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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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지식이 자유자재로 뻗어 있는 에코의 글은 산만해서 집중을 요구할 때가 많지만, 대신 항상 유머와 해학으로 즐거움을 서비스해준다. 블랙 유머는 독일어를 잘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지도교수를 잘못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한번 꼬인 인생은 성공으로 가는 우연의 길목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꼬인 채로 중년에 이르렀다. 고스트라이터에서부터 시작해서 번역 일과 온갖 잡동사니 신문에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사는 50세의 콜론나가 자신의 인생을 실패자로 규정하는 대목은 잘 안나가는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준다. 

패배자는 독학자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승리자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저 한 가지만 잘 알아야지 무엇이든 다 알겠다고 시간을 허비에선 안 된다.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건 패배자들이 겪는 업보이다. 어떤 사람의 지식이 늘면 늘수록 잘못 돌아가는 일들도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24


그러던 어느 날 시메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제안을 한다. 콤멘다토레가 발행하게 될 새로운 신문의 창간 멤버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인데, 제시하는 액수가 엄청나다. 이렇게 뜬금없는 금액을 제시할 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시메이는 이미 세상 쓴 맛을 두루 섭렵했을 콜론나에게 숨김없이 계약 조건을 이야기한다. 

창간 준비만 하다가 발행인의 결정으로 사업이 끝나버리면, 나는 책을 출간할 겁니다. 책은 폭탄이 될 것이고 나에게 거액을 인세를 안겨줄 겁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책을 출간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지요 (p33)


이 책은 우선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타블로이트 신문의 창간 준비호가 제작되는 과정의 세부 논의 과정들을 통해 뉴스가 제작되는 생태계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재능있고 경험이 풍부한 콜론나는 데스크를 맡으며 창간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된 기자들과 친해진다. 그 중 한 편으로는 브라가도초와 뜻하지 않게 자주 얽혀 그의 장황하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음모론의 청취자가 되고 술값까지 내게 되는 상황이 자주 생기고 한편으로는, 연예인 뒤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전직 연예계 기자 마이아와 썸을 타게 된다. 브라가도초가 기레기를 대표한다면 마이아는 아직까지 대중에게 진실을 전하고 싶은 순수한 기자 정신을 대표한다. 

나오지도 않을 신문이지만, 시메이 주필과 콜론나는 기자들에게 신문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신문의 실제적인 요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발행인인 콤멘다토레가 요양원을 소유했는데 한 판사가 요양원의 운영실태 수사를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발행인에게까지 수사의 영향력이 미치게 될 것을 미리 염려해, 수사관의 뒤를 캐는 것이 신문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신문이 할 일은 무엇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옳지 않'을 때 취해야 할 것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의 정당성을 떨어뜨릴 만한 것을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청렴하다고 해도 수상쩍은 일을 한가지쯤은 했을 거에요. 그것도 아니라면..그가 매일 하는 일을 수상해 보이도록 만드는 겁니다...상상력을 발휘해 보세요. 188

이 얼마나 익숙한,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수법인가.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처형해왔던가. 오늘도,  미디어를 장악한 베를루니코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각종 비리와 부패의 파티장으로 벌였던 10년의 장기집권 기간 중의 범행은 우리나라가 겪은 10년의 개막장이게나라냐정부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이탈리아에서 꺼진불도 다시보지 않고 재활용했던 파시스트들의 잔존 여파가 부패 극우로 변신하는 과정과 혈서 쓰고 친일을 한 후 공산당까지 골고루 돌아가며 했던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덕에 허황된 지역주의에 목을 맨 세력과 이에 호응하는 대중을 업고 대통령까지 했던 박씨의 성공담과 구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 미디어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리고 노력해도, 적당히 해먹었어야 덮는 게 가능하지라는 본보기를 근과거의 역사가 흔들리는 촛불의 잔영속에 비추지만, 미디어는 오늘도, 진실을 전하기 보다는,  목적을 위해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잘라내기 오려붙이기를 통해 대중의 눈을 속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 세월호에 탔던 어린 아이들이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가라앉았다는 그 엄청난, 믿기지 않은 사건의 본질은 실종되고 숨은유병원찾기놀이로 일제히 여론이 움직였던 일을 잊은 듯 본질을 호도한 보도들에 묻혀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을 의심하고 비방하고 검찰의 권력 앞에 꼭두각시처럼 부화뇌동하고 있다.

악한 사람을 신문에서 착하다고 부르면 그 사람은 착한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신문을 따라 착한OO라고 부른다. SNS 시대에도 여전히 신문과 뉴스의 효과는 그 무엇보다 막강하고,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이 개인 1인 미디어가 외치는 말보다 진실성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음모가 어떤 세력을 와해하고 혹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소한 거짓을 퍼뜨리는 방법은 교묘해서 알아차리기 힘들다. 1의 거짓을 전달하기 위해 99의 하찮은 진실에 1의 중대한 거짓을 섞어 전달하면 99의 하찮은 진실이 휘발한 후 1의 거짓만이 99만큼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이 짓거리들에 한국의 신문들은 최고가 되었다.

맞아요 신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145

신문들은 뉴스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250

가짜뉴스가 판을 치다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달에 가지 않았느니, 에이즈라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는다느니, 미국정부가 UFO니 외계인을 숨기고 있다느니 하는 여러가지 음모론 속에 0.1%의 몰랐던 진실, 매우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실이 숨어있다면 음모론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브라가도초는 어이없게도 처형당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음모론을 개발(?) 중이다. 뭔가를 믿기 시작하면 확증편향으로 이어져, 연관된 모든 것을 의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게 된다. 물론 본인은 개발이 아니라 진실을 캐는 과정이지만, 브라가도초가 제시하는 무솔리니의 대역 음모론은 말처럼 그리 황당하지만은 않다. 그는 무솔리니 체포 및 처형 당일의 행적을 깨알같이 조사하며 꿰어맞추면서 클론나에게 음모론의 진실(자기가 믿는)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드러나는 몇몇 군데 구멍들은 상상력으로만 메꿀 수 없다. 결국 그 구멍들을 메꾸기 위해 조사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연관된 인물과 사건이 활보하는 시간 범위는 더 가까와진다. 

두체 무솔리니 파시스트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로왔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거의 칼럼 기사처럼 브라가도초가 조사한 무솔리니의 행적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간략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짧은 지면이지만 등장인물도 많고, 이동 경로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었다. 

무솔리니 대역 처형 재구성 시나리오 등장 인물

카벨라 : 마지막 충신, 파시스트 신문 
산드로 페르티니 :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영웅 
라켈레 : 아내
클라레타 페타치 : 애인
마르첼로 페타치 : 애인의 오라비(스페인 영사로 분장)
*페드로 : 빨지산 부대 대장
*발레리오 대령 : 무솔리니 처형 지휘 대장

무솔리니의 도피 행적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실질적 수도였던 살로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18일 무솔리니는 살로를 버리고 밀라노 도청을 본부로 삼는다. 4월 25일 해방군과 맞닥뜨리자 무솔리니 일행은 밀라노 탈출, 가족, 애인도 코모에 집결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가족과 만나지 않는다. 이후 코모 인근 카르다노에서 무솔리니는 애인과 합류하고 도피중, 히틀러가 보낸 호위대가 오스트리아로 대피를 돕기 위해 나타나고 메나조에서 이들과 합류, 스위스 국경 키아벤나로 향하지만 실패하고 무소에서 빨치산과 대면한다. 호위하고 있던 독일군들은 이탈리아인들을 빨치산에게 넘기고 퇴각하지만, 돈고에서 독일군에 대한 전면 수색이 이루어지고 독일군으로 변장한 무솔리니가 여기서 발견된다. 이 때 조약에 의해 무솔리니는 연합군에게 인도될 예정이나, 해방위원회는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처형 이유는 이렇다. 

"해방위원회의 대다수는 이탈리아에 당장 하나의 상징, 파시즘의 20년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두체 무솔리니의 죽은 몸뚱이가 바로 그 상징이다.(..) 만약 무솔리니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으면 그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실체는 없으면서도 다루기 곤란한 존재가 되리라 직감한다. 바르바로사(붉은수염)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전설을 생각해보라.(..)동굴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 독일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 거라는 웅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무솔리니가 그런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이탈리아 국민을 과거로 회귀하도록 환상을 불러일으키면 안되는 것이다(162)"

4월 29일에 모든 시체가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부려진다. 이 광장은 거의 9개월 전에 근처에서 총살당한 빨치산들의 주검이 버려졌던 곳이다. - 빨치산들을 총살한 파시스트 민병대원들은 그 주검들을 온종일 햇볕이 뺑쨍한 곳에 놓아두고 유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가지 못하게 했다(169)

체포되어 공개 처형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근거는 콜론나가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허술하기 짝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는 점, 당대 사람들이 무솔리니의 얼굴을 잘 몰랐다는 점, 1주일만에 수척했던 무솔리니가 퉁퉁하게 살이 올라있었다는 점 등을 기반으로 한 추측성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몇가지 모순까지 존재하기에 브라가도초는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디에 있었겠는가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거대한 역사의 음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와 진짜가 교묘하게 섞어서 짜맞추면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일 창간되지 않을 창간 준비호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음모론에 빠진 브라가도초가 진실의 실 조각들을 모아서 짜낸 스토리 어딘가에는 누군가를 두렵게 하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들어서 알게 된 모든 것이 가짜이거나 왜곡이었다는 거야. 우리는 25년동안 계속 그들의 속임수 속에서 살았어. 내가 그랬잖아. 남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그 모든 뉴스는 오래전부터 유포되고 있었어. 다만 집단의 기억에서 뉴스들이 지워졌던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려면 기록보관소나 자료실에 가면 돼...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 뉴스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끌어내 다시 죽 늘어놓기만 하면 돼.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 일을 했고, BBC도 그 일을 한 거야. 재료를 혼합해서 저마다 칵테일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 앞에 두 잔의 완벽한 칵테일이 있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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