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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ㅣ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선택에 대한 판단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나를 따져봄으로써 단순화시킬 수 있다. 개떡같은 세상, 나랑 안맞고,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에게 적대적이라면, 다른 세상을 꿈꿔볼 수 있다. 가지 않은 길엔, 그 가지 못한 길의 미학 속에는 언제나 환상이 존재하고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엔 희뿌연 안개같은 두려움이 스멀거린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후회뿐인 인생 개떡같은 세상 대신 품은 구체화되지 않은 소망은 허구의 세상속을 통해 거울뉴런이 주는 아주 작은 공감으로 실현된다. 간단하구나. 그렇게 가면 되는구나. 그렇게 가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언젠가 정말로 정말로 세상이 나를 완전히 배신한다면 떠날 수도 있겠구나 라고..
계나는 떠나서 무엇을 얻었나. 언어연수와 대학원 그리고 각종 알바 기간을 거쳐 4~5년 정도 지난 후 계나는 9 to 4의 '번듯한' 회계일을 하는 직장을 얻었다. 어려운 영어 점수를 획득하고, 닭장 같은 쉐어하우스에서 살아내고, 별로 해본 적 없는 힘겨운 식당 보조 일에서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트레스까지 한국에서라면 마다했을 육체노동으로 한달 한달 살아나가면서 조금씩 성취해간 그녀의 성공은 아메리칸드림의 호주버전 같다. 그 곳에서 부딪치며 배운 영어실력은 쓸모가 있었고, 호주 유학 사화에서 아마도 드물게 학력이 무색하지 않은 직장을 갖게 된 성공 케이스일 것이다.
책장은 쉽게 쉽게 잘 넘어가고, 한국 사회의 부조리들을 꼬집어 내듯 거침 없는 입담이 독자에게 공감과 즐거움을 준다. 재밌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 스토리에는 한국의 W종금이라는 회사에 다니며 겪은 출퇴근의 고단함과 의미없고 성취없는 직장생활에 대한 디테일한 고생담에 비해 호주에서 그런 성공을 하기 위해 헌신해야 했을 치열한 삶에 대한 기록과 생고생 이야기는 너무 압축적이고 그 디테일이 빠져있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를 따질 때, 그러기 전에 낯선 곳에서 부딪쳐야 했을 언어적 문화 차이에서 오는 해프닝이 자아에게 주었을 상처와 모멸감과 자괴감 같은 것들은 없다. 비행기에서 차를 마실래? 커피를 마실래? 와 같은 간단한 언어조차 알아듣지 못해 아이 베그 유어 파든을 세 차례나 해서 그냥 아무거나 받은 커피를 마시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그 외국 생활이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서 느꼈을 자괴감으로 인해 순탄치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한국사람들로 드글거리는 쉐어하우스와 한국사람들로 드글거리는 영어 학원이 생활의 주무대였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비록 회사에서 하는 일에서 전혀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W 종금이라는 번듯한 직장에 다님으로서 얻는 사회적 위치와 비교해볼 때, 정신노동에서 육체노동으로의 전환이 주었을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피로감 역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술에서 빠져있다. 만족되지 않은 현실을 그보다는 조금 만족스런 현실로 옮겨갔을 때에는 그곳이 아무리 유토피아적인 세계라 하더라도 그 유토피아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기까지의 치밀하고 상세한 스토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갈등 없는 선택이라면 피상적인 동경만을 야기할 뿐이다. 그녀가 얻은 호주에서의 성공은 그 성공담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되었어야 했을 갈등과 고통스러운 선택의 과정이 뭉텅뭉텅 빠져 그 상상력의 간극을 메워줄 대리물이 없다.
나에게 누군가 미국이나 호주 혹은 다른 영어권의 영주권과 시민권을 주고 어디에서 살 것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할까. 책을 읽은 후 어떤 느낌이 여운으로 흔들릴만큼 강타하지 못했을 때에는 만일이라는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개인적 가치와 재능이 사회 시스템과 얼마나 잘 궁합이 맞는지에 달린 문제니까 말이다. 계나를 통해 지적한 그 한국 사회의 문제를 모두 인정하고 강력하게 동의하지만, 언어와 문화적 문제 역시 경험이 있으므로, 계나의 상태에 비해서는 훨씬 나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가지 않을 것 같다. 이 곳도 알지만 그 곳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사는 내 땅에 내 나라 한국을 싫어 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 싫은 구석이 많지만 '한국이 싫'지는 않은 문제가 그것이다.
싫다는 말 속에는 저주 같은 느낌이 살짝 묻어 있다. 너 싫어.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말이 향한 상대방은 벌레가 된다. 교육제도도 환경도 정치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찾기 힘든 요즘이지만 한국이 싫어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이미 내가 그 한국 이라는 말에 책임져야 할 기성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정말로 그렇게 저주할 만큼 싫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무슨 희망이 있나 싶기도 저주스럽기도 하지만, 저주하고 떠나서 도착한 곳이 설사 두렵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절망을 부르는 또다른 현실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도피처를 찾는다. 이곳에서 싫은 일을 그곳에서는 할 수 있다는, 이 곳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것들을 그곳에서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의 확산은 사회를 더욱 피페하게 만든다. 순문학으로서의 기능이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그 비판의 끝이 최소한의 대안으로 제시한 곳이 도피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