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거대한 슬픔'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행운이라고 말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나?

여하튼 나는 극도의 슬픔이나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은, 비교적 굴곡 적은 삶을 살았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거대한 슬픔'에 빠진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상처나 아픔이 없는 비단결 인생도 아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있을까마는 나는 신의 대답을 꼭 듣고 싶은 문제를 수십년간 끌어안고 있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내 능력으로 풀지 못하는 어려운 숙제 인지도 모르겠다.

" 그때 왜 침묵하셨을까?"

그렇게 엎드려 대답을 구했는데, 그렇게 간절히 대답을 기다렸는데도 왜 침묵하셨는지 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

내 선택을 가로막을 수 있었으면서, 내 결정을 제지할 수 있었으면서 왜 가만히 계셨을까?

그토록 기도했건만.

 

 

이 일은 내가 정색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높인 일이며 가장 서운함을 느낀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앞으로도 이 서운함과 원망을 거둘 자신이 없다.

잊은듯 하다가도 불현듯 되살아날 때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감정을 추스리기 어려워 이 일을지우려 해보았지만

언제나 사소한 문제를 타고 찾아와서는 내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정말이지 반갑지 않은 이 불청객을 퇴치하지 않는 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오두막]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사람은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면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놀라다가 나중엔 분노한다.

사람에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고,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그일을 기억하는 것조차 당사자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기억 저편에 있는 오래된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지 않았다면 그건 잠복 중인 진행형의 아픔이다.

언제든 건드리기만하면 바로 반응하는.

내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다.

 

 

맥은 사랑하는 딸이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되자 그 충격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빗장을

굳게 채운다.

그로부터 4년여 세월이 흐른 어느날 맥은 자신을 오두막으로 초대하는 파파의 쪽지를 받는다.

오두막은 맥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고통스런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주기 위해 넘어진  그곳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신다.

거대한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슬픔이 시작된 장소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나는 오두막으로 맥을 초청한 파파가 내 문제까지 건드려주길 기대하며,

맥이 불안과 기대와 의심을 안고 오두막을 찾은 것처럼 나도 같은 마음으로 동행했다.

오두막에서 흑인 여성의 파파(하나님)와 중동 청년의 예수(예수님)와 동양 여성(성령님)의 사라유가 맥을 반갑게 맞아준다.

 

 

거대한 슬픔을 막아주지 않은 하나님, 사랑하는 딸을 지켜주지 않은 하나님, 

자신의 기도를 거절하신 하나님과 마주한 맥의

대화는 너무도 감동적이고, 심오하고, 진솔하고, 경이롭다.

고통을 가져다 준 그곳에서 맥은 용서와 치유, 사랑과 자유함을 경험하며 서서히 변해간다.

그 과정이, 대화를 통해 알아가고 깨달아가는 과정이, 용서와 치유와 자유함으로 충만해지는 과정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분노와 고통과 상처의 상징인 오두막이 부드러운 대화가 있는 곳,  치유의 강물이 흐르는 장소로 변해 간다.

내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오두막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거룩한 곳으로 변해 간다.

내 아픔만 토해내고 내 상처만 호소하던 오두막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는 열린 공간으로 변해 간다.

어둡고 캄캄하고 눅눅했던 오두막이 따스하고 밝고 환한 세계로,

분노와 갈등으로 단절된 관계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를 오두막으로 초청하시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상심의 심연에 빠져서, 우리의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아서 초청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듣기까지, 빗장을 풀기까지 기다리셨다가

은밀하고 잔잔하게 부르셔서 부드럽고 작은 소리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맥을 초대하신 하나님이 치유의 현장인 [오두막]으로 지금 우리를 초청하신다.

상실의 슬픔으로 가득한 무거운 마음을 이제 그만 가볍게 하라고 [오두막]으로 손짓하신다.

 

 

[오두막]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정한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신선할 뿐 아니라 신학적 통찰과 접근이 놀라운 책이다.

책에는 여섯 자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소설을 쓴 아버지의 마음과 신앙이 잘 녹아 있다.

그 마음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오두막을 지었던 작가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은 이 작품은,

결론짓고 싶은 내 해묵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 길을 제시해 주었다.

하나님이  그때 왜 침묵하셨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바로 내가 쥐고 있었다.

하나님은 내 선택을 믿으시고 존중하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뿌리 깊은 희망
차동엽 지음 / 동이(위즈앤비즈)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절망의 유혹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계 경제를 비롯해 가정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위태롭고 불안하고 캄캄하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모두 절망을 이야기 한다.

절망이 차지한 자리가 너무 크고 견고해서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절망에 가려진 희망을 찾아 나서기가 두렵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더욱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절망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희망을 구해내야 한다.

절망에 눌린 희망을 건져 올리는 일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너와 우리 모두에게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

 

[뿌리 깊은 희망]은 희망찾기에 나서도록 용기와 격려를 보내는 책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도록 에너지를 주는 책이다.

절망의 저 밑바닥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희망에게로 친절히 안내하고 이끄는 소망의 글이다.

[무지개 원리]로 유명한 차동엽 신부님은

희망이야말로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대안이며,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라고 말한다.

낙심하거나 좌절해 있을 때, 희망을 붙잡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희망이라고 이야기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절망이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한바 있다.

절망 만큼 무서운 병도 없을 것이나 다행히 불치병이 아니다.

희망이라는 약과 주사를 투여하면 회복가능한, 완치가능한 병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라는 약과 주사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것을  '대체의 법칙'을 들어 설명한다.

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반대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반대로 희망이 먼저 앚아버리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으므로 절망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희망을 붙잡으라고 당부한다. 

절망과 싸우지 말고 희망을 품고 이루어지든지 말든지 계속 좋은 것을 상상하며 희망을 품으라고 말한다.

그것이 절망을 몰아내는 상책이란다.

 

우리에게는, 한국인에게는 절망을 몰아내고 희망을 앉힐만한 저력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펄벅이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인의 약동하는 히망유전자를 발견해 소개한 것과

[다이아몬드 딜레마]의 저자 타릭 후세인이 한국인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칭찬한 점,

마이크로소프트 아시아의 한 이사가 한국인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어와 제품들, 그리고 서비스를 격찬한 점을 들어

우리가 저력과 지혜를 지닌 민족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숱한 외침으로 인해 강해졌고, 지리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강성해질 수 있었고,

좁은 국토 때문에 경쟁력과 승부근성을 키울 수 있었다.

아픈 역사와 열악한 환경이 준 고마운 선물이다.

위기를 강점으로 승화시킨 우리의 자산이다.

이 선물과 자산을 절망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거짓의 가면을 쓰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절망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고 하지 않던가.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을 붙잡고 미리 근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는 절망의 속임수에 빠져드는 짓이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절망의 교활한 거짓말이다.

이제 두려워말고 절망을 대적하자.

혼자 맞서기 두렵다면 가족과 이웃을 초청하자.

그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것이며. 합세해 도울 것이다.

 

저자는 게속해서 희망을 찾아야 될 까닭을 알려주며,

희망을 건져 올려야 될 근거를 제시하며,

희망을 선택해야 될 이유를 설명하고,

희망을 붙잡아야 될 명분을 들려주고,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제안한다.

차동엽 신부님은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저력과  우리의 가능성이 너무도 희망적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고 설파한다.

희망만이 희망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뿌리 깊은 희망]은 역동적이고 활기찬 희망으로 가득하다.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맥박을 빠르게 하며, 심장이 요동하는 책이다.

희망으로 빼곡한 메시지는 독자를 온통 희망범벅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머리를 건드려도 희망이 나오고, , 어깨를 쳐도 희망이 솟아나고, 등을 만져도 희망이 발산되는,

희망으로 똘똘뭉친 희덩어리로 만들어 주는 책이다.

나로부터 시작된 희망이 나를 가득 채우고 넘쳐서 더 멀리 더 넓게 사방에 두루 퍼지길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이해한다;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상대의 입장과  감정, 기분을 내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위로의 말은 상대방에게 든든함과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상대의 감정만큼, 상대의 입장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상대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상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상대의 감정에 완전하게 공감할 수 없으며,

상대의 입장에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다만 부분적으로 이해할뿐이다.

우리 입 밖으로 뱉은 '이해한다'는 말은 대부분 말뿐인 이해이거나 부분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존 하워드 그리핀은 흑인의 차별과 억압, 박해와 미움, 불이익과 불평등을 이해하기 위해 흑인이 되었다.

백인의 입장에서 흑인을 이해하는 것도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아야 했던 시절에 위험과 비난을 감수하고

한시적이긴 하지만 흑인이 되었고 흑인의 입장으로 살았다.

그리핀이 흑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남부 흑인의 자살이 늘고 있다는 기사와 자기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흑인과 백인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핀은 피부과 전문의의 협조를 받아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먹고 강한 자외선을 온몸에 쪼이며 심한 고통을 겪은 후

중년의 중후한 흑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과거의 존 그리핀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지워지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무도 완벽하게 흑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피부가 검은 존재를 보며 낯섬과 충격과 외로움과 두려움과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진다.

나를 안쓰럽고 부끄럽게 만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거울 속 낯선 사람은 바로 그가 이해하고자 했던 존재였고, 그가 다가가고자 했던 또 하나의 자신인 '타자'였다.

그가 말한대로 겉보기에 자기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여긴 그 '타자'였다.

 

이제 그리핀은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거쳐 흑인만이 알 수 있는 '불공평' 속으로 들어간다.

50여일 동안 흑인 차별이 극심한 딥 사우스에서 흑인으로 살면서 불공평한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가 경험한 차별은

지갑에 돈이 있음에도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갈 수 없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물을 마시기 위해 한참을, 아주 한참을 걸어야 했고,

힘들어도 잠시 앉아서 쉴 수도 없고,

매번 정중한 말로 일거리를 거절당했고,

노골적인 무시와 증오, 반감의 시선을 받았다.

오로지 피부색을 근거로 말이다.

 

백인 사회를 치유하고 평화와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다고 굳이 흑인이 될 필요가 있을까?

꼭 그렇게 흑인이 되어야 했을까?

다른 방법도 있을텐데, 왜?

읽으며 궁금했다.

정답은 아니지만, 그리핀이 명쾌하게 밝히진 않았지만,

나는 나름의 대답을 굴곡많고 험난한 그의 인생 여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15살 어린 나이에 떠난 프랑스 유학,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 제2차 세계대전과 미 공군 입대,

솔로몬 제도의 최고 수장과의 친분과 그의 끔찍한 죽음, 시각장애와 하나님의 계시,

완전한 실명, 농장의 성공, 신학과 철학 공부, 결혼과 4명의 자녀,

10년만에 다시 찾은 시력과 수도원에서의 묵상.

평탄한 인생이 아니다. 평범한 삶도 아니다.

파란 많은 삶이다.

그리핀의 인생 여정 가운데

솔로몬 제도에서의 1년과 시력을 잃었던 10년은 그가 흑인이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대목이며,

실명과 하나님의 계시, 신학 공부와 수도원에서의 묵상, 다시 회복한 시력 등은 흑인이 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암시해 준다.

 

솔로몬 제도의 외딴 마을에서 1년간 살 때 처음에 그는 이 토착민을 '원시인'으로, 곧 '타자'로 여겼다.

그러나 다섯 살짜리 꼬마의 안내를 받으며 정글 탐험을 하면서 그는 깨닫는다.

꼬마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어른, 즉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지역 주민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타자'고 열등한 존재며, 그들은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력을 잃고 살았던 10년 동안 '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며 시각장애와 관련 없는 면에서도 열등할 것이라고 여긴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을 열등한 사람으로 여기는 백인처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열등한 '타자'로 단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잣대로 상대를 재단하고 폄하하는 것은 상대는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소중하다.

세사의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격체이다.

 

이 두번의 경험은 '타자'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했고 '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게 했다.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한 모진 훈련으로 받아들였고,

시력을 다시 찾은 것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생각한 그리핀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등과 정의를 위해 싸울 의지를 굳혔다.

 

그는 [블랙 라이크 미]로 인해 모형 인형을 동원한 린치와 체인으로 무자비하게 당한 구타와 인신공격과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웠다.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에 목숨을 걸었던 존 하워드 그리핀에게 경의를 표한다.

[블랙 라이크 미]가 왜 수천 군데가 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필독서로 선정되었는지,

왜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지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정말 오랫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정진규 외 지음 / 작가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말그대로 '창조'하는 일이다.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 알맞은 곳에 배치하여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모아 문단을 만드는 글쓰기는

무형 예술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분야이며 때에 따라서는 산고의 아픔을 수반하기도 하는 고통스런 학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말은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톤, 상황 등의 요소와 함께 표현되어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만,

글은 그러한 언어 외적 도움을 바라기 어렵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오해를 줄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정밀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은 짧은 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 꾸준한 독서와 사고하는 능력, 부단한 습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글쓰기라는 게 고작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느낌이나 책소개로 끝나는 서평과

일상의 자잘한 일을 가끔 끄적거리는 게 전부이지만 그것도 생각대로 써지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글일 때에는 내 글이 평가받는다는 부담감 때문에 안 써질 때도 있다.

그래도 '쓰면 쓸수록 는다'는 믿음 하나로 꾸준히 쓰기를 이어오고 있으나

믿음대로 정말 작문 실력이 늘었는지 제자리 걸음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된다.

솔직히 요즘은 '쓰면 쓸수록 는다'는 공식보다는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믿음이 서서히 싹트고 있다.

 

해서 글을 쓰는 모든 분들, 소설가나 시인, 극작가, 평론가 등 '작가'로 불리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특히 시를 쓰는 시인이 존경스럽다.

나에게 시는 난공불락이다.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 조차 어렵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 반복해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도 안 잡히는 시도 더러 있다.

그럴땐 절망스럽다.

 

나는 이 난해한 시와 친해질 요량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를 열심히 스크랩했다.

스크랩한 이유는 시도 좋았지만 해설을 해준 두 시인의 친절하고 맛깔스러운 시평 때문이다.

시의 뒷이야기와 시에 얽힌 사연, 시가 쓰여진 배경, 살뜰하고 친절한 시평은 나와 시를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주어서

시와 조금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내친김에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도 망설임 없이 펼쳐들었다.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작년 한 해 동안 각 문예지에 발표된 신작시들 가운데 좋은 작품들만 골라 실었다.

 전문가들이 공정하게 엄선한 시 78편과 시조 11편,  ‘좋은 시집’으로 평가되는 20권의 시집과 시집에 대한 서평을 함께 실었다. 

한 권의 책으로 많은 시인과 다양한 시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풍성한 시의 세계에 흠뻑 취하고 싶어서 따스한 봄볕이 살랑이는 평상에 앉아 읽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등에 내려앉고 봄바람이 책장을 넘겨주는 행복한 야외 독서를 즐겼다.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의 장점은 시와 함께 소개되는 '시작노트'로 시인과 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시집에 대한 서평이 가장 마음에 든다.

시집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시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유익하다.

특별히 문인수 시인의 시집 [배꼽]을 소개하면서 내가 사는 곳의 정선과 증산, 구절리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어렵고 멀게 느껴졌던 시에게로 성큼 다가가게 해준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나에게 봄날 햇살 같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 중국 간신 19인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역사의 경고
김영수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김영수 지음
추수밭(청림출판) 2009.03.06
펑점


공자는 통치자로서 제거해야 할 인물에 다섯가지 유형이 있다며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을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간신으로 간주했다.

공자가 꼽은 간신의 유형은 이러하다.

 

첫째. 마음을 반대로 먹고 있는 음험한 자.

둘째.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

셋째. 행동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

넷째.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

다섯째. 비리를 저지르며 혜택만 누리는 자이다.

이 다섯 가지 유형의 자들을 보면 모두 말을 잘 하고, 지식이 많고, 총명하고, 이것저것 통달하여 유명한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진실이 없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런 자들의 행위는 속임수투성이이며, 그 지혜는 군중의 마음대로 몰고 다니기에 충분하고, 홀로 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이런 자들은 간악한 무리의 우두머리라 죽이지 않으면 큰일을 저지른다고 공자는 경고한다.

저자는 공자의 이 논리를 지금 우리 상황에 대입시킨다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다.

 

공자가 간신으로 분류한 유형을 보면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스승을 은 30냥에 팔아 넘긴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의 12명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열두 명 중 가장 유능하고 뛰어나며, 리더의 자질을 가장 확실하게 갖추고 있는 실력자이며,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인물로 신학자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공자의 평가대로 가룟 유다는

말도 잘 하고, 지식도 출중하고, 총명하며, 통달한 것도 많은 유능한 제자였으나 그런 능력을 스승을 팔아 넘기는 데 쓰고 말았다.

유다야 말로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실력을 스승을 배신하는 행위가 아닌 수제자 베르로나 요한, 다른 열한 명의 제자들처럼 스승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했다면 그는 '태어난 게 비극'이었다는 후세의 평가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은 중국사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간신 19명의 삶과 그들이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난세에 답하다]로 잘 알려진 중국사에 정통한 중국사 전문가 김영수 작가는 책에 소개된 19명의 명예롭지 못한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 종교, 경제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여전히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간신배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충신의 삶을 살펴보는 것 이상으로 매우 흥미롭고 새로운 주제여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신을 만날 때마다 그 인물에 비교할 만한 우리나라의 간신배를 찾느라 머릿속이 부산했다.

나름 재미있는 비교여서 김영수 작가님이 다음 책에는 우리의 간신배를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19명의 간신배 중 가장 경악했던 인물은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혀 어린 자식을 삶아서 권력자에게 바친 최악의 간신 역아이다.
그릇된 권력욕에 사로잡힌 간신에게는 정말 제동장치가 없나보다.

오직 목적만을 향해 질주하느라 역아는 자식도 부모도 안중에 없다. 

필요하다면 부모 자식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얼마든지 희생시키며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간신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과도하다는 것과 기회를 잘 포착하는 기회주의자,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해 아첨하고 질주하며,

일단 권력을 잡으면 사리사욕과 방탕함으로 인생을 소진하는 소인배라는 것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간신들이 역사를 좌지우지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비단 중국사에 국한 될까?

우리의 먼 역사가 그러했고 가깝게는 일본에게 나라를 판 이완용이 그러했으며, 오늘날이라고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간신의 교활한 수법과 극악무도하고 치졸한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우리나 다를 게 없었다.

간신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어디 간신이 19명 뿐이겠는가마는 엄선된 19명은 중국 간신의 최고봉의 위치에 선 간신답다는 게

이 책을 읽은 느낌이다.

중국 역사의 명예롭지 못한 인물들이지만 많은 인물과 시대를 만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유익한 독서였다.

 

우리나라의 간신으로 연산군 때 남이 장군을 죽음으로 몬 유자광,

궁지기의 신분으로 세조를 좌지우지하며 집현전 수많은 학자를 죽음으로 몬 한명회,

선조 때 이순신 장군을 중상모략한 원균,

그리고 윤두수와 윤근수에 대한 간신 논란 공방.

물론  관점에 따라 간신인지, 난신인지, 충신인지 그 평가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의 저작동기처럼 간신들의 삶이 주는 교훈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위정자들이라면,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지도자와 성직자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저자의 바람처럼 우리 모두는 역사를 통해 배우고, 역사가 주는 교훈에 귀기울여야 한다.

반면교사로 삼아 저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