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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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냉혹하다는 것은 을씨년스런 노조들의 플래카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힘든 시절의 수준이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지만 어제나 오늘, 그리고 미래 역시 힘겨워하는 우리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어려움을 맨몸으로 버텨낸 책임지는 가장들 덕분에 어린 시절을 보낸 많은 사람들은 그나마 어려움과 고통을 수월하게 통과했다. 아마 그런 관계와 그 고마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버지의 오토바이’란 소설이 쓰였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배경은 차갑고 쓰디쓰다. 아버지의 사고를 담당하는 경찰의 시선은 자식까지도 혐의를 두는 그런 냉혹한 모습이었고 아버지의 친구인 장기풍의 모습은 부정적이기 그지 없다. 그들은 어느 집안의 가장이었지만 1차 집단을 위해 2차 집단의 살벌한 경쟁에 뛰어든 자들이라서 그런 것인지 세상에 대한 경쟁의식과 의심을 버리지 못 했거나 차라리 포기한 그들이었다.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 엄씨 부자는 서로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멀리 있었다. 지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서로 연락하기엔 너무 먼 관계만을 지니고 있는 부자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비극적인 만남을 갖게 된 이 슬픈 부자는 그러나 아비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기 힘든 아들만 남겨놓고 말았다. 그들은 그냥 호적 상의 가족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갑작스레 왔을 때 스스로의 경제적 상황의 위기로 심신이 지친 아들은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뒤처리 하려고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했고 또 자신의 생활을 꾸렸던 곳으로 찾아 왔다. 전화 상으로 짧은 대화만 했던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부자로만 남았다.
  망자를 위한 형식적인 의식을 치르는 동안 듣게 되는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은 엄시헌이란 아들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했고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그늘에 새삼 감격해갔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기에 너무나 컸던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아들을 살아 생전 알 수 없었기에 그들간의 이별은 너무 비극적이었다. 아마도 소설은 너무 담담한 어조로 썼기에 그 슬픔의 강도는 약했을지 모르지만 그 숭고함은 결코 우리 마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강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 생활을 냉혹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어느 아버지도 냉혹으로 인해 벌어지는 스트레스를 처자에겐 보이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엄숙한 책임은 가족의 행복이다. 그 행복을 깰 짓들을 할 잔인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집 안과 집 밖에서의 아버지는 달라야 함은 남자의 숙명이다. 이것을 포기한다면 그 순간 아버지의 책임을 저버리고 그에 따른 가족의 고통을 만들어 낼 뿐이다.
  아버지는 강해야 한다. 약해서는 안 된다. 약한 순간 자기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치욕도 감수했고 사회 생활에선 남성성을 포기하고 노예근성이든 범죄자 모습이든 어떤 짓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것이 남자들이 배운 남자답게 사는 법이고 아버지 되는 법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아버지가 되는 길일 뿐임을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이다.
  소설은 너무 슬픈 서사를 갖고 있다. 당연하지만 외면했고 외면하다가 소설에 의해 일깨웠기에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늙었다. 그 나이든 모습이 단순한 자연적 변화만은 아님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래도 강해지려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장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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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이.조:전쟁의 서막 - G.I. Joe: The rise of Cobr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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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무척 신났다. 얼마 전에 봤었던 트랜스포머처럼 액션과 볼거리, 그리고 단순한 갈등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각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허리우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요인이 바로 이것이었는지 모른다. 생각이 없고 철학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도 청소년이나 가족 단위로 보기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영화다. 세상 살기도 힘든데 뭐 그렇게 어려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을지 하는 의문을 품고 만든 영화들이 바로 Hollywood 영화다.
  작품성이란 잣대를 갖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CG나 황당한 장면들도 즐겁게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배트맨가 같은 부류가 아니니까. 특히 한국 배우인 이병헌의 출연은 여러 모로 화제다.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때, 일본인 같은데 한국말을 쓰고, 중국 무술을 배우는 것을 보면 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연기자로서 보인다. 그것이 Hollywood의 무식에서 오든 아시아 전체에서 시장 마케팅을 해야 하든 어떻든 그가 나오니 반갑다. 그의 정체성이나 시장성 앞에선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색이 짙어 봐야 인기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이런 것 역시 부질없는 논쟁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만화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적과 아군, 그리고 사랑의 회복 등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시작부터 어렵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싸우는 모습과 신기한 무기들, 그리고 에펠탑이 무너지는 거대한 장면들에 큰 탄성을 지을 준비만 있으면 OK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그럴 일이 없으니 영화상에서라도 볼 수 있는 일종의 장관일 것 같다. 너무 가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는 대놓고 2편 이상을 찍겠다고 악의 무리들이 살아난다. 그리고 그 잔당 역시 위험한 곳들에서 활개친다는 상징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있다. 영화에서 고민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 마음 역시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국가대표’나 ‘해운대’같은 휴머니즘은 없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보이는 친구들이 이겨서 좀 신난다. 심각하지 않고 활극의 미학을 즐길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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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마지막집 - The Last House on the Lef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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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은 언제나 소중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가족보다 더 가치 있는 동료도 없으며 가족보다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없다. 우린 이렇게 배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앞서의 사실을 부정할 만한 주장이나 근거도 없다. 가족은 유일무이하게 가장 비판 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가족에게 피해가 발생한다면? 슬프기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영화는 단순하다. 역사적으로 가장 원시적인 대처법을 사용하고 있다. 복수가 그것이다. 복수가 옳으냐 틀리냐의 논쟁은 사실 무익하다. 그럼 다른 대안은? 법정에서의 판단이 상처받은 가족에게 얼마나 좋은 치료법이 될 수 있을까? 그곳에서의 판단이 울분이나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 때문에 가족에 대한 복수는 영화에서 장황하리만치 재생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방법과 스토리가 다양하고 독특할 뿐이다. 뻔한 소재이자 주제이지만 그래도 재생산은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임은 분명하다.
  가족과 관련된 복수만 사실 영화나 문학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자신들과 관계된 친한 존재들에 대해 큰 봉변을 일으키는 것들에 대해 분노는 당연하고 그에 대한 행동이 바로 복수이다. 많은 작품들에선 그런 공분과 복수를 정당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 역시 어쩌면 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복수라도 옳다고 여길 것이며 아마도 실천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옳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그래서 복수 시리즈였던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그리고 ‘영자씨’ 등이 재생산됐고 그 영화에 열광했는지 모른다.
  사회에서의 법적 처벌 역시 응징이나 보복이란 개념이 포함된 것 역시 사실이다. 좀 더 공개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법적인 방식을 통한 처벌은 우리 모두가 합법적이라고 여긴 타당한 처리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가족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위험으로 인해 법적인 타당성을 통해 보복을 가하는지 모른다. 특히 가족의 슬픔이 그릇된 인간들의 행동에 기인한다면 개인적 복수 역시 암묵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처벌엔 가족은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이 바로 우리의 깊은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를 위한 복수의 정당성이 있어도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다. 그것을 자행한 자보다 당한 자들의 아픔은 아마도 평생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행자의 가족이 그런 범행에 치를 떠는 것인가 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적인 정서와 감정에 그 중심을 둘 때 슬픈 사연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요트 타고 나가는 장면은 모든 것을 잊고 살려는 인간의 몸부림일 것이다. 영화는 보다 인간적인 것에 다가섰고 불법이든 합법이든 인간의 그런 가족애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난 우리 가족의 가치를 다시금 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가족과의 행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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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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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시작을 보지 못한 난 영화의 시작이 어떻게 설정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 본다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샤넬이란 여자의 특정 시기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아닌 특정 시대를 꼭 집어서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인지 샤넬 인생의 전체를 담는 주제나 이미지를 담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실망한 것은 아니다. 그녀 인생 전체를 다 봐야 할 것도 아니고 그녀의 인생이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아님 얼마나 같은지 확인할 것도 아니다. 그냥 그녀는 그녀일 뿐이다.
  그녀의 인생 일부분을 보기 위해 사전에 그녀의 성공담이 크게 주목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한 그녀의 스토리가 중심이 되지도 않았고 그녀의 화려한 의상 디자인에 의해 조성된 세상이 있지도 않았다. 남성스럽게 입은 모습이 설마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흥분시킨 모습은 아니리라. 차라리 어수룩한 여자만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다. 좋은 이미지와 모습으로 치장을 했지만 그녀의 성공엔 남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그것이 어느 여성의 자유와 자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잘못 보거나 나쁘게 보면 그녀는 아내 있는 남자의 정부라고 여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이용했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립심 강한 여성보단 성공을 위해선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은 그녀만 있었다. 현대 여성의 핵심인 자립이 있기보단 사랑하다 어떻게 해서 자립했고 그래서 자기 인생 산 여자일 뿐이다.
  영화를 통해 과도한 주제의식이나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은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을 담은 영화를 갖고 주제의식 찾는 어리석은 방법은 탈피해야겠다. 그녀의 인생에서 부분만 뽑아 놓고 그것을 갖고 그녀 인생을 통째로 이야기하거나 상징한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일 뿐이다. 2차 대전 이후 그녀에 대한 많은 논쟁들은 이 영화에서 삭제됐다. 아내 있는 자신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로만 대충 끝낸 이 영화는 어쩌면 샤넬이란 이름에서 자아낸 환상을 충족시키고자 가장 말 적은 부분만 꼭 빼놓은 상황일 뿐이다. 그녀의 성공이 이 영화에선 위대해 보이지도 않고 일중독에 치인 여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로만 보기엔 너무 부족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름답게 끝났고 그녀의 평생 사생활에 대해 따라다닌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나왔다. 그러나 그것일 뿐이고 영화와의 서사와는 그다지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자막에서 여성의 자립을 읽을 수 있겠지만 영화의 서사완 사실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샤넬 이름만 빼면 그냥 어느 여자의 사소한 일들의 결합이다. 하긴 사소한 인생이 본인의 입장에선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아님 화려한 디자인의 세계를 보려는 청담동 여인들의 입장에선 사실 안 봐도 그만일 정도다. 그 영화엔 화려한 것이 많지 않으니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주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영화를 통해 주제를 찾는 것 자체가 이미 진부한 영화읽기일 뿐이다. 주제를 찾는 일이 허망하다고 주장하는 예술가들도 있기 마련이라 사소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지는 Trivialism을 이 영화가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영화 곳곳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깔끔하고 Cool한 인간들의 도시적인 행동들은 눈에 띈다. 그들은 서로간의 관계를 담담하게 대처했으며 조금은 타인인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도시적인 모습이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나올 때 당시 시대의 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장식성보단 단순한 이미지의 의상 (난 샤넬의 작품은 모르지만 그럴 것 같다)이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Cool하기엔 연약하지만 어쩔 수 없이 Cool하게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좀 있을 것이다. 다만 페미니즘 시각이나 자립에 대한 가치를 읽기 위해, 아님 화려한 패션 아이콘을 보기 위해서라면 좀 더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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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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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생의 편린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인내, 그리고,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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