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명작 ‘라이온 킹’ 감독 신작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애니메이션 예매권 증정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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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애미메이션으로 개봉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예언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 세상에서 두번째로 많이 읽힌 책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원작 도서가 유명하다는 것 외에도 이 작품엔 관심을 가질만한 요소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디즈니 최고의 명장 <라이온 킹>의 감독 로저 알러스가 참여하기도 하였고 어떤 위기에도 자녀를 구하는 <테이큰>의 리암 리슨이 목소리를 연기한 것도 이 영화에 주목할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예언자>는 칸 영화제, 안시애니메이션, 토론토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작품성 하나는 최고라는 것이겠죠.
또한,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 9명이 참여해 관람객에게 환상적인 영상미를 보여줄 예정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예매권을 받고 싶으시다면 지금 바로 이벤트에 참여해 보세요.^^ 

*
참여는
문예출판사 블로그나
http://goo.gl/mMOuQv

문예출판사 페이스북으로 이동하신 후
https://goo.gl/oPQU2v


댓글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원작 도서명을 남겨주시면 완료입니다.! ​

기간은 2015년 9월 6일까지
당첨자 발표는 9월 7일
선정인원은 10분(1인 1매)
예매권 사용 기간은 영화 개봉하는 동안 언제든지!
(예매는 예스24를 통해 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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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사랑과 마음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부른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문화적·미술적·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기만적 명성, 기만적 재력, 기만적 국가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 등 많은 기만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드물게 볼 수 있는 미덕이다.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고,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는 이야말로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에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간 기만을 용인하며 살아야 한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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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석학 린위탕 수필집《생활의 발견》 연재4.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교육 또는 교양의 목적은 지식 가운데에 견식을 키우고, 행위 가운데에서 훌륭한 덕을 쌓게 하는 데 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반드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물을 옳게 받아들여 사랑하고, 옳게 미워하는 사람을 뜻함이다.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미워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은 견식이 있음을 뜻한다. 머릿속이 역사의 연대와 여러 가지 숫자로 가득 차 있고 러시아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그 일을 바라보는 태도나 견해가 전혀 그릇된 사람과 어떤 모임에 함께 한다면 불유쾌할 것이다. 그들은 화제에 오르는 어떠한 일이든 약간의 사실과 숫자는 어김없이 알고 있지만 견해를 들으면 한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은 있지만 판단력, 그러니까 견식 또는 감식(鑑識)이 없다. 지식은 사실이나 뉴스를 따로 외고 있음을 말하지만 견식, 즉 판단력은 예술적 판단이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공자는 자기의 판단력이 없이 학식만 가진 것이 학식은 없으나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진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배움이 없이 생각하면 사람을 경망하게 만들고, 이렇다 할 생각이 없이 배우기만 하면 몸을 망치느니라.’ 이렇게 경고한 것을 보면, 공자는 그가 살던 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후자의 타입에 속한다고 본 게 아닌가 싶다. 이 경고는 현대의 학교에도 매우 적절한 말이다. 잘 알다시피 현대의 교육과 학교제도는 일반적으로 지식을 장려하지만, 판단력을 기르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지식을 마구 주입시키는 것을 마지막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다량의 학식만 있으면 교육받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이다. 학자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인은 대체로 학식, 행위와 견식, 다시 말해서 감식과를 구별하고 있다.(사람의 식견, 즉 현대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통찰력은 그 밖의 것보다 ‘상위’에 두어도 좋으리라.) 역사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역사 책이 최대의 학자적인 양심으로 쓰였다 해도 통찰과 명찰(明察, 사물을 똑똑히 살핌)이 전혀 없고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의 판단과 해석에 저자가 아무런 독창력과 이해력을 깊이 나타내지 않는 일은 흔하다. 우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견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 소식에 밝다든가, 사실을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다. 역사상의 어느 시기에는 쉽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사실이 많다. 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사항을 선택하는 판단력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 인물의 견해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사랑과 마음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부른다. 견식에는 매력이 있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문화적·미술적·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많은 기만에 싸여 있었다. 기만적 명성, 기만적 재력, 기만적 국가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들, 정신분석학자는 변비증상이 구두쇠의 근본이니 하는 투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얼마간 견식이 있는 이가 이런 학설을 듣는다면 재미가 있다며, 웃어넘기고 말 게 뻔한 노릇이다. 누가 저질렀건 잘못은 역시 잘못인 것이다. 위인의 이름이나, 위인은 읽고 범인은 아직 읽은 적도 없는 책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감탄하거나 위압을 받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한데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은 항상 식(識, 앎)과 담(膽, 담력)을 관련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용기, 다시 말해서 판단의 독자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로 드물게 보는 미덕이다. 후년에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유년 시대부터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고,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은 설사 그 시대의 인기 있는 시인이라 해서 무턱대고 호의를 베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정말 한 사람의 시인에 심취할 경우에는 당당히 그 까닭을 공언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문예에 있어서의 견식이라고 한다. 그는 또 유행파에 속하는 화가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예술적인 본능에 저촉될 경우에는 결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그는 또 철학에 있어서의 유행이나 시류에 따른 이론에는, 가령 그 뒤에 가장 위대한 사람의 이름이 있을지라도, 결코 감동하는 일은 없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납득되지 않는 일이라면 어떠한 저자에게도 심취하려고 들지 않는다. 저자가 그를 심취시켰다면 저자가 옳은 것이다. 만약 저자가 그를 심취시킬 수 없다면 그가 옳고, 저자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지식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원래 이와 같은 지적인 용기 또는 판단의 독립성을 지키자면 소박한 어린이가 가지는 종류의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런 자신감이 있는 이야말로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에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간 기만을 용인하며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사색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또한 어째서 사색보다는 지식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일까.

심리학, 중세사, 논리학에서부터 ‘종교’에 이르는 필요한 과목 또는 청강 과정을 끝냈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생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표나 졸업증서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또한 점수나 졸업증서가 학생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참된 목적이 지니고 있는 지위를 빼앗아버리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교육 제도가 대량 교육이며, 따라서 공장과 같다.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건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시스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학교의 이름을 지키고 제품을 표준화하기 위해, 학교는 졸업증서를 발행하여 제품의 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졸업증서와 함께 등수를 먹일 필요가 생기고 등수를 매길 필요에서 점수를 주는 제도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는 따로 암기, 시험, 고사(성적을 평가하는 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육 전체가 완전한 논리적인 연쇄를 이루고 있어서 도망칠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험이나 고사의 결과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그것은 견식이나 판단력을 기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기억하는 힘을 기르는 데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나도 학교 선생을 한 일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막연한 문제에 대하여 막연한 의견을 묻기보다는 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일련의 문제를 제출하는 편이 쉽다.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수립된 뒤로 학문은 내가 견식의 계발이라고 부르는 참다운 이상에서 멀어져만 간다는 것, 아니 이미 멀어져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칫하면 잊고 있기가 쉽다.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암기만 해서 얻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느니라.’

형식이야 어떤 것이든 사람이 가진 지식을 시험하게 하거나 측정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장자는 정말 잘 표현했다.

 

“아, 내 목숨에는 한이 있으나 지식에는 한이 없구나.”

결국 학문의 탐구는 신대륙의 탐험 도는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이른바 ‘영혼의 모험’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탐구하는 정신이 해명적이고 연구적이고 호기심적이고 모험적인 기분으로 유지 된다면 괴로움이 되지 않고 즐거움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틀에 박힌 수동적인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이고 발전적이며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졸업증서나 점수가 일단 폐지되든가, 단지 그것에 그치는 것으로서 취급하게 된다면 학생은 적어도 공부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 학문의 탐구는 보다 적극적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태로는 학생에게 있어서 문제의 해답은 이미 나와 있어서 마음에 어떤 의문도 느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신입생은 2학년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2학년은 3학년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의 본래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런 생각은 모조리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학술의 규명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문제일 뿐,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오늘날의 학생들은 모두 대학 간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많은 선량한 학생들은 부모를 위해서 또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인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재학중 많은 학자금을 대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근엄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선생 앞에서 근엄하게 보이기 위해, 또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족들을 부양할 많은 봉급을 받고 싶은 생각에서 공부하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생각은 모두가 부도덕적인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학문의 탐구는 다른 누구의 일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교육은 즐거움이 되고 적극적이 될 수 있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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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 《생활의 발견》 연재

3.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삶에 필요한 것

http://goo.gl/YDtgI7

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http://goo.gl/2aklf5

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http://goo.gl/C46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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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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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거나 꽃구경을 하거나
매사에는 그것에 알맞은 기분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그 장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상대와 함께 있으면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려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같은 기질을 가진 친구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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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재3.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삶에 필요한 것"

근인류의 문화와 그 행복이라는 점에서 보아 담배 피우는 것, 술 마시는 것, 차 마시는 것의 발명보다 더 중요한 발명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이 여가와 우정, 사교, 한담을 즐기는 데 있어서 사실 이처럼 중요하고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없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 어느 것이나 우리들이 사교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둘째는 다른 음식과 같이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에 식사 후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셋째로는 후각을 작용시켜서 콧구멍을 통하여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문화에 끼친 그 영향도 실로 대단하다. 식당차 옆에는 끽연실(흡연실)이 있고 바깥에 나가면 식당과 술집과 다방이 있다. 적어도 중국과 영국에서는 차를 마신다는 것이 하나의 사회 제도로 되어 있다.

담배, 술, 차를 정말 즐기는 풍습은 한가함과 우정과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발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담배, 술, 차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란 친구와의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 클럽을 만드는 데 굉장히 마음을 쓰는 사람, 타고난 성품이 한적한 생활을 사랑하는 인간에 한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교성이라는 요소를 빼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담배나 술이나 차를 즐기려면 달과 눈과 꽃을 즐길 때와 같이 적당한 상대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생활 예술가들이 자주 역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어떤 종류의 꽃은 어떤 종류에 속하는 사람과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종류의 경치는 어떤 종류의 여성들과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진심으로 즐기려고 생각한다면 여름철에는 깊은 산 절간의 대나무 침대에 드러누워서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매사에는 그것에 알맞은 기분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그게 중요한 것이니까 그 장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상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을 논하는 예술가가 적어도 생활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려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우선 절대 조건으로서 같은 기질을 가진 친구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친구의 우정을 얻어 그 우정을 오래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장기의 명수가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장기 상대를 찾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이토록 소중하다. 그러하기에 학자의 서재와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일반적인 환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선 즐거움을 함께 누리겠다는 한때의 친구가 있다. 즐거움의 종류가 다르면 그에 맞춰 종류가 다른 벗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만 할 줄 알고 늘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과 승마를 즐기러 간다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사람과 음악회에 가는 것과 같은 일로서 당치도 않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도의 기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

첫째, 차는 가장 냄새를 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항상 깨끗하게 취급하고, 술이나, 향(香), 그 밖의 냄새나는 것 또는 그러한 것들을 취급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차는 시원하고 건조한 곳에 저장해둘 것, 장마철에는 그때그때 쓸 것을 특별히 조그만 항아리에다가 적당히 덜어서 넣어둘 것. 이런 때 쓰는 작은 항아리로서는 백랍제(白蠟製, 주석합금)가 제일 좋다. 한편 큰 항아리에 저장해둔 차는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뚜껑을 열지 말 것, 항아리에 넣어 보관한 차에 곰팡이가 슬었을 경우에는 차 잎사귀가 노래지거나 퇴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한 불에다 쬐되 직접 불에 쬐면서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할 것.

셋째, 차를 잘 달이는 기술의 절반은 깨끗하고 순수한 좋은 물을 구하는 데 있다. 산에서 나는 샘물이 가장 좋고, 강물이 두 번째이고, 우물물이 세 번째라고 한다. 용두(龍頭)에서 나오는 물도 제방에 괸 물이라면 사실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이니까 그것 또한 좋다.

 

넷째로 진기한 찻잔을 감상하려면 조요한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할 것. 그것도 너무 많은 벗들을 한꺼번에 합석시켜서는 안 된다. 

다섯째, 보통 흔히 쓰이는 차의 알맞은 빛깔은 엷은 황금색이며, 모든 암홍색의 차는 우유나 레몬이나 박하나 그 밖의 무엇이 건 차가 지닌 쓴맛을 죽일 수 있는 것을 넣어서 마실 것.

여섯째, 가장 좋은 차에는 뒷맛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마신 뒤 30초 가량 지났을 무렵 화학적 요소가 타선(唾線, 침샘)에 작용하는 시간이 지났을 때 느끼는 맛이다.

일곱째로, 차는 신선한 것을 넣어서 곧 마실 것. 맛있는 차가 마시고 싶거든 한 번 따른 뒤 남은 차를 너무 오랫동안 차 주전자 안에 넣어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여덟째, 차는 방금 길어 온 물로 달일 것. 아홉째, 다른 것과 섞은 것은 일체 피해야 한다. 다문 어떤 종류의 외국산 향료, 이를테면 재스민이나 육계(肉桂, 계피) 같은 것을 약간 넣어 달이는 취미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기호가 다른 점을 인정해도 좋을 줄 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차에서 바랄 수 있는 향기는 갓난애의 살결에서 풍기는 듯한 향기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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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생활의 발견》 연재


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 http://goo.gl/2aklf5


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 http://goo.gl/C46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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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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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가장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른바 완전주의는 아니다.

바를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굳이 알아내자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기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스럽게 일하고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이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 린위탕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가란 질문을 해결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린위탕은 맹장와 장자의 의견을 빌려

인간의 착한 본성을 잊고 사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문명생활이 착한 본성을 회복할 수 없게 한다고 말이에요.

자신의 본성과 자신을 삶을 찾고 싶은 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_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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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재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근대 사회에서는 철학자란(가령 그러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거나 가장 무시당하고 있는 부류이다. ‘철학자’라는 말은 단지 사회적인 존칭에 불과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을 누구나 ‘철학자’라고 부른다. 또한 현실 생활에 초연한 사람도 ‘철학자’라고 불린다.

후자의 뜻이라면 다소 수긍이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에서 터치스톤에게 “목동이여, 그대는 철학이라도 갖고 있는가”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후자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이 뜻으로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자연과 인생 전반에 관한 평범하고 조잡하고 흔해 빠진 생각을 가리킨 데 불과하다. 이 정도의 것이라면 누구나 다소는 갖고 있다. 현실의 모습을 그 표면적인 가치 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거나 신문에 쓰여진 말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다.

 

대개 철학에서는 깨달음에서 오는 황홀한 느낌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철학자가 인생을 관망할 때, 그 방법은 화가가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흡사하며 베일이나 아지랑이 같은 것들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실 그대로의 또렷또렷하고 생생한 면이 다소 흐려지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의 대의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적어도 중국의 예술가나 철학자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자란 그날그날 자기 일에 파묻혀서 자기 일의 성패와 이해득실만이 절대적인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이를 뜻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사물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일조차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공자는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이 말은 공자가 한 말 가운데서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지식적으로 비아냥거린 말 중에 하나이다.

이 장에서 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중국 철학자들이 생각한 것들을 다소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들 철학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일치되는 점도 있다. 인간은 현명하지 않으면 안 되며,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자의 생각은 적극적인 것으로 보이고, 노자의 생각은 교활한 평화주의로 보이지만 그만큼 양자의 생각은 이른바 중용(中庸)의 철학 속에 하나로 녹아들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중용의 철학이야말로 중국인의 일반 종교라고 생각된다. 활동과 무활동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은 일종의 타협, 다시 말하면 이 땅에 이룩된 극히 불완전한 천국에 만족한다는 생각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에 비로소 현명하고 명랑한 생활 철학이 생겨나고, 마침내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시인이며 최고로 조화된 인격자라고 생각되는 도연명의 생활에서 그 전현을 찾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어쨌든 무의식적으로 모든 중국 철학자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결같이 생각한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이 가장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른바 완전주의는 아니다. 바를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굳이 알아내자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기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스럽게 일하고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이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맨 처음 부딪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거의 답변이 불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허나, 일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우리네 자신이 결코 참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 모두는 동감한다. 그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만 애쓴다면 뭔가 허전하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숨길 수 없는 확신이다. 여기 무엇인가를 찾아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자아, 이 문제를 풀어보시오’라고 현명한 자는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저 사람은 무엇을 잃었는가?’ 어떤 이는 시계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 밖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짐작이 모두 틀린 뒤에 홀로 현명한 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네들에게 가르쳐주지. 저 사람은 무엇인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란 말씀이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생활에 쫓기고 있는 동안에 흔히 참된 자기의 모습을 잊고 있기가 쉬운 법이다. 그것은 버마재비를 노리는 새가 자기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고, 버마재비는 버마재비대로 다른 먹이를 노리느라고 자기 몸이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맹자가 공자의 뒤를 이은 뛰어난 능변가였다던 것처럼, 장자는 노자의 뛰어난 언변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 스승보다 1백 년이나 뒤에 태어난 인물들이었다.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인물이었듯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맹자와 장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다. 즉, 인간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데, 철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잃어버린 것, 여기서는 맹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발견하거나 다시 되찾는 데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맹자는 말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이란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을 뜻함이다.’ 맹자는 문명이 발달한 기교적인 생활이 인간이 타고난 젊고 싱싱한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숲의 나무를 마구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때 우산(牛山)의 숲은 매우 아름다웠다. 허나, 큰 도시 근처에 있어 나무꾼들이 마구 나무를 자르니 어찌 더 이상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밤과 낮이 숲에 휴식을 주고, 비와 이슬이 계속해서 땅을 기름지게 하여 땅에서 쉴새없이 새싹이 돋아나 이제 소와 양 떼들이 마구 거닐게 되었다. 그 뒤로 우산은 저와 같이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우산에는 일찍이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던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벌거벗은 우산의 지금 모습이 저 산이 지닌 참다운 본성이었을까? 헌데, 인간에게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옳은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나무꾼이 도끼로 매일 나무를 찍어내는데 어찌 자연이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말하건대 낮과 밤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벽의 신헌산 공기가 몸을 기름지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고 하나, 인간이 낮에 행한 악(惡)은 이를 다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타고난 착한 본성에 쉴새없이 도끼질을 하므로 밤 동안에 취한 휴식과 건강의 회복이 소용이 없게 되며, 밤사이에 취하는 휴식이 전혀 효험이 없게 되는 날에 그 인간은 짐승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짐승과 같이 행함을 보고 그에게는 일찍이 인간다운 참된 마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타고난 진짜 본성이었을까?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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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연재 3. (준비중)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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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mUEY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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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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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부드러운 <이소>라든가

오마르 카이얌의 책 한 권을 들고

애인과 함께 강둑으로 그 책을 읽으러 간다.

그때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면

구름을 읽고 책은 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책과 구름을 다 같이 읽어라.”

- 린위탕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용기’를 가지고 싶은 분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분’을 가지고 싶은 분에게,
중국의 문필가 린위탕(임어당)의 글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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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생활의 발견》은 유머와 풍자로 자신의 사상을 명쾌하고 유쾌하게 알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행복이나 인생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보기도 하고, 공자와 같은 성인을 맹비난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일까요? 진리보다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린위탕. 그의 자유분방한 글쓰기만큼 한국독자의 의견도 참 다양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철학책,
읽고 나서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좋은 책,
유복한 사람의 이기적인 이야기,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의 책,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 책,
내 편견을 버리게 할 책,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책 등
다양한 평이 있습니다.

이 평들이 무엇을 의미하든 린위탕의 용기 있는 글쓰기가 부른 성과인 것 같습니다.

서문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주세요.^^

본문 연재로 가는 링크는 이 글의 하단에 있습니다.

_ 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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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재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은 사상과 인생에 관한 나의 체험을 밝힌 개인적인 증언이다. 이 책에 밝힌 나의 입장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영구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철학에서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을 오히려 경멸하는 사람이다.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사물을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정시적(抒情詩的)이라는 말을 개성이 강항 독자적 견해라는 뜻으로 간주하여, 이 책을 ‘서정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지나친 미명(美名)인 듯싶어 그만두기로 한다. 너무 높은 곳을 겨누게 되면 독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갖게 할 염려도 있고, 무엇보다 내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골자는 서정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산문이다. 때문에 이 책은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럽고 쉬운 글이 될 것이다.

 

너무 높은 곳을 겨누지 않고 땅에 매달려 흙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더라도 나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내 마음은 흙과 모래 속을 즐겁게 뛰노는 것으로 행복을 맛보고 있다. 이 땅 위의 생활에 도취될 때 사람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했나 여겨질 만큼 마음이 경쾌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에 있어 우리네 육신은 땅 위 6척(약 180cm)도 떠나는 일이 드물다.

 

나는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형식으로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러한 형식은 일 가운데 무언가 뜻 있는 듯한 이야기를 적거나, 아름답고 조용한 사상의 목장을 이리저리 거닐 때에는 매우 편리한 형식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게 싫었다. 그 이유는 내 자신에게도 분명치 않은데 이런 형식의 문학은 오늘날 그다지 유행하고 있지 않고, 읽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지고 보면 저자란 자신의 책이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한 대화란 신문에 실리는 인터뷰 기사의 문답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화란 한 개의 글이 몇 장씩 계속되는, 사실 유쾌하고 길게 주고받는 한가한 담화를 뜻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뜻밖의 곳에서 지름길로 빠져 맨 처음의 논점으로 되돌아오는 형식의 글을 말한다. 마치 담장을 타고 넘어 먼저 집으로 돌아와 나중에 온 동행의 친구를 놀라게 하는, 그런 식의 글을 뜻한다. 나는 뒷담장을 넘어 집에 돌아오거나 샛길을 거닐거나 하는 것을 여간 즐기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 벗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든가, 그 근처 시골 지리에 밝다는 것을 인정해줄 테지만 나는 굳이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코 독창적인 글을 쓰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상은 동서의 많은 사상가들이 몇 번이고 생각했고, 표현한 것들이다. 동양에서 빌려온 것은 이미 동양에서는 낡아 빠진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 사상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박았다면 본래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 독창적인 것의 표출로 처음에 내가 그 사상에 접했을 때 내 마음이 본능적으로 찬성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상을 사상으로서 아끼고 존중한다. 사상을 말한 인물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사실 나는 저술에서도, 독서에서도 샛길을 걸어왔다. 이 책에서 인용한 글들의 저자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이어서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로서도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다. 간혹 유명 인사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건 인물들의 사상을 직관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빌려 쓴 것이지 저자가 유명해서는 아니다. 이름도 없는 싸구려 고본(古本)을 사들여 그 속에서 혹시 숨은 보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조사하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버릇이다. 만일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내 사상의 출처가 어딘지 알게 된다면 이런 속물이 있나 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러나 보석상의 진열장에서 커다란 진주를 구경하는 것보다도 쓰레기통 속에서 작은 진주를 찾아내는 편이 훨씬 유쾌한 일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심원한 사상가도 아니요, 많은 책을 잘 읽는 편도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꼼꼼히 책을 읽다가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는 것을 뚜렷하게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로크나 흄이나 버클리의 저서들을 아직 읽지 못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닦은 학문의 방법과 훈련은 모두 그릇된 것이리라. 나는 철학을 읽지 않고, 직접 인생을 읽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연구치고는 파격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결국 그릇된 방법이라 할 수 있으리라.

 

여기 내가 간직하게 된 철학적 지식의 출처를 몇 가지 예로 들어볼까 한다. 우선 우리 집 식모인 황씨 부인, 그녀는 중국의 양가 출신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여러 생각들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굉장히 입이 험한 소주(蘇州)의 여자 뱃사공, 상해의 전차 차장, 우리 집 요리사의 아내, 동물원의 사자 새끼, 뉴욕 중앙공원의 다람쥐, 한때 그럴듯한 비평을 한 일이 있는 어느 배의 갑판 보이, 천문란(天文欄)의 필자(10년 전쯤에 작고했다), 신문 매점으로 들어오는 온갖 뉴스, 그리고 이 밖에 인생에 대한 우리들의 호기심과 자신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않으려고 하는 작가라면 어떤 작가든 모두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들자면 한이 없다.

 

이와 같이 나는 철학의 학술적인 훈련이 결여된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철학 책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통 철학자란 무슨 일에 대해서건 어렵게 말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철학을 그만두고, 무엇이든 그 보상을 할 생각을 갖는다면 무슨 일이거나 아주 또렷하게 또 단순하게 보이게 마련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잘 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내 태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을 것이다. 내가 쓰는 용어가 정통 철학자의 것처럼 길지 않다느니, 모든 일을 너무나 알기 쉽게 해버린다느니, 심지어 신중하지가 못하다느니, 철학의 신성한 전당에 들어와서도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의젓한 걸음걸이로 걷지 않는다느니, 자못 그럴듯한 엄숙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느니, 여러 가지 트집거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용기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찾기 어려운 미덕이 아닌가 싶다. 허나 나는 항상 철학의 성역 바깥만을 맴돌았고, 그것이 바로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여기에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에 호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노라고. 자기 스스로의 사상을 생각해내고, 독특한 판단을 정하고, 어린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발표하는 그런 방법이 있다.

 

그러면 세계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의견에 동의해준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사상을 가꾸어낸 사람은 많은 다른 저작들이 이러니저러니 논하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고, 자기가 느낀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기보다 우아하고 보다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이때 그는 고인(古人)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고인은 그가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게 되어 양자는 마음의 벗으로서 영원히 맺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나는 이들 옛 어른들, 특히 중국 고대의 마음의 벗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그러니까 이 책이 쓰여지기까지 많은 고대의 협조가가 있었던 셈이다. 모두가 저다운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들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거니와 그들 역시 내게 호의를 가져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가장 참된 뜻에서 이분들의 마음은 항상 나와 함께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부터 이상적이라고 믿는 정신적 교류의 유일한 형식이다. 생각해보라, 여기 두 사람이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느낌을 갖고 서로가 완전히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집필함에 있어서 나를 가르쳐주고, 나에게 충고해주고, 여러 모로 각별히 힘을 빌려준 몇 사람의 마음의 벗이 있다.

 

즉, 8세기의 백낙천, 11세기에 살았던 소동파, 16세기 및 17세기에 있어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졌던 인물의 대집단, 그리고 로맨틱하고 능변이었던 도적수(屠赤水), 우스겟소리 잘하고 독창적인 데가 있던 원중랑(袁中郞), 심원웅대한 사상을 가졌던 이탁오(李卓吾), 민감한 궤변가였던 장조(張潮), 쾌락파였던 이립옹(李笠翁), 유쾌하고 명랑했던 노(老) 쾌락주의자 원매(袁枚), 허풍쟁이이자 해학가이며 걸핏하면 흥분하던 김성탄(金聖嘆). 모두 한결같이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물들이다. 또한 너무나 독창적인 판단에 뛰어나고 지나치게 다감한 인물들이었기에 정통파의 비평가들에게는 호감을 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덕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선량하고, 막상 한마디로 선량하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도덕적인 인물들이었다. 불과 몇 안 되는 빼어난 인물들이었기에 이러한 인물들이 태어난 데 대핸 후세 사람들의 기쁨 또한 크고, 그들의 가치는 더욱 진지하게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더라도 그들의 정신은 늘 이 책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이 인물들이 중국에서 그들이 지닌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시일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글로써 나의 마음을 끄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말하려는 생각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중국의 아미엘(스위스 철학자)이라 부르고 있다. 즉, 입은 무겁지만 이야기할 때문 언제나 센스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아논(Anons)의 친구들 속에 끼워주고 싶은 그런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위인의 아버지처럼 영감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훌륭한 말을 입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말한 사람들보다 위대한 인물이 몇 사람 있다. 마음의 벗이라기보다는 내가 스승으로 받드는 사람들로서, 인생과 자연에 대한 맑고 투명한 경지에 이르러 인간미가 담뿍 깃들여 있으면서도 아주 신성하고 자연히 솟아나오는 슬기는 천의무봉(天衣無縫) 털끌만큼도 인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인물로 장자가 있고 도연명이 있다. 그 마음의 소박함은 도저히 시시한 인물들이 따를 바가 아니다. 나는 자주 이 인물들이 한 말을 인용하여 직접 독자에게 들려주었거니와 그 고마움을 잊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도 실은 이들 선철(先哲)을 대신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의 마음의 교류가 오래되면 될수록 그들의 사상에서 받는 은혜는 더욱더 친화의 도를 더하여 내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혼연일체가 되어간다. 마치 좋은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이 부모로부터 받는 감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러이러한 점이 아주 비슷하다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나는 중국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근대인의 하나로서 이야기하려고 애쓴 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고인의 사상의 충실한 소개자로서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근대 생활에서 내 자신이 스스로 체험하여 얻은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말하면 더욱더 진지한 태도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하기에 고인이 한 말에 대한 취사선택은 완전히 나의 자유재량에 의한 것이다. 어느 한 시인이나 어느 한 철학자의 전모를 여기다가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에 쓰여진 증거에 의하여 고인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이와 같은 말로 이 머리말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즉, 이 책의 가치는(가령 가치가 있다면) 주로 내 마음의 벗의 유력한 시사에 힘입은 것이며, 만일 내 판단에 부정한 점이나 불완전한 점이나 미숙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 혼자 져야 될 성질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리처드 J. 윌쉬 부부에게, 첫째로 이 책을 쓰도록 착상을 갖게 해준 데 대하여 , 둘째로 유익하고 솔직한 비평을 해준 점에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또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와 교정에 있어서 협조해주신 휴 웨이드 씨에게 감사하고, 색인을 만들어준 릴리안 페퍼 양에게 대해서도 고맙다는 뜻을 표시해야 겠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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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연재 2.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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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mUEY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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