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사랑과 마음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부른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문화적·미술적·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기만적 명성, 기만적 재력, 기만적 국가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 등 많은 기만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드물게 볼 수 있는 미덕이다.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고,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는 이야말로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에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간 기만을 용인하며 살아야 한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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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석학 린위탕 수필집《생활의 발견》 연재4.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교육 또는 교양의 목적은 지식 가운데에 견식을 키우고, 행위 가운데에서 훌륭한 덕을 쌓게 하는 데 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반드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물을 옳게 받아들여 사랑하고, 옳게 미워하는 사람을 뜻함이다.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미워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은 견식이 있음을 뜻한다. 머릿속이 역사의 연대와 여러 가지 숫자로 가득 차 있고 러시아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그 일을 바라보는 태도나 견해가 전혀 그릇된 사람과 어떤 모임에 함께 한다면 불유쾌할 것이다. 그들은 화제에 오르는 어떠한 일이든 약간의 사실과 숫자는 어김없이 알고 있지만 견해를 들으면 한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은 있지만 판단력, 그러니까 견식 또는 감식(鑑識)이 없다. 지식은 사실이나 뉴스를 따로 외고 있음을 말하지만 견식, 즉 판단력은 예술적 판단이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공자는 자기의 판단력이 없이 학식만 가진 것이 학식은 없으나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진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배움이 없이 생각하면 사람을 경망하게 만들고, 이렇다 할 생각이 없이 배우기만 하면 몸을 망치느니라.’ 이렇게 경고한 것을 보면, 공자는 그가 살던 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후자의 타입에 속한다고 본 게 아닌가 싶다. 이 경고는 현대의 학교에도 매우 적절한 말이다. 잘 알다시피 현대의 교육과 학교제도는 일반적으로 지식을 장려하지만, 판단력을 기르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지식을 마구 주입시키는 것을 마지막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다량의 학식만 있으면 교육받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이다. 학자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인은 대체로 학식, 행위와 견식, 다시 말해서 감식과를 구별하고 있다.(사람의 식견, 즉 현대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통찰력은 그 밖의 것보다 ‘상위’에 두어도 좋으리라.) 역사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역사 책이 최대의 학자적인 양심으로 쓰였다 해도 통찰과 명찰(明察, 사물을 똑똑히 살핌)이 전혀 없고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의 판단과 해석에 저자가 아무런 독창력과 이해력을 깊이 나타내지 않는 일은 흔하다. 우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견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 소식에 밝다든가, 사실을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다. 역사상의 어느 시기에는 쉽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사실이 많다. 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사항을 선택하는 판단력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 인물의 견해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사랑과 마음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부른다. 견식에는 매력이 있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문화적·미술적·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많은 기만에 싸여 있었다. 기만적 명성, 기만적 재력, 기만적 국가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들, 정신분석학자는 변비증상이 구두쇠의 근본이니 하는 투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얼마간 견식이 있는 이가 이런 학설을 듣는다면 재미가 있다며, 웃어넘기고 말 게 뻔한 노릇이다. 누가 저질렀건 잘못은 역시 잘못인 것이다. 위인의 이름이나, 위인은 읽고 범인은 아직 읽은 적도 없는 책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감탄하거나 위압을 받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한데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은 항상 식(識, 앎)과 담(膽, 담력)을 관련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용기, 다시 말해서 판단의 독자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로 드물게 보는 미덕이다. 후년에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유년 시대부터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고,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은 설사 그 시대의 인기 있는 시인이라 해서 무턱대고 호의를 베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정말 한 사람의 시인에 심취할 경우에는 당당히 그 까닭을 공언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문예에 있어서의 견식이라고 한다. 그는 또 유행파에 속하는 화가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예술적인 본능에 저촉될 경우에는 결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그는 또 철학에 있어서의 유행이나 시류에 따른 이론에는, 가령 그 뒤에 가장 위대한 사람의 이름이 있을지라도, 결코 감동하는 일은 없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납득되지 않는 일이라면 어떠한 저자에게도 심취하려고 들지 않는다. 저자가 그를 심취시켰다면 저자가 옳은 것이다. 만약 저자가 그를 심취시킬 수 없다면 그가 옳고, 저자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지식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원래 이와 같은 지적인 용기 또는 판단의 독립성을 지키자면 소박한 어린이가 가지는 종류의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런 자신감이 있는 이야말로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에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간 기만을 용인하며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사색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또한 어째서 사색보다는 지식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일까.
심리학, 중세사, 논리학에서부터 ‘종교’에 이르는 필요한 과목 또는 청강 과정을 끝냈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생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표나 졸업증서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또한 점수나 졸업증서가 학생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참된 목적이 지니고 있는 지위를 빼앗아버리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교육 제도가 대량 교육이며, 따라서 공장과 같다.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건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시스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학교의 이름을 지키고 제품을 표준화하기 위해, 학교는 졸업증서를 발행하여 제품의 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졸업증서와 함께 등수를 먹일 필요가 생기고 등수를 매길 필요에서 점수를 주는 제도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는 따로 암기, 시험, 고사(성적을 평가하는 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육 전체가 완전한 논리적인 연쇄를 이루고 있어서 도망칠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험이나 고사의 결과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그것은 견식이나 판단력을 기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기억하는 힘을 기르는 데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나도 학교 선생을 한 일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막연한 문제에 대하여 막연한 의견을 묻기보다는 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일련의 문제를 제출하는 편이 쉽다.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수립된 뒤로 학문은 내가 견식의 계발이라고 부르는 참다운 이상에서 멀어져만 간다는 것, 아니 이미 멀어져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칫하면 잊고 있기가 쉽다.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암기만 해서 얻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느니라.’
형식이야 어떤 것이든 사람이 가진 지식을 시험하게 하거나 측정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장자는 정말 잘 표현했다.
“아, 내 목숨에는 한이 있으나 지식에는 한이 없구나.”
결국 학문의 탐구는 신대륙의 탐험 도는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이른바 ‘영혼의 모험’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탐구하는 정신이 해명적이고 연구적이고 호기심적이고 모험적인 기분으로 유지 된다면 괴로움이 되지 않고 즐거움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틀에 박힌 수동적인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이고 발전적이며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졸업증서나 점수가 일단 폐지되든가, 단지 그것에 그치는 것으로서 취급하게 된다면 학생은 적어도 공부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 학문의 탐구는 보다 적극적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태로는 학생에게 있어서 문제의 해답은 이미 나와 있어서 마음에 어떤 의문도 느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신입생은 2학년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2학년은 3학년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의 본래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런 생각은 모조리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학술의 규명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문제일 뿐,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오늘날의 학생들은 모두 대학 간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많은 선량한 학생들은 부모를 위해서 또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인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재학중 많은 학자금을 대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근엄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선생 앞에서 근엄하게 보이기 위해, 또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족들을 부양할 많은 봉급을 받고 싶은 생각에서 공부하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생각은 모두가 부도덕적인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학문의 탐구는 다른 누구의 일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교육은 즐거움이 되고 적극적이 될 수 있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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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연재
3.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삶에 필요한 것
: http://goo.gl/YDtgI7
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 http://goo.gl/2aklf5
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 http://goo.gl/C46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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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