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부드러운 <이소>라든가

오마르 카이얌의 책 한 권을 들고

애인과 함께 강둑으로 그 책을 읽으러 간다.

그때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면

구름을 읽고 책은 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책과 구름을 다 같이 읽어라.”

- 린위탕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용기’를 가지고 싶은 분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분’을 가지고 싶은 분에게,
중국의 문필가 린위탕(임어당)의 글을 추천합니다.

 


*



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생활의 발견》은 유머와 풍자로 자신의 사상을 명쾌하고 유쾌하게 알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행복이나 인생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보기도 하고, 공자와 같은 성인을 맹비난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일까요? 진리보다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린위탕. 그의 자유분방한 글쓰기만큼 한국독자의 의견도 참 다양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철학책,
읽고 나서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좋은 책,
유복한 사람의 이기적인 이야기,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의 책,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 책,
내 편견을 버리게 할 책,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책 등
다양한 평이 있습니다.

이 평들이 무엇을 의미하든 린위탕의 용기 있는 글쓰기가 부른 성과인 것 같습니다.

서문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주세요.^^

본문 연재로 가는 링크는 이 글의 하단에 있습니다.

_ 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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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재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은 사상과 인생에 관한 나의 체험을 밝힌 개인적인 증언이다. 이 책에 밝힌 나의 입장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영구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철학에서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을 오히려 경멸하는 사람이다.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사물을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정시적(抒情詩的)이라는 말을 개성이 강항 독자적 견해라는 뜻으로 간주하여, 이 책을 ‘서정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지나친 미명(美名)인 듯싶어 그만두기로 한다. 너무 높은 곳을 겨누게 되면 독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갖게 할 염려도 있고, 무엇보다 내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골자는 서정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산문이다. 때문에 이 책은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럽고 쉬운 글이 될 것이다.

 

너무 높은 곳을 겨누지 않고 땅에 매달려 흙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더라도 나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내 마음은 흙과 모래 속을 즐겁게 뛰노는 것으로 행복을 맛보고 있다. 이 땅 위의 생활에 도취될 때 사람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했나 여겨질 만큼 마음이 경쾌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에 있어 우리네 육신은 땅 위 6척(약 180cm)도 떠나는 일이 드물다.

 

나는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형식으로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러한 형식은 일 가운데 무언가 뜻 있는 듯한 이야기를 적거나, 아름답고 조용한 사상의 목장을 이리저리 거닐 때에는 매우 편리한 형식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게 싫었다. 그 이유는 내 자신에게도 분명치 않은데 이런 형식의 문학은 오늘날 그다지 유행하고 있지 않고, 읽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지고 보면 저자란 자신의 책이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한 대화란 신문에 실리는 인터뷰 기사의 문답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화란 한 개의 글이 몇 장씩 계속되는, 사실 유쾌하고 길게 주고받는 한가한 담화를 뜻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뜻밖의 곳에서 지름길로 빠져 맨 처음의 논점으로 되돌아오는 형식의 글을 말한다. 마치 담장을 타고 넘어 먼저 집으로 돌아와 나중에 온 동행의 친구를 놀라게 하는, 그런 식의 글을 뜻한다. 나는 뒷담장을 넘어 집에 돌아오거나 샛길을 거닐거나 하는 것을 여간 즐기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 벗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든가, 그 근처 시골 지리에 밝다는 것을 인정해줄 테지만 나는 굳이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코 독창적인 글을 쓰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상은 동서의 많은 사상가들이 몇 번이고 생각했고, 표현한 것들이다. 동양에서 빌려온 것은 이미 동양에서는 낡아 빠진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 사상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박았다면 본래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 독창적인 것의 표출로 처음에 내가 그 사상에 접했을 때 내 마음이 본능적으로 찬성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상을 사상으로서 아끼고 존중한다. 사상을 말한 인물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사실 나는 저술에서도, 독서에서도 샛길을 걸어왔다. 이 책에서 인용한 글들의 저자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이어서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로서도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다. 간혹 유명 인사의 이름도 나오지만, 그건 인물들의 사상을 직관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빌려 쓴 것이지 저자가 유명해서는 아니다. 이름도 없는 싸구려 고본(古本)을 사들여 그 속에서 혹시 숨은 보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조사하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버릇이다. 만일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내 사상의 출처가 어딘지 알게 된다면 이런 속물이 있나 하고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러나 보석상의 진열장에서 커다란 진주를 구경하는 것보다도 쓰레기통 속에서 작은 진주를 찾아내는 편이 훨씬 유쾌한 일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심원한 사상가도 아니요, 많은 책을 잘 읽는 편도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꼼꼼히 책을 읽다가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는 것을 뚜렷하게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로크나 흄이나 버클리의 저서들을 아직 읽지 못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닦은 학문의 방법과 훈련은 모두 그릇된 것이리라. 나는 철학을 읽지 않고, 직접 인생을 읽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연구치고는 파격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결국 그릇된 방법이라 할 수 있으리라.

 

여기 내가 간직하게 된 철학적 지식의 출처를 몇 가지 예로 들어볼까 한다. 우선 우리 집 식모인 황씨 부인, 그녀는 중국의 양가 출신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여러 생각들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굉장히 입이 험한 소주(蘇州)의 여자 뱃사공, 상해의 전차 차장, 우리 집 요리사의 아내, 동물원의 사자 새끼, 뉴욕 중앙공원의 다람쥐, 한때 그럴듯한 비평을 한 일이 있는 어느 배의 갑판 보이, 천문란(天文欄)의 필자(10년 전쯤에 작고했다), 신문 매점으로 들어오는 온갖 뉴스, 그리고 이 밖에 인생에 대한 우리들의 호기심과 자신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않으려고 하는 작가라면 어떤 작가든 모두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들자면 한이 없다.

 

이와 같이 나는 철학의 학술적인 훈련이 결여된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철학 책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통 철학자란 무슨 일에 대해서건 어렵게 말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철학을 그만두고, 무엇이든 그 보상을 할 생각을 갖는다면 무슨 일이거나 아주 또렷하게 또 단순하게 보이게 마련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잘 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내 태도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을 것이다. 내가 쓰는 용어가 정통 철학자의 것처럼 길지 않다느니, 모든 일을 너무나 알기 쉽게 해버린다느니, 심지어 신중하지가 못하다느니, 철학의 신성한 전당에 들어와서도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의젓한 걸음걸이로 걷지 않는다느니, 자못 그럴듯한 엄숙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느니, 여러 가지 트집거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용기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찾기 어려운 미덕이 아닌가 싶다. 허나 나는 항상 철학의 성역 바깥만을 맴돌았고, 그것이 바로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여기에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에 호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노라고. 자기 스스로의 사상을 생각해내고, 독특한 판단을 정하고, 어린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발표하는 그런 방법이 있다.

 

그러면 세계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 의견에 동의해준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사상을 가꾸어낸 사람은 많은 다른 저작들이 이러니저러니 논하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했고, 자기가 느낀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기보다 우아하고 보다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이때 그는 고인(古人)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고인은 그가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게 되어 양자는 마음의 벗으로서 영원히 맺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나는 이들 옛 어른들, 특히 중국 고대의 마음의 벗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그러니까 이 책이 쓰여지기까지 많은 고대의 협조가가 있었던 셈이다. 모두가 저다운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들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거니와 그들 역시 내게 호의를 가져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가장 참된 뜻에서 이분들의 마음은 항상 나와 함께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부터 이상적이라고 믿는 정신적 교류의 유일한 형식이다. 생각해보라, 여기 두 사람이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느낌을 갖고 서로가 완전히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집필함에 있어서 나를 가르쳐주고, 나에게 충고해주고, 여러 모로 각별히 힘을 빌려준 몇 사람의 마음의 벗이 있다.

 

즉, 8세기의 백낙천, 11세기에 살았던 소동파, 16세기 및 17세기에 있어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졌던 인물의 대집단, 그리고 로맨틱하고 능변이었던 도적수(屠赤水), 우스겟소리 잘하고 독창적인 데가 있던 원중랑(袁中郞), 심원웅대한 사상을 가졌던 이탁오(李卓吾), 민감한 궤변가였던 장조(張潮), 쾌락파였던 이립옹(李笠翁), 유쾌하고 명랑했던 노(老) 쾌락주의자 원매(袁枚), 허풍쟁이이자 해학가이며 걸핏하면 흥분하던 김성탄(金聖嘆). 모두 한결같이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물들이다. 또한 너무나 독창적인 판단에 뛰어나고 지나치게 다감한 인물들이었기에 정통파의 비평가들에게는 호감을 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덕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선량하고, 막상 한마디로 선량하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도덕적인 인물들이었다. 불과 몇 안 되는 빼어난 인물들이었기에 이러한 인물들이 태어난 데 대핸 후세 사람들의 기쁨 또한 크고, 그들의 가치는 더욱 진지하게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더라도 그들의 정신은 늘 이 책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이 인물들이 중국에서 그들이 지닌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시일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글로써 나의 마음을 끄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말하려는 생각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중국의 아미엘(스위스 철학자)이라 부르고 있다. 즉, 입은 무겁지만 이야기할 때문 언제나 센스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명한 아논(Anons)의 친구들 속에 끼워주고 싶은 그런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위인의 아버지처럼 영감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훌륭한 말을 입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말한 사람들보다 위대한 인물이 몇 사람 있다. 마음의 벗이라기보다는 내가 스승으로 받드는 사람들로서, 인생과 자연에 대한 맑고 투명한 경지에 이르러 인간미가 담뿍 깃들여 있으면서도 아주 신성하고 자연히 솟아나오는 슬기는 천의무봉(天衣無縫) 털끌만큼도 인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인물로 장자가 있고 도연명이 있다. 그 마음의 소박함은 도저히 시시한 인물들이 따를 바가 아니다. 나는 자주 이 인물들이 한 말을 인용하여 직접 독자에게 들려주었거니와 그 고마움을 잊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도 실은 이들 선철(先哲)을 대신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의 마음의 교류가 오래되면 될수록 그들의 사상에서 받는 은혜는 더욱더 친화의 도를 더하여 내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혼연일체가 되어간다. 마치 좋은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이 부모로부터 받는 감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러이러한 점이 아주 비슷하다고 꼬집어 말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나는 중국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근대인의 하나로서 이야기하려고 애쓴 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고인의 사상의 충실한 소개자로서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근대 생활에서 내 자신이 스스로 체험하여 얻은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말하면 더욱더 진지한 태도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하기에 고인이 한 말에 대한 취사선택은 완전히 나의 자유재량에 의한 것이다. 어느 한 시인이나 어느 한 철학자의 전모를 여기다가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에 쓰여진 증거에 의하여 고인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이와 같은 말로 이 머리말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즉, 이 책의 가치는(가령 가치가 있다면) 주로 내 마음의 벗의 유력한 시사에 힘입은 것이며, 만일 내 판단에 부정한 점이나 불완전한 점이나 미숙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 혼자 져야 될 성질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리처드 J. 윌쉬 부부에게, 첫째로 이 책을 쓰도록 착상을 갖게 해준 데 대하여 , 둘째로 유익하고 솔직한 비평을 해준 점에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또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와 교정에 있어서 협조해주신 휴 웨이드 씨에게 감사하고, 색인을 만들어준 릴리안 페퍼 양에게 대해서도 고맙다는 뜻을 표시해야 겠다.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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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연재 2. 자신을 알라

링크 : ​http://goo.gl/2akl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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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mUEY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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