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가장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른바 완전주의는 아니다.

바를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굳이 알아내자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기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스럽게 일하고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이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 린위탕

 

 


 

 

어떻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가란 질문을 해결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린위탕은 맹장와 장자의 의견을 빌려

인간의 착한 본성을 잊고 사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문명생활이 착한 본성을 회복할 수 없게 한다고 말이에요.

자신의 본성과 자신을 삶을 찾고 싶은 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_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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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재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근대 사회에서는 철학자란(가령 그러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거나 가장 무시당하고 있는 부류이다. ‘철학자’라는 말은 단지 사회적인 존칭에 불과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을 누구나 ‘철학자’라고 부른다. 또한 현실 생활에 초연한 사람도 ‘철학자’라고 불린다.

후자의 뜻이라면 다소 수긍이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에서 터치스톤에게 “목동이여, 그대는 철학이라도 갖고 있는가”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후자의 뜻으로 쓰인 말이다.

이 뜻으로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자연과 인생 전반에 관한 평범하고 조잡하고 흔해 빠진 생각을 가리킨 데 불과하다. 이 정도의 것이라면 누구나 다소는 갖고 있다. 현실의 모습을 그 표면적인 가치 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거나 신문에 쓰여진 말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다.

 

대개 철학에서는 깨달음에서 오는 황홀한 느낌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철학자가 인생을 관망할 때, 그 방법은 화가가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흡사하며 베일이나 아지랑이 같은 것들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실 그대로의 또렷또렷하고 생생한 면이 다소 흐려지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의 대의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적어도 중국의 예술가나 철학자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자란 그날그날 자기 일에 파묻혀서 자기 일의 성패와 이해득실만이 절대적인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이를 뜻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사물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일조차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공자는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이 말은 공자가 한 말 가운데서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지식적으로 비아냥거린 말 중에 하나이다.

이 장에서 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중국 철학자들이 생각한 것들을 다소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들 철학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만큼 일치되는 점도 있다. 인간은 현명하지 않으면 안 되며,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자의 생각은 적극적인 것으로 보이고, 노자의 생각은 교활한 평화주의로 보이지만 그만큼 양자의 생각은 이른바 중용(中庸)의 철학 속에 하나로 녹아들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중용의 철학이야말로 중국인의 일반 종교라고 생각된다. 활동과 무활동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은 일종의 타협, 다시 말하면 이 땅에 이룩된 극히 불완전한 천국에 만족한다는 생각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에 비로소 현명하고 명랑한 생활 철학이 생겨나고, 마침내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시인이며 최고로 조화된 인격자라고 생각되는 도연명의 생활에서 그 전현을 찾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어쨌든 무의식적으로 모든 중국 철학자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결같이 생각한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이 가장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른바 완전주의는 아니다. 바를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을 굳이 알아내자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기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스럽게 일하고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이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맨 처음 부딪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거의 답변이 불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허나, 일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우리네 자신이 결코 참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 모두는 동감한다. 그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만 애쓴다면 뭔가 허전하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숨길 수 없는 확신이다. 여기 무엇인가를 찾아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자아, 이 문제를 풀어보시오’라고 현명한 자는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저 사람은 무엇을 잃었는가?’ 어떤 이는 시계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 밖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짐작이 모두 틀린 뒤에 홀로 현명한 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네들에게 가르쳐주지. 저 사람은 무엇인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란 말씀이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생활에 쫓기고 있는 동안에 흔히 참된 자기의 모습을 잊고 있기가 쉬운 법이다. 그것은 버마재비를 노리는 새가 자기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고, 버마재비는 버마재비대로 다른 먹이를 노리느라고 자기 몸이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맹자가 공자의 뒤를 이은 뛰어난 능변가였다던 것처럼, 장자는 노자의 뛰어난 언변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 스승보다 1백 년이나 뒤에 태어난 인물들이었다.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인물이었듯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맹자와 장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다. 즉, 인간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데, 철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잃어버린 것, 여기서는 맹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발견하거나 다시 되찾는 데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맹자는 말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이란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을 뜻함이다.’ 맹자는 문명이 발달한 기교적인 생활이 인간이 타고난 젊고 싱싱한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숲의 나무를 마구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때 우산(牛山)의 숲은 매우 아름다웠다. 허나, 큰 도시 근처에 있어 나무꾼들이 마구 나무를 자르니 어찌 더 이상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밤과 낮이 숲에 휴식을 주고, 비와 이슬이 계속해서 땅을 기름지게 하여 땅에서 쉴새없이 새싹이 돋아나 이제 소와 양 떼들이 마구 거닐게 되었다. 그 뒤로 우산은 저와 같이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우산에는 일찍이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던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벌거벗은 우산의 지금 모습이 저 산이 지닌 참다운 본성이었을까? 헌데, 인간에게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옳은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나무꾼이 도끼로 매일 나무를 찍어내는데 어찌 자연이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말하건대 낮과 밤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벽의 신헌산 공기가 몸을 기름지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고 하나, 인간이 낮에 행한 악(惡)은 이를 다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타고난 착한 본성에 쉴새없이 도끼질을 하므로 밤 동안에 취한 휴식과 건강의 회복이 소용이 없게 되며, 밤사이에 취하는 휴식이 전혀 효험이 없게 되는 날에 그 인간은 짐승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짐승과 같이 행함을 보고 그에게는 일찍이 인간다운 참된 마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타고난 진짜 본성이었을까?

-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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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발견》 연재 3. (준비중)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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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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