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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시대의 격랑을 넘어 굽이굽이 아픔의 자리들을 거쳐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황석영이 그간의 응축된 역량을 오롯이 쏟아 부은 듯『오래된 정원』은 여러모로 우뚝하다. 그런데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 황석영의 정신세계가 이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리하여 작중의 오현우이기도 한 황석영이 바뀐 환경에 낯설어하듯이 우리 또한 그와 그의 글에 서먹하기도 하다.
"무감동하게 바짝 마른 황야의 돌처럼 굳어 있던 마음속으로 촉촉한 물기가 번져오는 느낌이었다. 여름날 석양녘에 낮잠을 자고 깨어난 것과도 같이 사람들이든 산과 들의 풍경이든 너무도 선명하고 새롭고 뚜렷해서 낯설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권, 111쪽)
그의 작품은 이전의 그답지 않게 현실의 팍팍함에서 한 발 비껴나 있다. 일견 초월을 꿈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된 정원』에서 그는 이상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현우와 한윤희의 아니 작가 황석영에게 오래된 정원은 어디였을까? 아마 그것은 역사 발전의 과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합법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단계로서의 미래는 아닐 것이다. 우리 안에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는데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거나 알게 모르게 가능성이 조금씩 배태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것은 이념 과잉의 시대를 힘겹게 겪어내면서 뼈아프게 체득한 깨달음일 것이다.
황석영은 이상 사회의 표상으로서의 오래된 정원을 그려 보이기에 앞서 그것의 대척점이 될 지나간 시대의 성격을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는 수컷들의 삭막하고 쓸쓸한 갈등과 번민의 나날이었다. (하권, 304쪽) 권력, 헤게모니에 집착하던 광기의 시절이었다. 또 자본측이나 반체제 진영까지도 물질적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일방적인 시대였다. 하부 구조의 토대를 구축해야 인간성이 실현된다고 본 것이다. 한편 운동의 동력으로 전위(前衛)가 강조되던 연대였다. 소수의 영도 세력이 조출해낸 지침이 조직 대중에게 일관되게 관철되는 권위적인 방식에 얽매어 있었다. 새로 깨어나고 있던 각계각층의 잠재적 역량들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에게 소홀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현우의 회상과 윤희의 일기 형식을 통해 황석영은 가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음을, 그리하여 바람직한 새로운 사회에는 전과는 다른 시대 정신이 요구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새 시대에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냉혹한 지배방식에서 모성적 사랑으로 지향이 바뀌어야 함을 한윤희와 마리 부인을 통해 설득력있게 나타내고 있다. 연민과 보호가 탈취와 파괴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것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모성을 황석영은 위대한 자연과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 현우와 윤희가 몇 달을 함께 보냈던 갈뫼의 생태와 같은 본연의 것이 그것일 것이다. 샹그릴라나 유토피아는 관념속의 허구가 아니고 스스로 있을 따름인 자연의 원리에 순응해서 자족하며 살아가는 지경일 것이다. 새 시대의 화두가 모성과 생태임을 적시한 황석영은 이러한 시대로의 이행의 동력으로 새로 떠오른 시민 사회를 지목하고 있다. 6월 항쟁을 통해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특정 계급이나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고 광범위한 계층을 망라한 시민의 총체적인 역량이 사회 진보를 이루어 낼 힘의 원천임을 절감한 것이다. 그들의 연대가 결국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황석영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 모성과 생태의 공간이 결국은 우리가 열어 나가야 할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인 것을, 그리고 이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각성과 연대가 절실히 요구됨을 간곡하게 말하고자 한 것이리라.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권, 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