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킹 걸즈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6
김혜정 지음 / 비룡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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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과 보라, 세상을 향한 적대의식으로 똘똘 뭉쳐 반항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결코 남에게 곁을 내주지 않던 아이. 존중받아 본 적이 없기에 스스로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내팽개쳤던 아이. 그러기에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무궁무진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벅찬 일을 이뤄낼 수 있는 존재인지 도무지 생각조차 않던 아이들이었죠. 그러니 남에 대한 배려는 애초 기대하기 어려울 밖에요. 줄줄이 엮이는 일련의 사고들, 그런데 그것들이 실은 나를 알아달라는 외침이라는 것을 본인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니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편적인 삶의 궤적에서 한참이나 일탈한 속칭 문제아들로 보이게 된 거죠. 하지만 문제아라는 말처럼 의미가 모호한 게 또 없을 것입니다. 다들 자기 기준으로만 보기 때문이지요. 다른 아이를 때려서 구치소에 간 소녀나 왕따를 당해 그 괴로움을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풀던 소녀에게도 곡절과 이유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걷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과도할 정도로요. 별다른 장비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특별한 계획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곤 한답니다. 그러면서 걷기란 세계와 홀로 마주서는 일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습니다. 원시적이리만치 인간 본연의 방식으로 지구를 온몸, 아니 두발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걷기에 몰입할 때마다 더욱 나만의 세계로 오롯이 나아가기에 적합한 곳은 없을까 자주 생각하곤 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사막이나 무인도가 그러할 것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장 바람직하기는 드넓은 무인도 안에 있는 사막을 기진할 정도로 걷는 일이 되겠지요.

맺힌 응어리를 푸는 데는 걷기만한 것이 또 없을 것입니다. 오래 걷다보면 쌓였던 잡다한 것들이 걸러져 마음결이 문득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 고비를 넘기면 생의 한 구비를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길을 나섭니다. 그것도 바로 내가 꿈꿔왔던 사막에 가려하고 있습니다.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나드는 악조건 투성이인 곳으로 말입니다. 검찰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하는 청소년 재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두 명의 문제아 소녀와 30대 미주 언니가 함께 실크로드 도보 여행을 오르게 된 것입니다. 총 1,200킬로미터의 길을 70일 간에 걸쳐 오로지 맨몸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내가 꿈꿔왔던 그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의 여정을, 그들의 마음결을 따라 가다보니 나의 진솔한 내면의 일단, 혹은 걷기에 집착하고 있는 무의식의 근원이 읽혀지는 게 아닙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화해의 방식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내 의식을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를 모른 채 부여안고 살아갈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풀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많은데 어찌 할 바는 모르겠고 하여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내 몸이, 아니 내 발이 그런 내 마음을 먼저 읽고 나를 걷기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은성과 보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 반항하는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미웠을 겁니다. 이를 풀고 세상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마음이 길을 나서게 이끌었고 또 힘겨운 고비들도 너끈히 견뎌낼 수 있게 했던 힘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 무의식이 일행, 특히 미주 언니에 대한 적대감을 거둔 모습과 보라에 대한 배려의 형태로 고스란히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성과 보라의 실크로드 여정, 아니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의 그것도 추체험해 볼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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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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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녕 엄마에게

위녕 엄마, 이렇게 부르고 나니까 여간 어색한 게 아니네요. 위녕 아빠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은 <즐거운 나의 집>을 읽는 동안 줄곧 내가 바로 위녕 아빠라는,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자라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곤했답니다. 겉으론 도덕군자인 양 그럴듯한 포장을 했지만 좀만 속을 파 내려가면 잇속에, 오로지 제 안위에만 매몰되어 있는 세모돌이가 금방 도드라질 것이 빤했기 때문이었지요. 위녕 아빠, 엄마를 사랑한 건 분명한데 정면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늘 얼이 반쯤 나간 상태였죠. 하여 상투적인 기준에 얽매어 있을 밖에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 고집하며 마음 결 헤아리는 데는 또 젬병이었고요. 그런 아빠의 모습에 터무니없는 권위를 내세우며 내밀한 가슴의 소리에는 애써 눈감아왔던 나의 그것이 겹쳐지며 결국 고스란히 하나가 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게 아닙니까. 먹먹해진 가슴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불편한 감을 떨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위녕 엄마의 심경을 전폭적으로 이해하며 마음결이 순화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건 아마 두 통의 편지를 읽고 난 다음인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위녕 엄마의 속내를 오롯이 보아 버린 게 되었지요. 어찌나 강하게 다가왔던지 정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주변의 사물이 모두 감쪽같이 지워지는 듯 했어요. 그 후론 일사천리로 위녕 엄마 편이 되고 말았지요. 나를 닮은 아빠를 서슴없이 탓하며 말입니다. 처음 것은 감옥에 있던 위녕 아빠에게 보낸 것이었죠. 위녕이 발견하곤 몰래 읽는데 나까지 끼어든 셈이지요. 그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참 막막하게 만들더군요. 꽁지였던 당신이 위녕 아빠 곰탱에게 그렇게 발랄하고 정겨우며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위녕도 알게 된 부분 말입니다.

거기서 보았지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가식 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아이를 말입니다. 위녕 엄마 말마따나 조숙했던 탓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로 머물고 만 가엾은 아이를요. 요즘 듣고 있는 이은미의 리메이크 앨범 투엘브 송스(twelve songs)에 들어 있는 김민기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이 생각나더군요. 노랫말처럼 그 사람, 당신은 바로 아이였소. 빗물 같은, 바람을 닮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위녕 엄마, 그대는 정말 바람 같았어요. 가둘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지요. 그러기에 한 도덕군자의 규격화된 틀 안에 구겨 넣기는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미안하지만 나는 위녕, 둥빈, 제제의 엄마이기 전에 그냥 나다.”고 선포하기도 했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나는 아무개이기 전에 위녕의 아빠이고 위현의 아빠이며 현재 위현 엄마의 남편이기도 하다.”는 사람과 어떻게 즐겁게 발맞춰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도덕과 관습의 굴레, 그 가부장의 권위에 짓눌려 갑갑함을 견디지 못할 수밖에요. 당연히 무책임하고 제멋대로라며 매도되고, 위녕에게까지 그렇게 각인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외로움에 쩔쩔매게 된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녕, 그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랑도 못 느끼고 언제나 부당하게 취급받으며 너무 많이 거부당해 믿지 못할 아이가 되어버렸던 가여운 아이. 외톨박이로 이마에는 ‘나 엄마 없음’이라고 써넣고 가슴엔 나쁜 어린이표 명찰을 달고 있는 것처럼 외로웠던 위녕. 그리하여 늘상 석류처럼 빨간 상처가 벌어진 자리로 통증을 느끼곤 했었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일찍 세상 이치에 눈 떠 버린 아이는 오히려 엄마의 엄마 같은 딸로 자라나게 되었죠. 그런 위녕으로 인해 당신도 거듭나게 되었고요. 위녕 아빠도 이제 다 자란 위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길들여져야 비로소 행복에 의자를 내어 줄 수 있을 건데 그럴 기회를 더는 갖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다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도 엄마는 내 막내 동생 같고 아빠는 여전히 반장 역할만 하는 세모돌이 같고 새엄마는 무서운 에어로빅 강사 같다.”고 위녕이 여겼던 것이겠지요. 그런 위녕이 이제 수화기 너머로 아빠를 느끼고 머릿결에 닿는 엄마의 손길에 울컥해지는 이상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물, 그 청춘의 시간으로 막 진입하고 있지요. 딸도 자신의 길을 가도록 지켜보고 축복하며 스스로의 선택이 잘 된 것이 되도록 노력하게끔 마음으로 묵묵히 후원하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지막 편지는 청춘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그 순간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엄마의 스물과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며 기도를 믿고 앞으로 나가라는 축복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이라는 간곡한 기원이었지요. 똑똑한 딸은 엄마가 준 사랑의 열쇠가 바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 깨닫고 그 열쇠를 가지고 온전히 혼자, 아니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을 느끼며 비로소 성큼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아저씨를 떠올렸죠. 위녕 아빠가 과거이고 위녕이 현재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라면 다니엘은 당신의 미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잘 어울리더군요. 새로운 사랑이 어느새 다가왔네요. 축하할 일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상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마 이렇게 된 것은 위녕 엄마가 세 번의 파경에 아이들 양육까지 도맡아 곤욕을 치른 연후에 겨우 담담해진 것처럼 그도 아픔과 실패를 딛고 고요해진 까닭일겁니다. 다니엘도 실은 고독을 배낭처럼 짊어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잔잔한 인간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너무 샘이 나서 슬몃 끼어들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열등감 같은 게 밀려왔어요. 나는 아직 잔잔해지기 이전의 다니엘, 바로 위녕 아빠의 모습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프게 자각하는 한편 이제는 그런 상처를 딛고 새로운 단계에 오른 두 사람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참 즐거운 가족이 될 것 같아요. 더구나 둥빈이나 제제에게도 아빠의 자리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보다 먼저 위녕 엄마에게 또 다니엘 아저씨에게 꼭 필요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다니엘 아저씨가 당신에게 사람이 사는 데 유머라는 것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잖아요. 머리와 마음과 삶 전부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의미의 여유 같은 것이라고 당신이 느낀 그것을 맘껏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위녕 엄마도 이제 남편이란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지, 기댈 자리가 있다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그리하여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느끼며 즐거움에 겨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랑이란 꼭 아픈 것만은 아니란 걸 체감할 때도 되었고요. 더불어 다니엘 아저씨의 방황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니까요. 조금 주저되기도 하죠. 용기를 내세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가족, 그 가족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란 걸 그동안 절감했잖아요.

가족이란 모두가 사람 냄새가 나고, 언제든 나를 지켜봐주고 있구나 하고 느끼며 사랑의 온기에 겨워하는, 그리하여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순간순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사람 냄새나고 사랑이 감도는 곳,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지요. 지금이 위녕 엄마가 용기를 낼 때입니다. 그간의 아픔에 더는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세요. 위녕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즐거운 미래가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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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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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되면 의미 있게 다가온 부분에 밑줄을 그어 각별한 마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자연스런 독서법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대개 다이제스트로 묶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잠언들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D에게 보낸 편지>를 연거푸 두 번이나 읽으며 나를 뜨겁게 불러일으킨 지점을 표시해 나가다 어느 순간 약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인 차원의 밋밋한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에서 말입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 나는 여자와 두 시간만 같이 있어도 지루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도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결국 눈치 채고 말더군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에 난 사로잡혔습니다.(13쪽)


당신에게 영어로 말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14쪽)


당신은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나 없이 살 때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가 있었고, 대인관계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했고 또 남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속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지요.(31쪽)


“아 저렇게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다니!”점심 먹으면서 당신은 나에게 물었지요. “당신 사흘째 나에게 한마디도 안 한 것 알아요?”(40쪽)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키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86쪽)


내가 이런 데 필이 꽂히다니 왜일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답이 나왔습니다.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나의 내면을 흡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B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음결을 몰고 가는 묘한 기운이 절로 감정 이입이 되게끔 이끌었기에 그 울림이 남다르게 다가올 밖에요.


<D에게 보낸 편지>는 자신을 위해 전 생애를 오롯이 바친 여인에게 뒤늦게서야 비로소 고백하는 참회의 기록이었습니다. 도린, 고르를 위해 모든 걸 걸었고 쏟아 부었던 여인.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말입니다. 그리고 고결하고 빼어난 가슴과 머리의 소유자이기도 했고요. 하여 고르가 화려한 묘사로 요란을 떤 것이 아닌데도 누구나 금방 도린이 내뿜는 자장 안으로 빨려들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르는 늘 부채 의식에 시달려 온 듯합니다. 자신의 책 제목이기도 한 <배반자>가 바로 자기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적어도 도린에게는 말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살펴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힘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인격적 성숙이 결합된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자만이 참회록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D에게 보낸 편지>는 도린에 대한 고르의 깊은 성찰이 담긴 뼈저린 참회록입니다. 도린이 없었다면 그의 학술적 명망뿐 아니라 인간적 존재 자체도 어쩜 불가능했을 고르가 첫 저작 <배반자>에서부터 도린을 ‘동정심을 자아낼 정도로 불쌍하고 나약하며 의존적인’인물 케이로 그린 이후 50여년의 저작 생활 가운데 그의 존재의 기반이자 이유이기도 했던 그녀를 철저히 무시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빚의 무게는 그를 늘 짓눌렀지요. 고르의 저작들은 실은 도린과의 공동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린이 고르 곁에서 대화하고 고쳐주며 격려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는 도린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한 번도 명시적으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린, 그녀는 내면 깊숙이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었지만 늘 활달하고 경쾌하며 스스로를 개발했고 남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어느새 환해지곤 했지요. 그 남다른 매력이라니. 고르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또한 지적으로도 빼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죠. 오히려 학술 논문을 집필한 고르보다 사태의 본질, 그 핵심을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쓸 때나 신문사에서 일할 때 도린은 고르의 충실한 조력자, 아니 인도자가 되어 고르가 명망을 쌓아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도린을 도외시하고 어쩜 하찮은 여자로 그린 연후에 이를 시정하지 않고 있었으니 얼마나 미안하고 맘에 걸렸겠습니까. 그러나 미처 진지한 사과를 하기도 전에 도린은 불치의 병, 거미막염에 걸려 서서히 죽음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없이 치료에 매달릴 밖에요. 그 일보다 더 우선인건 없었을 것이니까요. 겨우 체념하고 받아들여 그 질병과 더불어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연후에도 고르는 늘 불안했습니다. 도린이 맞을 죽음도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후에 자신만 홀로 남아 견뎌야 할 고통과 외로움을 떠올릴 때 도무지 감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참회의 말을 곡진하게 전하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말을 비로소 털어놓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결국은 행복하고 자율적인 선택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죽음의 방식까지 스스로 결정하는 단안을 내리게 된 것이지요.


둘은 삶에서도 함께 했지만 죽음까지도 연대했습니다. 죽음조차 그들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나의 D(B)에게도 더 늦기 전에 참회의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아직 함께 할 날, 그것도 온전히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일 때 그간의 고마움과 섭섭했던 감정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환했던 일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편지를 한 통 쓰려 합니다. 나의 B에게로 시작되는 글. 우리의 첫 만남의 추억부터 회상해 보겠습니다.  아니 나를 있게 한 어린 시절과 그녀를 있게 했던 아스라한 시절의 얘기, 내가 들었던 것 있죠. 그것부터 꺼내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죽음보다 더 심장하고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던 우리 사랑에 대해서까지 말입니다. 이런 곡진한 고백이 마음의 응어리를 얼마나 녹일 수 있을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고 있던 부채의식의 상당 부분은 변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늦었지만 앞으로의 삶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선을 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해 준 <D에게 보낸 편지>를 슬몃 내밀며 웃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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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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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암을 대신 살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딸 라일라에게

라일라, 너는 언제나 그렇듯 너무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구나. 여기 하늘나라 내 옆에 있는 엄마에게는 소련군 점령 시절 무자히딘 전사로 지하드에 참여했다 순교한 두 오빠, 아마드와 누르의 대역으로 위안을 주더니 이젠 네 남편 라시드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암이 못다 이룬 삶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니.

네가 마리암의 아빠 잘릴의 편지를 읽는 걸 보고 기분이 참 묘했다. 편지도 잘릴의 유품 가운데 하나였지. 마리암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지 피노키오 만화영화 테이프를 넣었더군.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마리암 몫의 돈도 함께 들어 있었지. 그 편지를 네가 읽어 나갈 때 여러 갈레 생각이 교차되었단다. 우리 딸이 이뻐 보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샘이 더 많이 났음을 고백할게. 그리고 아빠가 네게 뚜렷이 남겨준 게 없구나 하는 자책도 밀려왔지. 편지 속에서 잘릴은 딸이 좀더 관대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자신이 주지 못했던 행복과 평화와 사랑을 마리암은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했을 때 가슴이 먹먹해져 한동안 어찌 할 줄 몰랐단다. 아빠도 같은 심정이었거든. 그래서 천국에 있는 아빠도 우리 딸을 축복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너에게 전해질는지 모를 편지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거란다. 아마 똑똑하고 마음결 잘 헤아리는 딸이기에 아빠의 심경도 자연스레 읽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난 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할거야.

라일라, 너를 낳았을 때 엄마와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앙증맞은 너를 보며 세상 온갖 시름을 잊곤 했지. 자랄수록 너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짙은 속눈썹, 청록색을 띤 눈, 보조개, 높은 광대뼈에다 샐쭉거리는 입술까지 어찌 그리 이뻤던지. 그리고 머리는 또 얼마나 좋았고. 해마다 각 학년 최우수 학생에게 수여하는 아왈 누므라 상을 도맡아 받곤 했었지. 그러나 한편으론 늘상 무거운 것에 가위 눌린 듯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단다. 아빠와 우리 아프간이 처한 현실이 딸로 태어난 너를 얼마나 힘겹게 할는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내 딸아, 원래 우리 아프간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어쩜 지금도 그런 나라가 아닐게고. 이런 살풍경은 우리의 모습이 단연코 아냐. 장미와 튤립으로 가득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지. 하늘의 천사들도 그곳의 푸른 초원을 부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단다. 그러니 도시의 지붕 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달들이 반짝이고 벽 뒤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이 숨어 있다고 17세기 페르시아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는 노래했던 거야. 아프간은 이렇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밝고 아름다운 나라야. 다만 그 햇빛이 벽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 너머에 비치고 있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태양은 보지 못하고 암울한 이쪽만 응시하고 있단다. 그러니 아프간은 사악한 나라가 되고 만거야.

특히 작년에 칸다하르 도상에서 선교팀이 피랍되어 애를 끓이던 한국이라는 나라 사람들은 더욱 심한 편견을 갖고 있을거야. 악마가 우글거리는 지옥이 따로 없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더라. 아니 어쩜 빤하게 보이는 일까지 불편해 하더라고. 1992년인가 미국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던 일을 아빠가 말해줬었니? 유색인종으로 소외받던 자들의 울분이 용출되던 그 때, 많은 흑인들이 분풀이 대상으로 왜 한인 상점을 택했는지, 그렇게 어이없는 약탈을 감행했는지 그들은 아마 잘 몰랐을거다. 같은 유색인종으로 주류 사회 구성원이 아닌 처진데도 말이야. 그때 보니 그들은 백인들보다 오히려 더 심하더라. 와스프(WASP)의 우월 의식을 완전 자기 것인 양 내면화하고 있더구나. 그러니 공분의 표적이 될밖에.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아프간을 무자비한 야만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로 여겨 그들을 계몽한다는 명목으로 선교팀을 시혜하듯이 파견하고 있지. 아마 이런 생각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에 대해 알려지며 더욱 공고하게 굳어진 것 같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9.11테러를 미국 심장부에서 자행하고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을 흔적도 없이 폭파했으며 여성들에겐 교육과 취업 기회를 봉쇄한 것 등이 공개되고 난 다음 말이야. 그런데 실은 이런 것들이 아프간 민중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더구나. 황석영이란 작가가 있는데 한국인 바리와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압둘의 아름다운 연대를 담고 있는 <바리데기>란 소설을 썼거든. 그는 오히려 약자를 배제하고 전지구적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 미국을 위시한 서구 주류 사회라 보고 그들 행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더라. 문제의 이면, 그 가려진 실상을 조목조목 시원하게 짚어 내더라고. 세상의 진실과 정의는 늘 일방적인 논리로 강변되기 일쑤임을 보여준거지. 그 작품에서 황석영은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강자들과 늘 억눌려 있던 뭇 약자들, 그들의 공존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임을 상기시키더니만 이렇게 요원한 일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바리와 압둘이 더불어 나아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더구나. 선의의 인간들이 맺는 인연의 연쇄가 전지구적 차원의 문명 공존을 이루는 작은 출발점이자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일거야. 그 작가가 쓴 <장길산>이라는 소설에 나오는‘장산곶 매’설화는 바로 라시드의 죽음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 같더라. 너를 독점하려는 생각에만 휘둘려 오히려 너를 해하려했던 그가 바로 장산곶 매를 자기 마을에서만 오롯이 차지하기 위해 발목에 매듭을 묶어두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야. 그런 집착은 결국 매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지. 매듭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거든. 너는 마리암 때문에 간신히 살아났었지. 단번에 그 한국인 작가에게 빨려들겠더라.

라일라, 우리 아프간의 아름다운 곳을 비록 많이는 아니지만 몇 군데 가보았지. 아빠와 함께 갔던 석불 여행 기억나니? 그 때 타리크도 동행했던가. 아마 백 살까지 산대도 그렇게 장엄한 것은 다시 못 볼 절경이었지. 절벽에 조각된 불상이 마치 2천 년 전 실크로드 대상을 내려다보듯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니. 불상의 머리 위쪽에 올라가 바라본 바미안 계곡의 풍요로운 장관은 또 어땠고.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야. 앞서 얘기했던 황석영이란 작가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썼던 수기 제목이 아마 <사람이 살고 있었네>일거야. 뿔 달린 빨간 괴물들이 살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북한 사람들도 고결한 것을 흠모하며 나름대로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지. 황석영 작가가 아프간에 와 보았다면 아마 같은 제목의 글을 썼을걸.

하지만 세월의 질곡은 우리 아프간을 피해가지 않았지. 그 와중에서 라일라 네 삶도 힘들었겠지만 지금 네가 그렇게 애틋해하고 하나가 되었으면 생각하는 마리암있지, 그녀의 신산한 삶을 생각해봐. 마리암은 마치 잘릴의 집 방에 놓여있던 마트료슈카 인형처럼 겹겹이 중첩된 사슬에 얽매어 있었잖아. 우선 세상이 악마로 여기는 무슬림에다가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하등한 존재 여자, 아프간에서 여자는 천형을 타고난 존재였지. 특히 탈레반 치하에서는 너무나 혹심하게 다루어져 도무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잖아. 부르카를 입고 남자가 동반해야만 외출할 수 있었고 병원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교육과 취업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했지. 그들은 신이 여자를 남자와 다르게 창조하여 뇌부터 차이가 나므로 여자는 남자처럼 사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강변했어. 또 서얼 하라미로 잘릴의 정부인과 적자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잖아. 그런 몇 겹의 질곡에 시달리던 잡초같은 존재였어. 그런 와중에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화가 되고 또 무자히딘 전사들의 약탈과 살육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며 탈레반의 학정까지 겪었으니 그 고달픈 삶은 더 말해 무엇하겠니. 그런데 그녀는 하나의 전쟁을 더 치러야 했어. 바로 라시드와의 그것이지.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지배자의 상징이었던 그. 뭇사람들의 싸움의 와중에서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와서 폭력에 익숙해있던 마리암이었지만 라시드에게 당했던 것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해야 할거야. 인간의 몸이 어떻게 그런 악의적이고 규칙적으로 가하는 폭력을 견디고 계속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지. 그리하여 마리암에게는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고통 받고 있는 여자들의 한숨처럼 보였던 것일 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아니야 정말 대단하지. 그런 중첩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발랄하게 나름의 주장을 펼쳐왔다는 게 말이야.

그런 마리암과 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인 태양처럼 우정을 나누었지. 물론 처음엔 서로의 마음 문을 닫은 채 모욕을 주기도 했고. 그래서 약간 걱정도 했단다. 마리암과 너를 이어준 건 의외로 아지자였지. 영특한 아이. 자면서 방귀를 뀌는 모습에 서로 쳐다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다가 자연스레 격의 없이 흉허물을 터놓는 걸 보고 아빠는 마음을 놓았단다. 그런 아지자를 고아원에 맡기고 둘이서 뒤돌아 나오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짠해 진단다. 뒤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들렸을 때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며 함께 통로를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며 더불어 나갔으니 존중받은 경험이 없고 늘 세상이 자신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왔던 마리암일지라도 마음 문을 활짝 열밖에. 그래서 너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걸 수 있게 된 거고. 타리크의 귀환 소식을 듣고, 독점욕에 눈이 멀어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라시드가 끔찍한 만행을 가해 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마리암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용단을 내리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조금의 거리낌도 없을 수밖에. 그 당당한 태도에 형을 집행하려던 탈레반 병사까지 숨죽이고 올려다보았잖니. 우리 딸 라일라의 마음속에 마리암은 아마 천 개의 태양이 내뿜는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을거야. 아빠 역시 네 속에서 그렇게 반짝거렸으면.

라일라. 생각해보니 마리암과 너 둘이는 너무 앞서나갔던 것 같아. 지금 여기의 우리 아프간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시대와의 불화로 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그러나 라일라 너는 기어이 그 간난을 이겨 내었지. 그리고 이제 파키스탄 여름 휴양지 마리에서의 꿈 같이 안락한 삶을 정리하고 버겁고 팍팍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아프간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고. 9.11 이후 마리에서의 삶은 뭔가 불충분하고 중요치 않으며 낭비 같다고 여기던 네가 떠오르는구나. 넌 역시 아프간이야. 아빠를 닮은 자랑스런 딸이고. 아프간이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가슴으로 체감했던거지. 새 조국에서 네가 할 일이 정말 많거든. 그래서 결국 타리크와 함께 아지자와 잘마이를 데리고 돌아왔구나. 타리크와 너는 참 잘 어울린단다. 네 엄마가 걱정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기품 있는 외모에 자상한 심성을 지닌 타리크. 너랑은 하마터면 페르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라일리와 마즈눈>이 될 뻔했지. 그리고 로켓탄이 우리 집에 터지던 그 날 말이야. 거기서 17일만 먼저 출발했더라면 우리 온가족도 무사하고 타리크와 함께 파키스탄에서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신의 뜻은 정말 알 수 없구나. 하나 결국 그와 너는 인연의 끈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지. 그리고 이젠 동반자고. 네가 마리암의 미완의 삶을 완수하고 이제 아지자의 인연이 배어 있는 고아원으로 향할 수 있게 된 데는 타리크의 정신적 지지가 큰 몫을 했을거야.

아 참! 돌아오는 길에 마리암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헤라트에 들르기로 한 건 너무 좋은 생각이었다. 역시 정이 많고 삶의 의미를 아는, 인간미 넘치는 내 딸이야. 마리암과의 작별과 진혼을 소홀히 할 순 없지. 그녀 역시 아빠나 엄마 같이 지금의 너를 있게 한 고마운 존재니까. 마리암, 아무런 불평 없이 시대를 견디고 자신을 덮쳐오는 물살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잃지 않던 그 의연한 모습, 잊히지 않는다.

이제 새로운 나라는 마치 새 이름 짓기 놀이를 하듯, 완전히 달라진 구조로 만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건설되겠지. 네가 사과나무 묘목을 심고 페인트칠도 깨끗이 하는 등 작은 일에서부터 아프간 재건 사업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단다. 그건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주겠다던 원조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고 있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며,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간을 잊을 것이라고 불평하며 조급해 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쾌한 답변이 될 것이야. 아프간 사람이 쳐부술 수 없는 유일한 적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꾸는 일이라고 아빠가 전에 말했었지. 그런데 그게 바로 네 몫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우린 지혜로운 민족이니까 아름답고 안전한 곳, 푸른 보리밭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아빠는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타리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낮잠을 자고 너는 시내에 발을 담그고 불상들 밑에서 좋은 꿈을 꾸었던 곳 같은 멋진 나라를 만들어 내고야 말거야. 그리고 그건 어디서 찾을 게 아니라 당연히 네 손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고. 우리 딸은 꼭 해내리라 믿는다.

라일라, 마지막으로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너와 마리암 같은 사람은 아프간에만 있는 것이 아냐. 이제 그들을 위해서도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해. 다른 나라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니. 그런 의미에서 타리크가 프랑스 NGO의 장애인 의족 보급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너무 고무적인 일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고아 교육 사업도 국제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을거야. 아프리카나 다른 분쟁 지역에도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들이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네가 NGO의 활동가나 UN같은 국제기구의 대표 자격으로 그런 곳에 가서 활동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빠 바비가 라일라에게 바랐던 것이 그런 모습 아니겠니. 분노에 무력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우리 딸이니 이것도 충분히 이루리라 믿는다. 내 딸 라일라, 네 앞길에 이제 좋은 일만 있기를 빌어줄게.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아빠 바비 하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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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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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정말 <장길산>과 <무기의 그늘>을 썼던 황석영 작가 맞는지요? 한동안 의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음결 추슬러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는 이제 한 구비를 온전히 돌아 환한 지경으로 나아온 듯합니다. 잡다한 구실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냄새가 완연하게 배어 있는 세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하긴 <오래된 정원>에서부터 그런 감을 잡기는 했었지만요.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늘상 그래 왔듯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 청년적 기질을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서구에서 장르적 특성이 정립된 것인데 그 외피 안에 우리 고유의 것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실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건 영락없는 한국 소설이구나, 장르적 보편성에 우리의 특수성을 완전하게 버무렸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한편 그것은 제3세계의 보편적 특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견하면 남미 문학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한데 실은 우리 전통 무가의 그것을 빌어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기에 한국 상황에 토착화시킨 우리만의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무속적 서사가 치밀하게 교직되어 있어서 친근하게 잘 읽힙니다. 특히 여러 나라를 무대로 펼쳐지는 빠른 스토리 라인은 시선을 떼지 못하게끔 강렬한 흡인력을 지니고도 있고요. 하여 한 마디로 한국 무가의 형식과 서사를 바탕으로 세계사적 상황을 녹여낸 그야말로 대작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황석영은 최근 들어 부쩍 인류 문명이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에둘러 가는 법 없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바리데기>에도 예의 그 투철한 의식이 듬뿍 배어 있습니다. 내게 <바리데기>는 문명의 공존, 혹은 인간의 선의로 읽혀졌습니다. 9.11 이후 제기된 문명 충돌 위기의 전지구적 상황에서 그 의미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약한 우리에게는 인간의 선의를 절감하여 안심하게 하는 한편, 약자를 악의 축으로 매도하고 배제한 이들에게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의 얘기는 언제나 그렇듯 인간 문명의 바람직한 지향에 대한 사려 깊은 지혜와 충언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먼저 황석영은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이 나약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어 가슴 먹먹하게 만듭니다.

“거럼 세상이나 한 사람이나 다 같다. 모자라구 병들구 미욱하구 욕심 많구.
내가 덧붙인다.
가엾지.
우리 바리가 용쿠나! 가엾은 걸 알문 대답을 알게 된다니까디.” (204쪽)

그런 인간이지만 용케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겹 쌓인 인연, 혹은 인간의 선한 의지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청진에서 무산을 거쳐 두만강 건너 마을로 건너갔다가 다시 북한 지역 산불을 목격한 후 귀환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또 연길, 대련을 거쳐 오랜 밀항 생활 끝에 런던에 도착하여 일자리를 얻고 정착하여 결혼하기까지 그야말로 겹겹이 얽힌 배려 덕분에 그 많은 간난을 이기고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인간의 선의를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연쇄가 바로 우리를 인간으로 남아있게 하는 열쇠임을 황석영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우리들 위에 군림하며 악업을 쌓고 있는 이들의 실상에도 황석영의 시선이 가 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원을 인간의 내면으로 환원하고 있어서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281쪽)

하지만 곧 약자를 배제하고 있는 세력들, 오늘날 전지구적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들에게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물으며 문제의 이면, 그 가려진 실상을 조목조목 짚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진실과 정의는 늘 일방적인 논리로 강변되기 일쑤임을 보여 서구 중심의 자문화 중심주의가 위기를 야기한 실제적인 원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나는 새된 어린 계집아이의 목소리로 종알거린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282쪽)

“저만큼에서 떠돌던 배가 가까워진다. 돛에서 선체까지 온통 시커먼 검은 배다. 온몸에 폭약을 매달고 있거나. 이미 폭사한 뼛조각과 살점 들이 하루살이 떼처럼 모여서 가까스로 형체를 이룬 남자들이 타고 있던 배. 딸이나 누이와 며느리에게 형벌을 가한 아버지 오라비 남편 가족들이 함께 타고 있다. 먼저 폭약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남자가 주먹을 쥐어흔들며 묻는다.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내게서 또다시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부르카를 쓴 여인이 헝겊 안에서 희미한 소리로 말한다.
내 죽음의 의미도 말해요.
나는 이 환영의 헛것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가슴이 미어지게 운다.
서양놈들하구 너희네 남자 놈들이 그 헝겊때기 보자기를 같이 씌워놨어. 바깥 놈은 그걸 벗겨야 개화시킨다구 그러구 안엣 놈은 단속해야 자길 지킨다구 그래. 신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이승의 얼굴이 너희들이야.” (283쪽)

그리하여 세상 논리를 주도하고 있는 사회적 강자들과 늘 억눌려 있던 뭇 약자들, 그들의 공존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원한 그것을 황석영은 바리와 압둘이 더불어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 일단이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안은 늘 그렇듯 인간으로의 회귀였던 것입니다. 선의의 인간들이 맺는 인연의 연쇄가 전지구적 차원의 문명 공존을 이루는 작은 출발점이자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압둘 할아버지는 내 손을 가만히 당겨 쥐고는 쓰다듬으며 말했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286쪽)

그리하여 <바리데기>는 신자유주의 일색의 서구 중심적 논리 일변도인 이 시대에 늘 배제와 소외의 대상이 되었던 비서구인, 이슬람 교도, 탈북자, 여성들의 시각에서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과 원인 및 그 대책을 제시한 한 편의 문명 비판서로 읽히기에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그가 던진 메시지가 너무 아릿하게 다가와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편 훈훈하게 덥혀줄 새로운 지향점, 그 모형의 일단을 또한 제시하여 희망에 들뜨게도 합니다. 그리하여 실험적 형식에서 내용의 의미심장함에 이르기까지 과연 황석영이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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