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위녕 엄마에게

위녕 엄마, 이렇게 부르고 나니까 여간 어색한 게 아니네요. 위녕 아빠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은 <즐거운 나의 집>을 읽는 동안 줄곧 내가 바로 위녕 아빠라는,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자라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곤했답니다. 겉으론 도덕군자인 양 그럴듯한 포장을 했지만 좀만 속을 파 내려가면 잇속에, 오로지 제 안위에만 매몰되어 있는 세모돌이가 금방 도드라질 것이 빤했기 때문이었지요. 위녕 아빠, 엄마를 사랑한 건 분명한데 정면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늘 얼이 반쯤 나간 상태였죠. 하여 상투적인 기준에 얽매어 있을 밖에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 고집하며 마음 결 헤아리는 데는 또 젬병이었고요. 그런 아빠의 모습에 터무니없는 권위를 내세우며 내밀한 가슴의 소리에는 애써 눈감아왔던 나의 그것이 겹쳐지며 결국 고스란히 하나가 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게 아닙니까. 먹먹해진 가슴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불편한 감을 떨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위녕 엄마의 심경을 전폭적으로 이해하며 마음결이 순화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건 아마 두 통의 편지를 읽고 난 다음인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위녕 엄마의 속내를 오롯이 보아 버린 게 되었지요. 어찌나 강하게 다가왔던지 정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주변의 사물이 모두 감쪽같이 지워지는 듯 했어요. 그 후론 일사천리로 위녕 엄마 편이 되고 말았지요. 나를 닮은 아빠를 서슴없이 탓하며 말입니다. 처음 것은 감옥에 있던 위녕 아빠에게 보낸 것이었죠. 위녕이 발견하곤 몰래 읽는데 나까지 끼어든 셈이지요. 그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참 막막하게 만들더군요. 꽁지였던 당신이 위녕 아빠 곰탱에게 그렇게 발랄하고 정겨우며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위녕도 알게 된 부분 말입니다.

거기서 보았지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가식 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아이를 말입니다. 위녕 엄마 말마따나 조숙했던 탓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로 머물고 만 가엾은 아이를요. 요즘 듣고 있는 이은미의 리메이크 앨범 투엘브 송스(twelve songs)에 들어 있는 김민기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이 생각나더군요. 노랫말처럼 그 사람, 당신은 바로 아이였소. 빗물 같은, 바람을 닮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위녕 엄마, 그대는 정말 바람 같았어요. 가둘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지요. 그러기에 한 도덕군자의 규격화된 틀 안에 구겨 넣기는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미안하지만 나는 위녕, 둥빈, 제제의 엄마이기 전에 그냥 나다.”고 선포하기도 했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나는 아무개이기 전에 위녕의 아빠이고 위현의 아빠이며 현재 위현 엄마의 남편이기도 하다.”는 사람과 어떻게 즐겁게 발맞춰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도덕과 관습의 굴레, 그 가부장의 권위에 짓눌려 갑갑함을 견디지 못할 수밖에요. 당연히 무책임하고 제멋대로라며 매도되고, 위녕에게까지 그렇게 각인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외로움에 쩔쩔매게 된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녕, 그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랑도 못 느끼고 언제나 부당하게 취급받으며 너무 많이 거부당해 믿지 못할 아이가 되어버렸던 가여운 아이. 외톨박이로 이마에는 ‘나 엄마 없음’이라고 써넣고 가슴엔 나쁜 어린이표 명찰을 달고 있는 것처럼 외로웠던 위녕. 그리하여 늘상 석류처럼 빨간 상처가 벌어진 자리로 통증을 느끼곤 했었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일찍 세상 이치에 눈 떠 버린 아이는 오히려 엄마의 엄마 같은 딸로 자라나게 되었죠. 그런 위녕으로 인해 당신도 거듭나게 되었고요. 위녕 아빠도 이제 다 자란 위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길들여져야 비로소 행복에 의자를 내어 줄 수 있을 건데 그럴 기회를 더는 갖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다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도 엄마는 내 막내 동생 같고 아빠는 여전히 반장 역할만 하는 세모돌이 같고 새엄마는 무서운 에어로빅 강사 같다.”고 위녕이 여겼던 것이겠지요. 그런 위녕이 이제 수화기 너머로 아빠를 느끼고 머릿결에 닿는 엄마의 손길에 울컥해지는 이상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물, 그 청춘의 시간으로 막 진입하고 있지요. 딸도 자신의 길을 가도록 지켜보고 축복하며 스스로의 선택이 잘 된 것이 되도록 노력하게끔 마음으로 묵묵히 후원하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지막 편지는 청춘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그 순간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엄마의 스물과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며 기도를 믿고 앞으로 나가라는 축복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이라는 간곡한 기원이었지요. 똑똑한 딸은 엄마가 준 사랑의 열쇠가 바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 깨닫고 그 열쇠를 가지고 온전히 혼자, 아니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을 느끼며 비로소 성큼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아저씨를 떠올렸죠. 위녕 아빠가 과거이고 위녕이 현재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라면 다니엘은 당신의 미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잘 어울리더군요. 새로운 사랑이 어느새 다가왔네요. 축하할 일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상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마 이렇게 된 것은 위녕 엄마가 세 번의 파경에 아이들 양육까지 도맡아 곤욕을 치른 연후에 겨우 담담해진 것처럼 그도 아픔과 실패를 딛고 고요해진 까닭일겁니다. 다니엘도 실은 고독을 배낭처럼 짊어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잔잔한 인간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너무 샘이 나서 슬몃 끼어들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열등감 같은 게 밀려왔어요. 나는 아직 잔잔해지기 이전의 다니엘, 바로 위녕 아빠의 모습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프게 자각하는 한편 이제는 그런 상처를 딛고 새로운 단계에 오른 두 사람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참 즐거운 가족이 될 것 같아요. 더구나 둥빈이나 제제에게도 아빠의 자리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보다 먼저 위녕 엄마에게 또 다니엘 아저씨에게 꼭 필요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다니엘 아저씨가 당신에게 사람이 사는 데 유머라는 것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잖아요. 머리와 마음과 삶 전부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의미의 여유 같은 것이라고 당신이 느낀 그것을 맘껏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위녕 엄마도 이제 남편이란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지, 기댈 자리가 있다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그리하여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느끼며 즐거움에 겨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랑이란 꼭 아픈 것만은 아니란 걸 체감할 때도 되었고요. 더불어 다니엘 아저씨의 방황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니까요. 조금 주저되기도 하죠. 용기를 내세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가족, 그 가족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란 걸 그동안 절감했잖아요.

가족이란 모두가 사람 냄새가 나고, 언제든 나를 지켜봐주고 있구나 하고 느끼며 사랑의 온기에 겨워하는, 그리하여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순간순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사람 냄새나고 사랑이 감도는 곳,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지요. 지금이 위녕 엄마가 용기를 낼 때입니다. 그간의 아픔에 더는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세요. 위녕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즐거운 미래가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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