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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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되면 의미 있게 다가온 부분에 밑줄을 그어 각별한 마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자연스런 독서법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대개 다이제스트로 묶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잠언들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D에게 보낸 편지>를 연거푸 두 번이나 읽으며 나를 뜨겁게 불러일으킨 지점을 표시해 나가다 어느 순간 약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인 차원의 밋밋한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에서 말입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 나는 여자와 두 시간만 같이 있어도 지루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도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결국 눈치 채고 말더군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에 난 사로잡혔습니다.(13쪽)


당신에게 영어로 말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14쪽)


당신은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나 없이 살 때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가 있었고, 대인관계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했고 또 남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속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지요.(31쪽)


“아 저렇게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다니!”점심 먹으면서 당신은 나에게 물었지요. “당신 사흘째 나에게 한마디도 안 한 것 알아요?”(40쪽)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키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86쪽)


내가 이런 데 필이 꽂히다니 왜일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답이 나왔습니다.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나의 내면을 흡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B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음결을 몰고 가는 묘한 기운이 절로 감정 이입이 되게끔 이끌었기에 그 울림이 남다르게 다가올 밖에요.


<D에게 보낸 편지>는 자신을 위해 전 생애를 오롯이 바친 여인에게 뒤늦게서야 비로소 고백하는 참회의 기록이었습니다. 도린, 고르를 위해 모든 걸 걸었고 쏟아 부었던 여인.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말입니다. 그리고 고결하고 빼어난 가슴과 머리의 소유자이기도 했고요. 하여 고르가 화려한 묘사로 요란을 떤 것이 아닌데도 누구나 금방 도린이 내뿜는 자장 안으로 빨려들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르는 늘 부채 의식에 시달려 온 듯합니다. 자신의 책 제목이기도 한 <배반자>가 바로 자기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적어도 도린에게는 말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살펴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힘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인격적 성숙이 결합된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자만이 참회록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D에게 보낸 편지>는 도린에 대한 고르의 깊은 성찰이 담긴 뼈저린 참회록입니다. 도린이 없었다면 그의 학술적 명망뿐 아니라 인간적 존재 자체도 어쩜 불가능했을 고르가 첫 저작 <배반자>에서부터 도린을 ‘동정심을 자아낼 정도로 불쌍하고 나약하며 의존적인’인물 케이로 그린 이후 50여년의 저작 생활 가운데 그의 존재의 기반이자 이유이기도 했던 그녀를 철저히 무시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빚의 무게는 그를 늘 짓눌렀지요. 고르의 저작들은 실은 도린과의 공동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린이 고르 곁에서 대화하고 고쳐주며 격려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는 도린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한 번도 명시적으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린, 그녀는 내면 깊숙이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었지만 늘 활달하고 경쾌하며 스스로를 개발했고 남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어느새 환해지곤 했지요. 그 남다른 매력이라니. 고르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또한 지적으로도 빼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죠. 오히려 학술 논문을 집필한 고르보다 사태의 본질, 그 핵심을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쓸 때나 신문사에서 일할 때 도린은 고르의 충실한 조력자, 아니 인도자가 되어 고르가 명망을 쌓아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도린을 도외시하고 어쩜 하찮은 여자로 그린 연후에 이를 시정하지 않고 있었으니 얼마나 미안하고 맘에 걸렸겠습니까. 그러나 미처 진지한 사과를 하기도 전에 도린은 불치의 병, 거미막염에 걸려 서서히 죽음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없이 치료에 매달릴 밖에요. 그 일보다 더 우선인건 없었을 것이니까요. 겨우 체념하고 받아들여 그 질병과 더불어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연후에도 고르는 늘 불안했습니다. 도린이 맞을 죽음도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후에 자신만 홀로 남아 견뎌야 할 고통과 외로움을 떠올릴 때 도무지 감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참회의 말을 곡진하게 전하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말을 비로소 털어놓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결국은 행복하고 자율적인 선택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죽음의 방식까지 스스로 결정하는 단안을 내리게 된 것이지요.


둘은 삶에서도 함께 했지만 죽음까지도 연대했습니다. 죽음조차 그들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나의 D(B)에게도 더 늦기 전에 참회의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아직 함께 할 날, 그것도 온전히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일 때 그간의 고마움과 섭섭했던 감정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환했던 일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편지를 한 통 쓰려 합니다. 나의 B에게로 시작되는 글. 우리의 첫 만남의 추억부터 회상해 보겠습니다.  아니 나를 있게 한 어린 시절과 그녀를 있게 했던 아스라한 시절의 얘기, 내가 들었던 것 있죠. 그것부터 꺼내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죽음보다 더 심장하고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던 우리 사랑에 대해서까지 말입니다. 이런 곡진한 고백이 마음의 응어리를 얼마나 녹일 수 있을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고 있던 부채의식의 상당 부분은 변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늦었지만 앞으로의 삶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선을 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해 준 <D에게 보낸 편지>를 슬몃 내밀며 웃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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