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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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세계의 끝 여자친구. 87쪽) 

1. 끝이라니, 거기가 도대체 어디 

세계라는 게 만약 끝이 있다면, 그 경계선 안쪽에 머물러 있건, 끝을 지나 세계 바깥쪽까지 일탈했건 어느 경우나 슬픈 일일 것이다. 경계선 내에 있는 자는 자기에게 부여된 좁디좁은 세계를 탓하며 그런 세계관을 강요한 측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할 것이며, 끝을 지나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던 세계를 벗어났다면 일탈을 방임한 측의 무책임을 탓하며 때론 세계 안의 안락함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 과정이나 정서적 반응은 세계의 끝에 이르거나 더 나아가 한계를 넘기까지 해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끝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이고, 끝까지 치달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며 안과 밖 두 세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끝을 본 사람은 삼나무 우듬지에 오른 까마귀처럼 이제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끝이라니, 도대체 어떤 지점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회의 분위기나 개인적 역량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얼마나 관대하게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지, 혹은 감성의 울림에 공감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심성의 두께와 경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오차의 범위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끝이란 바로 그 사회의 규범이 허용하는 한계를 구획하는 선, 넘는 순간 가해질 지탄을 개인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분량의 최대치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너무나 편협한 세계관을 강요하고 있다. 약간의 변주와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영혼들의 서식처로는 지극히 부적합한 환경일밖에. 세계가 이런 지경인데 감성까지 작은 떨림에도 울림이 깊게 스며든다면 그의 아픔은 극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또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천부적으로 이끌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은 온 생애를 건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여 그들은 누구보다 쉽게 세계의 끝에 이르고 때론 그 선을 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이혼으로 또는 연인과의 사랑을 일거에 접어버리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그들에게 세계의 끝은 상심을 넘어 절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믿었던 것들이 하나 남김없이 무너지는 그 순간, 세계의 끝이라는 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니까. 

하여 끝이란 게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끝에 직면했다는 건 생의 근원을 뒤흔드는 뼈저린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약 세계의 끝이 없다면, 생의 어떤 임계치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한번이라도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삶이 이리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겠는가. 너무 아픈 사랑이었다 해도 그게 사랑이 분명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면, 끝 모르고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사랑의 실체가 온전히 도드라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진정한 사랑은 갈 데 까지 나아가 끝에 이르러야만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온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고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오게끔 가리키는 이정표인 셈이다.

2.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끝에 이르는 과정에서 치르는 아픔은 겪지 아니한 자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고통스런 일이다. 하여 이건 도무지 사랑이 아니야 하며, 아예 사랑의 근원을 부정하기도 한다. 

체르니 40번을 친다는 건 고통 없이 플랫과 샵이 네 개 이상 달린 악보를 읽는다는 뜻이거든.
고통이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건 힘들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힘든 건 마음이 힘든 거고, 고통은 몸이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고통이겠지. 그치? 손가락이 아파서 건반을 두드릴 수가 없었으니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6쪽)

피아노 연주의 고통을 통하여 삶의 힘겨움을 말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처연하여 가슴이 저려온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는 이런 아픈 얘기들로 빼곡하다. 사랑하는 연인 케이케이를 잃고 그와 인연이 있는 모든 것에 탐닉하거나, 헤어진 연인과 이름이 같은 할머니에게 끌려 그의 사랑하는 제자 대역을 해 주는 남자,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택시운전수가 된 연인을 잊지 못하여 위성처럼 그 주위를 배회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이거나, 곁에 있어도 정서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되어 버린 부부, 문화혁명 기간 중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에 대한 얘기만을 평생 다른 버전으로 만들고 있는 노인의 사랑 얘기 같이 너무 절절하고 아픈 사랑만 그리고 있어 세계의 끝이 어떤 건지 다양한 변주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 곡은 때론 비장하고 더러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경계를 오르내리고 있다.

3. 아무리 아파도 사랑은 사랑인 법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 같이 뜨겁게 불살라 결국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미련 없이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것이다. 하여 타버린 불씨만이 남은 지금 그들은 이제 고요해진 상태다. 그리고 추억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에 지폈던 시절이거나 절망에 이르게 했던 이에 대한 것이다. 불꽃처럼 세계의 끝, 사랑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 순간은 비록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사라져버렸지만 지금 돌이키건대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있다. (김광석 노래 <회귀> 중에서)

하여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제발 좀 돌아보라고. 그리고 이제 얘기 한번 해 보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삶이 정리되고 비로소 그 시절 세계의 끝까지 막무가내로 치닫던 자신의 모습이 안개 걷히듯 또렷하게 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모든 삶은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거라며 달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이 끝났다고 여길 정도로 막막한 순간에 처하면 일체의 이성적 판단은 작동 중지되고 악에 북받쳐 분노에 눈이 멀고 만다. 자연 파괴와 자학이 뒤따를 수밖에. 이럴 땐 끝에 이르게 된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물론 마음 엄청 추슬러야 하고 세월도 훌쩍 지나가야 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게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세계의 끝 여자친구. 81쪽) 

그리고 세계의 끝에 이르렀던 과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대화라는 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상황 정리가 이루어져야 소통 가능한 것이므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일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심경의 내밀한 구석까지 얘기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끝났다고 여겼던 일을 얘기하는 가운데 스스로 흐름을 읽게 되고 자연스레 맺혔던 응어리가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 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312쪽)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315쪽)

그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 대한 성찰로 바꿀 수 있고 그 순간 상대방의 처지와 심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며 분노와 원망이 연민과 공감으로 화하게 된다. 용서와 화해도 그 지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홀가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족쇄에서 놓여나게 되었으니까. 

차가운 바다. 차가운 운하, 차가운 웅덩이. 그렇게 차가운 물에 둘러싸인 나는, 또한 따뜻한 그녀 안에 머물던 나는,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그리고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중에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 더 많았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4쪽)

4. 그러니 세상은 아직 살아볼만한 곳이 아닐까.

세계의 끝, 그 절망의 지점에 이른 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아니 돌아온 자만이 끝에 대해 알게 된다. 절망에 휘둘려 삶의 끝에 이른 자는 세계의 끝을 결국 알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돌아온 자는 이제 일상의 가벼운 것들에는 전혀 요동치 않게 된다. 삼나무 우듬지까지 올라가 보았으니 하찮은 것들에 눈길 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여 분노는 수그러들고 이제 오히려 그 시절이 아름답게까지 보이게 된다. 그것을 추동력으로 삼아 이제 현실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198쪽)

하여 김연수는 경계선의 작가라 하겠다. 세계의 끝 그 언저리에서 서성대는 우리에게 결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말았다. 바람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경계였음이 드러난다는 걸 명료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끝을 넘지 말라고, 넘었거든 속히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니 짐짓 들리지 않는 척 백수광부마냥 그예 넘고 말곤 한다. 하니 지금 막 선을 넘으려는 자에게 김연수는 하나의 구원이 될 것이다. 아픔을 딛고 응어리를 풀고 세상 한가운데로 돌아온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절망의 지점, 세계의 끝에 이르러 지상의 고통을 맛보았던 자는 이제 돌아와 다시 세계의 한 가운데 설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세계의 끝, 절정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하니 세상 모든 일들이 여유로워지고 이제 그 절망의 순간들에 대해서도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차득 차 있었다고 아름답게 추억하며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절망의 지점이지만 또한 희망과 구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김연수는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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