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런던의 생애와 한계

 

   

잭 런던 (1876~1916)은 20세기 초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파란만장한 삶을 몸소 살아낸 행동주의 지식인이다. 동시대 대중 상업 문학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미국 작가 중 최초로 글을 서서 거부가 된 인물 중 한 명이지만, 그 사상적·삶의 궤적은 지극히 거칠고 급진적이었다.

 

잭 런던은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노동을 겪었다. 노동 이력으로는 신문 배달원, 통조림 공장 노동자, 불법 굴 밀수꾼 (해적), 해안 경비대, 물개잡이 선원, 황금광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참전) 무임승차 방랑자 (부랑아) 등 거친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이 시기 직접 겪은 육체 노동과 극한 자연에서의 생존, 그리고 밑바닥 사람들과의 만남은 훗날 현장 취재형 작가로 성장하여 그의 작품들에 사실적인 생동감을 부여하는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정의하며 정치적 신념을 글과 행동으로 적극 표출했다. 무임승차 방랑자로 미국 대륙을 유랑하다 무단전착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후, 노동자 계급이 처한 구조적 착취를 뼈저리게 겪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칼 맑스, 『자본』과 사적 유물론도 이때 접하여 깊이 탐독했다. 그는 미국 사회당 활동 이력이 있으며, 미국 사회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장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으며,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강연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런던의 슬럼가인 이스트엔드에서는 직접 누더기를 걸치고 빈민들과 함께 생활한 뒤, 자본주의의 참상을 고발한 르포르타주인 『심연의 사람들, (1903)』을 집필했다.

 

그러나 잭 런던은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 시대의 복잡한 이념과 충돌했던 입체적인 인물이다.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해방을 외치는 동시에, 자연의 가혹함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 (자연주의·생물학적 결정론)을 깊이 다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지했음에도,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백인 우월주의 및 사회적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백인 영웅주의나 인종적 편향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잭 런던의 대표작 및 문학적 유산으로는 『야성이 부르는 소리, (1903)』 & 『하얀 어금니, (1906)』는 알래스카 자연 속 문명과 야성의 충돌을 다룬 소설이다. 『강철 군화 (1908)』는 자본 독재 체제의 등장과 계급 투쟁을 다룬 정치 소설이다. 『마틴 이든, (1909)』은 노동자 출신 작가의 성공과 환멸을 그린 자전적 성격의 명작으로 잭 런던은 40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50권이 넘는 책을 남기며, 펜을 무기 삼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인간 생존의 본질을 밀도 있게 탐구했던 ‘행동하는 작가’였다.

 


『강철 군화』 소개



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강철 군화』는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정치적 관점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편집자 주석이 달린 회고록’이라는 특수한 형식의 구성을 취한다. 본 줄거리는 혁명가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아내 아비스 에버하드가 20세기 초 자본가 계급의 독재와 민중의 저항 과정을 기록한 수고 형태다. 편집자 주석은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된 약 700년 후의 시대이며, 역사학자 ‘앤서니 메러디스’가 아비스의 수고에 주석을 달아 출판하는 형식을 띤다. 이러한 구성은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말과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역사적 기정사실로 전제하는 효과를 낸다.

 

‘강철 군화’는 독점 자본가 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 언론, 사법부,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구축한 극단적인 자본주의 독재 체제 (초기 파시즘의 형태)를 표상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는 계급 투쟁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총가치에 비해 지급받는 임금이 적기 때문에 국내 소비 시장에는 항상 상쇄되지 않는 ‘잉여 생산물’이 남게 되며, 자본가 체제는 이를 해외 시장 개척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과 자체 붕괴로 치닫는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소설 속 자본가 계급은 노조 간부나 숙련 노동자 일부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며,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을 포섭하여 체제를 유지한다.

 

혁명을 일으키려던 민중의 시도는 강철 군화의 철저한 공작과 잔혹한 군사력 진압으로 실패하고, 시카고는 무참한 유혈의 장이 된다. 소설은 단기적 패배와 비극에도, 수세기에 걸친 지하 투쟁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장기성을 그려낸다.

 

『강철 군화』는 단순한 정치 선전물에서, 20세기 역사적 사건들을 정확히 예견한 성격을 지닌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도 앞선 것으로,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파시즘적 폭력을 행사할 것임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혁명이 한 번의 폭발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반동과 시련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이행한다는 역사적 변증법을 서사로 구현했다.



에버하드의 논쟁


 

이 저작은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과 계급 권력의 본질을 거침없이 파헤치며, 계급 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가들의 뜨거운 투쟁을 다룬 선명하고 강렬한 작품이다. 잭 런던의 『강철 군화』에서 주인공 어네스트 에버하드가 자본가, 성직자, 철학자 등 기존 기득권층 및 관념론적 지식인들과 벌이는 논쟁은 이 소설의 정수이자 서사의 핵심 동력이다. 에버하드의 논쟁은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경제학 및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밀한 이론적 투쟁이다. 주요 논쟁의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사회적 진화론을 결합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사상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로, 맑스주의의 잉여 가치설 및 유물사관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계급 투쟁의 불가피성, 노동 가치설에 기반한 부의 착취 기제를 핵심 분석 도구로 사용한다.

 

둘째로, 스펜서 및 다윈주의적 사회적 진화론의 재해석으로, 잭 런던 특유의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초기의 자유 경쟁 단계에서 독점 단계로 진화했듯, 독점 자본주의 역시 거대한 사회적 결합 형태인 사회주의로 진화해야 한다는 사상적 당위성을 포섭한다.

 

소설 내에서 에버하드가 벌이는 논쟁은 상대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 지식인 및 성직자 집단과의 논쟁 (관념론과 도덕주의 비판)

 

‘철학 모임’ (‘Philomath Club’) 등에 모인 자유주의 지식인, 목사, 대학 교수들은 사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되며, 종교적 사랑, 자선, 도덕적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는 파쇄 논리에 따라 지식인들이 말하는 ‘도덕’과 ‘이성’은 자본가 계급이 제공하는 봉급과 자선기금에 의존하는 ‘하수인적 관념론’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대학, 언론, 교회는 자본의 지배를 받는 기구이며, 사상과 도덕 역시 경제적 하부 구조 (생산관계)로 결정된다는 사적 유물론을 제시한다. 이어 에버하드는 관념적 도덕론은 자본주의의 잔혹한 구조적 착취를 은폐하는 연막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 자본가 및 산악회 (자본가 모임)와의 논쟁 (경제적 모순 증명)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 중 하나로, 에버하드는 자본가들의 수학적·경제적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역공한다. 상대는 대자본가, 사업가, 금융가 집단으로 ‘상쇄 불능의 잉여 생산물’이라는 모순을 지적하며, 노동자가 100달러 상당의 제품을 생산하고 50달러의 임금을 받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생산과 임금의 불일치, 자본가는 잉여 가치 (50달러)를 전부 소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며,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임금 (50달러)만큼만 구매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시장에서는 생산된 총상품을 결코 전령 소비할 수 없다는 국내 소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어 남아도는 잉여 생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은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며 해외 시장 개척과 한계를 보인다. 곧 전 세계가 자본주의화되어 더 이상 잉여 생산물을 수출할 해외 시장이 남지 않게 될 때, 자본주의는 거대한 공황과 함께 구조적 총파국에 직면한다. 이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종말로, 자본주의의 파멸은 자본가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지닌 소비 부족과 잉여 생산물의 수학적 모순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 소자본가 (소시민 또는 프티 부르주아) 및 조합주의 노동 운동 비판

 

상대는 자본의 독점화로 몰락해가는 중소 기업가들과 개량주의 노동조합 간부들로 소자본가의 주장은 거대 트러스트 (독점 자본)를 법으로 해체하고 과거의 자유 경쟁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의 파쇄 논리는 독점과 트러스트는 기계화 및 생산력 발전이 가져온 기술적·역사적 발전의 결과다. 경제적인 대규모 생산 체제를 포기하고 과거의 비효율적인 소규모 경쟁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적 퇴행이라는 점을 밝히며, 문제의 본질은 ‘트러스트의 존재’가 아니라 ‘트러스트를 누가 소유하는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점 자본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무산자 계급이 이를 몰수하여 사회 전체의 점유로 전환 (사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가들이 에버하드의 이성적·수학적 논증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할 때, 그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자본가 대표인 위키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당신들의 논리가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우리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당신들을 짓밟을 것이다.”

 

에버하드는 이 답변으로 자본가 계급이 이성과 법치, 민주주의의 탈을 벗고 ‘강철 군화 (지배 계급의 폭력적 독재 체제’를 착용할 것임을 확인한다. 이 논쟁 과정은 평화적인 설득이나 선거에 따른 정권 교체의 한계를 폭로하며, 계급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지배 체제에 맞서는 피할 수 없는 혁명적 투쟁과 계급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맑스주의적 결론을 강렬하게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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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수단의 사유화’라는 착각


최근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글 「일론 머스크: 어떤 사회구조가 조만장자를 만들어내는가」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백만장자 정도면 자본가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했으나, 자본가들의 경제적 부가 극단적으로 축적되면서 이제는 ‘조만장자’ 혹은 ‘경만장자’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투쟁이 현실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 발전에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낙후된 한국 경제의 조건은 미국의 대자본가들처럼 고도화된 생산 수단을 확보할 만한 여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듯하다.

 

오늘날 사유 재산의 통제력이 기술적 진보와 결합하여 획기적인 수준으로 진화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부르주아 사상 전반을 이루는 그들의 국가 통제 전략과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론 머스크는 조만장자가 맞지만, 동시에 명확한 내적 한계를 지닌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유 재산의 유무가 오직 자본의 액수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고도화된 생산 수단이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독점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서평가들은 이러한 자본의 내재적 확장이 영구불멸할 것이라 판단하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자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착각의 기제일 뿐이다. 정치와 언론의 선동마저 자동화되어 기사 작성조차 불필요해진 오늘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번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분석은 《노동자 연대》의 문제 제기보다 냉철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사유 재산과 자본 축적의 관계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여전히 방관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세계 자본주의화 경향 속에서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 팽창할 때, 그들이 필연적으로 몰락해 가는 시대를 임시방편으로 ‘수정’하려 하는지, 아니면 당의 혼란을 수습하고 ‘공동의 질서’를 구축하는 데 오히려 기여하고 있는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라는 사회 구조가 오늘날의 조만장자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동인이라는 점은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핵심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향의 심화가 한국 사회에서도 ‘사유 재산의 정당화’로 귀결되고 있음을 꾸준히 알리는 일이다. 이에 맞설 수 있는 주체적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가, 당 건설을 위한 건설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오직 계급적 단결과 조직적인 당 건설 투쟁으로만 도출될 수 있다.  



“그들은 가혹한 재앙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지 못하고 있노라, 파멸은 이미 그들 머리 위에 내려앉았으니, 이 오만한 자들의 잔치는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다.”


호메로스,『오디세이아』 (할리테르세스의 경고) 



이처럼, 백만장자든 경만장자든,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재적 모순이 초래한 해악이 매달 나가는 고정 비용의 형태로 재산 없는 노동 계급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현실, 그 자체가 바로 체제 보수성이 가진 가장 큰 해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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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관계’와 제도의 진실

 

주위에서 이혼이나 파혼을 겪으며 불행해진 이들을 자주 목격한다. 결혼 생활이란 사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이나 예술 작품처럼 언제나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반대로, 가정의 화합을 강조하거나,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담론 뒤에는 여전히 일종의 검열과 억압이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때로 자신에게 불행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특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조차 어른이 되어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때, 정작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는 비단 특정 성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파혼을 ‘자유’로 여겨 이혼을 방조하는 태도가 한 가정의 처참한 몰락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가부장제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이라는 제도의 구조적 결함 때문일까. 반려 동물과 반려자의 차이가 단지 ‘반응의 여부’에 불과하다고 여길 만큼 관계가 메마른 사회에서, 자녀의 본연한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자본’이라는 제도적 질서에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게 된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과정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이 흔들리는 부실한 관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 가장 어렵다. 늘 '좋은 관계'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가장 큰 함정은 여기에 있다. 좋은 관계에 대한 강박에 갇혀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높은 도덕심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에 대해 “그럼에도 선(善)은 좋은 것”이라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들의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터무니없거나 불우한 가정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관계의 선악은 ‘가정의 자유’가 정치·법과 같은 상부 구조에 가로막힐 때 결정되며, 우리는 이 억압된 제도적 질서를 수용하며 스스로 ‘정상적’이라 믿는다. 부실한 가정 교육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자본 체제 속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야 하는 모순, 이 모순이 바로 현대 결혼 제도의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혼주의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된 가정을 꿈꾸는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심리적 착각이 아닌 사회 구조를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당신의 행복은 우리의 기쁨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불행은 우리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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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본주의 체제는 소비보다 불필요한 상품의 세계가 범람한다. 동지들이 성년으로 자라나는 동안, 이 체제 내의 억압은 탄생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강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38선을 목전에 두고도 상봉조차 가로막는 자본주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역사의 교훈이 국가의 유산을 지탱하는 후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는 오히려 사회주의 투쟁 과정에서 삭제되어 온 사회적 인물들의 노고야말로 진정한 민족 해방이자, 부르주아 국가 질서에 대한 전복적 노력성이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저들은 군대를 주무르는 막강한 자본과 생사여탈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위력으로, 사회 최하층에 있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금 이 순간에도 짓눌러 대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자본주의가 고착화된 이후, 우리 사회 역시 파국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 오랜 기간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자부해 온 국가는 이제 시대 교체조차 도모하기 힘들 만큼 노쇠해졌다.

 

흔히 어떤 시대든 그 뒤에는 ‘희망의 불꽃’이 오리라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그 희망조차 지배 질서에 의해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지배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흔히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쉽게 ‘숭고하다’ 말하지만, 그 사회적 비용을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불균등하게 전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자본 소비에 몰두해 있는 상태라면 이러한 구조를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작동시키고 있는지 구조적 관점에서 먼저 살피는 일이다. 국가의 정책이 민중의 삶을 포장하여 지배 도구로 악용하는지, 혹은 민중을 사회적 폐기물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를 냉철히 분석해야 한다.

 

이 모든 투쟁의 기초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교육관에서 시작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르게 학습하고, 이를 조직적 실천과 투쟁 과정에 적용하는 일, 그리고 기존 국가 질서가 언제든 부르주아지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핵심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언론 매체의 선동이나 익명이 유포하는 불합리한 가설, 터무니없는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비판적 의식과 계급적 자각을 갖추게 된다.

 

이 파국의 절정을 돌파하는 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적 투쟁이 비로소 역사의 주체로 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틀 자체를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삶과 사회의 주인은 노동자 민중 자신이지, 체제의 산물에 불과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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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강철 솟구치는 용광로의 그릇에

석유의 인부들의 피와 땀이 맺힌다.

탄광의 이름을 대신한 그 살신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붉은 기치를 세운다.

자신을 불살라 일으킨 혁명의 불길은 차가운 냉동마저 얼려버린 심장을 녹여낸다.

화염 속에서 사그라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잿더미, 우리는 이토록 뜨겁다.

 

우리의 심장과 손은 언제나 도구의 굴종에 매여 있었다.

이제 스스로 억압의 사슬을 끊어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시간마저 우리를 단련할 뿐.

 

방관하는 부르주아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긴 채

높은 곳만 쳐다보는 부르주아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언제나 헛되이 흐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받치는 노동의 숨결을.

언제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묵묵히 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부르주아지의 시체를 묻을 준비를 마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시간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프롤레타리아트인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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