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가면과 계급의 저울: 부르주아 법 체계와 국가의 본질

 

현사회에서 법판결의 결과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현상 그 자체가 부르주아적 법 체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사법 체계는 단순히 국내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지배 계급과 정치가들이 자본의 기구를 옹호하기 위해 마련한 질서의 방편으로 작동한다. 그것이 단순히 시민 사회의 제도여서가 아니라, 그 제도적 한계의 본질이 ‘부르주아적’임을 증명하는 공표인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법 체계 전반이 자본주의적 정치 질서의 원천이 되었음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혁명적 투쟁의 경우에도, 그 성격이 단순한 시가지의 거리 시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민 간의 동의에 따른 심층적인 조직적·사회적 투쟁으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 법철학이 마주한 근본적인 한계는 자본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현대 법 체계(민법, 헌법, 상법 등)가 여전히 소유재산을 옹호하는 ‘부르주아적 특징’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형식적 권리상의 동등함 뒤에는 ‘실질적 계급적 격차’의 은폐가 숨겨져 있다. 현대 헌법과 민법은 “만인은 법 앞에 동등하다”며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법적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지만, 이는 부르주아적 본질에서 하나의 함정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로 가진 자산과 경제적 조건이 전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형식적 법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실질적인 구조적 종속을 고착화한다. 재벌 대기업과 일용직 노동자가 동일한 법적 기준으로 계약을 맺거나 소송을 벌일 때조차, 법은 형식상 ‘공정성’을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금력과 법률적 대응력이 압도적인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각 역사적 시기마다 소유는 각각 다르게 발전해왔고 일련의 전적으로 다른 사회적 관계하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소유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적 생산의 모든 사회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유를 독립된 관계, 고립된 범주, 영속적인 관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단지 형이상학이나 법률학의 환상일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 〈토지 소유 또는 지대〉

 

이처럼 소유 재산을 둘러싼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는 노동자가 예속화된 생산관계를 스스로의 역량으로 타파하는 것을 제한하며, 오히려 법률적 형식이라는 허구적 틀에 종속시킨다.

 

“형법의 조문은 기껏해야 근대 공업과 경쟁이 국민의회와 제국시대에는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 〈파업과 노동자 조합〉

 

사유재산권 (특히 생산 수단)의 절대적 보호는 현대 법 체계가 지닌 가장 큰 모순이다. 민법과 헌법은 사유재산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자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규정하여, 타인의 노동으로 창출된 잉여가치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생산 수단(공장, 토지, 자본 등)의 사유화’를 정당화하고 철저히 보호한다. 반면, 아무런 생산수단도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노동력만을 팔아야 하는 대다수 무산 대중의 생존권과 주거권 등은 낙후된 사유재산권의 장벽 앞에서 빈번이 제약당한다.

 

‘계약의 자유’가 가진 함정 역시 이러한 노동의 상품화와 착취를 합법화하는 데 있다. 국가가 개인 간의 거래나 고용 계약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법의 대원칙 속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맺는 근로계약은 겉보기에는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 합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무산자의 구조적 궁핍함을 이용한 ‘강제된 계약’에 불과하다. 현대 법은 이러한 지배와 종속의 힘의 관계를 ‘개인 간의 자유로운 합의’로 포장하여 합법적인 착취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현대 법은 사회 구성원을 구체적인 계급이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 고립된 개인, 즉 자유롭고 합리적인 ‘추상적 법적 주체’로 상정한다. 인간을 계급적 조건(노동자, 자본가, 빈곤층 등)에서 떼어내어 단순히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구조적 불균등과 계급 격차를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 문제로 전가해 버린다. 또한 공·사법의 이원화로 경제적 지배를 은폐한다. 헌법·형법 등의 ‘공법’ 영역과 민법 등의 ‘사법’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여, 자본가들이 공장이나 기업 안에서 노동자를 지휘·감독하고 통제하는 경제적 권력 행사를 ‘사적 자치’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규제와 민주적 통제로부터 보호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독점과 지배를 ‘정치와 무관한 사적 영역’으로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에브게니 파슈카니스가 『법의 일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의 본질은 상품 교환”이다. 현대 법 체계 역시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를 전제로 성립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보편적 정의와 인권’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재생산하고 자본의 지배를 안정화하는 가장 정교한 이념적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에 맞서 소비에트 초기에는 노동 현장의 분쟁을 심리하는 ‘공장 재판소’의 개념이 실천적 구상으로 제시되었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직접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공장 재판소는 형식주의에 치우쳐 장기 소송이 만연한 일반 법원과 달리, 노동 현장의 실정과 고용주의 기만 수법(임금 체불, 부당 전근 등)을 정확히 이해하여 노동자에게 훨씬 공정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직접 법을 적용하고 집행 과정에 참여하여 국가 운영과 공공 문제에 독립적으로 주도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공장 재판수가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고양시키고 정부 관료의 독점적 권위를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서류함에 처박아 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결국 공장 재판소와 같은 제도는 노동자에게 절설히 필요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으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 그리고 노동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총체적 정치 투쟁의 일부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지배 계급의 이익과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 문제를 왜곡해 온 부르주아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발전 단계를 되짚어봐야 한다. 레닌의 《국가에 대한 강연》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가 영원히 존재해 온 것은 아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는 관습과 도덕적 권위가 사회를 유지했을 뿐, 타인을 영구적으로 지배하는 강제력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노예 소유 사회에서는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억압하는 기계로, 봉건 사회에서는 영주가 농노를 예속하는 기계로 국가가 진화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역시 봉건제를 무너뜨린 자본가 계급이 ‘자유’와 ‘법 앞의 동등’을 표방하며 세운 국가이나, 그 실상은 사유재산과 임금노동 제도를 유지한 채 다수의 무산 대중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보통 선거와 의회주의를 수단 삼아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처럼 선전하지만, 자본의 힘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이는 허구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지배는 더욱 노골화되며, 국가는 계급 억압의 도구로 작동한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의 보편적 평등이라는 허항된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고, 국가라는 강제력 기구를 장악하여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착취 구조를 완전히 철폐하고 계급이 사라진 사회가 도래할 때, 비로소 인간을 억압할 필요성이 소멸하여 국가라는 기구는 역사 속에서 고철 더미로 폐기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 속에서 공표된 소비에트의 《법원에 관한 제1호 칙령》은 제정러시아 및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사법 체계를 전면 해체하고 최초의 사회주의적 사법 기관을 구축하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제1조, 제3조로 기존 일반 법률 기관(지방법원, 항소법원, 상원 등)과 사법 관료주의 체계(수사관, 검사, 변호사 제도)를 전면 폐지했다. 이어 제2조와 제4조에 따라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판사와 배심원으로 구성된 ‘인민 법원’을 설치하고, 검사와 변호인의 역할을 도덕적으로 청렴한 모든 인민이 수행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또한 기존 법률은 ‘혁명적 양심’ 및 ‘혁명적 권리관’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한시적으로 준수하게 했으며, 소비에트의 법령이나 당의 강령에 위배되는 구법은 철저히 무효화했다. 특히 제8조에 의거해 반혁명 행위, 폭리, 투기, 사보타주 등을 전담 재판할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방어하고자 했다.

 

이 칙령은 부르주아 사법 기구를 단순히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숴버리고, 인민의 사회적 참여와 ‘혁명적 양심’에 기반한 새로운 사법 체계를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현대의 법 체계가 사유재산 제도의 근본적 모순은 배제한 채 오직 돈이 오간 지엽적인 현상만을 문제 삼기에, 이에 맞서는 혁명적 투쟁의 필연성은 조르주 상드의 문구로 요약된다.

 

“전투냐, 죽음이냐; 피로 얼룩진 투쟁이냐 사멸이냐, 이것이야말로 냉혹하게 던져진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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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킨스, 《코뮌(파리, 1871), 2000년 작》은 1871년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자치 정부였던 ‘파리 코뮌’의 탄생과 몰락을 다룬 작품이다. 약 5시간 45분 (345분)에 달하는 긴 상영 시간 동안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에 그치지 않고,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현대 매체 간의 관계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영화는 보불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직후, 피폐해진 프랑스 민중의 삶에서 출발한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임시정부(베르사유)는 파리 인민들로 구성된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압수하려 한다. 그러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여성들과 민중이 이를 저지하고, 군대가 발포를 거부하면서 봉기가 시작된다. 위협을 감지한 임시정부가 베르사유로 도피하자 파리 인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거를 거쳐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을 선포한다.

 

코뮌 정부는 집세 면제, 제빵 노동자의 야간 작업 금지, 무상 및 종교 분리 교육, 여성 권리 향상, 공장 노동자 공동 운영 등 사회 혁명 정책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동시에 전시 상황에서의 행정적 미숙함, 지도부 내 이념적 분열, 여성 참여에 대한 일부 보수적 한계 등 내부적인 균열도 함께 드러낸다.

 

이후 프로이센과의 협력으로 전열을 정비한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로 진격해 들어온다.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피의 일주일’ 동안 코뮌 인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격렬히 저항하지만,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결국 약 3만 명에 달하는 파리 인민과 노동자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면서, 파리 코뮌은 72일간의 역사를 뒤로한 채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특징은 1871년이라는 역사적 현장에 ‘현대 방송 매체’의 존재를 개입시킨 시대착오적 연출이다. 극 중에는 두 개의 방송 취재진이 등장한다.

 

코뮌 TV (민중 방송): 마이크를 들고 바리케이드 위를 직접 누비며 여성, 어린이, 가난한 노동자, 군인들의 목소리와 열망을 대담 형식으로 담아낸다.

 

베르사유 TV (기득권 방송): 정제된 방송실에서 고급 정장을 입은 보도 진행자와 취재원이 코뮌을 폭도와 무정부주의자로 몰아가며 선전 선동과 가짜 뉴스를 보도한다.

 

19세기 역사극에 현대의 촬영 장비와 뉴스 진행자가 등장하는 이 구조는 대중 매체가 역사를 다루고 편견의 틀을 씌우는 방식을 풍자했다.

 

또한 영화는 장시간 연속 촬영 방식을 활용해 카메라로 파리의 골목과 바리케이드 사이를 천천히 훑고 다닌다. 345분이라는 방대한 상영 시간 덕분에 주인공 몇 명에게만 조명이 집중되지 않고, 거리의 아이들, 방직 공장 여성, 정부군 병사 등 모든 출연진에게 고루 발언권이 주어진다. 관객은 6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72일간의 역사를 마치 ‘실시간 생중계’로 목격하는 듯한 깊은 생동감에 빠져든다.

 

무엇보다 서늘한 충격을 주는 대목은 화면 속 열기 외적으로 등장하는 검은 자막이다. 코뮌 인민들이 화면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오른다.

 

“이 증언에 나오는 21세 여성 노동자는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 병사는 진압 후 신원 미상 상태로 대량 매장지에 묻힌다.”

 

민중의 모습과 그들의 비극적 최후를 미리 알리는 자막의 대비는 관객에게 깊은 충격을 선사한다.

 

감독은 전문 배우 대신 약 300명의 비전문 일반인을 기용했다. 이들은 단순한 보조 출연자가 아닌 영화의 공동 창작자였다. 신문 광고, 전단지, 사회 단체 등을 거쳐 모집된 출연진은 실제 선반공, 교사, 우체부, 간호사, 노조 활동가, 알제리·아프리카계 이민자, 실업자, 학생 등 현실에서 약자나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가는 프랑스 인민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베르사유 정부군이나 기득권층 역할을 맡은 사람들 역시 실제 보수적 정치 성향을 가진 일반인이나 언론인들을 모집했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촬영 전 수개월 동안 역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파리 코뮌 학습 토론회에 참여했다. 각자 맡은 인물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연구한 이들은 정해진 대본을 외우는 대신, 감독이 던져주는 특정한 상황 (“빵 값이 올랐다”, “정부군이 진격해 온다”) 속에서 자신이 연구한 인물로서 자발적인 즉흥 연기를 펼쳤다. 영화 촬영장은 제작진이 완벽히 통제하는 연기 공간에 머물지 않고, 출연진들이 실제로 화를 내고 상대의 말을 끊으며 논쟁하는 하나의 ‘정치적 공론장’으로 기능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배우들은 ‘4차원의 벽’을 깨고 1871년의 역할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촬영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진짜 모습 (현대 프랑스의 노동자, 이민자, 학생 등)으로 돌아와 오늘날 사회 문제 (세계화, 대중 매체 독점 및 왜곡, 인종차별, 신자유주의 노동 조건, 교육 문제, 실업난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저는 사실 알제리 출신의 이민자 노동자입니다. 제가 맡은 1871년 노동자의 빈곤은, 2000년대 프랑스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저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대 출연진의 실제 삶이 한 화면에서 교차하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연극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기록극으로 전환된다.

 

이들의 동지애는 촬영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완성도 높은 민중극을 만들어낸 출연자들은 영화 완성 후 대형 매체나 배급사가 영화를 외면하려 하자, 직접 영화 수입/배급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자체 상영회를 열고 언론 매체 비판 운동을 이어갔다.

 

《코뮌》은 단순히 지나간 옛 역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과 현대적 매체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불꽃으로 대중 매체의 독점적 편견의 틀을 고발하며, “150년 전 민중들이 피 흘려 싸웠던 가치들이 과연 지금은 이루어졌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345분 동안 관객을 투쟁의 장벽 한가운데로 불러앉히는 이 혁명적인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민중의 열망은 왜 역사 속에서 지워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스스로 되묻게 만든다.



<《코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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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언어를 다루다 보면 그것이 외래어라는 사실을 종종 인지하게 된다. 상거래에서도 ‘표준 우리말’이라는 기치 뒤에서, 수입산 기계어에 익숙해진 채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용어들을 무자비하게 남용한다. 단순히 문맹을 벗어나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쓰자는 상투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언론의 말을 보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인 ‘은어’에 가깝다. 실제 우리말의 구성 비율을 보면 한자어가 50~60%, 고유어(순우리말)이 20~30%이며, 외래어 및 혼용어는 5%~10% 남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약 77.9%가 외국어와 외래어를 훨씬 더 많이 접한다고 응답한다. 자본의 논리로 도배된 상업·홍보성 문구가 매체를 점령하면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이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검수할수록, 정치인들과 자칭 ‘자유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수사가 얼마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한지 알게 된다. 그들은 막대한 연봉을 누리면서 사회의 실질적 기둥인 노동자를 은연중에 폄하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지지자들과 결탁해 선동을 일삼는다. 정작 자신들의 정당성에는 침묵한 채 오직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실체란 본디 속물적이고 지저분할 뿐이다. 우리가 ‘계급’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울 때조차, 사회는 전문 용어와 외래어로 포장된 뜻 모를 기계어를 주입식으로 반복 학습시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이 외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구호조차 또 다른 구차한 변명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나만 잘 먹고 살면 되지’는 안일한 태도가 모여 사회를 이룰 때, 자유는 끝내 인간을 배신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자본의 언어가 주입한 극소수의 언어에 불과하며, 그것을 방관하는 사회의 일원들 역시 이러한 구차함이 묻어난 글과 말로 저마다의 상아탑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 방관에 대해 단순히 ‘심심함’이라 말하기에는 얼마나 유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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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거대 자본이 국내에 통상과 원조를 요구하는 까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특히 미국과 서구의 제국주의 자본이 주식 발행과 금융 수탈을 매개로 한국 진출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한국의 생산과 무역 구조를 자국 자본의 종속물로 예속시키려는 전략적 의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제국주의 자본의 침투는 국내 핵심 독점 기업의 지분을 장악하여 매년 막대한 잉여 가치를 배당금의 탈을 쓰고 본국으로 수탈할 뿐만 아니라, 국내 노동 민중을 향한 초과 수탈을 한층 극심하게 만든다. 대외 의존이 심화할수록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 대상이 될 여지가 커진다는 마르크스의 『자본』 속 지적은 여전히 확고한 유효성을 지닌다.

 

그러나 토마 피케티의 수식적 자산 불평등 분석이나 마이클 로버츠의 통계적 이윤율 측정, 데이비드 하비의 공간적 수탈론 따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단순한 ‘분배의 불균형’이나 ‘실증적 수치’, 혹은 ‘외형적 강탈’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계급적 생산 관계를 부차화하는 경제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 개량주의적·실증주의적 진단과 달리, 마르크스주의 정론이 지목하는 모순의 본질은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잉여 가치 착취’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자립적인 자생적 생산 기반을 수립하지 못하는 한, 제국주의 자본의 확장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인 ‘가치 증식의 위기’와 ‘노동 대중의 빈곤화’를 가속화할 뿐이며, 그 결과 노동 민중의 삶은 개별화된 생존 경쟁 속에서 철저히 파편화된다.

 

제국주의 자본을 매개로 추진되는 전방위적 경제 원조는 실상 국내 생산품보다 서구 독점 자본에 유리한 기술 규격과 생산 표준을 강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술과 수입에 대한 종속은 단순한 에너지 자원 문제를 넘어, 의식 산업과 매체를 매개로 민중의 의식 구조 전반을 잠식하고 흡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속박 아래서 대외 무역 의존도가 고착될 경우, 그 귀결은 생산력의 정체와 장기적 경제 침체로 나타난다. 이는 증권 시장과 투기 자본에 몰두하는 현대 금융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전 세계적 독점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노동 민중에게 심대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기존 종속 이론이나 현대 수치 중심의 경제학이 빠졌던 국가 간 대립이라는 경제주의적 착시를 깨부수고, ‘자본 대 노동’이라는 계급 투쟁의 본질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 관점에서 ‘제국주의 대자본 기업 철수 요구’는 단순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계급적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구이다. 한국 GM 공장의 기습 폐쇄나 해외 사모펀드의 자본 도피 행태가 증명하듯, 제국주의 자본의 진출은 시혜가 아닌 착취와 수탈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 대자본과 국내 독점 자본의 생산 수단을 상환 없이 무상 몰수하여 사회화하고, 노동자 위원회에 기반한 계획 생산 체제를 수립하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물자 교환(무역)을 실현하는 것만이 인민 경제를 수탈로부터 해방하고 사회주의적 자립 생산을 이뤄내는 유일한 길이 된다.

 

 

참고 자료

 

 

· 피케티, 토마 (Piketty, Thomas), 『21세기 자본』 , 2014.

 

- r > g 공식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 세습 구조 실증 분석으로 자산 불평등의 수치적 심화를 폭로했으나, 그 모순의 본질인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잉여가치 착취’라는 생산관계를 외면하고 단순한 분배 불평등으로 축소하여 개량주의적 조세 개혁에 머무르고 마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 로버츠, 마이클 (Roberts, Michael), 『The Long Depression』, 2016.

 

- 주요 G20 국가 및 세계 자본의 장기 이윤율 하락 수치 통계화로 세계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실증 수치로 증명한 의의가 있으나, 지나치게 실증주의적·통계적 측정에 매몰되어 이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적 계급 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부차화하는 경제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다.

 

 

· 하비, 데이비드 (Harvey, David), 『신제국주의』, 2005.

 

- 현대 자본주의의 ‘강탈적 누적’ 및 공간적 다변화 이론은 제국주의적 자산 약탈의 외형을 포착했으나,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생산 현장에서 발생하는 가치 증식의 위기가 아닌 외형적 강탈 및 공간적 재편으로 국한시켜 자본주의 본연의 계급적 착취 구조를 추상적 도식으로 치부했다는 저술적 한계를 보인다.

 

 

· 한국은행 / 금융감독원, 『2022~2025년 외환지출 및 외국인 주식투자 현황』, 한국은행·금융감독원 공시 자료.

 

- KOSPI 주요 독점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 50%~60% 대 유지 및 매년 수조~10조 원 규모의 해외 배당금 유출 실증 통계로 해외 금융 자본으로의 부 유출을 수치화하고 있으나, 단순한 자본 이동 및 수지 균형 수준에서 통계를 집계할 뿐 이 수치가 노동 민중에게 가해지는 ‘초과 수탈’의 결과물임을 밝히지 못하는 제도권 통계의 한계를 안고 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지부,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보고서: 해외 ‘먹튀’ 자본의 실상과 노동자 생존권 파탄』, 금속노조, 2018.

 

- 2018년 GM 본사의 이윤율 방어를 위한 일방적 군산 공장 폐쇄 및 대량 실직 기록으로 해외 다국적 대자본의 일방적 자본 도피 행태를 기록했으나, 이를 해외 자본의 개별적 도덕적 해이로 바라볼 뿐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부르주아 국가 권력의 결탁 구조 및 생산수단 무상 몰수라는 계급적 과제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인다.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U Commission),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및 기업 지속가능성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이행안』, EU Official Publication, 2023.

 

- 서구 중심의 생태·노동 기술 규격 및 통상 표준 설정으로 표면적으로는 ‘지속적 발전’과 ‘환경 보호’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서구 독점 자본의 기술 독점을 공고히 하고 종속국의 생산 체계를 속박하는 현대 제국주의의 신형 규제 장벽임을 은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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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신의주와 평양 지방은 물론, 국내 서울의 한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외곽 지역들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인위적으로 가공·발전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으로 진행된 급격한 산업화와 그로 인해 파생된 무계획적 개발의 실체는, 결국 부르주아 시민층의 편의만을 위한 소수의 공간으로 독점되었으며 인위적인 가공을 거쳐 확장되었다. 도심의 상·하수도 시설과 지하 수도의 건설 역시 자연스러운 강의 물길을 차단한 댐과 강 유역의 개발에 그치지 않고, 불안정한 초고층 건물과 지하 교통 시설 등을 무모하게 확장한 결과였다. 1960~70년대 청계천, 만초천 등 30여 개 자연 하천의 복개 및 암거화, 그리고 여의도 윤중제 건설을 위해 밤섬을 폭파하고 모래톱을 콘크리트 호안으로 직강화한 역사적 사료들은 공간을 인위적으로 가공하고 수계를 통제한 대표적 실증 사례다. 이는 2000년대 대통령 정부 정권하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도시 계획 건설 통제의 일면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도시개발사업으로 위장된 이러한 ‘도시 제국’의 허점은 현재도 지속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해 가로수 문제, 부지 일대의 고층 아파트 건립, 그리고 지속되는 주택 부족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된다. 인구가 감소함에도 주택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원인은 정치경제학적 문제와 밀접하지만, 동시에 공간적 점유 측면에서 소수의 제국적 독점을 강화하여 부르주아 국가의 통제적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국 주택보급률이 이미 100%를 넘어 103% 내외에 달하는 공급 포화 상태임에도 서울의 자가점유율이 40% 대에 정체되어 있다는 통계 수치는, 주택 문제가 단순한 ‘양적 공급의 부족’이 아니라 자본이 주도하는 ‘점유와 분배의 독점’ 문제임을 입증한다. 신규 공급되는 주택은 실거주 노동자가 아닌 자산가층과 다주택자에게 집중 소유되어 임대 상품화되었으며, 지대와 시세 차익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과거부터 자신들의 식민지성을 강화하기 위해 사적으로 법적 강화를 무단 동원하는 방식으로 부족함을 보충해 왔으며, 서울 중심지를 비롯해 수도 이전 등을 빌미로 도시 제국의 확장을 위한 방편을 구축해 왔음을 증명한다. 국가는 토지 수용권과 용도 변경, 비상법적 제도를 동원하여 자본의 개발 이익을 법적으로 보호한 반면, 실질적으로 거주해 온 세입자의 주거권은 박탈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의 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방 도심의 경우에도 부족한 인구수를 대체한다는 명분 아래 도심 편의시설을 무모하게 확장하거나, 사업성에 치중한 건설 방식으로 기존의 자연경관마저 도시 제국의 일부로 흡수하며 밀어내 버렸다.

 

이 지점에서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는 참고할 만한 저작이지만, 해당 작업이 지닌 경제주의적 오류는 서울이라는 소도시에서 발생한 무모한 도시 확장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하비의 ‘자본 2차 순환론’은 과잉 축적된 자본이 건설 및 부동산으로 이동하며 도시를 재편한다고 보았으나, 이는 영토와 공간적 규모가 비교적 큰 자본의 도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주의 오류는 인민주의적 오류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울과 같은 동아시아 압축 성장 도시에서는 시장 자본의 내재적 동학에 앞서, 국가 공권력 (발전 국가)이 이념적·정치적·군사적 통제 목적으로 강북 제한과 강남 개발 등 공간을 강제 재편한 ‘국가 주도형 통제성’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핵심은 도시 제국의 역사가 자본주의 역사와 발맞추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부르주아 권력성을 보여주는 공권력 통제를 위해서도 도시의 기능은 인민을 통제할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도심의 기틀을 떠받치던 달동네와 쪽방촌 등 하층민의 주거 공간은 ‘도시 정비’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을 시작으로 1980년대 목동·상계동 합동재개발 철거 투쟁, 그리고 2009년 용산 참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토건 자본의 개발 이익과 국가 공권력이 결탁하여 세입자와 원주민을 도시 외곽 및 반지하·고시원 등의 열악한 거처로 폭력적으로 축출해 온 생존권 투쟁의 기록이다.

 

소도시에서 출발한 서울의 모습은 자본주의 경제가 보여주는 화려한 도시의 미관 뒤에 숨겨진 현실 노동자들의 거주지 문제를 비롯해, 도시 제국이 걸어온 실제 역사를 명확히 보여준다. 현대 도시 개발 정책은 미개척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축출하며 수탈을 정당화했던 신제국주의적 관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화려한 초고층 빌딩과 도심의 불빛은 공공의 자연 수계를 차단하고, 소수 부르주아 자산가층의 공간 독점을 강화하며, 노동자 계급을 ‘내부적 유배’ 상태로 내몰며 구축된 ‘도시 제국’의 폭력적 실체를 가리는 장식물에 불과하다.

 

 

참고 자료

 

 

· 서울시정개발연구원 (현 서울연구원), 『서울시 복개하천 생태복원 기본구상』,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3, pp. 24-25. (서울 시내 30여 개 주요 하천의 복개 및 암거화 역사와 도시 하수도화 과정 분석)

 

- 해당 자료는 서울 시내의 복합 단지 건설과 생태 복원에 있어 하수 기반 처리 시설의 조사를 진행했으나, 국가 정부가 임의로 주도한 정책적 결정 방식을 그 한계로 지목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5』, 한울, 2003. (1960~1970년대 한강 개발 계획, 여의도 윤중제 건설 및 밤섬 폭파 등 국가 주도 공간 가공의 사료적 기록)

 

- 이는 서울의 도시 계획의 발전 기록에 주목한 저작이지만, 실상은 경제주의적 한계를 포착하지 못한 실작에 불과하다.

 

 

· 통계청, 『2022~2024년 주택총조사: 인구·가구·주택 기본 집계』,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전국 주택보급률 102.1%~103.5% 대 대비 서울 자가점유율 47.9%~48.3% 대의 구조적 격차 실증 자료)

 

· 한국도시연구소, 『주택 공급 정책과 주거 불평등에 관한 연구』, 한국도시연구소 보고서, 2021, pp. 12-38. (대규모 주택 공급이 서민 주거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주택자·자산가층의 임대 상품으로 독점되는 정치경제학적 기제 분석)

 

· 국토연구원, 『지방도시 도심 재개발 및 도시재생 정책의 한계와 과제』, 국토연구원 연구보고서, 2020, pp. 55-82. (지방 혁신도시 및 원도심 재개발이 인구 유입보다는 토건 자본의 이익과 자연경관 파괴로 귀결된 실증 사례)

 

- 위 사례들은 주택 보유지에 대한 소득 측정 방식의 구조적 격차가 여전히 ‘평균 수치’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한계를 보인다. 방대한 통계청 자료에 비하며 부실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 김진균·조희연 편, 『한국 사회의 계급과 국가』, 한울, 1990. (토지 수용권 및 비상 제도를 동원한 국가의 사적 자본 비호와 법적 통제 기제)

 

- 이러한 분석은 토지 수용권 및 비상 제도를 거론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토지의 사유 재산화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민주적 기틀 하에서 수렴된 정책적 통일론으로 수렴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 하비, 데이비드 (Harvey, David), 『반란의 도시: 도시의 권리를 위하여』 (강현수 역), 자음과모음, 2014. (자본의 2차 순환 및 공간적 다변화 이론)

 

- 『반란의 도시』는 도시 계획의 공간적 점유 문제를 거론한 문제작이지만, 그의 경제주의적 접근 방식은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격차 문제를 온전히 규명하지 못하고 추상적·개념적 도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저술적 한계를 명확하다.

 

 

· 배준식·임동근, 『서울도시계획의 역사』, 동녘, 2015, pp. 102-145. (서구 자본 동학 중심의 하비 이론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한국 발전국가 공권력의 정치·군사적 공간 강제 재편 특수성을 분석한 연구)

 

· 조명래, 『현대도시론: 자본·공간·생태』, 한울아카데미, 2018, pp. 210-245. (신자유주의 도시개발 정책이 지닌 신제국주의적 원주민 축출 관성과 공간적 계급 축출의 최종 형태 비판)

 

-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는 자본의 공간적 점유 방식이 아닌, 다른 이유의 사례를 들어 그 특수성을 거론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점에 있다!

 

 

· 강인철, 『한국의 빈민운동과 도시투쟁사』, 한울아카데미, 2011, pp. 88-160.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1980년대 목동·상계동 합동재개발 철거 투쟁의 역사적 궤적)

 

·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용산참사 진상조사 보고서: 신자유주의 도시개발과 국가폭력』, 한울, 2010. (2009년 용산 4구역 재개발 강제 진압 및 세입자 생존권 박탈의 기록)

 

- 당시의 폭력적인 진압 방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민권과 참사의 관계를 단순히 시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요구되는 지점은 진상규명위원회가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며, 도심 내 지역 위원회조차 전무하다는 수도의 명확한 한계를 짚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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