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9. 30.


혁명 경제학 연구

 

1989년, 현실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1998, IMF 외환공황도 일어났다. 198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변혁운동이 주도됐다. 1990년대는 개인주의였고, ‘후기 현대’였다.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의 쟁점들>

 

이 책은 2001년에 나왔다. 논문집보다, 학부용 교재였다. 김수행은,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이란 과목을 맡았었다.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교재에서는 집필 팀들이 구성됐다. 개인적으로 사정으로 책에 싣지 못한 주제로는, 제3세계이론, 노동운동, 시민운동, 페미니즘, 생태주의, 한국 자본주의 현 단계, 등이다. 평이하고, 심화학습용 문헌하고자 부탁하셨다.

1989년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한 건, 1987년, 6월 시민항쟁에 대한 음덕이다. 서울대에서는 분단 뒤로부터, 제도권 학계에서 줄곧 배제됐던,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 학문적 시민권을 공인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긴장도 있었으며, 혁명적인 이념이었다. 경제학부 교수 사회 내부에서는 학문적 고립감도 느꼈다. 소련,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 붕괴도 부담이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김수행에 대한 업적으로는,

 

1. 마르크스 경제이론을 대중화한, 번역 · 소개 작업이 있다. <자본론> 완역..

 

2. 한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이론적 정교화를 위한 연구다.

 

3. 마르크스 경제학 동향 소개.

 

4. 자본운동 세계화,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5.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 입장들 분석.

 

신정완

 

마르크스 사후 120년 간, 마르크스 경제학 발전은 마르크스, 개인이라는 성취한 업적 무게에 도 중점을 두며, 미치지는 못한다. 소련,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됐으므로,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감당할 짐들도 더욱 무거워졌다. 마르크스 이론 가운데, 계승 · 발전, 수정 · 기각해야 할 부분을 판단하거나, 방향을 보여주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작업들도 시도됐으나, 정작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 영역인 경제이론 영역에서는 계승 · 수정 · 기각 · 재구성 등 논의는 충분하게 심도 있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작업들은 대체로는 고도의 지적 능력, 끈질긴 노력들을 요구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모든 연구자들에게는 공동 과제이다. 1980년대에는 사회구성체 논쟁도 진행했었으며, 후반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사회운동 쪽에서도 관심은 매우 높았다. 


현재는 그렇지도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로 대학, 학부에서도 아카데믹한 논의에만 머물렀으며, 긴급한 사회 현안들에 대한 분석, 처방들을 순발력 있게 내놓지는 못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이론적 발전 · 혁신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메시지를 가지거나,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할지에 대한 문제들도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은 해결해야만 한다. 김수행은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총장이었으며, 노동자 교육에도 힘을 쏟으면서, 열정으로, 헌신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우리 사회 사이에서 생산적 소통양식 개척에도 앞장서주기를 기대된다.


김수행

 

김수행은 생산적인 사업을 하고자 했었다. 우선 경제학 대중화를 위해 책을 쓰고자 했다.

 

대중화의 단계가 아닌, 심화 단계의 필요성.

 

김수행은 대중화에 대한 서적을 쓰고자 노력했으며, 그래서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2001, 6월),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2002, 2월)을 출간했다. 남은 건, <현대 마르크스경제학 쟁점들> 뿐이었다. 김수행은 서울대에서, 전공선택과목으로,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을 7년 동안이나 강의했었다. 좋은 교과서는 없어서 매우 흠딜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문헌들도 부족했으며, 한글로 되지도 않았다. 학생들도 공부하기 어려웠고, 강의 범위를 넓히거나, 속도를 원하는 만큼 높일 수도 없었다. 책 범위는 강의를 상당하게 초과했지만, 내용은 김수행 생각과도 같다. 각 집필자들에게, “내용은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도, 분석방법이나 실천적 대응에는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정성진은 제2인터내셔널, 이론과 실천에 대해 마르크스 원칙에도 근거해서,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안현효는 제주, 탐라대학 소속이기도 했으며, 현재 불화지폐, 신용경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마르크스 화폐이론을 발전하도록 한 여러 가지 시도를 고찰한다. 금융 세계화, 금융, 실물 부분에서 괴리현상을 설명하고자, 새로운 관점이 매우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수행은 독점, 제국주의에 대한 학설로부터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으며, 현재 다국적인 기업들과, 세계화를 독점하거나, 제국주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김윤자는 한신대 소속이기도 했으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실천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왜 그리고, 어떻게 변질됐는가를 밝힌다.

 

- 단지 토지 면적과 인구 수가 크다고 해서, 경제력이 강하지는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5. 27.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무국적자로 망명생활을 했다.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나, 1883년 3월 14일에 영국에서 사망했다. 트리어는 천주교가 깊은 도시로 가난했다. 마르크스는 트리어 지방에서 소수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1835년에 김나지움 졸업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김나지움이라는 수업과 자유롭고, 인본적인 교육은 마르크스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인리히 변호사 수입으로도 부족했으므로 하인리에 지참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었다. 마르크스는 부친과도 친분이 있었던 폰 베스트팔렌 백작을 만났고, 백작 딸이던 예니와 마르크스는 혼인한다. 그러나 뒤로는 트리어로 거의 오지는 않았다. 1835년에 대학 심사에 통과했다. 부모는 법률가를 권했다. 프로이센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등록했고, 대학시절 동안, 예니와 약혼했다. 베를린 학부에서 철학적 논쟁에도 참가했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본과 베를린에서 철학을 배웠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대학에서는 마르크스를 거부했다. 철학을 수료한 뒤로 쾰른 언론사에서 일했다. 쾰른에서 자유신문이던 “라인신문”에서도 마르크스는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843년 쓴 기사들에 대한 발행은 당국에서는 금지됐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불만들도 붙였기 때문이다. 쓴 기사들은 프로이센 당국과도 분쟁했다.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한 적도 있었고, 마르크스와 가족들도 유럽 망명지였던 벨기에 브뤼셀로 옮기면서부터 망명생활은 시작됐다.

 

1848년 혁명기와 『공산당 선언』

 

1848년 혁명기 동안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당국과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감시를 받았다. 국가 감시로부터 마르크스는 결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난민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산당 선언』을 작성했다. 1848년, 유럽에서는 혁명에 대한 격변이 발발했다. 1849년, 마르크스와 가족들은 런던에서 생활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만난 뒤로 생활에 도움을 주고 마르크스와 가족들에게 생계 지원도 해줬다. 당시 난민이던 마르크스와 가족들은 수많은 서유럽 도시들에서 이민을 다니며 생활했다. 철학을 배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게 <기독교와 본질>을 읽었다. 기자로 활동했던 당시에도 마르크스는 시사에서도 폭 넓게 논평했으며, 산업혁명 시기에 인쇄기와 전보는 일반 매체로도 발명했기에, 이를 활용하면서 조직원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공산당 선언』 초판은 1848년 2월에 출간했다. 마르크스는 찰스 다윈의 진화 법칙을 조사했고 사회 구조를 파악할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생활 조건들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자취는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들로 모여진다.”고 언급했다. ‘계급’이란 사회와 경제에서도 나뉘며 한 계급은 다른 계급을 착취한다. 사회, 정치, 경제 영역에서는 주로 가난이라는 원인을 만드는 사유 재산에 대해 고발하고, 무산 계급들은 폭력 혁명을 달성할 때만 비로소 해소할 수 있다. 

 

『자본』 집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등을 집필했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때를 보고 미래를 앞서 봤다. 20세기에는 정치적 행동에서도, 지식인들도 마르크스를 알릴 수 있도록 했지만, 자신들에 목적에 부합해서 마르크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주로 정치적인 표식이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1840년에는 경제를 배웠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세계적으로 사회와 정치라는 구조를 경제 체제로 지배한다. 그리고 첫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에 대한 분석을 서두로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마르크스는 20년 동안 경제 문제를 착수했다. 이윽고 『자본』은 1867년 독일에서 첫판으로 출판했다. 엥겔스는 1885년, 1894년에 나머지 『자본』도 출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로만 경제 발전과 부라는 명분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을 착취한다.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들을 희생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책을 자주 읽으며 기록했고, 발췌했고, 인용했고, 논평했다. 편지들도 썼고, 엥겔스 뿐만 아니라 예니와 딸들도 마르크스를 지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을 미작했다. 엥겔스는 엘레노어와 그의 유종을 지켜봤고 서류를 정리했다. 마르크스는 의자에 앉아서 자주 작업했다. 마르크스는 의자에 앉아 읽거나 자주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훗날 마르크스 후손이던 장 룽게는 마르크스 조각상을 만들었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노동자 단체는 19세기에 최초로 유럽에서 출현했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수공예를 다루던 장인들이나, 기계공들로 주축을 이뤘고, 독일에서도 대중 운동들로도 변모했다. 마르크스는 1899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를 따르는 국제노동자단체도 설립했다.

   

노동 운동

 

마르크스는 여러 노동 운동에도 도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동 운동들도 통일되지는 못하고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평의회를 지지하고 끝까지 정당 규칙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는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의회 민주주의 아래의 한에서 사회주의를 평화롭게 구현하기를 바라는 진영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후반에 마르크스를 분석하고자 만들어진 용어이다. 마르크스도 ‘마르크스주의’를 부르진 않았지만 아직도 유럽에서 많은 노동당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해석에만 따른다. 마르크스 사후로 아직도 마르크스를 ‘교리’로만 여긴다. 여러 학자들도 마르크스가 제기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이나 분석마저 포괄적이고, 불완전하고, 모순들이 많다고 했다. 1949년 이후로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에 동조하는 국가들도 늘어났다.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운동들도 지지했다. 1989-1990년대는 존재하던 세계 질서는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우세했고, 세계화는 촉진됐고, 경제 발전은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도 이뤄졌다. 중국이나 쿠바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에 의존한다. 2007년, 미국에서는 주택 거품도 일어났다. 국제 은행, 금융 체계는 오히려 경제 위기에 빠졌다. 각국 정부들의 비상 구제에도,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도 위험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재 내 사회에서도 『자본』 판매는 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필자가 다루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은 『자본』, 『공산당 선언』 단 두 권뿐이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이 두 권을 깊이 읽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저작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 일부 저작을 다시 검수하였다. 여러 독자가 기존의 번역본에 많은 오류를 지적해 왔기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곧바로 사업을 정리한 상태에서 생계를 위한 구인·구직 활동을 미루고 오직 해당 작업에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본』 및 『공산당 선언』 검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 다만 세부적인 주석이나 서문 등은 생략하였다. 그것은 본문 내용을 읽을 때 직접 참고할 수 있다면 충분하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학술적 용도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저작들이 단순한 이론적 학술용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용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세심한 노고를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장 바란 것도 저작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이것이 계급 투쟁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발적으로 이 작업을 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도서관 방문을 일 삼을 수밖에 없던 피치 못할 사정 역시, 지금의 사회가 과거보다 더 폐쇄적이고 정체되어 있음을 실감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사정이 모여 지금의 결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필자는 다시 구인·구직 전선에 나서는 청년 노동자로 돌아간다. 현장에서 구직에 성공한다면 노동 과정에서 경력도 부족한 필자를 동료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하고, 필자 역시 현장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공개하지는 않는다. 아직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여전히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에서 가끔 웃으며 나누는 수다 뒤에는 가식적인 면이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는 모두가 굴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고 희생하는 이들은 언제나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비하하고 차별하며, 도리어 유산 계급의 이익이 되는 일에 더 몰두해 왔던 것은 아닐까. 필자가 언젠가 현장에서 일하게 된다면 아마도 마지막 세대로 노동 현장에 진입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본의 경쟁은 더치열해지기보다, 그 서막에서 일찍이 충돌하거나 상쇄되며 가라앉고 있다. 무산 계급의 처지에서 앞날을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으므로, 주어진 조건과 한계 속에서 투쟁할 뿐이다.

 

계급 투쟁의 전장은 임금 노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로 인해 발생했던 수많은 폐단과 폐해가 현재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그날’이라 말했곤 했던 그러한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필자 역시 아직은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는 몸이다. 불로 소득을 위한 주식 투자나 저축 등은 사적 소유의 범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임금 노동이 지금도 만들어내는 연쇄 구조가 우리를 사슬처럼 족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지않은 근시일 이내에 볼 수 있다면, 현장에서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다. 매일 이곳을 방문하는 꾸준한 무산 계급 동지들에게 깊은 단결을 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동지와의 약속

 

『공산당 선언』은 단순히 유산 계급의 조예를 위한 문예 작품이 아니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임을 받아 작성한 당 강령 초안이었다. 엥겔스는 이 초안에 주석을 달며 프랑스 사회주의·민주주의와 독일 사회민주당 사이에는 거대한 노선적 차이가 존재함을 명시하였다. 이 강령 초안은 유럽 전역에서 전개되어 전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혁명적 비결이 담겨 있다. 곧, 공산당을 선언한다는 일은 단순히 사회민주당의 연장이 아니라, 무산 계급의 독자적인 정당이 변혁적 주체로 부상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한국의 사회주의·공산주의 문헌 수입 과정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수많은 저작이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유산 계급 중심의 대의제로 기존의 유산 계급적 지배 체제를 공고히 유지해왔다. 『공산당 선언』은 각 국가의 특수성에 강령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안에 대한 계급적 분석에서 시작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계급 격차가 단지 집권 정부의 정치적 기조에 따라서만 유지되는 왔는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유산 계급은 때로는 종교 세력과, 때로는 보수 및 개혁 세력과 연대하고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하는 안전 장치를 설계해왔다. 기술의 발전 역시 그러한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자본 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한 새로운 착취의 통제 방식으로 고안되었다. 결국 노동 계급의 혁명적 역량을 무력화하려는 유산 계급의 시도로 인해, 오늘날의 사회는 노노동의 해방이 실현되는 곳이 아니라 오직 유산 계급의 생존과 자본 경쟁만이 지속되는 전근대적 장으로 전락하였다.

 

계급적 각성은 단순한 선전·선동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 체제의 비호 속에서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는 유산 계급이 생산 수단과 재산을 사적으로 전유하고 자본 축적을 증대시키는 한, 그들은 각종 구조적 수단을 동원하여 노동 계급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갖 직업군의 공상가들과 지식인들이 유산 계급의 아군으로 합류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를 공고히 마련해주고 있다.

 

이러한 계급 모순을 방관할 수만은 없으며, 이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이 오늘날 지니는 실천적 의의이다. 선언이 작성될 당시에는 봉건주의 해체와 유산 계급 혁명이 동시에 분출했으나, 무산 계급 혁명은 자발적인 요구를 조직적 강령으로 담아낼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나 독일의 초기 농민 봉기들이 실패를 거듭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이 역사적 변혁의 주체라는 점은,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들이 소외된 소수가 아니라 그 사회의 대다수라는 자각에도 있다. 지배 계급 한 사람이 군림하기 위해 소모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자본 축적 과정을 상기한다면 그 의미는 명백해진다. 국가 내 자본의 순환 과정을 명확히 파악할 때, 비로소 자본 계급이자 지배 계급인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노동 계급이 겪는 억압은 개별적인 피해에 그치지 않는다. 유산 계급이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 과거 노예제가 유지되던 시절이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던 역사적 전환기에도 그들은 사적 소유를 법적·정치적으로 정당해왔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서 사적 소유의 등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무산 계급의 정치적 요구를 정당의 형태로 결집해낼 때, 그 혁명적 요구는 결코 특정 계급의 집권 체제를 단순히 교체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다. 그것은 무산 계급이 지닌 대다수의 힘을 자각하고 유산 계급 지배 구조 자체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실천이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계급적 논의와 연대를 확산시킬 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제공하였다. 노동 계급이 이 조건과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산 계급의 핵심 기반인 ‘사적 소유의 폐지’를 전면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면, 단순히 소수 원외 정당의 수준이 아니라 착취 노동전반으로부터의 온전한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 전근대적인 착취의 역사라는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 이 역사를 현재로 전환할 수 있는 혁명적 주체는 오직 무산 계급 자신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Ⅳ. 혁명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제Ⅱ장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이미 조직된 노동자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관계는 분명하며, 이는 영국의 차티스트들과 북아메리카의 농업 개혁론자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당면한 목적과 이해관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으로, 현재 전개되는 운동 내에서 그 운동의 전망을 대변한다. 프랑스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보수 및 급진 유산 계급에 대치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동맹하되, 혁명적 유산에서 비롯된 공허한 문구와 이념적 착각을 지적할 수 있는 비판적 권리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급진파’를 지지하되, 이 정당이 프랑스식 ‘민주 사회주의자’들과 급진 유산 계급이라는 상호 모순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혁명을 민족 해방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는 정당, 곧 1846년 크라카우 폭동을 주도한 정치 세력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일부 유산 계급이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과 공동 전선은 구축하되, 절대 군주제, 봉건적 토지 소유, 그리고 소시민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노동자들이 최대한 가장 명확하게 자각하도록 각성하는 작업을 한시도 중단하지 않는다. 이는 유산 계급이 그들의 지배와 함께 도입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을, 노동자들이 향후 유산 계급에 대항할 혁명 무기로 즉시 전환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아가 독일에서 반동적 계급들을 타도한 직후, 곧바로 유산 계급 자체를 겨냥한 투쟁을 지체 없이 개시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은 현재 유산 계급 혁명의 전야에 처해 있으며,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발전한 무산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고도화된 유럽 정세의 전반적 조건 하에서 이러한 변혁이 수행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주목의 대상을 주로 독일에 둔다. 따라서 독일에서 전개될 유산 계급 혁명은 다가올 무산 계급 혁명의 직접적인 서막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사회·정치적 지배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모든 변혁 운동 속에서 공산주의자는 생산력의 발전 단계를 불문하고 소유 문제를 운동의 기본 과제로 전면에 내세운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모든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간의 결속과 동맹을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은폐하는 것을 경멸하며,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하게 하라. 무산 계급이 혁명으로 잃을 것은 사슬뿐이며, 이들이 얻는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무산 계급이여, 단결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