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1. 나로드니크 경제학자 오류 분석

 

 

1-1. 사회적 분업

 

상품 경제 기반은 사회적 분업이다. 원자재 산업에서 떨어져 나온 제조업은 특정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고, 다른 모든 산업 부문에서 교환해서 소규모 및 하위 산업으로 세분화된다. 상품 경제 발전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이전에 자연 경제 사회는 가부장적 농민 가족, 원시 촌락 공동체, 봉건 영지 등 다수의 동질적인 경제 단위였으며, 많은 종류의 원자재를 자체적으로 사용하고자 모든 경제 활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상품 경제가 발전하면서 개별 경제 부문의 수가 증가했으며, 동일한 경제 단위의 수는 감소했다.

 

사회적 노동은 분업으로부터 발전했으며,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상품, 사용가치, 교환가치, 화폐로 구체화된다. 또한 소외로부터 사용가치를 생산물로 전환하고, 상품 시장은 사회적인 분업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에서 분업은 개별적인 생산물을 상품의 등가물로 전환시키며, 시장 역할을 하도록 한다.

 

사회적 분업으로 제조업과 원자재 산업 뿐만 아니라, 제조업과 농업을 분리하는 산업으로 전환하고, 경제 상품을 생산하도록 만든다. 많은 제품 · 제조를 분리해서 더욱 많은 산업 부문을 만들도록 하는 전문화 과정은 농업 지구 · 단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 및 상업적인 농업의 전문화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세계적인 노동 분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적인 분업은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의 전체 과정의 기초이며, 인위적인 조치에 따른 결과이다. 나로드니키와 같은 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상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이라고 널리 알리면서부터 발전했다. 이를테면 이반 스테부트, 『농작물 농업의 원리』와 이반 스크보르초프, 『증기 수송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에서는 농업 체계를 작물 재배, 가축 · 사육, 산업 농업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하며, 이에 따라 주요 생산물은 기술적 가공 과정을 거친 농산물이 된다고 지적한다.

 

 

1-2. 나로드니키의 특징과 산업 인구의 형성

 

 

상품 경제의 발전은 산업의 일정한 부문에서 농업이 순서대로 분리되는 형태이다. 저개발 국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가공하며, 교환과 분업이 거의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 경제의 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인구의 일부는 농업에서 분리된다.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은 농업 인구를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에 견주어 꾸준하게 감소시키며,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산업 인구를 증가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 기관이라는 불변 자본을 증가시킨 노동력이라는 가변 자본을 희생시키고, 가변 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하한다. 반면에, 농업 부문에서는 특정한 토지를 착취하면서, 가변 자본이 절대적으로 감소한다. 새로운 토지가 경작될수록 늘어나지만, 다시 비농업 인구 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업, 산업에 대한 증가는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매우 명백하다.

 

산업 중심지, 수적인 발전에 따른 인구 원인으로는 농촌 체계에도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치며, 자본주의 상업과 농업의 발전을 초래한다. 그러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은 법칙을 모두 무시했으며, 시스몽디주의자와 같은 경제적 낭만주의와 동일한 태도를 가졌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 노동력의 판매자인 임금 노동자가 있다. 소규모 생산자가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토지, 작업 도구, 작업장 등을 잃었다는 건, 빈곤해지거나, 파산했다고 전제를 둘 수 있다. 자본 파산은 인구의 구매력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을 약화시킨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점은 인민주의자들의 낭만적인 편견으로 완전하게 틀렸다. 왜냐하면 생산자 가운데 한 계급이 생산 수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 수단이 수중에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 자본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만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이전에 생산자가 지불했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해서 국내 시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생산을 확대하고,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새로운 도구, 원자재, 운송 수단 등과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제시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생산자의 안부가 아니라 화폐의 소유에 있다는 점이다. 자연 경제에서 가부장적이던 농민의 복지 감소는 화폐량의 증가와 양립한다. 농민이 더욱 파산할수록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며, 생계 수단의 몫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농민의 토지의 일부를 수탈하고 쫓아내면서, 식량 수단과 노동력 구매를 위한 가변 자본이라는 물질적 조건, 노동자의 생계 수단 및 노동 재료는 노동력 구매에 사용되는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며, 국내 시장이 창출된다. 따라서 이전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몰락하면,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주장은 추상적이며, 내용적으로도 공허할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 가치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불변 자본은 이전에 존재하던 원자재 및 보조재, 기계 및 생산 도구 등으로 가치를 대체하고, 특정 부분에서 완제품으로 재생산된다. 둘째로, 가변 자본은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가치로 대체한다. 셋째로,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초과 가치이다. 불변 자본은 생산으로 들어가고, 가변 자본은 노동계급의 구매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본가가 초과 가치를 완전하게 소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외국 시장의 획득에서 초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국내 시장은 농민의 몰락과 해외 시장이 없어 초과 가치를 획득할 수 없어서 위축되고 있다고 내세운다. 인민주의자들은 모두 생산물구현 문제를 초과 가치 실현으로 축고했으며, 불변 자본 구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불변 자본이 반드시 투입되어야만 하며, 생산 수단으로 구성된 생산물을 가진 자본의 경우에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변 자본의 생산물이 소비재인 경우로는 직접 생산에 투입될 수는 없다. 생산 수단과 소비재의 사회적 생산 간 교환이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축적 목적을 소비 문제로 제시한다. 불가코프도 『자본주의 생산 하의 시장』에서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단지 외국 시장에서 생산물 구현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와 물질적 형태에 따라서도 자본주의적 생산물에서 각 부분에 대한 시장에서 대체하는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외국 시장에서 생산물 판매 자체로는 판매되는 생산물에 해당하는 등가물을 찾고, 처음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 시장, 외국 무역은 전적으로 버려져야만 하며, 해외 무역에 의존해서, 매년 재생산되는 제품 가치를 분석해봤자, 문제의 기여보다 혼란만 커질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위기 등은 단지 초과가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물 모든 부분에서도 발생하며, 필연적이다. 분배가 고르지 못하므로, 따라서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 생산물과, 소비재, 생산 수단으로 구성된 생산물에서도 나타난다.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고립된 생산자들은 해외 시장을 위해서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1-3. 국민소득

 

 

정치경제학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기초로 놓았다. 애덤 스미스는 상품 가격을 임금이라는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 두 부분으로만 구분했다. 연간 사회적인 총생산물도 같은 부분으로, 사장 및 지주라는 두 사회 계층의 수입에서 직접 할당했다. 애덤 스미스도 불변 자본을 생략했다. 곡물 가격에서 지주의 지대, 생산에 고용된 노동자, 가축의 임금이나 생계를 지불하며, 농부의 이윤을 지불한다. 또한 생산 과정에서 농부의 재고와 가축 및 기타 농업 도구의 마모도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농업 도구에서는 가격 자체도 지대, 이윤, 임금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곡물 가격은 말의 가격과 생계비를 충당하지만, 전체 가격은 지대, 노동, 이윤이라는 동일한 세 부분으로 분해된다. 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생산 수단 가격도 포함된다. 이후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생산물 가격에서 자본의 불변 자본을 제외시킨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축적의 개념을, 생산의 확대, 초과 가치에서 자본의 전환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지적했다.

 

가치 분석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추상 노동과 기존 가치를 유용한 생산물의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유용 노동으로 구분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 소득 문제는 총사회자본의 재생산, 순환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이다. 애덤 스미스는 한 국가의 모든 주민들의 총수입은 그들의 토지와 노동을 전체 연간 생산물로 포함한다. 순수입은 유지 비용을 공제하면 남는다. 고정 자본, 순환 자본들은 자본으로부터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 생계, 편의, 오락으로 쓰인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 총생산물에서 자본을 제외하면서, 자본은 임금, 이윤, 지대로부터 순수입으로 분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에서 들어가는 총수입을 자본에다 포함시키고는, 소비재와 분리해서 순수입으로 계산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물에 자본이 없다면 수입에도 자본이 있을 수 있겠냐고 반박했다. 따라서 총생산물의 가치에는 가변 자본,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불변 자본도 들어간다.

 

애덤 스미스는 고정 자본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사회에서 순수입으로 제외했다. 애덤 스미스는 유용 기계, 무역 도구, 수익성을 띠는 건물 드을 지탱하는 자재나 자재틀을 적절한 형태로 제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 생산물은 일부가 될 수 없으며, 노동 가격의 일부로 나타나며, 고용된 일꾼들은 임금의 전체 가치를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로 바로 넣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노동에서는 가격과 생산물이 모두 재고로 돌아가며, 가격은 일꾼의 가격, 생산물은 다른 사람들의 가격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순수입에 들어가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노동과 유용 기계, 무역 도구, 건물 등으로 개인적인 소비로 사용될 수 없는 품목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바로 잡았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수입을 혼란스럽게 이해했고, 리카도, 세이, 밀, 맬서스, 시스몽디, 찰머스, 키르히만 등은 상품에서 전반적인 초과 생산 논쟁을 애덤 스미스의 잘못된 이론으로 고수했었고, 불가코프도 잘못된 전제, 문제 자체로 인식했기 때문에 잘못된 공식화로 논쟁이 벌어졌고, 투간과 바라노프스키 간의 산업 위기 논쟁에서도 공허하고, 학문적인 말장난만 반복했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총생산물은 개인 생산물과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 가변 자본, 초과 가치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두 가지의 주요한 부분으로 구분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두 가지 주요한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산 수단에서 생산이라는 생산 품목과 자본으로부터 지출하는 품목 생산에서 소비품 생산, 곧 개인적 소비 품목이라는 생산이다. 불가코프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했으며, 개인적인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분석에서는 완전히 생략했으며, 사회·자본에 따른 재생산을 분석하고자 했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물의 자연적인 형태에 또 다른 근거를 도입하고자 했는데, 개인 자본의 생산 분석에서는 생산물 판매와 노동자들의 소비재, 자본가들의 생산물 구매처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으며, 관련마저도 분석하지 않았다. 생산에서 개별 가치와 생산 결과에 따른 가치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소비재를 어디에서 얻으며,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또한 완제품에 대한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거나, 생산을 확대시킬 수는 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가치 부분에서 대체제 뿐만이 아니라, 물질 부분에서도 대체제도 있다고 거론했었다. 따라서 사회·경제 과정에서도 전적으로 다른 역할을 하는 생산물들을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생산물에서 단순 재생산이란, 이전 규모에 따른 생산 과정이 반복되고, 축적이 부재한다면 Ⅱ부문에서 개별 자본과 소비재 형태를 띠는 초과 가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초과 가치 전체로 지불되며, 자본으로부터 전환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진다. Ⅰ부문에서 생산 수단 형태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는 생산 수단의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위해 소비재와 교환된다. 반면 Ⅱ 부문에서 불변 자본은 다시금 생산에 투입되고자, 생산 수단과 교환된다. 따라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를 소비재 형태를 띠는 불변 자본과 교환된다. 자본가는 생산물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불변 자본을 획득한다. 단순 재생산에서는 교환되는 부분들이 동일해야 하므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의 합은 불변 자본과도 같다. 반면에,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 면에서는 축적으로부터 재생산을 가정하면, 첫 규모가 둘째 규모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추가 생산에 따른 초과적인 생산 수단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불변 자본은 각 부분에서 자본가들 간에 다른 생산물과의 교환으로부터, 재료 또는 도구 역할을 담당하며, 직접 생산으로 투입되면서부터 구체화된다.

 

축적 부문에서는 자본가들의 초과 가치에 따라 추출되어 초과된 생산 수단이 나타나며, 소비재에서 떨거져 나온 초과 가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하게 된다. 국내 시장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소비재보다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성장한다. 생산 수단 증가는 소비재 증가를 앞지른다. II 부문에서 소비재, 불변 자본은 I 부문에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 + 초과 가치와 교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일반 법칙에 따르면,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

 

소비재에서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과 소비재에 따른 초과 가치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지만, 생산 수단에서 불변 자본은 생산 수단에서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증가와 소비재 부문에서 불변 자본 증가를 모두 앞지르며, 매우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에 따른 발전이란 어느 정도는 개인 소비 발달과는 독립적이며, 주로 생산적 소비로부터 이뤄지게 된다. 여기서 '독립적'이란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가 분리됐다는 말은 아니며, 마르크스는 이와 관련해서,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는 주기적인 순환이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음에 불변 자본은 개인 소비와도 무관하며, 불변 자본에 따른 소비 형태는 분명하게 제한될 수밖에는 없다. 불변 자본 자체를 생산되는 게 아니라, 마르크스에게 생산물은 개인 소비에 따른 생산 영역에서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면서 생산된다고 지적했다.

 

불변 자본에서 지출되는 소비는 생산력 발전에서 더 높은 단계이며, 교환 가치로 표현된다. 생산 수단은 대규모 기계 생산을 위한 온갖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대규모 생산에 따른 기계 산업을 창출해서 사회적인 부과로부터 특정 부문을 확장시킨다는 특징을 가진다. 오래 전 경제학자였던, 시니어도 야만인들은 때때로 수입을 소비재로부터 분해될 수 있는 생산물을 얻지 못한다거나, 노동에 따른 지출하는 특권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의 더 많은 부분들을 생산 수단이라는 불변 자본으로부터 생산에다 투입해서 사용된다.

 

생산 수단은 임금 및 초과 가치에 따른 수익으로부터 늘 분해될 수는 없으며, 자본으로부터만 분해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물신 숭배도 생겨나며, 비축된 생산 수단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생산물 관계로 제시된다. 모든 생산물들은 구매자를 위해 생산되며, 시장에서는 상품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시중에 볼 수 있는 모든 제품이란 바로 상품으로부터 둔갑된 형태를 지니며, 수입을 생기로독 만든다. 국내 시장에서도 생산 수단 발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모순'이다. 목적으로부터 생산은, 소비로부터 지불된 형태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더욱 확대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은 사회 경제 체제에 따른 모순이며, 구매(소비)의 확대 없이 생산만 확대시키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회적인 본능과도 같은 구조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사회 생산력이 발전하며, 사회적으로는 기술적인 성과에 따른 사람들에게 기여한다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배제시킨다. 자본주의는 생산 확장에 따른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며, 제한된 구매에 따른 모순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도 자본주의 생산에서, 상품 구매자로부터 노동자는 시장에 따른 자신의 상품이자, 판매자로, 최저 가격으로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보다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많은 생산 부문과 사회적인 구매력에 따른 비례 관계들은 제한되므로, 생산력이 더욱 발전할수록, 구매 조건에서 기반하는 토대는 더욱 불균등하며, 따라서 고르지 못하다. 생산자들의 수탈과 가난에 기반한 자본 가치 보존과 자신들의 확장으로부터 단독적인 한계를 보이는데, 자본이 목적을 위해서 일으키는 생산 방식과 끊임 없이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는 무제한적으로 기반을 확장시키고자 하며, 목적 자체로는 생산, 사회적인 노동 생산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발전을 일으킨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들은 생산에 따른 물질적인 힘을 발전시켜,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역사적인 수단으로부터, 역사적인 과제와 사회적인 관계들 사이에서 끊임 없이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늘 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제한된 구매력으로부터 외적인 한계를 이루면서, 자본주의 생산에 따른 추진력과 개발 면에서 대조적으로 밀려나게 된다. 생산만을 확대하려는 추진력, 제한된 구매 사이에는 모순 이외에는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초과 가치가 구체화된다는 지적만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경제 위기를 단지 과소 소비로만 기인했다고 보거나, 섣불리 결론 짓고 말았다. 그러나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인 구매는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자본』에서도 증명했다. 구매품에 따른 소비재는 국내 시장에서는 미미하거나,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서 섣불리 결론 내리기도 한다.

 

생산에 따른 무한한 확장을 할 수 있다는 추진력과 제한적인 구매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은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모순이 아니다. 특히 자본주의 모순은 역사적인 무의미한 덧 없음과 붕괴로부터, 더 높은 형태로 변형하는 조건과 원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모순의 심각성은 이전의 사회 경제 체제에 따라서도 더욱 진보적인 성격을 갖추려고 든다. 

 

여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경제적 낭만주의자들은 불가코프 <산업위기>, 스크보르초프, <정치경제학 기초>에서도 전반적인 축적, 구매 품목에 따른 소비재 필수품, 사치품, 화폐 순환, 고정 자본, 마모 등 자세한 조사를 이뤄냈지만, 이윤과 지대에 대한 잘못된 견해, 특히 로드베르투스, 베른슈타인은 무의미한 절충주의와 총 초과 생산물 증가에 따른 부유층 증가와 자본가들로부터 초과 생산물 전체를 '소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충분히 향상될 수 있다고만 해석했다. 투간, 바르노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생산적 구매(소비)와 개인적 구매(소비)를 구분하며, 구체적으로 조사했고, 또 분석했다. 베른슈타인 <사회주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 과제>(1899)가 당시로는 부르주아 개량주의로 수정된 기회주의 견해로 불렸던 이유였다.

 

프루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동일한 오류를 저질렀다. 프루동은 초과 가치와 불변 자본이 생겨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해명하지는 못했으며, 상품을 화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봤다. 정작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이 구체화될수록, 원가에서 추가된 이자들로부터, 자신의 생산물을 다시 소비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포르가드, 로드베르투스도 상품 가격으로부터 임금을 넘은 이윤뿐만이 아니라, 불변 자본으로 대체하는 부분을 포함시켰다. 로드베스투스는 지대, 자본, 이윤, 임금을 소득이라고 지적했었지만, 정치경제학에서 소득 개념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었다. 또한 국민 총 생산물 총 일부는 생산으로부터 소비되거나, 소모된 자본으로부터 대체해서 사용됐고, 다른 일부는 국민 소득으로부터 사회 구성원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요구했다. 로드베스투스는 애덤 스미스와 동일한 오류를 남겼으며, 엥겔스도 지적했지만, 생산물에 따른 임금, 이윤, 지대라는 구분마저 소득 개념에서 기본적인 화폐를 국민 소득인지, 임금에 따른 자본 소득인지, 온갖 추측만 난무했다.

 

헤르크너, K. H 라, R. 마이어, A. 바그너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도, 수익과 소득 개념에서 생산물을 구분했었지만, 분배와 소비에 대한 관심으로 치중됐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자본에 따른 재생산 과정,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많은 구성 요소들을 대체할 수 있는 과정을 알지 않고서는 소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이 아니라, 생산에 따른 사회적 관계, 사회적 생산 체계이기 때문이다. 총소득량, 순소득량이란 총산출량, 순산출량과도 구분한다. 왜냐하면 총산출(량) 또는 총생산물은 재생산된 총생산물이다. 총소득은 총생산물 가운데 가치 일부와 총생산물 가운데에서 생산으로 투입된 양이며, 앞서 언급한 소비되는 불변 자본으로부터 대체하는 부분에서 차감된 남은 부분이다. 따라서 총소득은 임금(노동소득) + 이윤 + 지대로 계산한다. 반면 순소득은 초과가치, 임금을 차감하고 남는 초과 생산물이며, 자본으로 구체화되어, 지주로부터 분배된 초과 가치와 자본에 따라 측정된 초과 생산물이다. 총 소득에 따른 국민 소득이란 임금, 이윤, 지대가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이윤과 지대로 분해한 소득만을 순 소득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수입'은 마르크스, 『자본』 3권에서도 명시했다.

 

 

1-4. 자본주의 국가 아래에서 외국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산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분석의 시작은, 대외 무역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수입과 수출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초과 가치를 해외 시장으로부터 환원시키면서 설명하는데, 주어진 이론으로만 해석하고는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회피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해외 시장은 초과 가치나, 사회적 생산물이 아니라, 상품 유통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외 무역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인민주의자들은 초과 가치를 소비할 수 없다고만 '진부하게' 생각한다.

 

해외 시장 문제를 다루려면, 외국 무역 발전사, 상품 유통 발전사를 살펴봐야만 한다. 예전에는 사회적 생산에 따른 각 부문 가치와 자연적 형태 간의 일치가 돋보여서, 사회 자본에 따른 재생산이 필연적이었지만, 여러 연속적이고, 변동된 평균 크기로만 확립됐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해외 시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시장 역할은 많은 산업 분야에서도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경쟁하고, 앞지르면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초과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많은 산업 발전에서도 비례하거나, 고르지도 않았다. 자본이 한 산업 분야를 처분하고, 다른 산업 분야로 옮겨갈 때는, 산업 분야에서 나오는 경제 위기를 막고자 한다.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 따른 기술적 토대 위에서 생산을 반복한다. 지주 부역 경제에서도, 농민들의 자연 경제, 산업가의 수공업 생산 등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서는 생산 양식의 변화와 생산 규모 면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 및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생산 양식 아래에서는 경제 단위 성격으로나, 규모 면에서는 큰 변화 없이도, 소규모로 형태로, 지주의 영지, 농촌 마을, 농촌 수공업자, 소규모 산업가(수공예인) 위주로도 존재했었지만, 자본주의적인 기업이 출현하면서, 마을 공동체, 지역 시장, 국경 단위를 넘나들며 성장하게 됐다. 국가적인 고립은 일찌감치 무너진지 오래이고, 모든 자본주의 산업의 추세들은 해외 시장을 모색해간다.

 

자본주의에 따른 '진보적인' 역사적인 과업들은 실제로는 경제 체계에서도 오래된 고립을 파괴하거나, 세계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경제 전체 단위 하나로 연결해서 묶는다. 따라서 해외 시장을 조사하거나, 분석하고자 한다면 역사적 성격에 따른 각 산업 분야에서 개별적인 발전 과정, 국내 발전 과정, 자본주의 산업으로 전환 과정을 두루 살펴봐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모든 점들을 잘 살펴봐야만 한다는 말이다.

 

 

1-5.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오류 정리.

 

 

국내 시장에서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사회적인 분업을 띤다. 많은 형태로 된 원자재 가공에서도 농업 부문에서는 차례대로 분리되어, 독립적인 산업 부문으로부터, 각 산업 부문에 따른 생산물이자 상품으로 농산물과도 교환된다. 따라서 농업 자체에서도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 일어나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 따른 모든 발전하는 상품 경제는 상업 및 비농업 인구로는 농민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며, 더 많은 인구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된다.

 

직접 생산자와 생산 수단을 분리하면서 단순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으로 전환시켜, 국내 시장을 창출하면서 수탈이 이뤄진다. 소규모 생산자에서 벗어난 생산 수단은 새로운 소유자 수중에서 자본으로 전환되어, 생산된 상품을 다시 시중에 상품으로 전환한다. 단순 재생산에 따른 생산 수단에서도 구매가 필요하며, 시장에 따른 생산 수단으로부터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반면에, 소규모 생산자에 따른 생계 수단은 가변 자본에 따른 물질적인 요소, 고용주 등은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금액을 지출하며, 이러한 소비재에 따른 국내 시장은 생계 수단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자본주의에 따른 생산물로부터 초과 가치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생산물은 개인적 생산물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기존의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구분에서 불변 자본 + 가변 자본 + 초과 가치라는 부분으로 분해되고, 사회적 생산물은 생산 수단과 소비재로 구분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은 초과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구체화된다는 문제로만 접근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마르크스는 충분히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구체화된 논의로, 국민 지출(소비)와 소득 문제를 다뤘고, 국내 시장을 상품 경제로도 다뤘다.

 

전적으로, 상품 경제 발전에 따라 창출된 사회적 분업은 어느 정도 분화되는지에 따라 발전 수준이 결정되며, 상품 생산에서 제품이라는 노동력으로 확장되며, 국내 시장을 창출하면서도 확장된다. 노동력은 상품으로 전환하는 정도에 따라 비례해서 자본주의는 국가 전체 생산을 포괄하며, 생산 수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국내 시장에 따른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창출되고, 사회적 분업을 심화시킨 직접 생산자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리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이 발전하는 정도는 해당 국가에서도 자본주의 발전 정도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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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이 집필되고 발표된 시기 (1896년~1899년)는 그의 혁명가 생애에서 체포와 투옥, 시베리아 유배로 이어진 고난의 시기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거대한 이론적 성취를 이뤄낸 결정적 전환기였다.

 

1895년 말부터 1897년 초까지는 체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 생활의 시기였다. ‘노동자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던 레닌은 1895년 말 차르 체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년이 넘는 엄격한 옥중 생활 속에서 레닌은 어머니와 누이들의 도움으로 도서를 반입받아 러시아 경제 통계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구상을 다지고 집필을 시작했다.

 

1897년부터 1900년까지는 시베리아 슈셴스코예 유배 및 집필 몰두기였다. 1897년 초, 레닌은 동시베리아의 오지인 슈셴스코예 마을로 3년간의 유배 처분을 받아 이송되었다. 유배지에는 동료 마르크스주의 활동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합류하여 1898년 현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동반자이자 비서로서 연구 활동을 지원했다. 차르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레닌은 젬스트보 (지방 자치회) 통계 보고서, 공장 통계, 농업 조사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며 1898년 10월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초고를 완성했다.

 

유배 생활이 끝나가던 1899년 3월, 이 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명 ‘블라디미르 일린’으로 합법 출판되었다. 이 역작은 당시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인민주의자들 (보론초프, 미하일롭스키 등)의 주장, 즉 “러시아는 서구와 달리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농민 공동체 (미르)를 발판 삼아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관념을 철저한 통계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기반하여 비판했다.

 

레닌은 감옥과 유배지라는 물리적 고립에 처해 있었으나, 이념적으로는 러시아 경제 전반에 자본주의가 이미 깊숙이 뿌리내렸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장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이는 향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이끌고 볼셰비키 혁명을 준비하는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제1장 인민주의 오류

 

 

자본주의 발전의 전체 과정은 사회적 분업에 기초한다. 자연 경제 사회가 동질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단위였다면, 상품 경제는 제조업이 원자재 산업 및 농업으로부터 분리되고 산업 부문이 세분화되는 전문화 과정을 거친다.

 

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상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인 조치의 결과’로 왜곡하여 이해했다. 자본주의 발전은 불변 자본 (생산 수단)을 증가시키는 반면 가변 자본 (노동력)의 상대적 감소를 초래하며, 농업 부문에서 비농업 인구로의 이동을 가속화한다. 인민주의자들은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하고 파산하면 구매력이 약화되어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생산 수단을 상실한 생산자가 노동력 판매자 (임금 노동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생산 수단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자본으로 전화된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자본가 계급은 새로운 도구, 원자재, 소비재 등에 대한 거대한 수요를 창출하므로 국내 시장은 오히려 확대된다.

 

애덤 스미스와 훗날의 인민주의자들 (불가코프 등)은 상품 가격 및 연간 총생산물에서 불변 자본 (생산 수단 가치)을 누락하고, 이를 임금·이윤·지대라는 수입 (소득)으로만 분해하여 고찰하는 오류를 범했다.

 

마르크스의 사회적 재생산 공식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총생산물은 불변 자본 (c) + 가변 자본 (v) + 초과 가치 (m)로 구성된다. 생산은 크게 생산 수단 생산 부문 (제Ⅰ부문)과 소비재 생산 부문 (제Ⅱ부문)으로 나뉘며, 단순 재생산과 축적 과정에서 이들 부문 간의 교환과 비례성 (균형)이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본질은 개인 소비의 발달보다 생산적 소비 (불변 자본의 증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의 무제한적 확장 추진력과 제한된 구매력 (과소 소비) 사이의 모순 속에서 경제 위기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인민주의자들은 국내 시장의 협소함과 자본주의의 과소 소비 성향 때문에 초과 가치나 잉여 생산물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해외 시장 (외국 시장)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대외 무역이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이자 유통의 한 형태일 뿐이며, 초과 가치 실현의 절대적 전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는 각 산업 부문의 불균등한 발전과 경쟁을 동력 삼아 국내외로 시장을 개척하며, 오래된 고립적 경제 단위를 파괴하고 세계를 하나의 경제 단위로 통합하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소비와 분배 중심적 관점의 한계로 인해 프루동, 로드베르투스, 베른슈타인, 불가코프 등 부르주아 개량주의자들과 인민주의자들은 생산력과 자본의 재생산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단순한 분배와 소비 문제, 과소소비론, 혹은 부유층의 소비 증가에 기반한 위기 해소 방안 등에 매몰되었다.

 

국내 시장의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발전 정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직접 생산자가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 분리되는 과정 자체가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근본 동력이다.

 

 

제2장 농민층 분화 요인과 젬스트보 통계 및 인구 조사

 

 

러시아 각 지역의 젬스트보 통계 조사는 남부 및 중부 러시아 농촌 사회가 동질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와 화폐 관계에 따라 내부적으로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를 제공한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 (카리셰프, 포스트니코프 등)은 명백한 통계적 수치 속에서도 ‘평균 농민’이라는 허구적 범주와 ‘할당 분류’ 방식을 고수하며 농민층 분화를 부정하고 공동체적 유대와 균등론을 주장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노보로시아 (남러시아) 구베르니아 (포스티니코프 자료)

 

타우리다 지역 등에서 부농 (가구의 1/5)은 경작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집중시키고 환금 작물 재배 및 대규모 양 사육 등 상업적 농업을 주도한 반면, 빈농들은 토지와 쟁기 등 생산 수단을 상실했다. 부농은 가족 노동력을 초과하는 경작 면적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 임금 노동자 (일용직·정규직)를 고용했고, 빈농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고 토지를 임대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국내 시장이 창출되었다. 농민 부유층은 상인 자본 및 고리대금업과 결합하여 토지를 담보로 투기를 벌였으며, 이는 전통적 공동체 해체와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사마라 구베르니아 (노보우젠스크·니콜라예프스키 지역)

 

상층 농민은 철제 쟁기, 증기 탈곡기 등 개량 농기구의 대부분 (81.9%)을 독점하며 대규모 자본주의적 농경과 가축 사육을 결합한 반면, 빈농층은 농기구가 전무하고 가축조차 없어 생계형 일용직으로 전락했다. 매수 토지의 9/10과 임대 토지의 대다수가 소수의 농민 자본가 (상위 계급) 수중에 집중되었으나 인민주의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평균적 수치만 강조했다.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카미신 지역 등)

 

카미신 지역의 부농 (인구의 1/3)은 작물 재배 면적의 53.3%와 막대한 가축을 소유했으나, 통계학자들이 ‘산업 고용’이나 ‘할당 분류’라는 무차별적 범주를 사용하여 고용주와 임금 노동자, 부농과 빈농을 하나의 평균값으로 묶어 농민층 분화의 실상을 가리고 자본주의적 현실을 왜곡했다고 레닌은 비판했다.

 

페름 구베르니아 (크라스노우핌스크·예카테린부르크 지역)

 

상위 농민층으로 갈수록 게절적 일용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농장 노동자 고용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보론초프 등 인민주의자들이 주장한 ‘농민 전체의 농기구 개선’과 달리 개량 농기구와 비료 사용은 철저하게 상층 부농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오렐 구베르니아 (옐츠·트르부체프스크 지역)

 

대마 재배 등 상업적 농업의 발달 속에서 부농들이 빈농들로부터 비료를 매입하고 토지를 대규모로 임대·집중시켰으며, 오렐 지역 역시 토지 포기 및 노동력 매각에 따른 ‘농촌 무산층’과 토지 매수·임대 및 고용 노동을 결합한 ‘농촌 부르주아’라는 두 가지 정반대의 유형으로 명확하게 분화되었다.

 

이처럼 인민주의 경제학자들 (카리셰프, 보론초프, 포스트니코프의 비판적 한계 등)은 통계 자료를 다룰 때 ‘할당 분류’와 ‘평균값’이라는 허구적 지표를 사용하여 부농의 빈농 수탈과 자본주의적 분화라는 본질을 의도적이거나 무지하게 은폐했다. 그러나 젬스트보 통계의 세부 자료를 과학적으로 재조사하면, 러시아 농촌 공동체 (미르) 내부에서 이미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하여 임금 노동자와 자본가 (농민 부르주아)로 나뉘는 자본주의적 분화가 예외 없이 관철되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

 

보로네즈 구베르니아 (자돈스크, 젬랸스크 등 4개 군)

 

통계 자료가 방대했음에도 여러 부류를 일괄적으로 묶은 ‘중립 집단 (평균값)’ 산정 방식으로 인해 농민층 분화의 실상이 흐려지는 한계가 있었다. 이곳의 산업 종사자 및 외부 노동자 대다수는 농장 노동자, 짐꾼, 비숙련 노동자 등 ‘농촌 무산층’으로서 농업이 아닌 외부 고용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한 반면, 수적으로 매우 적은 상층은 곡물 판매 위주 경영, 농장 노동자 고용, 개량 농기구 및 상·산업 시설 소유를 독점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을 주도했다.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 (크냐진, 마카라예브, 바질 지역)

 

법적 배정지 소유 규모와 실제 토지 소유·경작 면적 사이에 큰 격차가 존재했고, 부농들은 매입 토지와 임대 토지를 집중시켜 실질적 지배력을 확대했다. 분뇨 비료 사용량에 따라 호밀 수확량이 극단적으로 갈렸으며, 부농들이 자본을 투입해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인 반면 빈농들은 소외되었다.

 

기타 주별 검토 (노브고로드, 체르니고프, 예니세이, 폴타바 등)

 

기타 주별 검토 중 노브고로드·체르니고프 등에서는 가축 보유량 분석 결과 상위 집단으로 갈수록 매입·임대 토지와 산업용 건물의 소유가 집중되었고, 가축 없는 하위 집단은 토지를 떠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시베리아 (예니세이 등)에서는 ‘할당지’라는 법적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가축이 없는 다수의 빈농과 5마리 이상을 소유한 부유층 (경작지의 73% 소유) 간의 자본주의적 분화와 임금 노동 의존 관계가 동일하게 나타났다. 트베리 등에서는 비흘라예프 등 일부 인민주의 성향의 통계학자들이 평등주의적 관념에 사로잡혀 공동체 내부의 차별화 과정을 부정하고 자연 경제와 인민 생산을 맹신하는 오류를 범했다.

 

지역별·구베르니아별 절대적 수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 가구의 상위 20% (부농)와 하위 50% (빈농)를 기준으로 재분류하는 표준화된 분석 방식을 적용해 보면, 농민 분화의 보편적 법칙으로서 법적 평등인 배정지와 달리 매수 및 임대 토지는 철저하게 상위 20%의 부농 수중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농층은 정규직·일용직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개량 농기구와 상·산업 시설을 독점한 반면, 빈농층은 토지를 상실하고 노동력을 판매하는 무산층 (프롤레타리아트)으로 전락했다. 인민주의자들과 카리셰프 등은 젬스트보 통계의 명백한 수치 속에서도 ‘평균’과 ‘할당 평등’이라는 허구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분화 과정을 은폐하려 했으나, 실제 통계는 러시아 농촌 사회가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와 계급 분화의 길에 들어섰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러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단일한 농업 인구 조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중앙통계위원회가 실시한 ‘군마 인구 조사 (1888년, 1891년, 1893~1894년 등)’는 러시아 농민층의 분화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국적 자료를 제공한다. 유럽 러시아의 통계를 결합해 보면, 전체 가구의 약 22% (약 220만 가구)인 상위 부유층이 전체 가구의 56.3%를 소유한 반면, 가축이 전혀 없는 가구 (280만 가구)를 포함한 다수의 빈농층은 극심한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 1888~1900년을 비교했을 때 시기가 지날수록 가구 수는 약 100만 가구 증가했으나 가축 수는 오히려 감소했으며, 가축이 없는 빈농 가구 비율이 27.3%에서 29.2%로 급증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과 몰락이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통계학자들이 흔히 제시하는 ‘평균 농민 예산’은 극단적인 빈곤층과 부유층의 현실을 은폐하는 허구에 불과하며, 실제 예산은 농장 규모와 가축 보유량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무마농 및 일마농 (하층)은 농업 소득이 미미하고 생계의 상당 부분을 고용 임금 노동에 의존하며 현금 적자와 생계 위기에 시달렸고, 이들의 생활 수준은 일반 농촌 임금 노동자보다도 못하거나 그 최저선에 머물렀다. 반면 농촌 기업가 (상층)은 수백 루블에 달하는 순소득을 올리며 농장 지출과 생산적 소비 (개량 농기구, 고용 노동, 상·산업 시설 투자)가 전체 지출의 과반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국내 시장의 이중적 창출이 지적되는데, 농촌 무산층인 무마층은 토지와 생산 수단을 상실하고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주로 소비재 시장을 창출하고, 농촌 부르주아인 부농은 농업과 상·산업을 결합하며 대규모 생산 수단과 투자를 확대하여 주로 생산 수단 시장을 창출한다. 레닌은 이 과정 전반이 자본주의 발전과 국내 시장 형성의 역사적 필연성임을 강조한다. 사브리나 등 일부 통계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왜곡·남용하고 ‘평균 수요 법칙’이나 단순 평균화 방식을 적용하여 농촌 무산층과 부유층의 계급적 격차를 지워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또한 마을 공동체 내에서 세금과 공과금은 할당지 면적을 기준으로 일률 부과되었으나, 실제 경제 능력이 파괴된 빈농들에게 세금 부담이 가중되어 이들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현대 러시아 농민들은 낙후된 조건 속에서도 이미 개인 소비, 세금 납부 등을 매개로 시장에 깊이 예속되어 있었다. 촌락 공동체 (미르) 내부에는 경쟁, 독점, 소수 생산 집중, 다수의 무산 계급화, 착취 등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의 촌락 공동체는 자본주의의 대척점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단단한 경제적 토대였다. 기존의 가부장적인 농민층은 단순한 재산 불평등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농촌 주민들은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를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 유형으로 재편되었는데, 이를 레닌은 ‘농민 분화’ (농민층의 분해)로 규정했다.

 

마르크스, 『자본』 제Ⅲ권에 나오는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의 역사적 단계를 거치면서 직접 생산자들 내부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착취 수단이 싹트게 된다. 현물 지대가 화폐 지대로 전환되면서 종속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를 매수당하고, 돈을 위해 고용된 무산 일용직 노동 계급이 형성된다. 부농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본가로 변모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은 시골 전역으로 확산된다.

 

이에 따라 농민 분화로 창출되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이 출현한다. 첫째, 농촌 부르주아지 (농민 상층, 가구의 1/5 이내)는 상업적 농업을 경영하는 자영농, 상업 및 산업 시설의 소유주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특징은 가족 노동력을 초과하는 대규모 경작을 위해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를 상시 고용하며, 고리대금과 상인 자본, 토지 매수 및 임대를 매개로 농촌 경제를 장악한다. 수적으로는 소수이나 생산 수단과 생산물 총량에서 현대 농촌의 주인을 자처하며 주로 생산 수단 시장 (생산적 소비)을 확대한다.

 

둘째, 농촌 무산층 (농민 하층, 전체 농가의 40~50% 이상)은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빈농뿐만 아니라, 척박한 소규모 토지만 보유한 채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토지 소유 임금 노동자 (일용직, 미숙련·건설 노동자 등)가 전형적인 대표자로 구성된다. 이들의 특징은 극도로 낮은 생활 수준과 현금 적자에 시달리며 주로 소비재 시장 (개인적 소비)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 마을 공동체의 ‘공동체 정신’과 유럽식 자본주의 농업 (발트해 연안의 오스트제 체계 등)을 대립시키나, 실제 오스트제 지역의 농장 노동자들도 토지 소유자와 임금 노동을 겸용하고 있어 경제적 실질은 러시아 농민과 다를 바 없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은 낡은 생산 양식을 해체하는 전제가 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산업 자본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 발달이 과도할 경우 농업 생산의 발전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쿨락 (고리대금업자)과 진취적인 부농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에서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경제적 현상이다. 전근대적 잔재인 노동 용역 (부역 경제)은 초기 자본주의적 분화를 지연시키는 요인이었으나, 이러한 봉건적 예속과 속박이 청산될수록 농민층의 양극화와 계급 분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제3장 지주 부역 경제

 

농노제 시대의 경제 체제는 영지의 토지가 영주 토지와 농민 토지 (할당지)로 나뉘며, 농민들이 자신들의 생계 수단과 노동 도구로 할당지를 경작하는 동시에 동일한 도구로 지주의 토지를 무상 경작 (초과 노동)하는 구조였다. 코르베 (부역) 경제는 생산자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기반 위에 성립하며 농민에 대한 인신적·개인적 의존 (강제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자로부터 토지를 박탈하는 기반 위에 성립한다. 코르베 경제와 그에 따르는 개인적 의존 및 무지는 농업을 빈곤과 타락, 기술적 정체 상태에 머물게 했다.

 

1861년 개혁으로 농민 농장은 지주 농장과 분리되고 토지를 매입했으나 자본주의적 고용 노동에 필요한 조건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으며, 지주들은 숲, 초원, 수경 시설 등 농민 자립에 필수적인 토지 (차단된 토지)를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경제적 압력 외에 신체적 처벌, 집단 책임 등의 구속력이 잔존하는 속에서, 지주들이 농민의 도구와 가축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대가로 토지 임대나 빚을 상환하게 하는 노동 용역 체계가 자본주의 체제와 병존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지배하게 되었다. 순수 러시아 구베르니아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우세했던 반면, 유럽 러시아 전체로는 자본주의적 지주 농업 제도가 점차 확대되는 등 상반된 체제가 얽혀 심오한 갈등과 파산을 초래했다.

 

이러한 노동 용역 제도는 일자리 고용, 데시아틴 고용, 반작물 임대, 법적 벌금 노역 등 제반 명칭 (오트라보키, 스코프시나 등)으로 불리며 밭 경작, 수확, 가금류 배달 등 농촌 생활 전반을 포괄했다. 노동 용역에 기반한 임금은 자본주의적 자유 고용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며, 농민들이 지주에게 개인적으로 종속되는 상태를 강제했다. 오랜 노예 생활의 잔재로 인해 농민들은 생산력 저하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이나 반작물 임대 같은 전근대적 예속 형태를 마치 빈곤층을 돕는 유익한 제도인 것처럼 미화했으나, 이는 실질적으로 농민을 파멸시키고 농장 노동자 (무산층)로 전락시키는 수단일 뿐이었다. 지주 부역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전근대적 속박과 자본주의적 요소가 결합된 과도기를 거쳤다. 이러한 봉건적 잔재 (노동 용역, 고리대금, 예속)가 청산되고 상품 경제와 화폐 관계가 확고해질수록 농민층의 계급 분화와 자본주의적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상품 경제와 상업적 농업의 성장은 자연 경제와 불변 기술에 기반한 노동 용역 체제와 본질적으로 상충하며 이를 훼손한다. 노동 용역에는 소작농 (가축과 농기구를 소유한 중농)이 수행하는 ‘순환 경작’ 등의 노동 영역과 농기구가 없는 농촌 무산층 (빈농)이 수행하는 수확, 풀베기, 탈곡 등의 노동 용역이 있다. 흉작과 가축 수의 급감, 그리고 농민층의 극심한 분화로 인해 중농층이 몰락하면서 노동 용역의 기초가 무너졌다. 중농들은 파산하여 노동 용역을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무산층 (빈농)은 지주에게 속박되기보다 더 유리한 조건과 현금 임금을 찾아 도시나 광산, 외부 고용 시장으로 이탈했다. 이로 인해 지주들은 기존의 노동 용역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 체제를 이상화하거나 영속시키려 했으나,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농민층 분화로 인해 노동 용역의 뿌리가 약화되고 자본주의적 고용 노동으로 대체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었다.

 

개혁 이후 농업 기계 생산과 사용은 1860년대 도입 시기의 실패를 거쳐 1870년대 말~1880년대의 점진적 증가, 1885년 이후 관세 부과와 위기를 거쳐 1890년대 초부터 비약적인 보급 및 생산 확대 단계로 진입했다. 초기 서부 외곽 지역 중심에서 1890년대에는 남러시아 대평원 및 러시아 본토 지역으로 자본주의적 농업 및 기계화의 중심지가 확대되었다. 철제 쟁기, 수확기, 탈곡기 등의 국내 생산과 수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지주뿐만 아니라 ‘농민 부르주아 (부농)’층에서도 개량 농기구를 광범위하게 구입·사용했다. 특히 남부 대평원 지역을 중심으로 증기 발전기와 증기 탈곡기가 대거 도입되어 상업적 대규모 농업 경영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곡물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과 경쟁 격화는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자본주의적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구식 수작업과 노동 용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적 기계 농업을 확산시키는 주된 동력이 되었다.

 

인구가 밀집하고 노동 용역이 지배적이던 중앙 흑토 지대 등 북부·서부 지역에서, 상업적 곡물 농업이 발달한 남부 및 동부 외곽 지역 (베사라비아, 헤르손, 타우리다, 돈 지역 등)으로 매년 수백만 명의 농업 이주 노동자가 유입되었다. 이는 농촌 무산층으로 전락한 빈농들이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 시장으로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젬스트보 통계 및 루드네브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의 농업 노동자 수는 약 350만 명에 달했으며, 취업 연령 남성의 약 20%가 부농과 지주를 위한 임금 노동을 주된 작업으로 삼고 있었다. 남부 및 남동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이는 거대한 노동 시장 (카호브카 등)이 형성되었다. 전근대적 속박 관계가 점차 사라지고, 오직 노동력을 사고파는 ‘무정한 현금 지불’과 자유 경쟁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가 지배적이 되었다.

 

기계의 도입과 보급은 대규모 농장을 노동자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시켜 주었으나, 동시에 이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임금을 지속적으로 하락시켜 농업적 노동 예비군 (과잉 인구)를 창출했다. 수확기와 증기 탈곡기 등의 도입은 노동 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였으며, 야간 작업의 상시화와 함께 수많은 산재 부상과 직업병 (정신적 트라우마 등)을 야기했다. 기계 사용은 성인 남성 노동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여성 및 아동 노동 (14세 미만 소년·소녀 노동자 포함)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가속화했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주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노동 용역 체제를 이상화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을 외면했으나, 실제 농민들은 전근대적 속박보다 차라리 ‘순수한’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와 이동의 자유를 더 선호했다.

 

 

제4장 상업 농업 발전과 농산물 가공과 농업 위기

 

개혁 이후 인구의 상·산업 부문 전환과 이주로 인해 농업 인구 비율은 감소했으나, 농업 노동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곡물 및 감자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상업 농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헤르손, 타우리다, 사마라, 사라토프 등 남동부 외곽 지역과 노보로시야 대평원 지역이 풍부한 자유 토지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본주의적 농경과 해외 수출용 밀 생산을 주도하며 기존의 중앙 흑토 지방을 밀어내고 새로운 곡물 생산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 지역들은 임금 노동자와 수확기, 증기 탈곡기 등 대규모 기계를 전면적으로 활용했다. 인민주의자들은 곡물 가격 하락과 상업 농업의 발전을 외면하고 자연 경제의 정체성을 옹호했으나, 실제로는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적 전문화가 러시아 농업 전반을 깊숙이 재편하고 있었다.

 

발트해 연안, 서부 구베르니아, 북부 산업 지역 및 일부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뇨 생산만을 위한 가축 사육에서 우유·버터·치즈 등 상업적 유제품 생산을 위한 낙농업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아르텔 (협동조합)과 자본주의적 공장화가 전개되면서 야로슬라블, 볼로그다 등지에서 치즈 제조와 버터 생산이 상업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고, 원심 분리기 등 최신 기계와 순수 배양 기술이 도입되면서 생산이 집중되었다. 대도시 인근의 대규모 유제품 시설은 공공업체와 계약을 맺고 품질 기준을 강제하며 소규모 농가들을 자본주의적 시장에 종속시켰고, 상인 자본과 목축업자들은 파산 직전의 농민들로부터 가축을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소농들을 완전히 예속시키며 이들의 삶을 황폐화했다.

 

낙농업과 상업적 축산의 발달은 기존의 삼포제 윤작을 폐지하고 사료용 풀 재배와 다포제 토지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주 농업의 합리화와 기업가적 경영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산업 구베르니아와 낙농 지역의 농업 노동 수요는 연중 고르게 분포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농업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과 위생 조건은 공업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했다. 기계 도입과 자본주의적 착취는 노동 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였으며, 직업병, 산재 부상, 그리고 성인 남성 노동을 저렴한 여성 및 아동 노동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심화시켰다.

 

상업적 낙농업과 축산업의 발전은 농업 기술 향상, 풀 재배 도입, 개량 농기구 보급 등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빈농들의 식량 사정 악화, 새로운 유형의 수탈과 예속, 그리고 농민층의 극심한 몰락을 동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베르니아 등 비흑토 낙농 지역에서도 소를 전혀 키우지 않거나 1마리만 소유한 하층 농민 (절반 이상)은 낙농업의 혜택에서 소외된 채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렸으며, 3마리 이상을 소유한 상위 부농층이 낙농업 수익의 대부분을 독점했다. 부농들은 클로버 등 풀 재배를 확대하고 토지 사유화를 추구하며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 자본주의적 축산을 주도한 반면, 다수의 빈농들은 가난 속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포스코프, 트베리, 블라디미르 등 비흑토 지대를 중심으로 상업적 아마 재배가 급격히 확대되었으며, 이는 농민들의 주요 화폐 수입원이자 시장 경제 의존도를 높이는 핵심 요인이었다. 아마 재배는 투기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고, 프스코프 등의 지역에서는 높은 토지 임대료와 상인 (구매자)들에 대한 절대적 의존으로 인해 농민 대중이 절망적인 예속 상태에 빠졌다. 초기에는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이 농민을 지배했으나, 스카처 등 기계와 개량 종자 세척기 도입, 건조실·압착기 운영 등이 확산되면서 상인 자본은 점차 산업적·자본주의적 성격으로 대체되었고, 농민층 내부에서도 농촌 부르주아의 형성과 노동 용역의 자본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개혁 이후 감자 증류를 중심으로 증류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으며, 증류소의 대다수는 지주 영지 및 농업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감자 재배 면적과 수확량의 폭발적 증가는 삼포제에서 다포제 순환으로의 전환을 이끌었고, 노동 집약적인 뿌리 작물 재배는 농촌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사탕무 재배와 제당업은 주로 귀족 지주 영지 등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업에 집중되었으며, 경작 면적과 가공량이 수배 이상 급증했다. 사탕무 밭의 경작과 수확에는 여성과 아동 노동을 포함한 막대한 농업 임금 노동이 투입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숙소와 위생 조건은 극도로 열악하여 전염병과 질병이 만연했다. 한편 전분 제조, 식물성 기름 압착 (해바라기씨 등), 상업적 담배 재배 등은 농민 부르주아지 (부농)의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의 지배 속에서 빈농층의 파산과 무산화 (프롤레타리아화)를 가속화했다.

 

철도 부설은 도시와 산업 중심지로의 농산물 운송을 촉진하며 과일, 채소, 멜론 등의 상업적 재배 (교외 농업)를 급격히 발전시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로스토프 (포레치예) 등 대도시 주변의 채소·온실 재배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와 임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부농 (농촌 부르주아지)들이 대규모 틀과 온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임금 노동자를 착취했다. 교외 농업은 가부장적 농민을 자본의 힘과 일반 상품 생산 법칙에 온전히 예속시키는 자본가적 소생산자 (산업가)로 변모시켰으며, 도시와 산업의 성장은 온 마을을 교외와 같은 상품 공급처로 전환시켰다.

 

사유지뿐만 아니라 소농 경제에 이르기까지 농업은 단순한 자급자족적 자연 경제에서 벗어나 상업적·기업가적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화는 농산물 교환, 제조업 생산물에 대한 수요 급증, 농기계 및 생산 수단 시장의 확대, 그리고 정규직 및 일용직 농업 노동력 시장을 전면적으로 창출했다. 자본주의는 전근대적 노동 용역과 개인적 종속 관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이를 비인격적인 화폐 지불 및 고용 노동 관계로 대체하여, 분산되어 있던 농업을 사회적 규모의 생산으로 전환시켰다.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위기와 곡물 가격 하락을 근거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역할을 부정하려 했으나, 엥겔스의 분석대로 당시의 위기는 세계 시장 경쟁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제한적인 확대로 인해 오히려 구시대적 독점과 봉건적 잔재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노동의 계절적 불균형 (겨울철 실업)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농민을 파멸시킨다고 주장하며 ‘겨울철 해방론’을 폈으나 이는 허구에 불과하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산업과 농업 간의 이동성이 높아지고 겨울철 실업과 예속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적 노동 용역과 불충분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인한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여 소농 경제를 미화하고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을 부인하려 했으나, 마르크스는 소농 소유가 고립, 무지, 그리고 인간력의 거대한 낭비를 초래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과학적 농업과 농업의 사회화를 이룩한 위대한 역사적 업적임을 명백히 밝혔다. 결론적으로 마을 공동체 등 토지 소유의 법적 형태 자체는 자본주의 발전에 절대적 장애물이 아니며, 진정한 문제는 공동체의 신분적 고립, 높은 세금, 그리고 농민의 이동 및 정착의 자유를 박탈하는 중세적 과거의 잔재들이다.

 

 

제5장 산업 자본주의

 

 

원자재를 생산하는 농민 가족이 직접 가공하는 가내 산업은 자연 경제의 필수적 잔재로, 러시아 산업이 농업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던 초기 형태였다. 가부장적 농업에서 분리된 첫 산업 형태는 소비자 주문에 따라 무두질, 부츠 제작, 대장간 작업 등을 수행하며 농업을 보완하던 수공업 (장인) 생산이었다. 이러한 장인들의 노동 생산물은 시장에 유통되지 않고 농민의 자연 경제 테두리 안에 머물렀으며, 아직 본격적인 상품 생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장인의 생산물이 시장에 등장하고 전문 상인 (매수자)이 개입하면서, 수공업자는 점차 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소규모 상품 생산자로 전화되었다. 시장이 확대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소규모 산업가들은 치명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해 기술적 발명과 노하우를 비밀로 유지하고 독점적 지위를 지키려 했다.

 

중앙 지방의 발전된 장인들이 경쟁과 공장제 발달을 피해 남부 등 새로운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소규모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중부 등지에서 형성된 소규모 산업이 주변 마을로 확산되었다. 이는 자본이 무역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맞물려 전국적인 자본주의 관계를 확산시켰다. 모스크바 및 페름 지역의 수공예 인구 조사 분석 결과,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은 평등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극심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하위 등급은 가족 노동에 의존하며 영세한 규모를 유지하는 소규모 생산자였으나, 상위 등급인 소부르주아지는 다수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높은 노동 생산성과 개량된 도구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본주의적 작업장으로 발전했다. 소규모 산업이 초기에는 가족 노동에 기반했으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타인의 손으로 일하게 시키는’ 착취적 자본주의적 협업 관계로 전환되었다. 생산 시설의 규모가 커질수록 노동자 1인당 생산량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고 기술적 우위를 점하게 되며, 이는 소규모 영세 사업자들의 몰락과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임금 노동자) 대중의 형성을 가속화하는 근본 동력이 되었다.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이 다수의 노동자를 한 자본가의 지휘 아래 동일한 노동 장소에서 고용하여 대규모로 생산을 조직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작된다. 이는 개별 노동자의 숙련도 차이를 해소하고 생산 비용을 절감하며 안전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적 협업이 본격화되며, 상품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분산된 소규모 생산자들은 대규모 도매 시장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이 틈을 타 매수자 (상인 자본)가 유통을 장악하게 된다. 상인 자본은 고리대금과 결합하여 생산자들을 철저히 예속시키고 착취한다. 매수자들이 단순히 완제품을 매입하는 것을 넘어 원자재를 공급하고 가공을 지시하는 단계로 나아가면서, 상인 자본은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고 자본주의적 가내 산업이 형성된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산업가와 농민이 거의 구분되지 않으나,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부유한 산업가 (부농·소부르주아)는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고 농업 방식을 개선하는 반면, 빈농은 파산하여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 인민주의자들은 공업과 농업의 결합이 ‘인민 생산’의 이상적인 형태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역사적 과정에서 이는 자연 경제의 잔재이거나 자본주의적 발전 속에서 농민층 분화와 수탈을 매개하는 다양한 과도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중세적 장벽과 신분적 구분에 갇혀 있던 자본주의 이전의 농촌 경제는 자본주의의 침투와 경쟁, 그리고 상인 자본과 화폐 경제의 발전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거대한 국가 시장 및 세계 시장으로 통합되었다.

 

 

제6장 공장제 수공업과 가내 공업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은 다수의 노동자가 작업장에 모여 체계적인 분업을 수행하는 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생산 형태이다. 제조업은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 완전히 전환되기 전 단계로 여전히 수작업 기술을 기반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도시 수공예와 농촌의 가내 노동 (재택 공장 노동)을 유기적으로 결속시키며, 대자본이 원자재 구매와 전국적 시장 판매를 통제하면서 수많은 무산 노동자 대중을 지배하는 구조를 형성했다. 경제 문헌과 공식 통계는 가내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수공예 산업’으로, 작업장의 노동자를 ‘공장’으로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과학적 현실을 왜곡했으나, 실제로는 단일한 자본주의적 제조 체계의 일부이다.

 

직조 및 섬유 산업

 

직조 및 섬유 산업 (면직, 견직, 양모 등)은 대자본가들이 원자재를 대량 구매하여 자체 작업장에서 가공하거나 수공예 농민들에게 가내 노동으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이바노보 (블라디미르) 같은 대규모 비농업 제조 중심지가 형성되었으며, 직조공들은 토지와 분리되어 자본가에게 완전히 예속된 프롤레타리아 인구로 전화했다.

 

가축 및 축산물 가공 산업 (가죽·모피·신발)

 

보고로드스코예 (니즈니노브고로드), 킴리 (트베리), 사라풀 등지가 무두질, 신발 제작, 모피 가공 등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적 제조업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대자본가들이 연쇄 무두질 공장과 대규모 작업장을 소유하고, 수많은 외부 노동자와 가내 노동자들을 지배하며 도시적 생활 양식을 지닌 숙련된 장인 및 노동자 인구를 배출했다.

 

금속 가공 및 기타 제조업 (파블로보·툴라 등)

 

자물쇠와 칼붙이 (파블로보), 사모바르 및 아코디언 (툴라), 단추 및 빗 제작 등이 엄격한 분업에 기반한 수작업 생산과 가내 노동이 결합된 대표적 제조업 형태였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14~18시간)과 물품 대금 지불 등 극심한 착취가 자행되었으며, 대자본의 지휘 아래 수많은 소규모 생산자와 가내 노동자들이 단일한 생산 기계의 부품처럼 포섭되었다.

 

제조업은 기계 대공업으로 완전히 전환되기 전 단계로서 수작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분업의 발전과 확장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그 형태를 유지했다. 생산 과정을 가장 단순한 세부 작업으로 분할하는 분업은 향후 대규모 기계 생산을 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단계이자 숙련된 노동자를 양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제조업의 세부 분업은 높은 수준의 기술 (기교)을 발전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신체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척추 굽음, 가슴 발달 저해 등) 극심한 착취와 불구 상태로 내몰았다.

 

지역적 분업과 공업·농업의 분리로 인해 원자재의 가용성과 운송 비용의 제약에 따라 특정 지역이 특정 제품 생산을 전문화하는 영토적 노동 분업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주민들이 농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상업·산업적 성격에 정착한 비농업 중심지 (도시 및 산업 마을)가 형성되었다. 제조업은 소규모 수공업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하고 주변 마을의 농민-공업가들을 포섭하며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녔다.

 

제조업 단계에서는 대공장 소유주가 원자재 구매, 도매 판매뿐만 아니라 소주주와 가내 노동자들에게 자재를 유통하고 제품을 매입하는 상인 자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자본가들은 작업장 건설 비용을 줄이고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농촌 무산자들에게 가내 노동을 배분하였고, 이는 ‘발한 체계 (생체 체계)’, 식량 지급 체계, 채무 노예제 등 가장 가혹한 착취를 낳았다. 공식 통계와 인민주의자들이 ‘수공예 산업’으로 분류한 대다수의 영세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자본가에게 완전히 종속된 200만 명 이상의 자본주의적 가내 노동자 및 임금 노동자 대중이었다.

 

 

제7장 대규모 기계 공업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대규모 기계 공업은 생산을 위한 기계 체계의 도입이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서 성립한다. 공장제 수공업에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은 수세기 동안 축적된 장인의 수작업 기술을 파괴하는 완전한 기술 혁명이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순진하게 자본주의를 단순히 공장 산업과 동일시하고, 공장 통계에만 의존하여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상무제조부 및 주지사 보고서 등 초기 공식 공장 통계는 명확한 기준 없이 소규모 장인·수공예 시설, 제분소, 가내 노동자들까지 무분별하게 ‘공장’으로 합산하여 실제보다 수치를 심각하게 과장하거나 왜곡했다.

 

섬유 및 면직물 산업

 

면방적과 직조 분야에서는 동력 직기와 증기 동력의 도입 등 대규모 기계 생산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다만 초기 통계는 가내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를 동일 범주로 묶어 실제 대규모 기계 공장 노동자의 성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우랄 산맥 지역은 농노제의 잔재 토지 무상 임대 등에 의거한 저임금 구조와 구식 내풍로 사용 등 농노제의 잔재가 자본주의 전성기까지 이어지면서 기술적 후진성과 침체에 빠졌다. 반면 도네츠 문지 등 남부 광산 지역은 전통과 신분적 구분을 타파하고 세계 자본과 기계 설비를 적극 유입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폭발적인 속도로 철강 및 석탄 생산을 증대시켰다. 바쿠 등 코카서스 지역의 석유 생산 역시 미국산을 대체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발전은 개인적 소비재보다도 생산 수단과 연료 같은 생산적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1865년에서 1890년 사이 유럽 러시아의 공장 노동자 총수는 약 50만 명에서 84만 명 이상으로 65% 증가했으며, 광부 수는 2배 이상 (107% 증가) 늘어났다. 철도 노동자까지 포함할 경우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의 노동자 수는 25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나 일반 인구 및 도시 인구 증가율을 크게 상회했다. 인민주의자들은 공식 공장 통계가 수공예 시설과 가내 노동자까지 무분별하게 포함하여 부풀려졌다는 점을 악용하거나, 전체 인구 대비 공장 노동자의 비율 (약 1% 등)만 강조하며 자본주의의 발전 실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다. 그러나 1897년 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할 때, 러시아 전체 인구는 농업 인구 (농민층 내부의 부농·중농·빈농/무산층 분화)와 상·산업 인구 (대부르주아, 소부르주아, 그리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및 준프롤레타리아트)로 확고하게 계급 분화가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였다.

 

증기 기관의 총 마력 용량은 16년 만에 3배로 증가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외에도 폴란드 (페트로코프)와 남부 (예카테리노슬라프) 등 신흥 산업 중심지가 급부상했다. 개인 소비재 생산보다 철도, 광업, 야금 등 생산적 소비재 (생산 수단)를 생산하는 산업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전체 공장 수 대비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대형 공장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90년에는 전체 공장 노동자의 71%, 생산량의 57% 이상을 집중시켰다. 광업 부문에서는 100명 이상 고용 기업에 전체 광부의 84.5%가 집중되는 등 극심한 생산 집중 현상을 보였다.

 

도시뿐만 아니라 오레호보 주예보 등 농촌 공장 중심지로 산업이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농촌 지역의 대규모 공장들은 고립된 외딴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농민들을 거대한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자 대중으로 흡수했다. 이러한 연료 및 건설 산업의 자본주의화로 인해 목재 산업은 노예적 조건과 가혹한 착취 속에 최저 임금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양산했고, 도시 및 철도 건설 호황에 따른 건설 산업은 100만 명 이상의 이주 건설 노동자층을 형성하며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토지를 완전히 분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나, 데멘티예프의 조사 등 모스크바 위생 통계의 실증적 자료에 따르면 수동 공장 노동자와 달리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은 토지 (농업)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정규직 공장 노동층을 형성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세대를 이어온 공장 계보를 지닌 무산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했으며, 대형 공장일수록 연중 가동 일수가 길어 (평균 연간 253일 이상) 이들을 전통적인 가부장적 농업 및 생활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영구적으로 분리시켰다.

 

소규모 상품 생산 (농민 산업), 자본주의적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대규모 공장 및 기계 산업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된 연속적인 발전 단계이다. 사바 모로조프 같은 대다수 거대 공장주들 역시 과거에는 가장 영세한 소규모 수공예인이었다. 기계 체계의 진화 측면에서 소규모 상품 생산은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원시적 수작업 기술과 전통적 농민의 가공 방식을 유지하고, 공장제 수공업은 분업을 도입하여 기술적 변화를 가져오나 여전히 수작업에 기반하여 발전 속도가 느린 반면, 대규모 기계 산업은 수작업 기술을 압도하고 과학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근본적인 기술 혁명을 일으킨다. 소규모 생산 단계에서는 대자본이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미미하나 제조업 단계에서 계급 분화가 진행되며, 대규모 기계 산업에 이르러 모든 저해 요인이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점에 달한다. 좁은 지역 시장을 상대로 하던 소규모 생산은 비교적 안정적이나 기술 정체를 수반하는 반면, 전국적·세계적 시장을 상대하는 공장제와 기계 공업은 호황과 불황의 순환 속에서 극심한 불안전성과 대규모 실업자 예비군을 창출한다.

 

소규모 산업가들은 농민적 외양을 유지하나, 제조업을 거쳐 대규모 기계 산업에 이르면 농업과 완전히 분리되어 전통적 삶의 방식과 단절된 정규직 공장 노동층 (프롤레타리아트)을 형성한다. 모스크바 위생 통계 등에서도 기계화된 공장일수록 토지로 돌아가는 비율이 급감함이 증명된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낡은 가부장적 고립을 파괴하고 전국적인 인구 이동성 (이주 노동)을 창출하며, 노동의 사회화에 따른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적 생산 참가를 촉진한다. 나아가 국내 시장의 확대로 인해 생산 수단과 연료 등 생산적 소비재에 대한 수요와 개인 소비재 시장을 동시에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며, 인구를 농업에서 상·산업 부문으로 전면적으로 전환시킨다.

 

 

제8장 국내 시장 형성

 

 

러시아의 철도 체계는 1865년에서 1890년 사이 7배 이상 증가했으며, 철도 운송량과 수상 운송량, 외항선 수용량 역시 비약적으로 폭증하여 전국적인 상품 유통과 국내 시장 형성의 물리적 기반을 다졌다. 도시 인구는 농촌 인구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증가했으며, 특히 5만 명 이상의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인구와 자본이 급격히 집중되었다. 중부 농업 지역의 과잉 인구가 남부·동부의 새로운 외각 지역으로 대거 이주 (식민화)하면서 새로운 농업 인구와 시장을 형성하는 동시에, 비농업 이주 노동자 (500만~600만 명 이상)가 급증하여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 계급을 형성했다.

 

농업, 공장, 광산, 철도, 건설, 목재 등 제반 부문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임금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토지와의 결합 상태에서 점차 분리되어 자본주의적 실업 예비군 (상대적 과잉 인구)을 구성했다. 중앙 농업 지역의 저임금 노동력이 자본주의적으로 발달한 남부·동부 외곽 지역과 대도시·산업 주(州)로 유입되면서 화폐 경제가 자연 경제를 대체하였고, 농촌과 산업 전반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와 임금 노동 시장이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중부 지역의 대형 공장들은 기존 시장의 한계를 넘어 남부 노보로시야, 북코카서스, 시베리아 등 신흥 식민지 지역으로 시장을 급속히 확장하며 세계 상품 유통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기계제 대공업 도입을 매개로 한 사회적 노동 생산력의 발전은 수작업 생산을 압도하면서 분산된 소규모 경제를 통합하고, 전국적·세계적 규모로 노동을 집중시키는 노동의 사회화 (개인적 종속 관계 타파, 인구 이동성 창출, 산업 중심지 확대, 대중적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은 호황과 불황, 부문 간 불균형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낡은 가부장적 제도를 파괴하는 동시에 극심한 사회적 모순과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를 심화시켰다.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객관적 발전 과정을 오해하고 왜곡하여 공상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시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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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의 사회

 

지금 다루는 저작들은 종종 실패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사실상 소외된 자들을 대변할 정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재활용되지도 못하는 쓰레기처럼 구겨지거나 처분될 위기에 놓였으며, 심지어 녹슨 건전지와 같이 활용되지도 못한 채 해고되거나, 부득이하게 사업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반복된다. 우리에게 ‘어두운 시절’은 수많은 탈락을 겪거나,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일들이 발생한다. 성공의 관점에서 볼 때 실패로 규정된 탈락의 연속이 거대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잊기가 대단히 쉽다. 성공한 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처럼 다뤄지기도 하고, 당사자들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쉽게 놓치 못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정치는 이제 고였다. 경력을 답습한 고인물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샛별을 외면하여 경제로 학살하는 일들을 자행하면서도, 그들 모두는 존경과 찬사를 받는다. 이미 의회 정치의 기능은 실종된 지가 오래됐다. 정부 여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이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펴는 정책마저 소수의 막대한 임금과 자금으로 유지되고 거대한 굴레에 속박되어 너도나도 이 경쟁의 정치판에 뛰어들고 만다. 정치가 고통을 겪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자들을 위해 자리매김한 것은 이러한 고인 정치가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적인 현상이다. 모두 초심을 잃었다.   

 

기술 분야에서 기계도 오류를 저지른다. ‘디버그’란 용어는 이러한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물질이 쌓인 기계처럼, 기술적 실수는 현상에 대한 오류를 파악할 수 있다. 고도의 문명과 기술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이보다 못한 인간들은 더 많은 경쟁으로 편을 갈라 서로를 지배할 생각만 하고 있다. 성공에 대한 갈증은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윗물이 고였으니 아랫물은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호소로도 부족한 탈락의 세상으로 인해 지금의 소외된 이들은 고통에 침묵할 이유만 더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오늘도 새로운 면접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탈락이 예정된 면접을 겪고 있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을 탓했으나, 지금은 이제 이 탈락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긴다. 모든 일도 처음부터 잘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패라 불리던 탈락의 연속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이룬다. 단추와 신발끈 묶기부터,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기, 사람과 관계를 맺기 등, 이 모두가 적응과 탈락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성공의 안락이 주는 기대와 편의가 늘상 새로운 시각에 대한 불안으로 자리매김한 이상,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주어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임하고 있다면, 이 사회가 그러한 실패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묻게 된다. 즉, 준비된 조건에도 이렇게 치열해야만 했던 이유가 실패가 주는 좌절에 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실패의 관점이 주는 교훈은 기나긴 역사에서 현재를 묻는다. 이처럼 더 많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일은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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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본 도표와 추가 도표는 본문에서 언급된 오스트로고즈스크 군(郡) 내 전형적인 농가 24곳의 농가 예산 및 경제적 구성 지표를 요약·정리한 자료이다.  

 

해당 자료는 농가의 수입과 지출 구조, 그리고 자본 축적 및 수탈의 양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초 토대를 제공한다.

 

첫째, 제1~21열, 제25~29열은 『통계 초록』의 원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제22열은 호밀, 밀, 귀리·보리, 기장·메밀, 기타 곡물, 감자, 채소, 건초 등 8개 항목에 관한 세로줄을 합산한 것이며, 제24열은 말, 소, 양, 돼지, 가금류, 가죽·양털, 지방·고기, 유제품, 버터 등 9개 항목에 관한 세로줄을 집계한 것이다. 제30~34열은 식료품 및 보드카·차 등 12개 가계 소비 지출 항목의 세로줄을, 제35열은 비누, 등유, 양초, 옷, 식기 등 4개 생활용품 지출 항목의 세로줄을 각각 합산하여 구성하였다. 왕겨와 짚을 제외한 곡물 수입 (제23열)의 산출 근거는 본문의 기술을 따른다.

 

둘째, 경지 규모 (제8열)는 임차 토지와 분여지 내 경지 면적을 데샤티나 단위로 합산하여 도출하였다.

 

셋째, ‘수입원’ 및 ‘지출 분포’ 항목의 하단 수치는 수입과 지출의 화폐화된 금액을 나타낸다. 특히 제25~28열과 37~42열의 수입 및 지출은 전액 화폐 가치로 환산된 수치이다. 이러한 금전적 수치는 총수입에서 각 가구의 자가 소비액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산출되었다.

 

가구 분류별 인구 및 분여지 통계 (부록 1)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남녀를 더한 수

노동력 인구(성인 남자의 수)

농업 노동자가 있는 가구

농업 노동자 수(남녀)

분여지(데샤티나)

부유한 가구 6

계

47

11

6

8

132.6

 

가구당 평균

7.83

1.8

—

—

22.1

중간 가구 11

계

92

26

2

2

101.2

 

가구당 평균

8.36

2.4

—

—

9.2

가난한 가구 7

계

37

10

2

2

57.8

 

가구당 평균

5.28

1.4

—

—

8.5

총 24가구

계

176

47

10

12

291.6

 

가구당 평균

7.33

1.9

—

—

12.1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9

2

—

—

14.4

 

가구당 평균

4.5

1

—

—

7.2

 

 

가구 분류별 토지 점유 및 자본 재산 통계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임차지 가구 수

임차지 면적(데샤티나)

총 경작지

건물의 수

공업 제조소 수

농업 기구의 수

집수레용 동물

가축의 총계

부유한 가구 6

계

6

52.8

123.4

52

4

224

35

81

 

가구당 평균

—

8.8

20.6

8.6

—

37.3

5.8

13.5

중간 가구 11

계

10

85.5

140.2

70

—

338

40

89.1

 

가구당 평균

—

7.7

12.7

6.4

—

30.7

3.6

8.1

가난한 가구 7

계

4

19.8

49.8

31

—

108

7

15.3

 

가구당 평균

—

2.8

7.1

4.4

—

15.4

1

2.2

총 24가구

계

20

158.1

313.4

153

4

670

82

185.4

 

가구당 평균

—

6.6

13

6.4

—

27.9

3.4

7.7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

—

6.8

6

—

11

—

1.1

 

가구당 평균

—

—

3.4

3

—

5.5

—

0.5

 

 

자산 가치 평가 및 미수 대부금 현황 (루블 환산)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건물

기타 부동산

도구

가정용품

의복

가축 및 꿀벌

총계

체불 대부금

부유한 가구 6

계

2,696

2,237

670.8

453

1,294.2

3,076.5

10,427.5

80

 

가구당 평균

449.33

372.83

111.8

75.5

215.7

512.75

1,737.91

13.3

중간 가구 11

계

2,362

318

532.9

435.9

2,094.2

2,907.7

8,650.7

357

 

가구당 평균

214.73

28.91

48.44

39.63

190.38

264.33

786.42

32.4

가난한 가구 7

계

835

90

112.3

254

647.1

605.3

2,543.7

233.6

 

가구당 평균

119.28

12.85

16.04

36.29

92.45

86.47

363.38

33.4

총 24가구

계

5,893

2,645

1,316

1,142.9

4,035.5

6,589.5

21,621.9

670.6

 

가구당 평균

245.55

110.21

54.83

47.62

168.14

274.56

900.91

27.9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155

25

6.4

76.8

129.3

9.1

401.6

50

 

가구당 평균

77.5

12.5

3.2

38.4

64.65

4.55

200.8

25

 

 

농가 계급별 수입원 구조 (루블)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농업 수입: 총계

농업 수입: 곡물 수입

가축 사육

양봉 및 원예

공업

제조소

기타

수입 총계

부유한 가구 6

계

61.2% (3,861.7)

2,598.2

15.4% (972.6)

4.3% (271)

6.5% (412)

5% (320)

7.6% (482.2)

100% (6,319.5)

 

가구당 평균

643.6

—

162.1

45.2

68.6

53.3

80.4

1,053.2

중간 가구 11

계

60.7% (3,163.8)

2,203.8

16.1% (837.5)

0.7% (36.1)

18.8% (979.3)

—

3.7% (195.5)

100% (5,212.2)

 

가구당 평균

287.7

—

76.1

3.2

89

—

17.8

473.8

가난한 가구 7

계

48.7% (689.9)

502.08

22.9% (324.2)

1.9% (27)

23.8% (336.8)

—

2.7% (39)

100% (1,416.9)

 

가구당 평균

98.5

—

46.3

3.9

48.1

—

5.5

202.4

총 24가구

계

59.6% (7,715.4)

5,304.8

16.5% (2,134.3)

2.6% (334.1)

13.3% (1,728.1)

2.5% (320)

5.5% (716.7)

100% (12,948.6)

 

가구당 평균

321.5

—

88.9

13.9

72

13.3

29.9

539.5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59.5% (118)

—

5.7% (11.4)

—

128.8

—

2.0% (4)

100% (198)

 

가구당 평균

29.75

—

2.85

—

64.4

—

2

99

 

 

농가 계급별 지출 구조 (루블)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식량: 총계

식량: 채소

식량: 기타

식량: 우유·육류

식량: 소금·보드카·차

옷감 및 가정 필수품

가축 사육

도구 및 가축

부유한 가구 6

계

29.2% (1,500.6)

823.8

676.8

561.3

115.5

8.2% (423.8)

24.9% (1,276.6)

9.4% (484.5)

 

가구당 평균

250.1

—

—

—

—

70.63

212.76

80.75

중간 가구 11

계

37.6% (1,951.9)

1,337.3

614.6

534.3

80.3

10.6% (548.1)

21.2% (1,098.2)

5% (256)

 

가구당 평균

177.45

—

—

—

—

49.83

99.84

23.27

가난한 가구 7

계

42.1% (660.8)

487.7

173.1

134.4

38.7

14.6% (229.6)

15.6% (243.7)

7.1% (110.6)

 

가구당 평균

94.4

—

—

—

—

32.8

34.81

15.8

총 24가구

계

34.6% (4,113.3)

2,648.8

1,464.5

1,230

234.5

10.1% (1,201.5)

22.2% (2,618.5)

7.1% (851.3)

 

가구당 평균

171.39

110.37

61.02

51.25

9.77

50.06

109.1

35.46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81.7% (161.8)

72.1

9.6

6.1

3.5

14.91% (29.5)

8 (15.8)

53.2 (26.9)

 

가구당 평균

40.85

—

—

—

—

7.45

4

26.6

 

 

지출 분포 및 재정 수지 통계 (루블)

 

가구의 분류 및 그 수

구분

노동자 및 양치기

지대

세금 및 부담금

성직자 사례금

기타

총계(루블)

흑자(+) 또는 적자(-)

부유한 가구 6

계

13.5% (691.7)

6.5% (332)

4.9% (253.5)

1.1% (56)

2.3% (116.5)

100% (5,135.2)

+1,184.3

 

가구당 평균

115.29

55.33

42.25

9.33

19.42

855.86

+197.34

중간 가구 11

계

0.9% (47.6)

6.8% (351.7)

4.9% (254.9)

1.3% (69.9)

11.7% (609.4)

100% (5,187.7)

+24.5

 

가구당 평균

4.33

31.97

23.17

6.35

55.4

471.6

+2.19

가난한 가구 7

계

1.6% (24.3)

6% (94.5)

6.5% (101.8)

1.8% (28)

4.7% (73.2)

100% (1,566.5)

-149.6

 

가구당 평균

3.47

13.5

14.54

4

10.46

223.78

-21.38

총 24가구

계

6.4% (763.6)

6.5% (778.2)

5.1% (610.2)

1.3% (153.9)

4.7% (799.1)

100% (11,889.4)

+1,059.2

 

가구당 평균

31.82

32.43

25.43

6.41

33.29

495.39

+44.11

농업노동자 2 (가난한 가구에 포함)

계

0.4% (0.8)

—

22.6

2.8

3.3

100% (186.9)

+11.1

 

가구당 평균

0.2

—

11.3

1.4

1.65

93.45

+5.55

 

 

부록 2

 

 

스트루베가 니콜라이 온의 이론적 오류를 지적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투쟁 및 국가 이론이 러시아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생소하다’는 논지를 비판의 기초로 삼은 것은 매우 타당한 분석이다. 필자는 특정 단편 논문만을 근거로 상대의 이론 체계 전체를 단정하는 정황을 경계하기에 스트루베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해당 분석만큼은 정확하다고 판단한다. 니콜라이 온의 근본적 한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계급 투쟁의 객관적 역동성을 파악하지 못한 점에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의 핵심 축인 계급 투쟁 원칙을 간과한 채 스스로를 엄격한 신봉자로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이론적 모순이자 비판받아 마땅한 오류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 투쟁 관점의 부재를 재정립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론적 명제와 연구로부터 사회민주주의적 결론을 도출하는 정당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니콜라이 온이 러시아의 역사적 특수성과 현실적 조건만을 예외로 두고 마르크스 이론을 수용했을 개연성 또한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마르크스의 이론이 러시아의 사회 체제를 설명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게 된다. 나아가 이론을 변개하여 계급 관계와 계급 투쟁이 내재하지 않는 독자적 자본주의 개념을 도출해야 하므로, 마르크스 이론이나 자본주의라는 범주 자체를 적용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이론 체계만을 수용하고 나머지 핵심 요소를 거부하고자 했다면 명확한 논리적 근거와 이론적 당위성을 제시했어야 함에도, 이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시도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 내 계급 투쟁을 간과하는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적·정치적 역동성을 도외시한 채 공상적 열망의 한계에 머무르는 드러낸다. 이러한 시각에서 니콜라이 온을 공상주의자로 규정한 스트루베의 비판은 이론적으로 지극히 타당하다. 나아가 부르주아 관념론과 ‘사회’ 및 ‘국가’라는 추상적 범주에 의존하는 태도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 이론적 혼선을 가중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적대를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와 투쟁 노선 확립을 저해하는 반동적 결과로 귀결된다.

 

스트루베의 논의에 대한 연장선에서,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제6호에 수록된 니콜라이 온의 반론 역시 분석적 검토가 요구된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에 미치지 못한다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러시아 자본주의가 자체적 발전을 스스로 제약하여 ‘역사적 과제 수행’과 거리가 먼 상태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 및 북아메리카와는 구별되는 독자적 발전 경로의 당위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내재한 마을 공동체 파괴의 역동성과 계급적 귀결을 도외시한 이론적 모순을 내포한다.

 

해당 기술은 V. V. 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해 고안해 낸 전형적인 반론의 구도를 체현한다. 이는 ‘인민의 삶에 자본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제를 순전히 국가적 내치 사안으로 취급하는 행정 관료적 시각에 불과하다. 즉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가 수행되면 수용하고, 그렇지 못하면 배척한다는 식의 논리다! 이러한 주장이 지닌 논리적 허구성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 자체를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관점의 한계를 합법적 언로가 봉쇄되어 반론조차 제기하기 어려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변혁적·혁명적 역할은 노동의 사회화 과정 자체를 매개로 “노동자 계급을 단련하고 단결시키며 조직화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작동 기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훈련시키고 그들의 “반란”을 조직하며, 이들을 계급적으로 결집시켜 “수탈자에 대한 수탈”과 정치권력 쟁취를 담보하며 “소수 수탈자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몰수하여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물질적 토대를 창출한다 (『자본』, 650쪽).

 

마르크스의 분석 체계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혁성은 단순한 ‘공장 노동자 수의 수량적 증가’에 있지 않고, 생산 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 과정에 존재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편협한 해석자들은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사회화를 단순히 공장 노동자들이 한 공간에 집결하여 노동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축소 기술하였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변혁적 역할 수행 여부를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감으로만 평가하는 이론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공장 노동자 수의 감소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 실패로 규정하고 이를 근거로 지식인 계급 주도의 독자적 발전 경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니콜라이 온의 주장은 이러한 편합한 관점의 틀에 기반한 대표적 논거이다.  

 

러시아 지식인 계급은 사회 발전의 ‘독자적 경로’를 도출하기 위해 수십 년간 이론적 모색을 거듭하며, 자본주의가 실업과 경제 위기를 수반하는 ‘부적절한’ 발전 경로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1880년과 1893년의 경제 위기를 단서로 제시하며, 자본주의적 발전 체제 내에서 나타난 파국적 징후들을 근거로 기존 노선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이탈과 독자적 경로 설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정세의 악화와 비판 속에서도 자본주의적 수탈과 이윤 추구를 단절하지 않는다. 산업 자본 단계로의 진입에 따른 이윤율 감소 직면하자, 이들은 여전히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본원적 축적 조건’이 유지되고 농민 분화가 미진한 동부 및 북부 변방 지대로 자본을 확장하며 한계 상황을 돌파하려 시도한다. 지식인 계급은 이러한 구조적 파국과 사회적 추락을 끊임없이 경고하지만, 자본주의의 작동은 무수한 소자본가와 농민을 내쫓고 빈곤과 실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뿐이다. ‘지식인 계급’은 이를 해외 시장의 부재 및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하며 구조적 오류를 타령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적 역동을 직시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다.

 

부르주아 계급은 ‘지식인 계급’의 논쟁에 개의치 않은 채 자본주의적 확장을 지속한다. 이들은 식민지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 등 대규모 사업을 감행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영역을 미개척 지대로 확대하고, 산업 및 농업 부르주아지를 신속히 형성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생산자 대중은 만성적 기아에 시달리는 실업자 대열로 전락하며,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에 따른 계급적 분화는 한층 가속화된다.

 

니콜라이 온은 인구 구성 지표를 바탕으로 러시아 자본주의가 생산자 대중의 흡수에 실패하고 자체적인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그는 서구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와는 차별화되는 러시아만의 독자적 경제 경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러시아 사회가 이미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에 진입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내재된 계급적 대립과 공동체 해체의 객관적 과정을 직시하지 못한 이론적 모순을 드러낸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불안전성이나 공장 노동자 수의 완만한 증가만을 근거로 잘못된 발전 경로를 타령하는 태도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동을 오인한 유치한 시각에 불과하다. 스트루베의 원문을 정확히 검토해 보면, 미국과 러시아의 농업 인구 비중 차이 (44% 대 80%의 격차)를 매개로 자본주의가 수행해야 할 역사적 과제, 즉 산업화에 수반되는 인구의 구조적 전환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콜라이 온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객관적 사회화 기능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론적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해당 지문에서 ‘임무’라는 용어는 이론상 불완전하나, 스트루베의 핵심 요지는 분명하다. 이는 니콜라이 온 스스로도 인정한 러시아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이 농촌 인구의 감소를 동반하며,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일반적 법칙에 해당함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니콜라이 온이 이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1) 자본주의 고유의 이러한 인구 이동 경향을 자신이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거나, (2) 자본주의 제체 자체에 농촌 인구를 감소시키는 내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어야 한다.

 

니콜라이 온은 인구의 1%에 불과한 공장 노동자 통계만을 제시하며 스트루베의 비판을 반박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스트루베가 언급한 수치는 공장 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농업 종사 인구’ 전체를 가리키는 지표이다. 공장 노동자와 비농업 종사 인구를 동일시하는 것은 분석적 오류이며, 실제로 미국 인구의 56%와 러시아 인구의 20%를 단순히 공장 노동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핵심은 공장 노동자 수의 수량적 비율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개에 따라 농업 종사 인구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구조적 법칙성에 있다. 니콜라이 온은 이러한 농업 인구의 감소 경향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 채 범주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본질적인 논점을 회피하고 있다.

 

크리벤코를 거치며 왜곡된 해당 대목의 본의를 올바르게 바로잡는 작업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에 관한 니콜라이 온의 독단적 규정을 비판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이다. 스트루베가 지적했듯, 인구의 산업적 구성에서 농업 종사 비율의 감소 (미국의 44% 대 러시아의 80%)는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구조적 법칙이지 단순한 공장 노동자의 수량적 비중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니콜라이 온의 주장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지닌 고유한 인구 구조 재편 법칙과 사회적 노동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단선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이론적 오류에 불과하다.

 

첫째, 공장 노동자의 수치만을 자본주의 생산 종사자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대규모 기계 공업만을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소부르주아 경제학의 오류를 반복 및 심화하는 부적절한 설정이다. 상인 자본으로부터 통상 임금을 받으며 그들의 원자재로 노동을 수행하는 수백만 명의 수공업자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포섭된 생산자이다. 마찬가지로 고정 농업 노동자, 일용직 농업 노동자, 건축 산업 노동자 등은 모두 고용주에게 임금을 받으며 잉여 가치를 수탈당하는 자본주의적 착취 대상에 해당한다.

 

둘째, 공장 노동자 수 (140만 명)를 전체 인구와 단순 비교하여 백분율로 산출하는 방식 역시 방법론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는 생산 연령 인구와 비생산 연령 인구를 비교하거나, 물질적 가치 생산 종사자와 ‘비생산적 전문직’ 종사자를 동일한 선상에 놓는 왜곡된 대조에 불과하다.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비노동 가족 구성원은 물론, 상층 계급과 군인, 공무원 등 비생산 부양 인구까지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생산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생산 인구 집단을 공장 노동자와 대립시켜 단순 농촌 인구로 분류하는 것은 명백한 이론적·통계적 오류이다. 또한 어업과 같은 산업 부문을 공장 산업과 구분한다는 이유만으로 농업 범주에 임의적으로 결부시키는 것 역시 지극히 부당하다. 인구의 산업적 구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적 가치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를 비생산 인구 (비노동자, 군인, 공무원, 성직자 등)와 엄격히 분리한 뒤, 이를 국가 전체 노동의 산업별 분야로 세분화하여 분석했어야 한다. 이러한 정밀한 통계 산출이 불가하다면, 전체 인구의 1%만이 공장 산업에 관계되어 있다는 식의 왜곡된 통계를 제시하기보다 인구 구성 비중 산정 자체를 유보하는 것이 이론상 타당하다.

 

셋째, 자본주의의 변혁적·혁명적 역할이 오직 공장 노동자의 결속 및 집결에만 존재한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사회화 개념을 극도로 단선적으로 왜곡한 결과이다. 마르크스가 규정한 노동의 사회화는 단순한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 내 노동자들의 수량적 집적이 아니라, 생산 수단의 집중, 분업의 발전, 그리고 사회 전체에 걸친 생산 관계의 상호 의존성 확대를 포섭한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온 등은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노동의 사회화를 공장 노동자의 물리적 결속으로 축소 해석하여, 자본주의가 농업 및 수공업 등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전개하는 실질적인 계급적·생산적 재편 과정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내재된 노동의 사회화는 단순히 다수의 노동자가 한 공장이라는 공간에 모여 일하는 물리적 집합에 국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정립한 사회화의 본질적 의미는 첫째, 생산이 개별적·파편적 소비가 아닌 사회 전체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 둘째, 분업과 협업의 확대를 매개로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이 하나의 사회적 총노동으로 결합되어 작동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니콜라이 온 역시 이러한 사회화의 두 가지 특성, 즉 사회 전체를 위한 생산과 공동 생산물 획득을 위한 노동자들의 결합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 완수 여부를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감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 제시한 이론적 전제와 충돌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공장 노동자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하고 혁명적 운동의 핵심 주체로 부상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사회화 전체를 공장 노동자의 수치와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사회화 과정은 농업 및 수공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생산 관계를 재편하며 진행되는 객관적 역동성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의미’를 단지 공장 노동자 수로 축약하는 태도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의적으로 축소·왜곡하는 오류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소책자 『주택 문제에 대하여 (Zur Wohnungsfrage)』에서 독일의 산업 구조와 토지 소유 임금 노동자를 분석한 논지는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자 계급의 형성 과정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소농의 고통 심화로 확대된 농촌의 가내 공업은 독일 신흥 대규모 공업의 광범위한 기초를 형성하였으나, 농업과 공업의 결합은 생산자의 안녕이 아닌 거주지 고착에 따른 자본의 수탈 강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내 공업의 확산은 농촌 지역을 산업 지형으로 결부해 독일의 산업 혁명을 전면적인 영토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혁명적 노동 계급 운동이 대도시 중심지에 국한되지 않고 수많은 소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어 지속적이며 억누를 수 없는 전진을 이루게 한 구조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의 사회화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형성은 단지 기계제 대공장의 수량적 통계나 공장 노동자의 비중만으로 국한되지 않으며, 가내 공업과 수공업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수탈 구조 속에서 다각도로 전개된다. 엥겔스가 제시한 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농촌 가내 공업의 확대는 생산자에 대한 자본의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농촌 지역을 자본주의적 산업 지형으로 결합하여 혁명적 노동 계급 운동을 농촌과 소도시로까지 확산시키는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러시아의 수공업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깊이 포섭되어 있음에도, 인민주의자들은 이를 ‘인민 산업’으로 포장하며 공장 노동자 수치만을 자본주의의 범위로 축소하는 오류를 범한다. 공장과 제조업을 단순한 부동산이나 자선 사업 기관 수준의 미미한 일면에 치환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분석을 비하하는 크레벤코의 시각은, 자본주의가 생산자 대중 전체를 착취하고 재편하는 객관적 역동성을 직시하지 못한 단선적이고 임의적인 단정에 불과하다.

 

이류 부르주아 철학자들의 논리적 왜곡은 새삼스럽지 않으나, 니콜라이 온이 동일한 오류에 빠져든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마르크스가 『자본』 393쪽에서 제시한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전체 2,000만 명 중 주요 공장 산업 종사자는 160만 5,440명에 불과한 반면 하인 계급은 120만 8,648명으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마르크스는 2판 각주에서 이 계급의 급속한 성장을 지목하였는데, ‘자본주의의 구조적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160만 명을 2,000만 명으로 나누어 비중이 8% 미만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방식이 적용된다면, 이는 인구의 12분의 1조차 포섭시키지 못한 영국 자본주의를 ‘실패한 발전 경로’로 규정하고 비자본주의적 독자적 경로를 모색하자는 무의미한 주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니콜라이 온처럼 공장 노동자의 수량적 비중만을 근거로 자본주의의 사회화 및 역사적 임무를 평가하는 태도는, 통계적 수치에 매몰되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지닌 구조적 역동성과 사회화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이론적 한계를 극명히 드러낸다.

 

니콜라이 온은 러시아 자본주의가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 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역할을 창출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독립적인 노동 계급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비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미하일롭스키 역시 마르크스의 이론이 이미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된 조건에서 도출된 것이며,『철학의 빈곤』을 근거로 러시아의 빈곤은 전복적·혁명적 동력을 내포하지 않은 단순한 고난에 불과하다고 강변하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주의 형성기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과 공산주의 강령을 작성하던 1848년 이전 마르크스가 독일 역시 전면적인 노동 운동이 미약하고 정치적 자유가 부재한 가운데 지하 소조 중심의 활동 등의 활동이 주를 이루어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조건과 다를 바 없었다. 오늘날 목도되는 폭넓은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확산은 20여 년에 걸친 사회주의자들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선전 활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 당시에는 정치적 자유조차 부재하여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지하 소조로 국한되어 있었다. 자본주의의 혁명적·계급적 역할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사회민주주의 노동 운동이 본격화되고,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체계화되었으며, 대규모 공업의 확산과 함께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 이론을 전파할 역량 있는 주체들이 등판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미하일롭스키 등 예외론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노동자 계급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이끈 사회주의자들의 방대한 실천 활동을 외면한 채, 마르크스에게 자동주의적이고 숙명론적인 관점을 강제로 덧씌우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의 조직화와 사회화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전제하며, 자본주의의 존재에도, 노동 운동이 가시화되지 않은 까닭을 주체적 조직·선전의 미비가 아닌 자본주의 자체의 임무 미완수에서 찾으려 한다.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기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천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개적 투쟁으로 이미 반박된 논리다. 카우츠키의 지적대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 운동과 사회주의 이론의 결합으로 성립한다. 따라서 러시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업을 ‘현실화’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역사적 조건과 계급 투쟁의 다각적인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론을 대중화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결집시키는 조직적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역시 이러한 계급적 과업이 완수되었다고 선언한 적이 없으며,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에 기반하여 비로소 혁명적 토대가 확립됨을 일관되게 천명해 왔다.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파편화된 이해 외에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할을 부인하는 통속적 토식은 ‘인민의 체제’라는 허구적 관념에 기초해 있다. 소농의 해체와 농민의 내부의 부르부아적 분화를 포착하지 못한 채 ‘마을 공동체’라는 허구적 인민 체제에 고착하는 시각은, 농촌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외면한 피상적 관념에 불과하다. 토지 소유권의 형식적 변화에 매몰되어 이를 경제 조직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공동체 내부에서 한창 진행 중인 자본주의적 계급 분화를 직시하지 못하는 이론적 정체를 드러낸다.

 

문제적 ‘마을 공동체’의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의 대립 구도로 분화할 때, 예외론자들은 이를 농촌의 초기 형태의 중세 자본주의 형성 과정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농촌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외면한다. 이들은 ‘조국을 위한 독자적 경로’를 모색하며 소위 ‘평등한 마을 공동체’ 내부에서 부르주아적 분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농민 토지 소유권의 형식적 변화에만 매몰되어 이를 경제 조직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개는 중세적 마을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봉건적 토지 지배를 해체한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박탈당한 농민들은 러시아 전역을 유랑하며 지주, 철도 사업자, 도시 노동자, 부농의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유랑 속에서 ‘농민’은 자신이 자본에게 수탈당하고 있으며, 그 수탈 주체가 ‘지주’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매수하는 같은 ‘농민 형제’라는 계급적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나아가 국가 권력이 노동자들의 생존권 주장과 봉기를 진압하여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사실, 그리고 부와 사치의 증대 속에서 노동 조건의 악화와 수탈, 실업이 상시적인 구조적 모순으로 고착됨을 목도한다. 이러한 현실에도 예외론적 비판자들은 공장 노동자의 완만한 증가만을 근거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업 수행 여부’와 독자적 경로의 타당성만을 관념적으로 논의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편협하고 교조적이며 악의적이라는 식의 비난은, 러시아 현실에서 전개되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객관적 역동성을 외면하고 유토피아적 관념론으로 도피하려는 주관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이들이 간과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계급적 적대와 계급적 투쟁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관념적 유토피아주의 (마닐로프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수탈이 사회 전반에 관철되는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비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라는 허구를 좇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조직성과 의식성을 부여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에 투신하는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의 부》 같은 호 (6호)에서 전개된 스트루베의 비판적 논법에 대응하는 니콜라이온의 논조는, 비판의 핵심인 자본주의적 인구 이동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 선동적 용어 사용을 문제 삼는 수사적 회피에 머문다.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가 독일 학술지에 게재한 글에서 ‘유토피아’나 ‘반동적 구상’과 같은 개념을 남발하는 방식이 부적절하며, 이미 독자 대중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 이러한 수사적 비난이 의도한 비판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128쪽)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상대방의 논리적·통계적 허점을 규명하는 실질적 반론이 아니라, 본질적 논점을 우회하여 비판의 수사적 형식만을 문제 삼는 이론적 빈곤함을 드러낼 뿐이다.

 

스트루베가 비판 과정에서 ‘유토피아’나 ‘반동적 구상’과 같은 이론적 규정을 사용한 것을 두고 “부적절한 방식”을 동원했다고 비난하는 니콜라이 온의 주장은 논쟁의 본질을 회피하는 수사적 전가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비판적 어휘나 경고성 표현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객관적 근거와 명확한 이론적 논증 없이 단지 상대방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위해 자의적인 어휘를 동원할 때이다.

 

그러나 스트루베의 지적은 자본주의 발전의 구조적 법칙성에 기초한 논리적 비판이었던 반면,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용어의 어감만을 문제 삼는 니콜라이 온이야말로 본질적인 이론적 논점을 우회하는 불필요한 수사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상대방의 견해를 “근심거리”나 “끔찍한 단어”로 치부하는 방식이 비판적 논증의 본질을 결여한 수사적 비난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거친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론적 분석과 객관적 논거에 기반하고 있다면, 이를 단지 “부적절한 방식”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실제로 니콜라이 온 스스로도 슬로님스키 (Slonimsky)를 향해 소수공업과 소농 토지 소유권 방어의 반동성과 공상성을 지적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이유는, 선명한 관점과 체계적인 논리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유토피아적 한계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리적 근거를 갖춘 구조적 비판과 단순한 수사적 회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스트루베가 니콜라이 온의 주장을 반동적 구상이자 순진한 이상주의로 규정한 근거는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첫째, 니콜라이 온은 ‘생산의 사회화’를 지향하면서도 국가와 사회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였는데, 이는 국가가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규정과 계급 투쟁의 역동성을 포착하지 못한 결과이다. 둘째, 현실의 자본주의적 전개 과정을 외면한 채 단지 주관적 당위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없는 생산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것은 역사의 객관적 발전 법칙을 무시한 관념론적 포착에 불과하다. 자연 경제의 해체와 농촌 인구의 감소를 동반하는 자본주의의 전개는 가부장적 질서를 파괴하고 현대 국가를 공개적인 계급 투쟁의 장으로 끌어낸다. 따라서 생산의 실질적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념적 호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이 분출시키는 객관적 동력과 현실적 계급 세력에 주목해야 한다.

 

스트루베가 니콜라이 온의 방법론을 비판하며 제시한 논거들은 객관적·이론적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니콜라이 온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제된 계급 투쟁의 객관적 역동성을 도외시한 채, 국가와 사회가 계급적 이해관계를 사상하여 노동 사회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관념론적 착오에 빠져 있다. 계급 국가의 본질을 외면하고 지배 계급의 도구인 국가에 사회주의적 개조를 호소하는 태도는 순진한 반동적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의 구조적 비판에 담긴 명확한 이론적 요지를 반박하기는커녕, 검열로 인해 상대방의 제대로 된 실질적 반론이 봉쇄된 지면에 의존하여 ‘부적절한 수사’만을 문제 삼는 본말전도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상대의 정당한 비판을 우회하려는 이론적 빈곤함의 논쟁 방식이자 전형적인 수사적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스트루베가 자본주의와 분리된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노동의 사회화를 이루겠다는 구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체제에 의존하는 관념적 구상이다. 니콜라이 온이 스스로 인정했듯, 1861년 이전의 생산 단위는 ‘가구’와 ‘마을 공동체’에 국한되어 낮은 생산성과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개요」, 106~107쪽), 이후 진행된 노동의 사회적 분업 심화는 이러한 고립성을 해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이 파편화된 생산 단위의 한계를 파쇄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노동의 실질적 사회화를 이끌어냈음을 입증했다. 이처럼 자본주의로 촉발된 노동의 사회화의 객관적 역동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 부재한 마을 공동체에 기대어 역행적 구상을 모색하는 것은 니콜라이 온 자신의 이론적 전제와 부합하지 않는 논리적 모순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미 노동을 사회화해온 자본주의가 아닌, 그 해체를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비로소 사회 전반적인 노동 사회화를 성립하게 했던 마을 공동체에 노동 사회화의 근거를 두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인 반동적 공상에 불과하다. 이는 스트루베의 핵심적 논지이자 체계적인 논리 전개의 결론이다. 이에 대한 찬반을 차치하고, 그의 철저한 비판이 객관적 분석과 명확한 전제로부터 도출된 논리적 필연성임을 감안한다면, 이를 단지 ‘수사적 비난’이나 ‘주관적 비난’으로 치부하는 니콜라이 온의 태도는 타당한 반론이 될 수 없다.

 

스트루베가 자본주의적 전개로 촉발된 노동의 사회화와 “공개적 계급 투쟁의 국면을 전망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개진했음에도, 니콜라이 온은 상대를 농민 토지 수탈의 대변자로 왜곡하며 논쟁을 종결하는 비약적 태도를 취한다. 더욱이 검열로 인해 스트루베가 공개적 계급 투쟁에 기반한 세력의 실체를 합법적 출판물에서 상술할 수 없다는 구조적 제약을 포착하면서도 이러한 왜곡을 가한 것은, 니콜라이 온의 논쟁 방식이 객관적 이론 검증을 이탈한 전적으로 ‘부적절한’ 수사적 회피였음을 명증한다.

 

 

부록 3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 논객들이 유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는 검열이라는 제도적 제약 속에서 심각하게 왜곡되고 자의적으로 축소된 형태에 불과하다. 이들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어 변증법적 소유 이행론이라는 표피적 측면만을 마르크스주의의 전부인 양 다루면서, 모든 형태의 착취와 적대를 폭로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을 촉진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적 방법론의의 실질적 핵심과 계급 투쟁의 원리를 완전히 도외시하였다!

 

절대주의 체제의 검열로 왜곡·파편화된 극히 일부의 단편만을 근거로 마르크스주의 전체의 이론적 한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은, 자신들의 무지와 이론적 태만을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의 본질적 특성을 생략한 채 자의적으로 축소된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는, 검열이라는 구조적 한계와 비판 대상의 실질적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소부르주아적 논객들의 분석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계급 투쟁과 자본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적대, 그리고 그 적대의 심화 과정을 포착하지 못하는 이례적인 현상은 러시아의 특수한 지적 지형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혁명적 역할에 대한 자각조차 결여한 채, ‘화폐 경제’나 그 ‘필연성’과 같은 범주를 담아낸 순전한 부르주아적 기획을 내놓으면서도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행태는, 미하일롭스키 식의 비논리적·관념적 사고 방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자의적 왜곡에 불과하다.

 

마르크스 이론의 총체적 가치는 그것이 지닌 “본질적인 비판성과 혁명성”에 존재한다. 이러한 특성은 이론 자체에 유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대 사회의 모든 적대와 착취 형태를 폭로하고 그 역사적 변증법을 규명하여 그 일시적인 성격과 다른 형태로의 변화의 불가피성을 제시하는 한편, 모든 착취의 신속한 종식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임무를 직접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타당성은 엄밀한 과학성과 혁명성이 우연이 아닌 본질적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즉 체계 정립자 개인의 과학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자질의 유기적 결합은, 사회과학의 본래 목적이 현실의 경제 투쟁 속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실천적으로 지원하고 해방하는 데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명제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과학의 직접적인 임무는 진정한 투쟁의 구호를 제시하는 것, 즉 당면한 투쟁을 명확한 생산관계 체제의 객관적 산물로 파악하고 그 불가피성과 내용, 발전 경로 및 조건들을 규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세분화된 모든 투쟁 형태를 세밀히 분석하고, 매 단계의 이행 과정을 추적하며, 특정 국면의 일반적 속성과 모든 착취·억압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철폐라는 총체적 목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투쟁의 구호’를 도출 하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은 현상에 대한 단순한 당위적 규범이나 관념적 비판에서 탈피하고, 현실의 경제적 적대와 계급 투쟁의 객관적 법칙성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적 해방 투쟁에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자유주의 및 급진주의 논객들이 왜곡한 자의적으로 구성된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본래 ‘비판적·혁명적’ 이론을 대조하면,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핵심적 정수를 사장시킨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적 왜곡이 극명히 드러난다. 스스로를 ‘노동 인민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의 필연적 구성 요소인 계급 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도려내어, 실천적 지침으로서의 동력을 상실한 ‘퇴행적 관념론’으로 이론을 격하시켰음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요구와 인민주의 문헌을 비교하면, 인민주의가 보여주는 관념론적 한계와 비자본주의적 공상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인민주의 문헌은 노동 인민의 궁핍을 연구·서술하고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 데 머물 뿐, 농노제를 착취와 계급 적대, 특정한 법적·정치적 구조를 낳은 명확한 경제 구조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지주의 학대와 불의로 치부하였다. 마찬가지로 농민 개혁을 계급 간의 충돌이 아닌 정부 당국의 정책적 실수나 ‘잘못된 경로’의 선택으로 다루었으며, 개혁 이후의 러시아 역시 적대적 생산관계의 전개 과정이 아닌 규범적 발전에서의 탈선으로 서술하였다. 이처럼 현실의 객관적 경제 구조와 계급적 적대를 직시하지 못한 채 궁핍에 대한 관념적 탄식 (한탄)에 빠져드는 태도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탈피하고 생산관계의 법칙성과 계급 투쟁의 불가피성을 규명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소부르주아적 유토피아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공상적 인민주의의 이론적 유효성이 해체되는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현대 사회의 적대적 생산관계와 계급 투쟁을 규명하는 유일한 혁명 이론으로 정립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이 실천적·이론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 대한 공상을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혁명적 원리를 러시아의 구체적 현실에 철저히 적용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현실의 객관적 발전 법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역동성에 기반한 신속하고 선명한 실천만이 혁명 과업의 완수를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민의 벗들’ 지식인층을 향해 인민에게 계몽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실질적 산업을 창출하라고 촉구하는 행태는, 당대 지적 지형의 빈곤함과 왜곡을 여실히 입증한다. 이러한 경향성을 선명히 파악하기 위해 나로도불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나로도프랍치 (Narodopravtsi)’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민의권리당 (Narodnoye Pravo party)이 1894년 간행한 소책자 『시급한 쟁점』에 나타난 관점은, 객관적 생산관계의 법칙성을 외면한 채 지식인의 주관적 열의와 시혜적 역할에 의존하려는 인민주의적 관념론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민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의 확대 상황에서도 노동 인민의 독립적 경제 기반을 보장하는 기존 경제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정치 개혁이 아닌 체계적인 계획 경제 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나로도프랍치는 이러한 관념적 논리를 반박한 후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논지를 이어간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옹호자가 아니며, 그들의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방 감독관 (Zemsky Nachalnik)의 통제 아래 부르주아지의 침범으로부터 ‘계획적인 경제 개혁’을 보호받는 길과, 인민의 조직적 권익 방어가 보장되는 부르주아 정치 정당 기반의 경제 개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인민에게는 후자가 명백히 부합하다. 현재 인민에게서 독자적 경제 구조를 박탈하는 것은 ‘정치 개혁’이 아니라, 인민의 노동에 대한 철저한 착취로 관철되는 부르주아 정책 그 자체이다. 당대 체제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는커녕 입헌국의 농경민과 자본가조차 상정하지 않는 신분적 특권 (social-estate)의 보호만이 존재하며, ‘부르주아 의회 제도’나 독자적 사회 영역은 전무하다. 대신 자신들의 산업적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주의 장벽 구축을 요구하는 나이데노프 (Naidenov), 모로조프 (Morozov), 카지 (Kazi), 비엘로프 (Byelov) 등 대자본가 집단과, 토지 1데샤티나당 100루블에 달하는 무이자 대출을 요구하는 ‘특권 귀족’의 대표들이 국가 기구에 초대되어 경제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인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지방 감독관이나 농업 근로대 기획 역시 관료주의적 절대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수탈 정책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나아가 인민에게 분여지를 부여한 유일한 이유가 세금 납부와 부역 강제에 있음을 공공연히 표명한 볼로그다 주지사의 회람문은, 전제 군주정 및 관료주의적 절대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수탈 정책의 실체를 보여준다.”

 

인민의권리당 (나로도프랍치)이 상정한 ‘인민’과 ‘사회’의 개념이 지닌 관념적 모순에도, 이들의 출범은 ‘조국을 위한 독자적 경로’라는 관념적 공상을 완전히 탈피하고 구체적인 혁명적 요소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민주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뚜렷한 모색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가 모색 단계에 머무르는 까닭은 핵심 논지를 일관되게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세력과의 무차별적 결합을 도모하는 한편,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급진화가 지식인층과의 단절을 초래한다는 오류에 빠져 노동 계급 운동의 무력함을 선언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노동 계급 운동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자본과의 경제 투쟁, 그리고 이와 불가분하게 결합된 정치 투쟁에 기반할 때 비로소 강력한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나아가 이념적 기원이 다른 정당 간의 진정한 동맹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각 조직의 독자성이 전제될 때 비로소 성립하다는 사실 또한 외면되었다. 나로도프랍치는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으로 규정하면서도 (1894년 2월 19일자 「인민의권리당 선언문」), 실제로는 ‘실질적’ 사회주의적 의제를 회피한 채 정치 개혁의 틀 내에 자족하였으며, 이들이 주창한 사회주의는 입헌주의의 재판에 불과했다. 다만 인민주의적 한계를 지닌 나로도불치에서 출발했음을 고려할 때, 정치 강령에 근거하여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 투쟁의 영역을 설정하여 일보 전진을 이룬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나로도프랍치가 현존 경제 체제에 대립하고 민주주의적 이해관계에 결합된 사회 세력과 실질적 유대를 강화하며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관료 체제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로 인해 정치 투쟁의 당위성을 도출하지 못하는 ‘인민의 벗들’의 인민주의는 논리적·실천적 한계를 지닌다. 이들의 주장은 사회주의적 지향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노동 인민이 직면한 억압의 근본 원인과 현존하는 계급 투쟁의 객관적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유토피아적·주관주의적 타협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점을 지닌 인민주의적 관념론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과 과학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실천적 비판에 직면하여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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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의미가 있을 결론

 

 

결론적으로, 다수의 독자가 이미 품었을 법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 과연 이러한 부르주아적 인사들과 긴 지면을 할애해 논쟁하고, 검열을 통과한 자유주의적 주장의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이러한 논쟁은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이는 그들 자신이나 ‘식견을 갖춘’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맹공격으로부터 반드시 유익한 교훈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민주주의자들의 공격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불가분의 단일체를 이루었던 과거 (체르니셰프스키 시대)의 발전 단계가 이미 종식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심오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이론과 실천에 치명적인 해악을 미치고 있으며, 이론적 근거 또한 전무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직시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이념과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을 감행해야 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이념의 태동기와 그 이후의 변모 과정을 검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이러한 역사적 검증을 위한 충분한 사료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하여 1893년 10월 2일 독일 신문 《중앙 사회 정책 신문 Sozialpolitisches Centralblatt》 제1호 Ⅲ편에 게재된 스트루베의 논문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 관하여」와, 니콜라이 온의 공상주의를 비판한 스트루베를 크리벤코가 공격하고 나선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크리벤코는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사고를 ‘전(全)국민적 사회주의 (national socialism)’라는 “전적으로 공상적 본질”로 규정한 스트루베의 분석에 격분하며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마을 공동체와 농민의 경제적 독립을 개혁의 기초로 삼았던 역사 연구자들과 언론 대부분의 입장을 인용하며, 이들 모두를 공상적 사회주의의 피해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냐고” 반문하기에 이른다.

 

‘인민의 벗들’이 보인 이념적 왜곡과 격분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노선의 관념적·비체계적 성격을 모순적으로 입증한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노동 인민의 착취에 맞선 저항이자 착취 체제의 완전한 철폐를 위한 변혁적 투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틀 내에 머무르는 개량적 조치들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분여지 옹호’는 봉건적 수탈의 파생물인 토지 상환금 지불 구조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며, 토지 대금 상환이 아니라 개혁 이전에 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의 무상 보유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가 되었던 농민 토지 소유권의 법제화에 다름 아니다. 또한 관례적 토지 분배에 대한 국가 경찰력의 개입을 반대하는 ‘마을 공동체 옹호’ 역시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계급 분화와 착취 구조를 은폐하는 소부르주아적 공상에 불과하다. 계급적 수탈을 전제로 한 관료적·공동체적 질서를 사회주의와 귀속시키는 것은 어휘의 이념적 범주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결과에 불과하며, 이러한 논리라면 체제 수호적 반동 관료인 포베도노스체프 (Pobedonostsev)마저 사회주의자로 규정해야 하는 비논리적 귀결에 도달할 뿐이다.

 

스트루베는 민중주의자들의 부당한 비판에 대해 조금도 양보할 바가 없다. 그는 인민주의자들의 ‘전국민적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그들이 인민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으로 플레하노프의 「우리의 의견 차이」를 인용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플레하노프는 의심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의 범주와는 접점이 없는 인민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을 격렬히 비판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크리벤코가 이러한 비판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여겨 격분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자신이 지향하는 사조에 대한 스트루베의 정확한 진단을 알고자 했다면, 해당 논문에 담긴 핵심 단락들을 발췌하여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지면에 번역·소개하는 것이 마땅했을 터이나, 이를 고의로 외면한 것은 실로 비논리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인민주의 이념은 그 사회적·이론적 토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조는 장기간 목격되어 온 체제 내적 타협을 도모하는 무색무취의 개혁적 사조로 퇴조하거나, 자본주의 발전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적·실천적 결론을 수용하여 공상주의적 환각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타협적 사조의 전형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러시아 부》의 이론적 주장을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해당 잡지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현실을 인민주의 이념의 파편들과 임의로 결합하려는 파탄된 시도를 보여주며, 그들의 정치적 구상 역시 기존 자본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틀 안에서 소생산자의 경제 상태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개량주의적 목표에 국한되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가장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인민주의가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로 타락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부》가 제안하는 구성의 실체, 즉 이민 규제, 토지 임차, 저리 신용 제공, 박물관 및 창고 설립, 기술 개선, 집단 농장과 공동 토지 경작 등은 봉건지주의 기관지나 금융 자본의 대변지를 제외한 ‘진지하고 존경받는’ 자유주의 언론 진영 전반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나아가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하고 시급하며 체제에 ‘무해하다’는 합의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이러한 견해는 지방 정부의 각종 조사 보고서와 언론 매체 등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경향을 인민주의의 성과로 간주한다면, 그 확산과 관철은 실로 명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확인은 결코 과거의 관념적 의미에 머무르는 인민주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사회혁명적 인민주의가 한낱 기회주의로 타락하고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오로지 소부르주아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게 된 이념적 퇴행의 결과다.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계급 분화 현상은 명백한 정치경제학적 분석 대상이며, 이는 농촌의 ‘착취자’와 ‘농장 노동자 집단’을 정치경제학적 범주로 정식화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의 ‘인민주의적’ 개량 조치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집단 농장이나 공동 경작과 같은 시도 역시 농촌 내부의 계급 분화와 착취 구조라는 근본적 실태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이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유럽 전역에서 감행했던 비참한 개량주의적 시도의 반복이자 파탄될 귀결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예르몰로프 (Yermolov)나 비테 (Witte) 같은 전제 관료들조차 ‘인텔리겐처’가 혁명적 투쟁에서 이탈하여 계급적 대립을 무마하는 화해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한다면,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시도’에 기꺼이 재정적 지지를 보낼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인민주의 이념의 발생 및 이론적 구조, 그리고 그 내적 한계와 역사적 변모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인민주의 이념이 초기에 보여준 이론적 체계성은 농민의 삶에 내재된 특수한 양식에 대한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인민주의는 ‘마을 공동체’ 농민이 보유한 공산주의적 본능과 주체성을 포착하였으며, 이에 따라 농민을 본질적인 사회주의 전사이자 변혁의 주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은 러시아 사회의 구체적·객관적 경제 현실에 대한 실증적·이론적 검증이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공동체적 속성에 기초한 정치적 구상을 실제 사회 운동 및 제도적 실천에 구현할 실천적 기반 역시 극히 취약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론의 발전은 크게 두 가지 경로, 즉 이론적 파악과 실천적 모색을 거쳐 전개되었다. 이론적 작업은 주로 토지 소유 형태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주의자들은 그 내부에서 공산주의의 초석을 확인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방대한 양의 실증 자료가 축적되었으나, 토지 소유권이라는 법적·형식적 형태에 치중한 분석은 오히려 농촌 사회의 실질적 경제 관계를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생산 관계를 고찰할 체계적인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했던 데다, 수집된 자료 역시 농민이 직면한 당면 과제와 실생활의 궁핍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다수 연구자의 관심은 토지 부족, 고율의 소작료, 법적 권리 부재, 농민에 대한 억압 등 현상적 고통을 규명하는 데 국한되었다. 이러한 제반 문제는 풍부한 자료에 기반하여 상세히 조사·분석되었으며, 국가가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계급 국가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중립적 기구라는 전제하에서는 그 개선의 필요성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를 계급적 관점이 아닌 ‘설득의 대상’으로 바라본 순진무구한 연구자들은 구체적 사실에 몰두한 나머지, 경제 전반을 규정하는 농촌의 기본 정치경제 구조를 간과하였다. 그 결과, 사회주의적 변혁이 아닌 기존 경제 체제를 주도하는 계급, 즉 주어진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자본을 축적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급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는 모순에 도달하였다. 착취의 철폐를 위한 제도를 규명하고자 시작된 이론적 시도가, 모순되게도 착취 체제에 기반을 둔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개량주의적 구상으로 귀결된 것이다!

 

실천적 혁명 운동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농민의 공산주의적 본능에 대한 맹신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고 ‘인민 속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이 과정에 착수했으나, 현실은 농민의 본성이 공산주의적일 것이라는 발상의 단순함만을 각인시켰다.

 

결국 이들은 계몽 대상인 농민이 아닌 전제 정부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모든 역량은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되었으며, 이 투쟁은 주도적인 지식인 계급에 간혹 노동자가 가담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초기 투쟁은 인민이 사회주의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권력 쟁취를 거쳐야만 정치적·사회적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이론은 타당성을 상실했고, 정부에 맞선 나로드니키의 투쟁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급진주의적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그 활동 역시 출발점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이 경우 역시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강령이 도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이 과정이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한계는 명확히 확정되어 있다. 인민주의의 이러한 전개 과정은 그 이념이 농민 경제를 특수한 공동체적 체제로 규정하는 허구에 기초하고 있었던 만큼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현실에 직면하자 그 허구는 해체되었으며, 농민 사회주의는 소부르주아 농민층의 급진적·민주적 요구를 대변하는 창구로 전환되었다.

 

크리벤코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막연한 선의만 가득할 뿐 지속적인 실천력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남부 러시아에서 농민에 대한 정서적 애정과 인도주의적 호의를 베풀며 유럽의 제도와 노동자 연대를 전파하던 젊은이들의 사례를 제시한다. 반면, 동일한 지역에는 아무런 인도주의적 수사 없이 냉철하게 일했던 독일인 정원사 슈미트가 존재했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농민에게 실질적인 포도 재배 기술을 전수하여 연간 75~100루블에 이르는 소득을 올리게 해준 슈미트는 농민들에게 유용한 존재로 남은 반면, 막연한 선의 외에 어떠한 실질적 결과도 제공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청년들은 농민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사례는 농민의 공산주의적 본능에 기대어 시혜적 호의만을 베풀던 초기 인민주의의 공상적 실천이 현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계급적 조건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제시된 구절은 1869~70년경, 인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선진적 조직인 제1인터내셔널을 러시아에 도입하고자 도모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크리벤코의 설명은 다소 지나친 편파성을 띠고 있었으며, 이에 그 스스로도 “슈미트의 행위가 정당했다거나 결정적이었다기보다 우연적이고 하찮은 시도였음에도 지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원인을 짚어보고자 했을 뿐”이라는 유보적 단서를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는 시혜적 호의에만 치우친 초기의 공상적 실천이 현실의 경제적 효과성 앞에서 무력했음을 반증하는 또 다른 비논리적 변명에 불과하다.

 

제시된 구절은 극히 모호한 유보적 설명에 불과하나, 핵심은 그 모호함 자체가 아니라 필자가 두 활동 유형 간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를 간과한 채 일방의 실패와 타방의 성취를 개별적으로 대비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는 동시대 민주주의자의 과념적 외관과 그 한계를 명확히 규명해 주는 핵심 지점이다.

 

농민에게 ‘유럽의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를 선전한 청년들은 기존 사회 구조를 근원적으로 변혁하려는 의도를 지녔으며, 착취와 억압을 낳는 동시대 체제에 맞서 농민들을 사회혁명의 주체로 결집하고자 했다. 반면 ‘슈미트 씨’는 전문가로서 개별적이고 실무적인 업무 처리를 도왔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질적 목적이 정반대인 두 활동 유형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건물을 해체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건물의 유지·보강 작업과 단순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왜곡된 접근이다.

 

올바른 논리적 분석이라면 인민 속으로 들어가 혁명을 도모했던 청년들의 실천이 왜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즉 ‘농민층’을 피착취 노동 인민의 단일한 대표자로 간주했던 전제 자체가 오류였는지, 혹은 봉건적 잔재로서의 농민 전체가 이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분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규명했어야 한다. 한마디로 종래의 사회주의 이론과 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 체계를 정밀하게 검토했어야 함에도, 크리벤코는 “슈미트 씨”의 개량주의적 노력이 ‘확실히 필수적’이었다는 비논리적 정당화에 골몰한다. 그러나 포도밭 투입으로 연간 75~100루블의 소득을 올리게 해준 것을 인민주의적 사회혁명과 동일 선상에 놓는 판단은 체제 수용적 개량주의에 불과하다.

 

크리벤코는 농민 개인이 포도밭에 투입하는 행위는 고립된 활동에 불과하지만, 이를 다수가 수행할 경우에는 확산된 집단적 활동이자 소규모 노동을 실질적이고 적절한 노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A. N. 엥겔하르트 (Engelhardt)가 자신의 사유지에서 인산 비료를 도입한 데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도 이를 보급했던 사례와 동일한 연장선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관념적 민주주의자가 지닌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소생산자의 기술적 개선이나 부분적 조직화를 사회적 변혁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농촌 내부의 계급 분화와 생산관계의 근본적 모순을 외면한 채 체제 내적 개량에 안주하려는 소부르주아적 착각을 재확인할 뿐이다.

 

농민 개혁에 대한 체르니셰프스키의 사례는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 지향이 자본주의적 개량주의적 조치와 타협할 수 없었던 이념적 진통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전제정의 검열 아래 개혁의 가식적 본질을 직접 고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회적 표현으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피착취 상태에 놓인 농민에게 제공되는 개량적 시혜적 조치란, 근본적인 소유권과 생존권이 담보되지 않은 채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는 가혹한 식사와 같다고 지적한다. 조건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소유권 논의나 명목상의 보호 조치는 피지배층의 몰락을 가속할 뿐이며, 이러한 지배 질서 내적 개량에 몰두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의 본질을 왜곡하는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다.

 

결국 이 우회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본주의적·관료적 질서와 타협하여 개량주의로 퇴행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근본적인 체제 변혁 없이는 어떠한 소부르주아적 조치도 인민의 실질적 해방을 가져올 수 없음을 입증한다.

 

체르니셰프스키가 농민 개혁의 실상과 계급적 적대 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혁명적 이론으로 정식화한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전제정의 가혹한 검열 아래에서도 체르니셰프스키는 우회적 수사를 활용하여 혁명적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했다. 나아가 검열의 제약이 없는 불법 저술 영역에서는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 언어로 지배 계급의 개량주의적 기만을 고발했다. 그는 대표작 「서문을 위한 서문」에서 자신의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인 불긴 (Volgin)의 입을 빌려, 지주 계급이 주도하는 개혁의 기만성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일갈한다.

 

“지주들의 정당의 손에 농민의 해방을 맡기시오. 그다지 별 차이도 없을 테니까.”

 

지주 정당이 농민에 대한 토지 할당 자체를 반대하므로 개혁의 결과에는 막대한 격차가 존재할 것이라는 논쟁 상대의 반론에 대해, 그는 불긴 (체르니셰프스키)는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반박한다.

 

인민주의자들의 관념적 개량주의와 그 소부르주아적 본질을 비판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논지와 당대 정세 분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니, 차이는 별로 크지 않고 무의미할 정도일 거요.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 격차는 엄청나겠지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서 물건을 가져가는 것과 그의 수중에 그대로 두는 것은 분명 격차가 있겠지만, 물건을 가져가면서 그에게 대금을 치른다면 완전히 똑같은 셈입니다. 지주 정당과 혁명주의자들의 구상 간의 유일한 격차는 전자가 더 단순하고 시간이 짧게 걸린다는 것뿐입니다.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더 나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불필요한 요식 행위가 줄어든다면, 십중팔구 농민들의 부담도 덜할 겁니다. 돈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살 것이고, 돈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사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땅을 사라고 강요하는 건 그들을 몰락시킬 뿐입니다. 토지 상환금을 내리는 건 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농민 개혁이 막 도입되던 당시에 (당시 서유럽에서조차 그 적절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 부르주아적인 본질을 이토록 명확히 간파한 점은 체르니셰프스키의 비범한 정세 혜안을 입증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와 ‘국가’가 노동 인민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으며, 농민층의 몰락과 수탈이 이들의 주도로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음을 파악한 점 역시 마찬가지다. 나아가 그는 계급적 적대 관계를 은폐하는 전제정 정부의 존재야말로 노동 인민의 생존 조건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근본 요인임을 명확히 규명하고 있었다.

 

제시된 구절은 전제정 정부의 위선적인 타협책과 지주 계급의 이해관계를 규탄하고, 개혁의 기만적 본질을 폭로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낸다.

 

불긴은 “농민들이 토지 없이 해방되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봉건 지주들이 절대주의 정부의 타협책 뒤에 숨어 이해관계를 가리는 위선을 버리고, 차라리 그 본색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계급적 대립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내는 데 부합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지주들이 주도하는 농민 해방의 허상에 동요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지적하며, 지배 계급의 기만적인 개량주의 조치보다 그들의 실질적 이해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더 유효하다”고 결론 내린다.

 

다음은 『수신인 없는 편지들』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이들은 농민 해방을 주장하나, 이를 완수할 주체적 역량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역량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역량이 미흡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과업에 착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사태의 귀결은 자명하다. 이들은 역량을 초과하는 농민 해방 작업에 착수할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명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는 과업의 파탄과 동시에 참혹한 귀결로 이어질 따름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이 같은 진단은 역량과 조건이 미비한 상태에서 단행되는 개량주의적 조치가 초래할 파국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러시아의 봉건 관료제 국가가 농민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본질, 즉 봉건적 농노 소유주의 특권을 타도하는 대신 자유주의자와 지주의 이해관계를 타협시키는 기만적 조치 (상환금 납부 방식의 토지 매입)에 그칠 것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타협책은 안위와 자유라는 허상을 유포해 농민을 기만하는 과정이 수반되며, 궁극적으로는 농민을 몰락시켜 지주 계급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파악했다. 이에 따라 그는 개혁안에 강력히 저항하며 그 실패를 촉구했다. 나아가 전제정 정부가 자유주의자와 지주 사이의 줄타기 속에서 파국을 맞이하여, 러시아가 은폐된 적대 관계를 탈피하고 공개적인 계급 투쟁의 국면으로 진입하기를 지향했다.

 

그러나 체르니셰프스키의 비범한 혜안이 현실화되고 지난 30년간의 역사가 그 모든 경제적·정치적 착각을 가차 없이 폭로한 현재,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미화하며 그것을 ‘인민적’ 생산의 허용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이들은 개혁에서 노동 인민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들을 설득할 개연성의 근거를 도출하고자 시도한다. 농민 개혁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이들 민주주의자가 얼마나 철저히 부르주아적으로 변질되었는가를 명증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으며, 오히려 핵심적 본질조차 망각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비교를 위해 1872년 《조국 연보》의 사례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서 본고는 ‘위대한 해방’을 표방한 개혁 이후 첫 10년간 러시아 사회가 이룩한 자유주의적 과실, 즉 금권 정치의 이해관계를 은폐한 성과를 다룬 「금권 정치와 그 토대」의 구절들을 인용한 바 있다.

 

해당 논고의 필자는 과거 개혁을 비판하며 태평했던 옛 시절을 회상하던 이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새로운 질서에 만족하며 환호한다”고 서술했다. 나아가 “문학 자체가 금권 정치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민주주의’를 빙자한 채” 금권의 이해관계와 열망을 옹호하는 양상을 고발한다. 필자는 개혁이 가져다준 새로운 질서의 명백한 부르주아적 적대성에도, 노동 인민을 제외한 ‘사회’와 ‘지식인 계급’의 대표자들이 이에 안주하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인민 대중은 자유주의가 노동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한 ‘취득의 자유’를 은폐하는 도구에 불과함을 자각하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가치 있는 대목은 사회주의적 비판의 본질인 ‘반대’ 그 자체에 있다. 다만 금권 정치가 민주주의의 탈을 쓴 데 대한 이러한 비판은, 농민 개혁 내부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지식인 계급 및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부정하는 해당 잡지의 전반적 논리와는 모순된다. 이들은 러시아 내 자본주의적 토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실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집단의 적대적 징후를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국 연보》가 계급적 적대성을 포착하고 부르주아 자유주의 및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투쟁한 점은, 적대적 본질을 완전히 규명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체제 자체와 맞서고자 했던 선구적 사회주의자들의 대의명분과 부합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각에서 이는 역사적 성격을 띤다. 반면 오늘날의 ‘인민의 벗들’은 이러한 적대 관계를 망각한 채, ‘민주주의의 외피’ 아래 숨어 있는 부르주아지의 본질을 포착하는 비판 의식마저 상실했다.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반동적 위치에 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계급적 적대 관계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투쟁이 아닌 유화적인 ‘개량’ 활동만을 기만적으로 주창하고 있다.

 

1860년대에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며 금권 정치를 대변했던 러시아 자유주의자가, 1890년대에 이르러 단지 우려와 근심을 표명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가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기존의 사회적·경제적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대규모 ‘획득의 자유’, 즉 거대한 신용, 대자본, 기술 개혁을 독점할 자유가 소규모 신용과 자본, 소규모 기술 개량을 취득할 자유로 대체되었다고 해서 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적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견해를 바꾼 것은 사회 질서의 근본적 변화나 시각의 급진적 전환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교훈을 망각한 것에 불과하다.

 

과거 선배들이 지녔던 혁명적 특성, 비록 현실에 대한 이론적 한계와 공상적 한계가 존재했음에도 지니고 있던 계급적 적대성에 대한 비판 의식을 상실한 ‘인민의 벗들’은 지난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지난 30년간의 러시아 정치·경제사는 이들에게 적절한 비판적 자각을 제공했어야 함에도, 이들은 역사적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1860년대’ 당시 봉건 지주들의 지배력은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하며 점차 몰락하고 있었다. 지주 계급의 후퇴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발전과 과학, 우수성, 불의에 맞선 투쟁, 인민의 권익과 양심, 인민의 힘 등을 다룬 자유주의적 미사여구가 유포되었다. 이는 오늘날 불황의 시기에 급진적 불만 세력들과 자유주의 입담꾼들이 사교계와 기념일 만찬, 잡지와 신문에서 늘어놓는 언사들과 부합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당시 러시아에 ‘공개적인 계급 투쟁의 선명성’이 완전히 확보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수준은 후대보다 명확했다. 따라서 계급 투쟁 개념을 확립하지 못한 채 엄혹한 현실 직시보다 공상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노동 인민 관념론자조차 자유주의가 금권 정치의 외피에 불과하며, 새로운 체제가 부르주아적 질서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봉건 지주들의 무대 퇴장이 새로운 질서의 (비교적) 전형적인 형태를 가리지 않고 드러나게 한 결과다.

 

그러나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금권주의적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데 그쳤을 뿐, 이를 이론적·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구조 내에서 이러한 현상의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과거 봉토 제도 대비 새로운 체제가 지닌 역사적 진전 및 체제 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 역시 파악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유’와 ‘인간성’을 내세운 체제에 ‘조소’를 보내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 부르주아적 성격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며 ‘인민의 체제’라는 자발적 이행에 대한 기대를 유지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후의 역사는 이들에게 또 다른 사회적 관계의 실상을 제시했다. 개혁으로 인해 중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완전히 와해되지 않은 봉건 지주층은 (한동안) 세력을 재집결하며 부르주아적 관계와 대비되는 봉건적 수탈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아가 약탈적 반동의 형태로 나타난 현실은 민주주의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시각을 사회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대신 자유주의 진영으로 퇴보했고, ‘제도권 언론’이 자신들의 논리를 수용함을 자긍심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기존 관념적 유토피아의 비현실성을 명증하게 폭로했다. 인민의 특수한 삶의 양식이나 사회주의적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일시적 현상에 의존하던 과거의 관념론적 틀은 설 자리를 잃었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한다면 러시아에는 부르주아적 관계와 소멸해 가는 봉건적 관계 외에 다른 사회·경제적 경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 계급 운동을 거치지 않는 사회주의 이행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전적으로 망각했다. 결과적으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순진한 공상은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라는 온건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완전한 이념적 퇴행으로 귀결되었다.

 

오늘날 노동 인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은 명백히 반동성을 띤다. 해당 이론들은 현재 러시아 사회의 구조적·경제적 적대 관계를 은폐하고, ‘향상’이나 ‘개량’ 등과 같은 표피적 조치만으로 사태를 개선하거나 계급적 타협과 야합을 이룰 수 있다는 기만을 유포한다. 나아가 국가를 중립적 기구로 미화하며, 피착취 인민에게 실질적 수혜를 제공할 수 있는 시혜적 주체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그 반동적 본질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해당 이론들은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 스스로의 주체적 투쟁과 그 필연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동성을 띤다. 예컨대 ‘인민의 벗들’은 자신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부》 편집실을 방문한 한 기술자가 ‘자본주의의 인민 삶 도입’을 위한 ‘구상’을 성립했다는 사례는 이들의 관념적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소부르주아적 이념 및 이론 체계와 단호하고 완전하게 결별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해당 투쟁 과정에서 도출해야 할 핵심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이다.

 

본고에서 소부르주아 이념과의 단절을 주장했을 뿐, ‘인민의 벗들’이나 그들 개별 이념 자체와의 단절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호 연관성이 부재한 대상과는 단절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의 벗들’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념에 존재하는 여려 경향 중 하나를 대표할 뿐이다.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념 및 잔존하는 러시아 농민 사회주의 이념 전반과 단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는 해당 이념의 대리인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기여하기는커녕 반(反)마르크스주의 운동에 휩쓸려 소부르주아적 이념을 유달리 풍부하고 선명하게 표명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들을 동시대 사회주의 및 러시아의 객관적 실상과 비교해보면, 그 이론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그리고 정당한 이론적 토대의 흔적을 완전히 상실한 채 한심한 절충주의와 명백한 기회주의적 개량 강령의 단계로 전락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락이 잔존하는 사회주의 이념 전반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로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특정 인사들의 개인적 과실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본고는 잔존하는 소부르주아 이론들의 퇴화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증명하는 데 주력해 왔다. 특히 개별 인사에 대한 비판은 극력 배제하고, 잔존 러시아 사회주의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신조를 비판하는 데 대부분의 논지를 할애했다. 본고가 해당 신조들을 부정확하게 규정했거나 중요한 대목을 누락했다고 판단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정중히 요청하고자 한다. “신사 여러분, 부디 귀하들이 직접 이를 명확히 밝히고 충분히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실상 사회민주주의자들만큼 사회주의자들과 논쟁의 계기를 반기는 이들도 없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이 직접적이고 단호한 도전을 감행하지도 않는데, 그 ‘논박’에 일일이 응답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진부한 자유주의적 미사여구와 속물적 훈계의 의도를 굳이 파악하려 드는 노력이 과연 무익한 것인가?

 

해당 이념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소상히 밝힐 임무가 오롯이 그 신사 여러분에게 있다는 점이 우리의 과오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본고가 논하는 바는 사회주의와 결합된 소부르주아 이념과의 단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검토한 소부르주아 이론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자임하는 한 무조건 반동적이다.

 

그러나 제시된 이론의 내부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전혀 부재하다는 점, 즉 착취의 구조적 원인을 해명하는 데 실패하여 노동 계급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파악한다면 이에 대한 대응 방식 역시 전환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 및 그 구성에 대해 노동 계급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규명할 수 없다. 특히 거대 부르주아지와 미발달된 소부르주아지 간의 적대로 인해 이러한 양면성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적 잔재와 중세적 농노제 존속에 맞서 일반적 민주주의 요구를 내세우는 한에서는 혁명적 성격을 띤다. 반면 자신들의 특수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보존하고자 자본주의적 발전의 대세를 지연시키거나 역행시키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반동적이다. 일례로 분여지의 양도 불가 방침을 비롯해 농민 감독을 목적으로 수립된 수많은 반동적 기획들은 노동 인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상은 인민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해방을 향한 계급 투쟁을 저해하는 역할에 그친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구상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해당 이론들이 지닌 기만적인 사회주의적 성격을 배격하고 그 반동성에 맞서 투쟁하는 한편, 그 안에 내포된 민주주의적 요소의 의의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소부르주아 이론 체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해서 소부르주아 구상에 포함된 민주주의적 요구까지 배척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민주주의적 요구를 한층 철저하게 주장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은 다음의 사례에서도 명확히 확인된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론의 상투적 근간을 형성해 온 세 가지 주요 논지는 바로 토지 부족, 과도한 세금과 부담금, 그리고 관료적 폭정이었다.

 

이러한 폐단에 대한 폐지 요구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이는 강탈과 착취의 본질적 구조를 해명하지 못하며, 해당 폐단의 제거 역시 자본의 노동 억압 구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적 잔재의 철페는 노동 인민의 가중된 억압을 덜어주고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직접적 투쟁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요구로서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일반적인 지불금과 세금 문제는 본래 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 특수한 중요성이 부여되는 사안이나, 현재 러시아 농민이 부담하는 지불금은 농노제의 잔재라는 성격이 짙다. 예컨대 토지 상환금 및 농민과 소도시 주민에게만 부과되고 ‘상류층’에는 면제되는 차별적 세금은 즉각적·무조건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경제적·정치적 정체를 야기하는 이러한 중세적 관계의 유물을 철폐하는 요구에 언제나 적극 동참할 것이다.

 

토지 부족 문제 역시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농민 개혁 당시 단행된 토지 수탈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농민을 수탈한 조치였으며, 직·간접적 방식으로 반동적 지주 세력의 기반을 강화해 왔음이 명백하다. 이에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에게서 수탈된 토지의 즉각적인 반환과 봉건적 토지 소유권의 완전한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토지 국유화와 병행되는 토지 소유권의 폐지는 형성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적 농업 관계의 발전을 촉진할 뿐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지는 않으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토지 귀족의 지배력을 해체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적 조치로서 지대한 의의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농민의 권리 박탈을 수탈과 착취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유자코프나 V. V. 일파와 같은 관념론자들에 불과하다. 관료 기구가 가하는 농민 억압은 단순한 권력 남용에 국한되지 않고, 농민을 귀족 세력에 복종해야 할 ‘신분적 하위 집단’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농민의 공민적 권리는 예외적인 시혜로만 허용되며 (예컨대 이주), 하급 관리조차 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취급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의 완전한 공민적 권리 쟁취, 귀족적 특권 및 관료적 감독의 철폐, 그리고 농민의 자치적 결정권 보장을 지체 없이 지지하고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는 여타 세력보다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해야 하며, 실천 활동에 있어 민주주의가 지니는 중대한 의의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서유럽과 비교할 때 중세적·반(半)봉건적 잔재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잔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을 억압하는 명백한 기제로 작용하며, 모든 계급의 정치적 의식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다. 따라서 절대 왕정, 신분제, 관료 체제 등 봉건적 제도 전반에 맞선 투쟁이 노동자 계급에게 극도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제도들이 지닌 반동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즉, 봉건적 제도들이 자본의 노동 탄압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노동 인민에게 어떠한 체계적 압박을 가하는지, 자본을 전산업적 중세 형태로 파편화하여 머물게 함하여 해방 투쟁에 어떠한 엄중한 난관을 초래하는지를 명확히 자각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반동의 보루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봉건적 잔재가 존속하는 한,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받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지속적 투쟁 대신 자포자기식 불만에 그치게 될 것이며, 노동 계급 승리의 필수 조건인 이들의 결집과 지지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 왕정과 반동적 신분제 및 제도에 맞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싸우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적인 과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과제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하며, 봉건적 제도를 폐지하는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맞선 계급 투쟁을 촉진하는 필수 수단임을 끊임없이 밝혀야 한다. 나아가 노동 인민의 주적인 자본에 맞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민주주의적 요구의 실현이 선행되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은 본래 민주주의적 형태를 띠나, 특히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해 반동 세력과 결탁하여 노동자 운동의 진전을 저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제반 혁명 정파들의 ‘연합’ 및 ‘동맹’ 경향에 대해 사회민주주의가 취해야 할 입장은 충분히 정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해당 경향은 다소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특정 단체들이 구체적으로 합의된 강령을 바탕으로 ‘동맹’을 제의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 제안이 존재했다면 이는 당사자 간의 교섭으로 해결될 구체적 과제였을 것이며, 범파벌적 ‘연합’이라는 경향성 자체가 형성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실제하는 이유는 기존의 이론적 토대를 상실한 채 표류하는 세력들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던 전사들이 입각해 온 기존 이론의 해체는 투쟁에 필수적인 결속과 조직의 조건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따라 ‘연합 세력’과 ‘동맹 지지자들’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이론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자유 요구만으로 강령을 축소하고, 사회주의적 과제와 비사회주의적 과제를 포괄하는 제반 핵심 사안들을 은폐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결합을 향한 이러한 순진한 오류는 실천적 검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연합’ 경향이 전투적·혁명적 인민주의가 정치적 급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최종 단계를 체현한다는 점이다. 상기 기치 아래 집결한 비(非)사회민주주의 혁명 정파들의 연합은 러시아 예외주의라는 이념적 편견을 탈피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강령이 확립될 때 비로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이러한 민주주의 정당의 출현을 운동의 진전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반(反)인민주의 투쟁을 더욱 심화하여 비과학적 전제를 철저히 분쇄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결집하여 여타 정파들의 민주주의 정당 창설을 견인해야 한다.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조직화를 필수 과제로 확립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이들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적 제도에 맞서는 민주주의자들의 제반 투쟁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공조할 것이다.

 

인민주의가 가장 통속적인 소부르주아 급진 이론으로 타락했다는 사실 (‘인민의 벗들’은 이에 대한 매우 명확한 실증이다)은 그간 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본질과 전체 노동 인구 해방을 이끌 전사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닌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은 채, 단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관념만을 유포한 자들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덕분에 부르주아 관념론자들조차 정치적 자유 요구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회적 경제의 부르주아적 구조가 아닌 토지 부족, 상환금, 또는 관료적 폭정으로 설명되는 한, 가치 형태와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을 노동자들에게 해명하는 작업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계급 투쟁 이론 역시 자본주의의 주입 과정이나 정착된 공장 노동자 계급의 상태는 물론, 인민 대중과 고용주 간의 적대적 관계조차 규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실천적 의의를 갖지 못한다.

 

인민 대중이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직행할 수 있다고 본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 귀결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혁명적 역할을 수용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노동자에게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것은, 실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리 투쟁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 주되게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에 기여할 뿐, 노동자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지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투쟁 조건을 한층 유리하게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 체계를 거부하면서도 소박한 확신에 따라 노동자 대중에게서만 혁명적 요소를 포착하고 소요를 자극하는 사회주의자들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대목이다. 이들 사회주의자의 이론은 실천과 심각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으로 조직해야 할 결정적 과업으로부터 방해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 적대가 농노제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시기, 농노제가 지식인 계급 전반의 일치된 일치된 반발을 자극하여 그들 내부에 특수한 민주적 측면이 존재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 이념적 간극이 크지 않다는 착각을 형성했던 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어 과거 자본주의의 토대를 부정하던 이들조차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로 진입했음을 인정하는 현 상황에서 그러한 착각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오늘날 ‘인텔리겐처’의 성격은 물질적 가치 생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만큼이나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가운데,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세를 불리는 출세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의 시종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체제의 구조적 원리를 숙지한 ‘지식인’들은 이를 그저 자족하며 수용할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의 부도덕성을 입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며 비난과 도덕적 훈계를 시도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인텔리겐처로 하여금 자신의 부르주아적 본성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이러한 순진한 시도는,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인민의 몰락과 빈곤, 실업, 대중적 기아를 들어 부르주아지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어리석은 행동과 다름없다. 자유주의·급진주의 ‘지식인’들은 발전, 과학, 진실, 인민이라는 미사여구를 남발하며, 이념적 균열이나 회의, 낙담, 무관심 없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의로 가득했던 1860년대의 종언을 한탄할 뿐이다.

 

특유의 단순함으로, 이들 신사들은 1860년대에 존재했던 의견 일치가 당시의 되돌릴 수 없는 물질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당시는 농노제가 사회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억압하던 시절이었다. 소액의 자본을 축적해 안락한 삶을 도모하던 농노 관리인이 존재했는가 하면, 지대를 수탈하고 간섭을 일삼는 지주에 맞서 자기 영농 활동에 전념하고자 했던 기업형 농민도 존재했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장원 농노와 빈곤 농민은 상인에게 노예처럼 매각되었고, 이는 상인 제조업자와 노동자, 수공업자와 하청인 모두에게 중대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들 모두를 결속시킨 유일한 유대 요소는 농노제를 향한 그들의 공통의 적대감이었다.

 

그러나 일러한 외견상의 일치 이면에서는 이미 극심한 경제적 적대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적대적 구조가 거대하게 발전한 오늘날에조차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달콤한 관념적 착각에 매몰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의 조건이 과감한 투쟁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과거의 단합에 연연하기보다 부르주아지의 예속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 진영에 결집해야 한다.

 

‘인민의 이익’이라는 가공된 명분을 배격하고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면, 제반 개량주의적 조치로 소생산자 경제 (“인민 경제”) 를 보존·육성하려는 철저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현존하는 지배적 생산관계하에서 이러한 개량적 조치가 도출한 유일한 귀결은 프롤레타리아화의 가속화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인민의 벗들’은 지식인 계급의 계급적 본성을 폭로하고 러시아 소생산자 역시 소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규명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오랫동안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적 착오의 청산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존 이론을 왜곡하고 전락시킨 결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해당 구상을 재정립·수정하거나 비과학적 교조로 배격하는 엄중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벗들’은 부유 농민의 개선된 농기구 도입을 ‘소생산자 체제’의 결실로 포장하고,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와 개량책을 들먹이며 위선적인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지식인 계급은 자신들의 이념적 착각을 포기하고, 관념적 공상이 아닌 현실의 실질적 발전과 사회경제적 관계를 지지 기반으로 삼을 때 비로소 유의미한 실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의 이론적 과업은 러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경제적 적대와 그 상호 연관성, 그리고 역사적 발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치사나 법률 체계의 특성, 혹은 기존의 이론적 편견으로 은폐되어 온 계급적 적대 구조를 드러내고, 이를 명확한 생산관계 체계로서 일관되게 제시해야 한다. 즉, 현 체제하에서 노동 인민에 대한 수탈과 착취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함을 입증하는 동시에, 경제 발전 자체의 동학 내에서 현 체제를 변혁할 실천적 동력을 도출해야 한다.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 연구에 기초한 이러한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에 부합하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며, 과학적 조건을 충족하는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저항 의식이 자각될 때마다 이들을 사회민주주의적 투쟁의 장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이 이론이 더욱 엄밀하게 정립될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은 한층 신속히 확대될 것이다. 현 체제의 가장 교활한 옹호자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적 각성을 막을 수는 없다. 현 체제 자체가 생산자에 대한 극심한 수탈과 프롤레타리아 및 예비군의 지속적 증대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이는 사회적 부의 축적,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 자본주의적 노동의 사회화와 병행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 수반되는 제반 과제가 아무리 방대할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완수해 낼 것이다. 실천적 과정 전반에 대한 엄밀한 정식화를 요구하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인 유물론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으며, 이를 구현한 사회민주주의가 거두고 있는 성과가 이를 보장한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는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진영을 크게 흔들어 놓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적 활동이 지니는 필요성과 중요성, 그리고 그 방대함을 강조한다 해서 이를 실천적 활동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론적 완성을 이유로 실천을 유예할 까닭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을 봉대하는 자들이나 공상적 사회주의 추종자들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기존의) ‘발전 경로’(와) 구별되는 ‘새로운 경로’를 창안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실천 활동은 천재적 철학자가 그러한 경로를 제시할 때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으며 경로가 제시된 이후에는 단지 그 이행을 안내하는 역할로 축소될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자의 본래 임무가 현실의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을 가로막는 실질적 적들에 맞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념적 지도부로 복무하는 데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의 저명한 명제로 수렴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이론적 활동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듯, 이론을 실천적 대의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연결하고 그 결과를 노동자 대중에게 보급하여 이들의 조직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이 역시 무의미하다.

 

이러한 과업의 제시는 사회주의자 정파들이 자주 함몰되는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이론의 최고이자 유일한 검증 기준이 실제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과의 부합 여부에 귀속되는 조건하에서는 교조주의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 촉진이 본연의 과제로 정립되어 ‘지식인 계급’ 내부에서 특정한 지도자 집단을 인위적으로 추대할 필요성이 사라질 때 종파주의 역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제반 이론적 사안을 둘러싼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의 견해차에도, 이들이 견지해 온 실천적 정치 활동의 기본 양식은 당파의 성립 이래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왔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치적 활동은 러시아에서 노동 계급 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다. 그 핵심은 현재 이론적 지도 없이 시위와 ‘폭동’, 파업을 간헐적으로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운동을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러시아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투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아가 착취자들에게 수탈당한 권리를 쟁취하고, 노동 인민에 대한 억압에 기초한 사회 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실천적 활동의 근간에는 러시아의 피착취 노동 인민을 대변하는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주체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적 전제가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농노제 잔재를 제외하면 사실상 사실상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성을 입증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대규모 기계 공업에 집적된 착취는 중세적·법적 장치로 은폐된 소규모 착취와 달리 자본 대 노동의 적대적 관계를 명백한 형태로 드러낸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에 억압받고 있음을 직시하게 되며, 이에 맞선 투쟁은 필연적으로 개별 자본가가 아닌 전체 부르주아 계급에 대응하는 조직적·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선봉적 위상은 공장 노동자를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한 주체로 정립시킨다. 대규모 산업만이 투쟁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생산 수단이 산재하고 소유와 착취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저발전 부문에서는 생산자의 파편화와 소부르주아적 의존성으로 인해 계급적 결속과 단일한 조직화가 저해된다. 반면 대규모 자본주의는 혁명적 단결과 정치적 각성의 토대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천적 역량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집중되어야 한다. 노동 계급의 선진적 대표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파편화된 경제적 투쟁을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전환할 공고한 조직을 건설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민주주의적 세력의 최선두에서 전제정을 타도하고 정치 투쟁의 넓은 길을 따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로 이끌게 된다.

 

1894년 봄과 여름에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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