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의 사회
지금 다루는 저작들은 종종 실패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사실상 소외된 자들을 대변할 정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재활용되지도 못하는 쓰레기처럼 구겨지거나 처분될 위기에 놓였으며, 심지어 녹슨 건전지와 같이 활용되지도 못한 채 해고되거나, 부득이하게 사업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반복된다. 우리에게 ‘어두운 시절’은 수많은 탈락을 겪거나,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일들이 발생한다. 성공의 관점에서 볼 때 실패로 규정된 탈락의 연속이 거대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잊기가 대단히 쉽다. 성공한 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처럼 다뤄지기도 하고, 당사자들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쉽게 놓치 못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정치는 이제 고였다. 경력을 답습한 고인물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샛별을 외면하여 경제로 학살하는 일들을 자행하면서도, 그들 모두는 존경과 찬사를 받는다. 이미 의회 정치의 기능은 실종된 지가 오래됐다. 정부 여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이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펴는 정책마저 소수의 막대한 임금과 자금으로 유지되고 거대한 굴레에 속박되어 너도나도 이 경쟁의 정치판에 뛰어들고 만다. 정치가 고통을 겪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자들을 위해 자리매김한 것은 이러한 고인 정치가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적인 현상이다. 모두 초심을 잃었다.
기술 분야에서 기계도 오류를 저지른다. ‘디버그’란 용어는 이러한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물질이 쌓인 기계처럼, 기술적 실수는 현상에 대한 오류를 파악할 수 있다. 고도의 문명과 기술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이보다 못한 인간들은 더 많은 경쟁으로 편을 갈라 서로를 지배할 생각만 하고 있다. 성공에 대한 갈증은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윗물이 고였으니 아랫물은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호소로도 부족한 탈락의 세상으로 인해 지금의 소외된 이들은 고통에 침묵할 이유만 더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오늘도 새로운 면접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탈락이 예정된 면접을 겪고 있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을 탓했으나, 지금은 이제 이 탈락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긴다. 모든 일도 처음부터 잘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패라 불리던 탈락의 연속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이룬다. 단추와 신발끈 묶기부터,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기, 사람과 관계를 맺기 등, 이 모두가 적응과 탈락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성공의 안락이 주는 기대와 편의가 늘상 새로운 시각에 대한 불안으로 자리매김한 이상,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주어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임하고 있다면, 이 사회가 그러한 실패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묻게 된다. 즉, 준비된 조건에도 이렇게 치열해야만 했던 이유가 실패가 주는 좌절에 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실패의 관점이 주는 교훈은 기나긴 역사에서 현재를 묻는다. 이처럼 더 많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일은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