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의미가 있을 결론

 

 

결론적으로, 다수의 독자가 이미 품었을 법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 과연 이러한 부르주아적 인사들과 긴 지면을 할애해 논쟁하고, 검열을 통과한 자유주의적 주장의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이러한 논쟁은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이는 그들 자신이나 ‘식견을 갖춘’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맹공격으로부터 반드시 유익한 교훈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민주주의자들의 공격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불가분의 단일체를 이루었던 과거 (체르니셰프스키 시대)의 발전 단계가 이미 종식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심오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이론과 실천에 치명적인 해악을 미치고 있으며, 이론적 근거 또한 전무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직시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이념과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을 감행해야 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이념의 태동기와 그 이후의 변모 과정을 검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이러한 역사적 검증을 위한 충분한 사료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하여 1893년 10월 2일 독일 신문 《중앙 사회 정책 신문 Sozialpolitisches Centralblatt》 제1호 Ⅲ편에 게재된 스트루베의 논문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 관하여」와, 니콜라이 온의 공상주의를 비판한 스트루베를 크리벤코가 공격하고 나선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크리벤코는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사고를 ‘전(全)국민적 사회주의 (national socialism)’라는 “전적으로 공상적 본질”로 규정한 스트루베의 분석에 격분하며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마을 공동체와 농민의 경제적 독립을 개혁의 기초로 삼았던 역사 연구자들과 언론 대부분의 입장을 인용하며, 이들 모두를 공상적 사회주의의 피해자로 몰아세우는 것이냐고” 반문하기에 이른다.

 

‘인민의 벗들’이 보인 이념적 왜곡과 격분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노선의 관념적·비체계적 성격을 모순적으로 입증한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노동 인민의 착취에 맞선 저항이자 착취 체제의 완전한 철폐를 위한 변혁적 투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틀 내에 머무르는 개량적 조치들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분여지 옹호’는 봉건적 수탈의 파생물인 토지 상환금 지불 구조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며, 토지 대금 상환이 아니라 개혁 이전에 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의 무상 보유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가 되었던 농민 토지 소유권의 법제화에 다름 아니다. 또한 관례적 토지 분배에 대한 국가 경찰력의 개입을 반대하는 ‘마을 공동체 옹호’ 역시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계급 분화와 착취 구조를 은폐하는 소부르주아적 공상에 불과하다. 계급적 수탈을 전제로 한 관료적·공동체적 질서를 사회주의와 귀속시키는 것은 어휘의 이념적 범주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결과에 불과하며, 이러한 논리라면 체제 수호적 반동 관료인 포베도노스체프 (Pobedonostsev)마저 사회주의자로 규정해야 하는 비논리적 귀결에 도달할 뿐이다.

 

스트루베는 민중주의자들의 부당한 비판에 대해 조금도 양보할 바가 없다. 그는 인민주의자들의 ‘전국민적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그들이 인민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으로 플레하노프의 「우리의 의견 차이」를 인용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플레하노프는 의심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의 범주와는 접점이 없는 인민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을 격렬히 비판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크리벤코가 이러한 비판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여겨 격분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자신이 지향하는 사조에 대한 스트루베의 정확한 진단을 알고자 했다면, 해당 논문에 담긴 핵심 단락들을 발췌하여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지면에 번역·소개하는 것이 마땅했을 터이나, 이를 고의로 외면한 것은 실로 비논리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인민주의 이념은 그 사회적·이론적 토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조는 장기간 목격되어 온 체제 내적 타협을 도모하는 무색무취의 개혁적 사조로 퇴조하거나, 자본주의 발전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적·실천적 결론을 수용하여 공상주의적 환각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타협적 사조의 전형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러시아 부》의 이론적 주장을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해당 잡지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현실을 인민주의 이념의 파편들과 임의로 결합하려는 파탄된 시도를 보여주며, 그들의 정치적 구상 역시 기존 자본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틀 안에서 소생산자의 경제 상태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개량주의적 목표에 국한되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가장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인민주의가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로 타락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부》가 제안하는 구성의 실체, 즉 이민 규제, 토지 임차, 저리 신용 제공, 박물관 및 창고 설립, 기술 개선, 집단 농장과 공동 토지 경작 등은 봉건지주의 기관지나 금융 자본의 대변지를 제외한 ‘진지하고 존경받는’ 자유주의 언론 진영 전반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나아가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하고 시급하며 체제에 ‘무해하다’는 합의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이러한 견해는 지방 정부의 각종 조사 보고서와 언론 매체 등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경향을 인민주의의 성과로 간주한다면, 그 확산과 관철은 실로 명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확인은 결코 과거의 관념적 의미에 머무르는 인민주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사회혁명적 인민주의가 한낱 기회주의로 타락하고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오로지 소부르주아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게 된 이념적 퇴행의 결과다.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계급 분화 현상은 명백한 정치경제학적 분석 대상이며, 이는 농촌의 ‘착취자’와 ‘농장 노동자 집단’을 정치경제학적 범주로 정식화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의 ‘인민주의적’ 개량 조치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집단 농장이나 공동 경작과 같은 시도 역시 농촌 내부의 계급 분화와 착취 구조라는 근본적 실태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이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유럽 전역에서 감행했던 비참한 개량주의적 시도의 반복이자 파탄될 귀결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예르몰로프 (Yermolov)나 비테 (Witte) 같은 전제 관료들조차 ‘인텔리겐처’가 혁명적 투쟁에서 이탈하여 계급적 대립을 무마하는 화해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한다면,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시도’에 기꺼이 재정적 지지를 보낼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인민주의 이념의 발생 및 이론적 구조, 그리고 그 내적 한계와 역사적 변모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인민주의 이념이 초기에 보여준 이론적 체계성은 농민의 삶에 내재된 특수한 양식에 대한 확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인민주의는 ‘마을 공동체’ 농민이 보유한 공산주의적 본능과 주체성을 포착하였으며, 이에 따라 농민을 본질적인 사회주의 전사이자 변혁의 주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은 러시아 사회의 구체적·객관적 경제 현실에 대한 실증적·이론적 검증이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공동체적 속성에 기초한 정치적 구상을 실제 사회 운동 및 제도적 실천에 구현할 실천적 기반 역시 극히 취약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론의 발전은 크게 두 가지 경로, 즉 이론적 파악과 실천적 모색을 거쳐 전개되었다. 이론적 작업은 주로 토지 소유 형태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주의자들은 그 내부에서 공산주의의 초석을 확인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방대한 양의 실증 자료가 축적되었으나, 토지 소유권이라는 법적·형식적 형태에 치중한 분석은 오히려 농촌 사회의 실질적 경제 관계를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생산 관계를 고찰할 체계적인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했던 데다, 수집된 자료 역시 농민이 직면한 당면 과제와 실생활의 궁핍을 보여주는 데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다수 연구자의 관심은 토지 부족, 고율의 소작료, 법적 권리 부재, 농민에 대한 억압 등 현상적 고통을 규명하는 데 국한되었다. 이러한 제반 문제는 풍부한 자료에 기반하여 상세히 조사·분석되었으며, 국가가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계급 국가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중립적 기구라는 전제하에서는 그 개선의 필요성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를 계급적 관점이 아닌 ‘설득의 대상’으로 바라본 순진무구한 연구자들은 구체적 사실에 몰두한 나머지, 경제 전반을 규정하는 농촌의 기본 정치경제 구조를 간과하였다. 그 결과, 사회주의적 변혁이 아닌 기존 경제 체제를 주도하는 계급, 즉 주어진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자본을 축적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급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는 모순에 도달하였다. 착취의 철폐를 위한 제도를 규명하고자 시작된 이론적 시도가, 모순되게도 착취 체제에 기반을 둔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개량주의적 구상으로 귀결된 것이다!

 

실천적 혁명 운동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농민의 공산주의적 본능에 대한 맹신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고 ‘인민 속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이 과정에 착수했으나, 현실은 농민의 본성이 공산주의적일 것이라는 발상의 단순함만을 각인시켰다.

 

결국 이들은 계몽 대상인 농민이 아닌 전제 정부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모든 역량은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되었으며, 이 투쟁은 주도적인 지식인 계급에 간혹 노동자가 가담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초기 투쟁은 인민이 사회주의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권력 쟁취를 거쳐야만 정치적·사회적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이론은 타당성을 상실했고, 정부에 맞선 나로드니키의 투쟁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급진주의적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그 활동 역시 출발점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이 경우 역시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강령이 도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이 과정이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한계는 명확히 확정되어 있다. 인민주의의 이러한 전개 과정은 그 이념이 농민 경제를 특수한 공동체적 체제로 규정하는 허구에 기초하고 있었던 만큼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현실에 직면하자 그 허구는 해체되었으며, 농민 사회주의는 소부르주아 농민층의 급진적·민주적 요구를 대변하는 창구로 전환되었다.

 

크리벤코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막연한 선의만 가득할 뿐 지속적인 실천력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남부 러시아에서 농민에 대한 정서적 애정과 인도주의적 호의를 베풀며 유럽의 제도와 노동자 연대를 전파하던 젊은이들의 사례를 제시한다. 반면, 동일한 지역에는 아무런 인도주의적 수사 없이 냉철하게 일했던 독일인 정원사 슈미트가 존재했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농민에게 실질적인 포도 재배 기술을 전수하여 연간 75~100루블에 이르는 소득을 올리게 해준 슈미트는 농민들에게 유용한 존재로 남은 반면, 막연한 선의 외에 어떠한 실질적 결과도 제공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청년들은 농민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사례는 농민의 공산주의적 본능에 기대어 시혜적 호의만을 베풀던 초기 인민주의의 공상적 실천이 현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계급적 조건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제시된 구절은 1869~70년경, 인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선진적 조직인 제1인터내셔널을 러시아에 도입하고자 도모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크리벤코의 설명은 다소 지나친 편파성을 띠고 있었으며, 이에 그 스스로도 “슈미트의 행위가 정당했다거나 결정적이었다기보다 우연적이고 하찮은 시도였음에도 지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원인을 짚어보고자 했을 뿐”이라는 유보적 단서를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는 시혜적 호의에만 치우친 초기의 공상적 실천이 현실의 경제적 효과성 앞에서 무력했음을 반증하는 또 다른 비논리적 변명에 불과하다.

 

제시된 구절은 극히 모호한 유보적 설명에 불과하나, 핵심은 그 모호함 자체가 아니라 필자가 두 활동 유형 간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를 간과한 채 일방의 실패와 타방의 성취를 개별적으로 대비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는 동시대 민주주의자의 과념적 외관과 그 한계를 명확히 규명해 주는 핵심 지점이다.

 

농민에게 ‘유럽의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를 선전한 청년들은 기존 사회 구조를 근원적으로 변혁하려는 의도를 지녔으며, 착취와 억압을 낳는 동시대 체제에 맞서 농민들을 사회혁명의 주체로 결집하고자 했다. 반면 ‘슈미트 씨’는 전문가로서 개별적이고 실무적인 업무 처리를 도왔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질적 목적이 정반대인 두 활동 유형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건물을 해체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건물의 유지·보강 작업과 단순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왜곡된 접근이다.

 

올바른 논리적 분석이라면 인민 속으로 들어가 혁명을 도모했던 청년들의 실천이 왜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즉 ‘농민층’을 피착취 노동 인민의 단일한 대표자로 간주했던 전제 자체가 오류였는지, 혹은 봉건적 잔재로서의 농민 전체가 이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분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규명했어야 한다. 한마디로 종래의 사회주의 이론과 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 체계를 정밀하게 검토했어야 함에도, 크리벤코는 “슈미트 씨”의 개량주의적 노력이 ‘확실히 필수적’이었다는 비논리적 정당화에 골몰한다. 그러나 포도밭 투입으로 연간 75~100루블의 소득을 올리게 해준 것을 인민주의적 사회혁명과 동일 선상에 놓는 판단은 체제 수용적 개량주의에 불과하다.

 

크리벤코는 농민 개인이 포도밭에 투입하는 행위는 고립된 활동에 불과하지만, 이를 다수가 수행할 경우에는 확산된 집단적 활동이자 소규모 노동을 실질적이고 적절한 노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A. N. 엥겔하르트 (Engelhardt)가 자신의 사유지에서 인산 비료를 도입한 데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도 이를 보급했던 사례와 동일한 연장선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관념적 민주주의자가 지닌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소생산자의 기술적 개선이나 부분적 조직화를 사회적 변혁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농촌 내부의 계급 분화와 생산관계의 근본적 모순을 외면한 채 체제 내적 개량에 안주하려는 소부르주아적 착각을 재확인할 뿐이다.

 

농민 개혁에 대한 체르니셰프스키의 사례는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 지향이 자본주의적 개량주의적 조치와 타협할 수 없었던 이념적 진통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전제정의 검열 아래 개혁의 가식적 본질을 직접 고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회적 표현으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피착취 상태에 놓인 농민에게 제공되는 개량적 시혜적 조치란, 근본적인 소유권과 생존권이 담보되지 않은 채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는 가혹한 식사와 같다고 지적한다. 조건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소유권 논의나 명목상의 보호 조치는 피지배층의 몰락을 가속할 뿐이며, 이러한 지배 질서 내적 개량에 몰두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의 본질을 왜곡하는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다.

 

결국 이 우회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본주의적·관료적 질서와 타협하여 개량주의로 퇴행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근본적인 체제 변혁 없이는 어떠한 소부르주아적 조치도 인민의 실질적 해방을 가져올 수 없음을 입증한다.

 

체르니셰프스키가 농민 개혁의 실상과 계급적 적대 관계를 파악하여 이를 혁명적 이론으로 정식화한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전제정의 가혹한 검열 아래에서도 체르니셰프스키는 우회적 수사를 활용하여 혁명적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했다. 나아가 검열의 제약이 없는 불법 저술 영역에서는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 언어로 지배 계급의 개량주의적 기만을 고발했다. 그는 대표작 「서문을 위한 서문」에서 자신의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인 불긴 (Volgin)의 입을 빌려, 지주 계급이 주도하는 개혁의 기만성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일갈한다.

 

“지주들의 정당의 손에 농민의 해방을 맡기시오. 그다지 별 차이도 없을 테니까.”

 

지주 정당이 농민에 대한 토지 할당 자체를 반대하므로 개혁의 결과에는 막대한 격차가 존재할 것이라는 논쟁 상대의 반론에 대해, 그는 불긴 (체르니셰프스키)는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반박한다.

 

인민주의자들의 관념적 개량주의와 그 소부르주아적 본질을 비판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논지와 당대 정세 분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니, 차이는 별로 크지 않고 무의미할 정도일 거요.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 격차는 엄청나겠지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서 물건을 가져가는 것과 그의 수중에 그대로 두는 것은 분명 격차가 있겠지만, 물건을 가져가면서 그에게 대금을 치른다면 완전히 똑같은 셈입니다. 지주 정당과 혁명주의자들의 구상 간의 유일한 격차는 전자가 더 단순하고 시간이 짧게 걸린다는 것뿐입니다.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더 나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불필요한 요식 행위가 줄어든다면, 십중팔구 농민들의 부담도 덜할 겁니다. 돈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살 것이고, 돈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사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땅을 사라고 강요하는 건 그들을 몰락시킬 뿐입니다. 토지 상환금을 내리는 건 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농민 개혁이 막 도입되던 당시에 (당시 서유럽에서조차 그 적절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 부르주아적인 본질을 이토록 명확히 간파한 점은 체르니셰프스키의 비범한 정세 혜안을 입증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와 ‘국가’가 노동 인민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으며, 농민층의 몰락과 수탈이 이들의 주도로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음을 파악한 점 역시 마찬가지다. 나아가 그는 계급적 적대 관계를 은폐하는 전제정 정부의 존재야말로 노동 인민의 생존 조건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근본 요인임을 명확히 규명하고 있었다.

 

제시된 구절은 전제정 정부의 위선적인 타협책과 지주 계급의 이해관계를 규탄하고, 개혁의 기만적 본질을 폭로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낸다.

 

불긴은 “농민들이 토지 없이 해방되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봉건 지주들이 절대주의 정부의 타협책 뒤에 숨어 이해관계를 가리는 위선을 버리고, 차라리 그 본색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계급적 대립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내는 데 부합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지주들이 주도하는 농민 해방의 허상에 동요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지적하며, 지배 계급의 기만적인 개량주의 조치보다 그들의 실질적 이해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더 유효하다”고 결론 내린다.

 

다음은 『수신인 없는 편지들』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이들은 농민 해방을 주장하나, 이를 완수할 주체적 역량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역량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역량이 미흡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과업에 착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사태의 귀결은 자명하다. 이들은 역량을 초과하는 농민 해방 작업에 착수할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명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는 과업의 파탄과 동시에 참혹한 귀결로 이어질 따름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이 같은 진단은 역량과 조건이 미비한 상태에서 단행되는 개량주의적 조치가 초래할 파국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러시아의 봉건 관료제 국가가 농민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본질, 즉 봉건적 농노 소유주의 특권을 타도하는 대신 자유주의자와 지주의 이해관계를 타협시키는 기만적 조치 (상환금 납부 방식의 토지 매입)에 그칠 것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타협책은 안위와 자유라는 허상을 유포해 농민을 기만하는 과정이 수반되며, 궁극적으로는 농민을 몰락시켜 지주 계급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파악했다. 이에 따라 그는 개혁안에 강력히 저항하며 그 실패를 촉구했다. 나아가 전제정 정부가 자유주의자와 지주 사이의 줄타기 속에서 파국을 맞이하여, 러시아가 은폐된 적대 관계를 탈피하고 공개적인 계급 투쟁의 국면으로 진입하기를 지향했다.

 

그러나 체르니셰프스키의 비범한 혜안이 현실화되고 지난 30년간의 역사가 그 모든 경제적·정치적 착각을 가차 없이 폭로한 현재,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미화하며 그것을 ‘인민적’ 생산의 허용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이들은 개혁에서 노동 인민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들을 설득할 개연성의 근거를 도출하고자 시도한다. 농민 개혁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이들 민주주의자가 얼마나 철저히 부르주아적으로 변질되었는가를 명증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으며, 오히려 핵심적 본질조차 망각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비교를 위해 1872년 《조국 연보》의 사례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서 본고는 ‘위대한 해방’을 표방한 개혁 이후 첫 10년간 러시아 사회가 이룩한 자유주의적 과실, 즉 금권 정치의 이해관계를 은폐한 성과를 다룬 「금권 정치와 그 토대」의 구절들을 인용한 바 있다.

 

해당 논고의 필자는 과거 개혁을 비판하며 태평했던 옛 시절을 회상하던 이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새로운 질서에 만족하며 환호한다”고 서술했다. 나아가 “문학 자체가 금권 정치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민주주의’를 빙자한 채” 금권의 이해관계와 열망을 옹호하는 양상을 고발한다. 필자는 개혁이 가져다준 새로운 질서의 명백한 부르주아적 적대성에도, 노동 인민을 제외한 ‘사회’와 ‘지식인 계급’의 대표자들이 이에 안주하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인민 대중은 자유주의가 노동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한 ‘취득의 자유’를 은폐하는 도구에 불과함을 자각하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가치 있는 대목은 사회주의적 비판의 본질인 ‘반대’ 그 자체에 있다. 다만 금권 정치가 민주주의의 탈을 쓴 데 대한 이러한 비판은, 농민 개혁 내부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지식인 계급 및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부정하는 해당 잡지의 전반적 논리와는 모순된다. 이들은 러시아 내 자본주의적 토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실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집단의 적대적 징후를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국 연보》가 계급적 적대성을 포착하고 부르주아 자유주의 및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투쟁한 점은, 적대적 본질을 완전히 규명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체제 자체와 맞서고자 했던 선구적 사회주의자들의 대의명분과 부합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각에서 이는 역사적 성격을 띤다. 반면 오늘날의 ‘인민의 벗들’은 이러한 적대 관계를 망각한 채, ‘민주주의의 외피’ 아래 숨어 있는 부르주아지의 본질을 포착하는 비판 의식마저 상실했다.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반동적 위치에 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계급적 적대 관계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투쟁이 아닌 유화적인 ‘개량’ 활동만을 기만적으로 주창하고 있다.

 

1860년대에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며 금권 정치를 대변했던 러시아 자유주의자가, 1890년대에 이르러 단지 우려와 근심을 표명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가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기존의 사회적·경제적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대규모 ‘획득의 자유’, 즉 거대한 신용, 대자본, 기술 개혁을 독점할 자유가 소규모 신용과 자본, 소규모 기술 개량을 취득할 자유로 대체되었다고 해서 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적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견해를 바꾼 것은 사회 질서의 근본적 변화나 시각의 급진적 전환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교훈을 망각한 것에 불과하다.

 

과거 선배들이 지녔던 혁명적 특성, 비록 현실에 대한 이론적 한계와 공상적 한계가 존재했음에도 지니고 있던 계급적 적대성에 대한 비판 의식을 상실한 ‘인민의 벗들’은 지난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지난 30년간의 러시아 정치·경제사는 이들에게 적절한 비판적 자각을 제공했어야 함에도, 이들은 역사적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1860년대’ 당시 봉건 지주들의 지배력은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하며 점차 몰락하고 있었다. 지주 계급의 후퇴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발전과 과학, 우수성, 불의에 맞선 투쟁, 인민의 권익과 양심, 인민의 힘 등을 다룬 자유주의적 미사여구가 유포되었다. 이는 오늘날 불황의 시기에 급진적 불만 세력들과 자유주의 입담꾼들이 사교계와 기념일 만찬, 잡지와 신문에서 늘어놓는 언사들과 부합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당시 러시아에 ‘공개적인 계급 투쟁의 선명성’이 완전히 확보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수준은 후대보다 명확했다. 따라서 계급 투쟁 개념을 확립하지 못한 채 엄혹한 현실 직시보다 공상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노동 인민 관념론자조차 자유주의가 금권 정치의 외피에 불과하며, 새로운 체제가 부르주아적 질서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봉건 지주들의 무대 퇴장이 새로운 질서의 (비교적) 전형적인 형태를 가리지 않고 드러나게 한 결과다.

 

그러나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금권주의적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데 그쳤을 뿐, 이를 이론적·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구조 내에서 이러한 현상의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과거 봉토 제도 대비 새로운 체제가 지닌 역사적 진전 및 체제 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 역시 파악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유’와 ‘인간성’을 내세운 체제에 ‘조소’를 보내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 부르주아적 성격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며 ‘인민의 체제’라는 자발적 이행에 대한 기대를 유지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후의 역사는 이들에게 또 다른 사회적 관계의 실상을 제시했다. 개혁으로 인해 중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완전히 와해되지 않은 봉건 지주층은 (한동안) 세력을 재집결하며 부르주아적 관계와 대비되는 봉건적 수탈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아가 약탈적 반동의 형태로 나타난 현실은 민주주의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시각을 사회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대신 자유주의 진영으로 퇴보했고, ‘제도권 언론’이 자신들의 논리를 수용함을 자긍심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기존 관념적 유토피아의 비현실성을 명증하게 폭로했다. 인민의 특수한 삶의 양식이나 사회주의적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일시적 현상에 의존하던 과거의 관념론적 틀은 설 자리를 잃었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한다면 러시아에는 부르주아적 관계와 소멸해 가는 봉건적 관계 외에 다른 사회·경제적 경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 계급 운동을 거치지 않는 사회주의 이행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전적으로 망각했다. 결과적으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순진한 공상은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라는 온건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완전한 이념적 퇴행으로 귀결되었다.

 

오늘날 노동 인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은 명백히 반동성을 띤다. 해당 이론들은 현재 러시아 사회의 구조적·경제적 적대 관계를 은폐하고, ‘향상’이나 ‘개량’ 등과 같은 표피적 조치만으로 사태를 개선하거나 계급적 타협과 야합을 이룰 수 있다는 기만을 유포한다. 나아가 국가를 중립적 기구로 미화하며, 피착취 인민에게 실질적 수혜를 제공할 수 있는 시혜적 주체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그 반동적 본질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해당 이론들은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 스스로의 주체적 투쟁과 그 필연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동성을 띤다. 예컨대 ‘인민의 벗들’은 자신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부》 편집실을 방문한 한 기술자가 ‘자본주의의 인민 삶 도입’을 위한 ‘구상’을 성립했다는 사례는 이들의 관념적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소부르주아적 이념 및 이론 체계와 단호하고 완전하게 결별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해당 투쟁 과정에서 도출해야 할 핵심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이다.

 

본고에서 소부르주아 이념과의 단절을 주장했을 뿐, ‘인민의 벗들’이나 그들 개별 이념 자체와의 단절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호 연관성이 부재한 대상과는 단절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의 벗들’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념에 존재하는 여려 경향 중 하나를 대표할 뿐이다.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념 및 잔존하는 러시아 농민 사회주의 이념 전반과 단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는 해당 이념의 대리인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성장에 기여하기는커녕 반(反)마르크스주의 운동에 휩쓸려 소부르주아적 이념을 유달리 풍부하고 선명하게 표명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들을 동시대 사회주의 및 러시아의 객관적 실상과 비교해보면, 그 이론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그리고 정당한 이론적 토대의 흔적을 완전히 상실한 채 한심한 절충주의와 명백한 기회주의적 개량 강령의 단계로 전락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락이 잔존하는 사회주의 이념 전반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로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특정 인사들의 개인적 과실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본고는 잔존하는 소부르주아 이론들의 퇴화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증명하는 데 주력해 왔다. 특히 개별 인사에 대한 비판은 극력 배제하고, 잔존 러시아 사회주의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신조를 비판하는 데 대부분의 논지를 할애했다. 본고가 해당 신조들을 부정확하게 규정했거나 중요한 대목을 누락했다고 판단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정중히 요청하고자 한다. “신사 여러분, 부디 귀하들이 직접 이를 명확히 밝히고 충분히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실상 사회민주주의자들만큼 사회주의자들과 논쟁의 계기를 반기는 이들도 없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이 직접적이고 단호한 도전을 감행하지도 않는데, 그 ‘논박’에 일일이 응답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진부한 자유주의적 미사여구와 속물적 훈계의 의도를 굳이 파악하려 드는 노력이 과연 무익한 것인가?

 

해당 이념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소상히 밝힐 임무가 오롯이 그 신사 여러분에게 있다는 점이 우리의 과오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본고가 논하는 바는 사회주의와 결합된 소부르주아 이념과의 단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검토한 소부르주아 이론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자임하는 한 무조건 반동적이다.

 

그러나 제시된 이론의 내부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전혀 부재하다는 점, 즉 착취의 구조적 원인을 해명하는 데 실패하여 노동 계급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파악한다면 이에 대한 대응 방식 역시 전환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 및 그 구성에 대해 노동 계급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규명할 수 없다. 특히 거대 부르주아지와 미발달된 소부르주아지 간의 적대로 인해 이러한 양면성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적 잔재와 중세적 농노제 존속에 맞서 일반적 민주주의 요구를 내세우는 한에서는 혁명적 성격을 띤다. 반면 자신들의 특수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보존하고자 자본주의적 발전의 대세를 지연시키거나 역행시키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반동적이다. 일례로 분여지의 양도 불가 방침을 비롯해 농민 감독을 목적으로 수립된 수많은 반동적 기획들은 노동 인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상은 인민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해방을 향한 계급 투쟁을 저해하는 역할에 그친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구상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해당 이론들이 지닌 기만적인 사회주의적 성격을 배격하고 그 반동성에 맞서 투쟁하는 한편, 그 안에 내포된 민주주의적 요소의 의의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소부르주아 이론 체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해서 소부르주아 구상에 포함된 민주주의적 요구까지 배척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민주주의적 요구를 한층 철저하게 주장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은 다음의 사례에서도 명확히 확인된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이론의 상투적 근간을 형성해 온 세 가지 주요 논지는 바로 토지 부족, 과도한 세금과 부담금, 그리고 관료적 폭정이었다.

 

이러한 폐단에 대한 폐지 요구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이는 강탈과 착취의 본질적 구조를 해명하지 못하며, 해당 폐단의 제거 역시 자본의 노동 억압 구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적 잔재의 철페는 노동 인민의 가중된 억압을 덜어주고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직접적 투쟁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요구로서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일반적인 지불금과 세금 문제는 본래 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 특수한 중요성이 부여되는 사안이나, 현재 러시아 농민이 부담하는 지불금은 농노제의 잔재라는 성격이 짙다. 예컨대 토지 상환금 및 농민과 소도시 주민에게만 부과되고 ‘상류층’에는 면제되는 차별적 세금은 즉각적·무조건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경제적·정치적 정체를 야기하는 이러한 중세적 관계의 유물을 철폐하는 요구에 언제나 적극 동참할 것이다.

 

토지 부족 문제 역시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농민 개혁 당시 단행된 토지 수탈은 지주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농민을 수탈한 조치였으며, 직·간접적 방식으로 반동적 지주 세력의 기반을 강화해 왔음이 명백하다. 이에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에게서 수탈된 토지의 즉각적인 반환과 봉건적 토지 소유권의 완전한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토지 국유화와 병행되는 토지 소유권의 폐지는 형성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적 농업 관계의 발전을 촉진할 뿐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지는 않으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토지 귀족의 지배력을 해체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적 조치로서 지대한 의의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농민의 권리 박탈을 수탈과 착취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유자코프나 V. V. 일파와 같은 관념론자들에 불과하다. 관료 기구가 가하는 농민 억압은 단순한 권력 남용에 국한되지 않고, 농민을 귀족 세력에 복종해야 할 ‘신분적 하위 집단’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농민의 공민적 권리는 예외적인 시혜로만 허용되며 (예컨대 이주), 하급 관리조차 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취급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의 완전한 공민적 권리 쟁취, 귀족적 특권 및 관료적 감독의 철폐, 그리고 농민의 자치적 결정권 보장을 지체 없이 지지하고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는 여타 세력보다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해야 하며, 실천 활동에 있어 민주주의가 지니는 중대한 의의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서유럽과 비교할 때 중세적·반(半)봉건적 잔재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잔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을 억압하는 명백한 기제로 작용하며, 모든 계급의 정치적 의식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다. 따라서 절대 왕정, 신분제, 관료 체제 등 봉건적 제도 전반에 맞선 투쟁이 노동자 계급에게 극도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제도들이 지닌 반동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즉, 봉건적 제도들이 자본의 노동 탄압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노동 인민에게 어떠한 체계적 압박을 가하는지, 자본을 전산업적 중세 형태로 파편화하여 머물게 함하여 해방 투쟁에 어떠한 엄중한 난관을 초래하는지를 명확히 자각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반동의 보루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봉건적 잔재가 존속하는 한,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받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지속적 투쟁 대신 자포자기식 불만에 그치게 될 것이며, 노동 계급 승리의 필수 조건인 이들의 결집과 지지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 왕정과 반동적 신분제 및 제도에 맞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싸우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적인 과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과제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하며, 봉건적 제도를 폐지하는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맞선 계급 투쟁을 촉진하는 필수 수단임을 끊임없이 밝혀야 한다. 나아가 노동 인민의 주적인 자본에 맞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민주주의적 요구의 실현이 선행되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은 본래 민주주의적 형태를 띠나, 특히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해 반동 세력과 결탁하여 노동자 운동의 진전을 저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제반 혁명 정파들의 ‘연합’ 및 ‘동맹’ 경향에 대해 사회민주주의가 취해야 할 입장은 충분히 정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해당 경향은 다소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특정 단체들이 구체적으로 합의된 강령을 바탕으로 ‘동맹’을 제의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 제안이 존재했다면 이는 당사자 간의 교섭으로 해결될 구체적 과제였을 것이며, 범파벌적 ‘연합’이라는 경향성 자체가 형성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실제하는 이유는 기존의 이론적 토대를 상실한 채 표류하는 세력들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던 전사들이 입각해 온 기존 이론의 해체는 투쟁에 필수적인 결속과 조직의 조건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따라 ‘연합 세력’과 ‘동맹 지지자들’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이론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자유 요구만으로 강령을 축소하고, 사회주의적 과제와 비사회주의적 과제를 포괄하는 제반 핵심 사안들을 은폐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결합을 향한 이러한 순진한 오류는 실천적 검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연합’ 경향이 전투적·혁명적 인민주의가 정치적 급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최종 단계를 체현한다는 점이다. 상기 기치 아래 집결한 비(非)사회민주주의 혁명 정파들의 연합은 러시아 예외주의라는 이념적 편견을 탈피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강령이 확립될 때 비로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이러한 민주주의 정당의 출현을 운동의 진전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반(反)인민주의 투쟁을 더욱 심화하여 비과학적 전제를 철저히 분쇄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결집하여 여타 정파들의 민주주의 정당 창설을 견인해야 한다.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조직화를 필수 과제로 확립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이들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적 제도에 맞서는 민주주의자들의 제반 투쟁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공조할 것이다.

 

인민주의가 가장 통속적인 소부르주아 급진 이론으로 타락했다는 사실 (‘인민의 벗들’은 이에 대한 매우 명확한 실증이다)은 그간 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본질과 전체 노동 인구 해방을 이끌 전사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닌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은 채, 단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관념만을 유포한 자들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덕분에 부르주아 관념론자들조차 정치적 자유 요구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회적 경제의 부르주아적 구조가 아닌 토지 부족, 상환금, 또는 관료적 폭정으로 설명되는 한, 가치 형태와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을 노동자들에게 해명하는 작업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계급 투쟁 이론 역시 자본주의의 주입 과정이나 정착된 공장 노동자 계급의 상태는 물론, 인민 대중과 고용주 간의 적대적 관계조차 규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실천적 의의를 갖지 못한다.

 

인민 대중이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직행할 수 있다고 본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 귀결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혁명적 역할을 수용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노동자에게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것은, 실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리 투쟁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 주되게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에 기여할 뿐, 노동자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지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투쟁 조건을 한층 유리하게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 체계를 거부하면서도 소박한 확신에 따라 노동자 대중에게서만 혁명적 요소를 포착하고 소요를 자극하는 사회주의자들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대목이다. 이들 사회주의자의 이론은 실천과 심각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으로 조직해야 할 결정적 과업으로부터 방해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 적대가 농노제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시기, 농노제가 지식인 계급 전반의 일치된 일치된 반발을 자극하여 그들 내부에 특수한 민주적 측면이 존재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 이념적 간극이 크지 않다는 착각을 형성했던 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어 과거 자본주의의 토대를 부정하던 이들조차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로 진입했음을 인정하는 현 상황에서 그러한 착각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오늘날 ‘인텔리겐처’의 성격은 물질적 가치 생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만큼이나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가운데,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세를 불리는 출세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의 시종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체제의 구조적 원리를 숙지한 ‘지식인’들은 이를 그저 자족하며 수용할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현실의 부도덕성을 입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며 비난과 도덕적 훈계를 시도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인텔리겐처로 하여금 자신의 부르주아적 본성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이러한 순진한 시도는,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인민의 몰락과 빈곤, 실업, 대중적 기아를 들어 부르주아지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어리석은 행동과 다름없다. 자유주의·급진주의 ‘지식인’들은 발전, 과학, 진실, 인민이라는 미사여구를 남발하며, 이념적 균열이나 회의, 낙담, 무관심 없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의로 가득했던 1860년대의 종언을 한탄할 뿐이다.

 

특유의 단순함으로, 이들 신사들은 1860년대에 존재했던 의견 일치가 당시의 되돌릴 수 없는 물질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당시는 농노제가 사회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억압하던 시절이었다. 소액의 자본을 축적해 안락한 삶을 도모하던 농노 관리인이 존재했는가 하면, 지대를 수탈하고 간섭을 일삼는 지주에 맞서 자기 영농 활동에 전념하고자 했던 기업형 농민도 존재했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장원 농노와 빈곤 농민은 상인에게 노예처럼 매각되었고, 이는 상인 제조업자와 노동자, 수공업자와 하청인 모두에게 중대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들 모두를 결속시킨 유일한 유대 요소는 농노제를 향한 그들의 공통의 적대감이었다.

 

그러나 일러한 외견상의 일치 이면에서는 이미 극심한 경제적 적대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적대적 구조가 거대하게 발전한 오늘날에조차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달콤한 관념적 착각에 매몰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의 조건이 과감한 투쟁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과거의 단합에 연연하기보다 부르주아지의 예속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 진영에 결집해야 한다.

 

‘인민의 이익’이라는 가공된 명분을 배격하고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면, 제반 개량주의적 조치로 소생산자 경제 (“인민 경제”) 를 보존·육성하려는 철저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현존하는 지배적 생산관계하에서 이러한 개량적 조치가 도출한 유일한 귀결은 프롤레타리아화의 가속화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인민의 벗들’은 지식인 계급의 계급적 본성을 폭로하고 러시아 소생산자 역시 소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규명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오랫동안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적 착오의 청산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존 이론을 왜곡하고 전락시킨 결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해당 구상을 재정립·수정하거나 비과학적 교조로 배격하는 엄중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벗들’은 부유 농민의 개선된 농기구 도입을 ‘소생산자 체제’의 결실로 포장하고,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와 개량책을 들먹이며 위선적인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지식인 계급은 자신들의 이념적 착각을 포기하고, 관념적 공상이 아닌 현실의 실질적 발전과 사회경제적 관계를 지지 기반으로 삼을 때 비로소 유의미한 실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의 이론적 과업은 러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경제적 적대와 그 상호 연관성, 그리고 역사적 발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치사나 법률 체계의 특성, 혹은 기존의 이론적 편견으로 은폐되어 온 계급적 적대 구조를 드러내고, 이를 명확한 생산관계 체계로서 일관되게 제시해야 한다. 즉, 현 체제하에서 노동 인민에 대한 수탈과 착취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함을 입증하는 동시에, 경제 발전 자체의 동학 내에서 현 체제를 변혁할 실천적 동력을 도출해야 한다.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 연구에 기초한 이러한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에 부합하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며, 과학적 조건을 충족하는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저항 의식이 자각될 때마다 이들을 사회민주주의적 투쟁의 장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이 이론이 더욱 엄밀하게 정립될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은 한층 신속히 확대될 것이다. 현 체제의 가장 교활한 옹호자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적 각성을 막을 수는 없다. 현 체제 자체가 생산자에 대한 극심한 수탈과 프롤레타리아 및 예비군의 지속적 증대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이는 사회적 부의 축적,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 자본주의적 노동의 사회화와 병행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 수반되는 제반 과제가 아무리 방대할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완수해 낼 것이다. 실천적 과정 전반에 대한 엄밀한 정식화를 요구하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인 유물론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으며, 이를 구현한 사회민주주의가 거두고 있는 성과가 이를 보장한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는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진영을 크게 흔들어 놓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적 활동이 지니는 필요성과 중요성, 그리고 그 방대함을 강조한다 해서 이를 실천적 활동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론적 완성을 이유로 실천을 유예할 까닭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을 봉대하는 자들이나 공상적 사회주의 추종자들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기존의) ‘발전 경로’(와) 구별되는 ‘새로운 경로’를 창안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실천 활동은 천재적 철학자가 그러한 경로를 제시할 때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으며 경로가 제시된 이후에는 단지 그 이행을 안내하는 역할로 축소될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자의 본래 임무가 현실의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을 가로막는 실질적 적들에 맞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념적 지도부로 복무하는 데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의 저명한 명제로 수렴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이론적 활동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듯, 이론을 실천적 대의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연결하고 그 결과를 노동자 대중에게 보급하여 이들의 조직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이 역시 무의미하다.

 

이러한 과업의 제시는 사회주의자 정파들이 자주 함몰되는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이론의 최고이자 유일한 검증 기준이 실제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과의 부합 여부에 귀속되는 조건하에서는 교조주의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 촉진이 본연의 과제로 정립되어 ‘지식인 계급’ 내부에서 특정한 지도자 집단을 인위적으로 추대할 필요성이 사라질 때 종파주의 역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제반 이론적 사안을 둘러싼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의 견해차에도, 이들이 견지해 온 실천적 정치 활동의 기본 양식은 당파의 성립 이래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왔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치적 활동은 러시아에서 노동 계급 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다. 그 핵심은 현재 이론적 지도 없이 시위와 ‘폭동’, 파업을 간헐적으로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운동을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러시아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투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아가 착취자들에게 수탈당한 권리를 쟁취하고, 노동 인민에 대한 억압에 기초한 사회 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실천적 활동의 근간에는 러시아의 피착취 노동 인민을 대변하는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주체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적 전제가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농노제 잔재를 제외하면 사실상 사실상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성을 입증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대규모 기계 공업에 집적된 착취는 중세적·법적 장치로 은폐된 소규모 착취와 달리 자본 대 노동의 적대적 관계를 명백한 형태로 드러낸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에 억압받고 있음을 직시하게 되며, 이에 맞선 투쟁은 필연적으로 개별 자본가가 아닌 전체 부르주아 계급에 대응하는 조직적·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선봉적 위상은 공장 노동자를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한 주체로 정립시킨다. 대규모 산업만이 투쟁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생산 수단이 산재하고 소유와 착취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저발전 부문에서는 생산자의 파편화와 소부르주아적 의존성으로 인해 계급적 결속과 단일한 조직화가 저해된다. 반면 대규모 자본주의는 혁명적 단결과 정치적 각성의 토대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천적 역량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집중되어야 한다. 노동 계급의 선진적 대표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파편화된 경제적 투쟁을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전환할 공고한 조직을 건설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민주주의적 세력의 최선두에서 전제정을 타도하고 정치 투쟁의 넓은 길을 따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로 이끌게 된다.

 

1894년 봄과 여름에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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