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록 노동자이지만, 언젠가 세상은 나의 세계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불편한 관계’와 제도의 진실

 

주위에서 이혼이나 파혼을 겪으며 불행해진 이들을 자주 목격한다. 결혼 생활이란 사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이나 예술 작품처럼 언제나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반대로, 가정의 화합을 강조하거나,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담론 뒤에는 여전히 일종의 검열과 억압이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때로 자신에게 불행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특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조차 어른이 되어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때, 정작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는 비단 특정 성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파혼을 ‘자유’로 여겨 이혼을 방조하는 태도가 한 가정의 처참한 몰락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가부장제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이라는 제도의 구조적 결함 때문일까. 반려 동물과 반려자의 차이가 단지 ‘반응의 여부’에 불과하다고 여길 만큼 관계가 메마른 사회에서, 자녀의 본연한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자본’이라는 제도적 질서에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게 된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과정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이 흔들리는 부실한 관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 가장 어렵다. 늘 '좋은 관계'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가장 큰 함정은 여기에 있다. 좋은 관계에 대한 강박에 갇혀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높은 도덕심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에 대해 “그럼에도 선(善)은 좋은 것”이라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들의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터무니없거나 불우한 가정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관계의 선악은 ‘가정의 자유’가 정치·법과 같은 상부 구조에 가로막힐 때 결정되며, 우리는 이 억압된 제도적 질서를 수용하며 스스로 ‘정상적’이라 믿는다. 부실한 가정 교육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자본 체제 속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야 하는 모순, 이 모순이 바로 현대 결혼 제도의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혼주의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된 가정을 꿈꾸는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심리적 착각이 아닌 사회 구조를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당신의 행복은 우리의 기쁨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불행은 우리의 문제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분명 자본주의 체제는 소비보다 불필요한 상품의 세계가 범람한다. 동지들이 성년으로 자라나는 동안, 이 체제 내의 억압은 탄생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강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38선을 목전에 두고도 상봉조차 가로막는 자본주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역사의 교훈이 국가의 유산을 지탱하는 후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는 오히려 사회주의 투쟁 과정에서 삭제되어 온 사회적 인물들의 노고야말로 진정한 민족 해방이자, 부르주아 국가 질서에 대한 전복적 노력성이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저들은 군대를 주무르는 막강한 자본과 생사여탈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위력으로, 사회 최하층에 있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금 이 순간에도 짓눌러 대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자본주의가 고착화된 이후, 우리 사회 역시 파국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 오랜 기간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자부해 온 국가는 이제 시대 교체조차 도모하기 힘들 만큼 노쇠해졌다.

 

흔히 어떤 시대든 그 뒤에는 ‘희망의 불꽃’이 오리라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그 희망조차 지배 질서에 의해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지배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흔히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쉽게 ‘숭고하다’ 말하지만, 그 사회적 비용을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불균등하게 전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자본 소비에 몰두해 있는 상태라면 이러한 구조를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작동시키고 있는지 구조적 관점에서 먼저 살피는 일이다. 국가의 정책이 민중의 삶을 포장하여 지배 도구로 악용하는지, 혹은 민중을 사회적 폐기물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를 냉철히 분석해야 한다.

 

이 모든 투쟁의 기초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교육관에서 시작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르게 학습하고, 이를 조직적 실천과 투쟁 과정에 적용하는 일, 그리고 기존 국가 질서가 언제든 부르주아지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핵심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언론 매체의 선동이나 익명이 유포하는 불합리한 가설, 터무니없는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비판적 의식과 계급적 자각을 갖추게 된다.

 

이 파국의 절정을 돌파하는 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적 투쟁이 비로소 역사의 주체로 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틀 자체를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삶과 사회의 주인은 노동자 민중 자신이지, 체제의 산물에 불과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붉은 강철 솟구치는 용광로의 그릇에

석유의 인부들의 피와 땀이 맺힌다.

탄광의 이름을 대신한 그 살신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붉은 기치를 세운다.

자신을 불살라 일으킨 혁명의 불길은 차가운 냉동마저 얼려버린 심장을 녹여낸다.

화염 속에서 사그라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잿더미, 우리는 이토록 뜨겁다.

 

우리의 심장과 손은 언제나 도구의 굴종에 매여 있었다.

이제 스스로 억압의 사슬을 끊어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시간마저 우리를 단련할 뿐.

 

방관하는 부르주아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긴 채

높은 곳만 쳐다보는 부르주아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언제나 헛되이 흐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받치는 노동의 숨결을.

언제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묵묵히 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부르주아지의 시체를 묻을 준비를 마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시간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프롤레타리아트인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지켜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익의 선동적 발언은 체제적 범죄를 정당화하고 은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