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설탕 두 조각 소년한길 동화 2
미하엘 엔데 지음, 유혜자 옮김 / 한길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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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룩한 수염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한 눈망울이 마냥 소년같기만 한 미하엘 엔데는 좋아하는 작가를 넘어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그에 대한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글과 선한 눈매에서 감지된 나만의 느낌이다. 판타지 문학의 고전이라 할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로 나와 내 아이를 빠져들게 만들었던 그가, 이번엔 동화 <마법의 설탕 두 조각>으로 찾아왔다.

렝켄은 착한 아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이 정도의 착함은 지니고 있다. 그러나 또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렝켄도 부모님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걸 문제 삼기도 한다.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하는 아빠, 신발 정도는 스스로 빨아 신으라는 엄마를 상대로 렝켄은 집안에서 우위를 선점하고픈 욕심에 ’요정’을 찾아나선다. 요정을 묻는 렝켄에게 요릿집을 알려주려는 경찰관아저씨가 한 번 웃겨줬다.  어쨌든 의지의 렝켄은 진짜 요정을 찾아가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사람이 하나도 아닌, 둘 이라는것과 부모님보다 커져서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요정이 건네준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먹은 부모님은 렝켄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때마다 키가 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빨리 어른이 되고싶어
어릴적에는 부모님처럼 빨리 어른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내맘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렝켄처럼.. 그러나 가만히 두어도 세월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다시 그 어린 꼬맹이로 돌아가고 싶을때가 있다. 아직 렝켄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콕 짚어 소원을 들어준 미하엘 엔데. 렝켄이 원한건 정말 부모님이 자신보다 작아지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민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을 찾은건 아닌가 싶다. 점점 작아지는 부모님을 보면서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걸 깨달은 렝켄은 결국 부모님께 드렸던 설탕을 자신이 먹는걸로 마법의 주문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또한 미하엘 엔데식의 해결법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스스로 반성하고 책임지고, 되돌릴수 있는 기회를 적절히 허락하는것 말이다.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언제나 좋은것을 가려서 주려고한다. "너희들을 위해서란다." 라는 말을 덧붙이며 언제나 좋은것만 가르치려고 하면서도, 아이의 생각이 어디서 맴도는지를 간과할때가 있다.   가끔 내가 어릴적을 떠올려 보는건 어떨까? 어떤 날은 숙제나 공부같은거 하지 않고 마구 놀고 싶었던 기억, 극구 뜯어 말리는 불량식품에 군침 흘리던 기억, 나만의 비밀 일기장을 보물창고에 감춰두고 싶었던 기억, 엄마가 마시는 커피 한 방울이 꿀맛처럼 달콤했던 기억, 부모님처럼 마음대로 사고 싶은걸  사들이는 상상, 친구집에서 밤새 수다를 떨다가 친구와 잠들고 싶었던 기억들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삐뚜름한 말과 행동을 보며 소리를 꽥 지르기 보다는 한 번 웃어줄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물론 그리고 나서는 안된다고 말을 해줘야겠지..기억은 기억일뿐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니까..

아이와 함께 한 마법의 설탕이 달달하게 혀 끝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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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쇼콜라 쇼에 파리를 담다
한정선 지음 / 우듬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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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 그녀의 사진 하나에서 이방인의, 이방인을 향한 시선을 느낀다. 한 잔의 쇼콜라 쇼에서도 동질의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것은 낯선 외로움, 그리움이다. 핫 쵸코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가져다 주는 쇼콜라 쇼. 일본인이 우기는 기무치가 넘볼 수 없는 ’김치’의 진정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힘든 하루하루에 안녕을 고하고 외로움을 핑계 삼아 쉬어 갈 수 있는 파리는, 내게 영원한 꿈의 도시이자 일탈의 도시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소박하지 않은 꿈을 뒤쫓기에는, 나의 파리는 너무나 멀리 있다. 내 힘든 하루의 안녕은 언제나 ’즐거운 나의 집’에서 이뤄지고 있으니까. 비단 부러움의 자조만은 아니다. 부럽지 않다구? 정말?...물론 어디에든 언제든 100%의 확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 또한 장담은 하지 않겠지만,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 또 다른 외로움을 품어낼 자신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녀가 쇼콜라 쇼에 담아낸 파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 맛처럼 진하게 때론 부드럽게 전해진다. 어려운 거리 이름을 외울 필요도, 살짝 손발 오그라드는 불어의 이해도 필요치 않기때문이다. 지하철역 식당앞에서 넘어졌을 때의 민망함, 무릎살이 쳐지는 고민, 살이 찌는 것에 대한 민감함이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있었고, 외로움 역시 그녀를 두고 어디론가 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책장을 넘기다 낯선 풍경에도 어색하지 않게 그녀의 느낌과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뱉은 한마디로 인해 나는 서울을 더욱 짜릿하게 사랑할 수도 있게됐다. ’아, 제기랄! 서울 가면 먼저 목욕탕부터 가서 1시간 동안 탕에서 몸 불리고 때 밀고 말 테야.’ 

  
퇴폐적인 핫 초콜릿 Decadent Hot Chocolate, 레시피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멋쩍게 웃었다. ’우아하거나 귀여운 찻잔’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녀가 본책에 수록한 앙큼하기 이를데없는, ’너를 위한 레시피’가 떠올라서였다. 질투 5g과 취향에 따라 필요한 약간의 자비,믿음,관능 등..뭐 이런 거였다. 외로움 말고도 인생에서 필요한 뭔가를 찾아내는 그녀의 발랄함이 좋았다. 서른 다섯살의 진통을 겪고 있는 그녀가 많은 문제들을 안으로만 껴안고 있어야했듯, 무명의 나이인 나도 비스무레한 문제들로 고민한다. 그녀처럼, 그것을 파리로 가서 풀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울에는 목욕탕이 참 많기"때문일것이다. 물에 불린 때를 벗겨내듯 내 외로움의 각질들을 벗겨내고, 나는 한 잔의 쇼콜라 쇼를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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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둘러보다가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아릿함이 느껴졌다.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 스쳤다. 신여성 대열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그녀가 현해탄에 잠들어야했던 이유까지 구구절절 생각나는건 아니고...그녀의 노래가 표지속 그녀의 눈빛을 통해 흘러나오는 듯하다. 

그리고 훓어보니, 

 이 소설은 1948년 제주4ㆍ3부터 60년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여인 3대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3만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4ㆍ3 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던 목장의 막내딸 송지하는 겁탈을 당하고 원수의 자식을 낳아 키워야 하는 잔인한 운명에 처한다. 그녀는 불굴의 집념으로 빼앗긴 목장 땅을 하나하나 되찾지만, 엄마의 상처를 알 수 없었던 딸은 내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다 죽는다. 

,는 기막힌 얘기다. 주인공 지하와 윤심덕....묻어나오는 아릿한 눈빛이 서로 닮아있는 듯하다. 결국 이 책은 집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돌뎅이같은 소설속으로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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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이 되라 - 운명을 바꾸는 창조의 기술
강신장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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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음식으로 명소가 된 곳에 가면 이런 간판 꼭 있다. ’원조 00’ 
’원조’라는 글자로도 안되겠는지 ’진짜원조’ ’원래원조’ 등 원조를 강조하는 수식어가 난무하다. 자신의 업소가 제일 처음 시작했다는거다. 원조라는게 무슨 의미길래 그럴까.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 개발했다는 자부심의 증거를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따라하는 사람들은 흉내만 낼뿐 원조를 능가할 수 없다는 은근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한다.


그렇다. 카피는 오리진의 흉내일뿐 결코 오리진이 될수 없다. 복제품이나 대량생산된 상품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아우라’처럼 말이다. 창조본능을 일깨우며 오리진이 되기를 강조하는 저자는 생각의 전환으로부터 창조작업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상품이나 아이디어들이 생겨난 동기를 들어 창조작업의 발상적 전환을 설명하고 있다. 특이할만한 것은 창조본능의 모티브가 되는것이 사람을 향한 일련의 감정들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 어떤 상품을 사용함에 있어 불편함을 겪고 있고 그 누군가의 불편을 덜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창조적 발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외로움, 슬픔, 기다림, 우울함을 해소시키고 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고자 노력하는 자세 말이다. 이전에 발상의 전환을 외치는 창조작업 지시서들에서 간과된 사람의 마음 읽기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중심 언어이자 오리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분명한 이유로 충분하다.  


’고기도 먹어본 넘이 맛을 안다’ 고 경험의 과정을 통한 창조 또한 중요하다. 창조하려는 분야에서 실컷 놀아봐야 즐거움과 재미를 느끼고 부족한 2프로를 채우기 위해 본능을 발동한다는 것이다. 발명가들중 대부분은 자신이 느꼈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한 일련의 작업들로 기발한 발명품을 만들어내곤 하는데, 이를 증명하는 결과물이 여기 있다.  똥꼬가 데이고 얼고, 민망함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던 직원들의 직접체험이 만들어낸 불후의 명작 ’토토 비데’를 보면서 "아~ 이래서 각도와 온도가 딱딱 맞았구나", 혀를 내두르게 된다. 



흔히 창조는 머릿속에서 시작되는 작업이라 생각했는데 이 저작물이 이끈 결론은 의외였다. 
감정을 읽고 몸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창조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결국엔 몸 어느 구석에선가 꿈틀거리는 창조를 끄집어내어 틀에 담는 작업을 한다는것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야말로 창조의 기본이다, 라는 평소의 생각과 같은 결말을 유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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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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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표지를 열었을 때, 마쓰오카 세이고의 직업적 이력보다 놀란 것이 있었다. 인터넷 상에 하루 한 권씩 독서 감상문을 올리는 장대한 북 니비게이션 ’센야센사쓰 千夜千冊’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과 이미 천 권을 넘어서고도 그 장정이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이 이야기가 진지한 경험에서 비롯한 것임을 피력하기에 적잖은 무게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독술에 관한 총 7장의 형식을 따지지 않고 내게 응용되는 포인트만을 골라 정리해 보자면,



사실, 책에 꼬투리를 달기는 의외로 쉽다. 
서평이 아니라 책에 대한 공감 체험을 안내한 기록으로 감상문을 써라   

눈 뜨면 잡히는대로 책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불로그에 리뷰를 적으면서 적잖은 고충이 동반된다. 느낌을 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나 적정한 인용과 충분한 표현에 동원될 만한 용어의 부재 때문이다. 또 하나, 리뷰를 적음으로써 책에 대한 느낌을 남기는 일에 충실하자는 나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어느 순간에 책에 꼬투리를 달고 책을 비평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자가 내세운 이 지침을 다시한번 되새김으로써 본래와 상충하는 리뷰어로써의 역할에서 벗어나 보고싶다. 물론 다른 분들이 작성한 서평을 보면서 따라해보고 싶은 충동을 수시로 느끼지만 내 역량에 反하는만큼 나답게 살기로 한다.


과학이란 웬만해서는 독학으로 친근해지지 않는다. 
이런 책들은 처음에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다


하하. 지당하신 말씀이다. 어지간히 튼실한 이빨로도 안된다.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 이빨을 들이대면 언젠가는 잘근잘근 씹히지 않겠는가. 좀처럼 이빨이 들어가지 않기는 ’인문’도 마찬가지다. 비록 과학 보다야 쉽겠지만, 여전히 내게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전 어느 순간에 불거진 인문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기인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두 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조금씩 살점이 뜯겨 나오더란 말씀이지. 그 맛? 씹는 질감 못지 않은 맛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서의 본질에  한 발 다가서라는 저자의 귓뜸을 이해할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의 독서 취향을 발견해야 한다는 선행 과제를 마친 다음에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의 독서 취향에 따른 순리적 책읽기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것.



"독서는 누군가와의 인연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배우고 싶은 사람의 책은 반드시 읽는다.
   

이 책에 대한 신뢰감을 부추기는 단어 ’인연’ 
어느 방면이고간에 빠지지 않으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연’이다.  옷깃을 스치는 몇 갑절의 인연이 책에서 이루어진다고 나 또한 믿고 있다. 작가와의 인연, 책 속 인물들과의 인연, 책을 선물하고 받는 관계에서 비롯한 인연은 물론이고 책 자체와의 인연도 그렇다. 이 모든 것이 망라된 만나고 싶은, 배우고 싶은 사람의 책이라면 두 말 할것도 없겠다. 소설을 주로 읽다보니 자연 신봉에 가까우리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읽은 후의 느낌이 실망스럽다는 결론에 봉착하더라도 일단은 그 작가의 책을 집어들고야 만다. 이런 독서 습관은,  다른 장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독서의 정점이 되는 전집독서와도 일맥상통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연속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3D가 대세인 요즘, 독서에서의 입체감도 누려줘야 안 되겠나.



그러나, 창조적 책읽기의 답이 다독술에 있다는 말에는 소심한 반기를 들어 흔드는 바이다.  
’多’가  전부는 아니듯 무작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多讀을 지양하고 나 만의 해답을 찾아 보자면,
알게 모르게 행해졌던 무분별한 독서행태를 바로 잡으며,
다독을 통해 양서를 구별해내는 심미안을 기르기에 힘쓰며,
지극히 개인적일지라도 나만의 독서 취향을 무시하지 않으며,
매일은 아니더라도 읽은 책의 느낌을 기록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다, 라는 다짐으로 좋은 공부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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