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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참을 수 없는 요의. 영화 <인셉션>에서 그들은 각각의 토템을 지니고 있다. 꿈속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는 자신만의 인식. K에게는 그 토템이 '참을 수 없는 요의'다. 배설의 욕구만큼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본질이 또 있을까. 어릴 적에는 요에 지도를 그리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요의'의 자각을 꿈속에서도 명확히 구분한다. 꿈속을 벗어나 있는 '나'를 증명하는 체감이다. 그래서 혼란이 시작되거나 혼란중에 있는 K는 '요의'로써 현실로 돌아오게된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는 이상한 기류들은 모두, 영화 <인셉션>의 그것들처럼 꿈인걸까. K의 혼란은 그저 '이상한 느낌'들로 시작한다. 가끔은 누구에게라도 찾아드는 낯설고 불편한 느낌들이다.
길에서 우연히 스친 사람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거나, 반대로 주위의 익숙한 냄새들이 변질되어 느껴지는 것들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는 건 잦아진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은 잠깐의 현상으로 지나고 언제나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제 자리에 잘 정돈된 '나'와 '나의 냄새'들이 돌아온다. 강박에 지친 한 인간의 머릿속으로 두통같은 현상들이 지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반복됨에 따라 불안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확실한 두려움같은 게 불거진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도시가 통째로 뒤바뀌는 건지, 타인들이 역할을 바꾸는지와 같은 3차원적 두려움이 아니다. 거울속의 너는 누군인가. '나'가 아니라면 단지 낯익은 타인이란 말인가. 나는 진짜 나일까, 라는 질문에 휩싸이게 하는 4차원적, 혹은 그보다 깊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확실히 주위로 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나'란 현상에 집중된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K의 두려움과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한낱에 불과한 헤프닝이라 하기에 딱 좋은 주제이고, 전개다. 이것이 전말(顚末)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현상적 질문들이 어느 순간 존재적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뒤바뀐다. '나는 누구인가'
변신하는 자들의 도시, 변장이나 변복이 아닌 "본태가 바뀌는 탈바꿈"을 하는 사람들. 자신의 변신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행사하고 변신한 자신을 본질적인 '자신'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도시에서 K는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기에 K는 이 도시에서, 존재의 이유가 필요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오랜동안 철학적으로 누적되어온 것에 비한다면, '변신'을 동기로 품은 이 질문은 좀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변신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원론적 본질이다. 나는 인간이다, 라는 형용할 수 없지만 명료한 진실로 이끈다. 인간이기에 뼈저리게 알고싶은 존재적 이유에 대한 욕구. 그러나 쪼개고 나누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나무가 잎을 떨구고 벌거숭이인채 자신을 들여다봐도 '현상'은 도통 변하지 않고 본질은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쪼개고 나누어 나무속으로 이어진 관다발을 찾아내고 또 다시 그것을 가르는 것처럼, K는 자신의 본질을 파낸다. 거기 있었다. K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나'의 모든 것이. 그것은 선과 악의 관을 타고 말초신경까지 가로질렀던 삶의 내막이었다.
"선악과였어."
"그래, 만약에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자네와 나는 선도 악도 몰랐을 거야. 원래 이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었을테니까. 그랬으면 자네와 난 분리되지 않고 합체가 된 온전한 하나의 '나'가 되었을 거야. 그 하나의 '나'는 하느님이 창조했던 원래의 인간이 아닐까. 온전한 '나'가 되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할 테니까." (336쪽)
"K는 죄를 짓지 않은 무죄한 사람이었다...중략..K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선'으로 규정짓고 있다. 동시에 K2가 자신이듯, 그는 '악'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야' 라는 논리에 가당찮다는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설령 반박하고 싶어하는 '거짓말 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기억 못하는 거짓말이 있을거란 의심을 하지 않는 건 아닐거다. 그것은 우리 몸속에 수 천년, 수 만년 전부터 흘러든 원죄에 대한 기억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또다른 '나'는 무엇인가. 현상일까. 존재일까. 원죄로부터 분리된 선과 악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회귀'에 도달한다. 신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고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면서 생명의 잉태며. 도달이고, 시작이다. 그래서 최인호 작가는 K를 본래의 그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돌아가는 곳. K는 죽음을 그렇게 해석하기로 한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 바로 그곳으로.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겠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을 한 편이라도 쓰고 죽는 작가는 거의 없다. 그런데 백척간두의 고통 속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을 쓸 수 있었고...병에 걸린 뒤 암이 내게는 봄볕이라는 것을 알았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어영부영하다가 들쑥날쑥하다가 허겁지겁 죽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동아일보 2011년 7월 14일자 인터뷰 기사중에서)
그의 삶은 문학으로 연명되어온 것이며, 그가 곧 문학이다.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신을 향한 은유의 고백...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