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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살아 있는 가슴. "뻘 속에 갇힌 무디고 둔한 영혼"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자유로운 가슴을 소유했던 조르바. 거침없이 바다로, 바다와 맞닿은 대지에서도 머물지 않았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육체 노동으로부터 얻어지는 깊은 쾌감을 누린다. 조르바의 살아 있는 가슴은, 악을 바다에 빼앗기고 순수하고 선하게 단련되어 있다. "과부를 혼자 두는 것"에 대한 죄책감, 사랑을 맘껏 내어주지 못하는 남자들의 파렴치함, 이성과 도덕에 붙들린 정조를 용납하지 못하는 순정파 가슴이다. 그의 이러한 '살아있는 가슴'에서 비롯한 괴변은 잠깐의 삐뚜름한 미소를 짓게 하지만, 인간의 욕망마저도 자유에 헌사하는 기염을 엿볼 수 있다. 조르바의 사랑 방식은 간단하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다.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사랑받을, 사랑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이성적 영혼으로 침묵하는 동안, 조르바의 영혼은 뛰고 숨쉬고 있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중에서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의 이력은 깨나 흥미롭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명성을 얻고 몇 해 뒤의 일이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에서 그의 민중에 대한 철학과 사상과 애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나'의 조국애와 민중의식은 진지하고, '크레타 혁명'을 통해 드러나는 동지들의 숙명적 애환과 결단에 고무적이다. 단면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 어쩌면 정치인으로서의 위선과 현실에 타협해 나가야 할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조르바를 통해 충족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럼주를 입안에서 굴리 듯" 조르바는 거침없는 자유를 입안에서 농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꿀꺽 삼킨 쓰디 쓴 술을, "푸짐한 언어"들로 토해낸다. 예의 바르고 조신한 말들이 때론 밥맛 없게 들릴 때가 있다. 반면 막 돼먹은 말투가 미혹적이기도 하다. 단순한 언어의 유희에 그치는 조르바가 아니다. 그가 내놓는 언어들은 투박하지만 길들어지지 않는 자유와 모험의 언어들이다. 그가 경험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철학이고 사상이고, 고뇌다. 혁명을 한답시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만용했던 애국심의 치부를 통해 젊은 시절, 한 때의 혈기를 참회한다. 조르바는 60대 노인으로 '나'와 만난다. 세상 풍파를 몸으로 겪고 배우고 깨달은 조르바의 연륜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한다는 조르바의 푸짐한 언어들은 완전한 조언이며, 농익은 애정이다. 조르바는 거침없이 탐욕적이고 주저없이 육적이다. 반면의 '나'에 대한 조르바의 조롱은 언제나 우회적이다.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칠" 육체에 대한 그의 설득은 약에 쓸만한 개똥철학이다. 왜 행동하지 않는지, 머무르려고만 하는지, 고뇌를 달고 사는지에 대해 조르바는 '나'에게 묻고 있다. "노예의 사슬"만 길어지게 할 뿐 아니냐고. 조르바가 야성적이라는 것 쯤 이제 완전히 파악된다. 그것은 성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혼에까지 이른다. 길들어지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다. 땅을 누비며, 바다를 가르며, 몸으로 사는 사람이다.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하는" 뱀과 같은 사람.
거침없고 야성적이고 쾌락적이며 멋대로인 조르바는 의외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사람이다.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거반 도(道)의 경지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 손의 행복은 꽉 진채로, 불행만을 드러내어 자신을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조르바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라고 고백한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조르바는 위대한 스승이다. 이 한줄의 글은 사실 아무런 감정도 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약간의 근접함은 있을지라도 조르바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나도 뭉클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나를 향한 조르바의 시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난 작품에 비교적 이입이 잘 되는 특이 체질이다. 387쪽 쯤에서의 조르바의 고백은 충분히 나를 다독이고 나를 녹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불쌍해지는 현실감이 불편하긴 했지만, 뭉클한 감정은 앳된 응어리를 쓸어내리게 했다. 아마도 내가 조르바의 순수에 빠져들고 있나보다, 했다. "신성한 경외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조르바는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24쪽)
작품속의 '나'는 자유를 채집하는 사람일 뿐이다. 채집된 '자유'를 바라보고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는 인물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도무지 채집당하지 않는 완전한 이성적 자유, 조르바로 인해 더이상의 채집을 멈춘다. 형태를 남기지 않는, 본연의 자유에 속한 조르바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조르바는 '나'에게 선물같은 자유의 징표로 "산투리"를 남긴다. 산투리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영혼에서 부르짖는 자유의 선율이며 삶의 가사를 붙인, 신을 향한 고백이며 참회의 소리다. 창조자를 거스르는 일은, 허락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오만이며, 방종이다. 조르바가 경험한 숱한 자유의 표현들이, 마지막 겸손한 자유로 '나'에게 건네지는 순간, 나는 완전한 해방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페넬로페가 된 것 같다. 열렬했던 자유, 자유인 조르바, 강렬한 소설 조르바를 만난 반가운 흥미는, 10 여 년이 넘게 떠나 있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만난 그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