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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대장장이는 쇠담금질을 시작하기전에 마음을 정(淨)하게 한다고 한다. 특히나 무사의 칼을 만들 때는 더욱 마음을 정(靜)하게 하였다고 들었다. 비록 살의(殺意)의 도구로 사용됨이 확실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넘어 오고 넘어 가는 '마음'을 차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만들 때도 이와 같다. 음식을 만드는 이가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요리하는가, 슬프고 화난 마음으로 요리하는가에 따라 그 맛이 달콤하거나 쓰거나 하단다. 뿐만아니라 슬프고 화난 상태로 만들어진 요리는 독이 된다고 한다. 미물은 그렇다치더라도 사물이 사람과 통한다는 게 정말일까, 싶으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고보면 허투루 지날 일은 아니다. 사물이 사람의 마음을 읽던, 사람이 사물에 마음을 심던 간에 그것이 사실이거나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약간 오싹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말굽이 살의(殺意)를 발현(發現)한다. 말의 발바닥에 죽은 듯이 -아니 실제로 죽은 게 맞다 - 붙어 있어야 할 물건이 사람의 손에 있다면 일단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굽이 손에 의해 부려지거나 기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려 들고 손을 부리려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런 황당함은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에서, 서서히 불성실하나마 연민으로 변해간다. 연민이라기보다는 연대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살인에 대한 해석의 각각이 변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살인에는 분노와 절망, 혹은 가눌수 없는 절박함 같은 게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변명도, 당위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말굽에 의한 살인에서, '나'는 '바람맞힌 미란이년' 때문에 발길질하는 남자에 대해 부당하다거나 화가나 있지도 않았다. 아예 "때리고 싶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손바닥이 "발작하듯" 내리박힌다. 그 남자의 뒤통수에.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이었다는 게 '발작'이란 단어를 통해 드러난다. 자신의 의지와 별개였음을 언뜻 시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말굽의 우회적 살인을, 殺意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첫번 째 살인은, 말굽의 의지였다고 본다. 그렇기에 당연히 말굽의 기억속에 차 있던 殺意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결국 '미란이년' 운운하던 남자는 "죽여도 좋은 쓰레기들"중에 하나라고 여기던 전 주인의 의지와 기억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패밀리'중 두 명을 죽인 두 번째 살인은, 그야말로 살인의 해석이 필요없는 우발적인 사고다. '개백정의 아들'도 모자라 기폭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막연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의 첫 저항의 의지는 강력했고 확실했다. 두 번째 살인이야말로 진짜 살인의 이유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 뿐이었다.
슬픔은 언제나 그냥 하나의 슬픔 뿐이며, 분파되지 않았다.
어쩌면, 연민의 공포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341쪽)
'나'는 '슬픔의 집'이다. ''탄생 이전의 슬픔'을 간직하고 슬픔말고는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도 없는 '순수한 슬픔'이다. 그래서 "연민의 공포"라는 말로 대신되는 슬픔을 끝내기 위해 세 번째 살인을 한다. 피켓든 남자, 치매걸린 노파, 제천댁의 죽음에 관여한 건 분명 그 이유다. 그들을 살리는 길은 죽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대신된다. 세 번째 살인을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불성실한 연민'이 느껴진다. 이로써 '나'의 마지막은 분명해진다. 말굽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을 살리기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죽음을 완성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방정맞게도 스릴을 만끽해가는 나는 "도덕상의 악과 선"을 외면할 뿐아니라, 그 경계를 잊어가고 있다. 어쩌면 "살인이야말로 언제나 최고의 윤리성을 갖고 있다"는 '나'의 말에 연대감을 가지는 건 아닌지. 죽을 힘을 다해 살라는 말이 있다. 차마 죽지 못한다, 라는 말도 들었다. 죽음이 아무리 가까이서 치근덕 거려도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변명이다. 그렇다면 왜 살아야하는가. 왜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여기서 '나'는 그 답을 얼버무리지만 '말굽'만은 정확히 알고 있다. 최소한 '말굽' 자신이 살아야하는, 그것도 불멸이어야하는 이유 말이다. 완전한 결합, 의식과 사랑과 행위가 결합된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세 번째 살인에서 중요한 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손'이었다. 제천댁의 마지막 손은 "그녀를 강력히 붙잡고 있었고, 그것은 그러므로 비열하고 비천"하다는 것이다. '나'의 손을 들여다 본 것이다. 자신을 강력히 붙잡고 있는 말굽의 집착이 비열하고 비천해 보였을 것이다. 이로써 말굽과의 결별은 확연한 약속이 된다.
마지막 살인은 '나'를 떠나있던 기억이 완성되는 순간에 이뤄진다. "영원히 훼손될 염려가 없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살인을 통해 자신과 완전히 결합시킴으로써 그 자신도 불멸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듯하다. '내'가 '샹그리라'로 되돌아온 이유이기도하다. 상그리라.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땅이 아니던가. 여진을 통해, 여진의 죽음을 통해 '나'는 영원한 행복을 박제(剝製)하기에 이른다. 또한 두 영원한 것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었기에, 더이상의 영원한 슬픔을 '나'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속 이사장의 은둔처, 상그리라엔 "부부가 사는 집이 없다". 그것은 완전한 결합, 완전한 사랑, 완전한 불멸이 없다는 뜻이기도하다. 부부가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살을 맞대고 사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결합자체가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을 못보는 여진, 성불구의 이사장, 쓰레기같은 세상을 용납하지 못하는 '패밀리', 욕정에 사로잡힌 슈퍼마켓 남자와 노랑머리 여자, 이들은 결국 상그리라에서 추방되어질, 아니 애초부터 상그리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상그리라에서 여진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완전한 결합을 꿈꾸고 영원한 행복을 이루고 상그리라를 완성한다. 그리고 비로소 "본성을" 찾는다.
말굽은 단순히 살인의 도구가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의 주인을 도구로 삼았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일목요연하다. 말굽은 '나'를 성장시키고 단련시켰다. 말굽은 '유기적 살의'다. 살의가 살아있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고 힘든 상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가 가졌던 슬픔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말굽에게서. '나'의 마지막 뼈에 달라붙어 있으면서 불멸의 또 다른 주인을 기다리는 말굽에게서 슬픔의 순환이 보간직하고 있는 건 기억이다. 기억이 슬픔이다. '화형'으로도 멸하지 않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원망하며, 또 다시 버림받지 않기위해 불멸의 누군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간절함은 애뜻한 사랑으로 이어져 말굽을 무기물로 바꿔놓는다. 말굽은, '나'의 여진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력한 사랑을 '나'에게서 원했던 듯하다. 뜻밖이다. 살인의 도구와 탄생 이전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의 사랑이라니. 마땅히 자신도 인정한 싸이코패스, 말굽에 대해 오싹한 경멸이 느껴져야함에도 그의 불멸이 어쩐지 안됐지, 싶다. 이사장의 얼굴과 몸뚱아리가 따로 노는 것에서 느껴지던 안쓰러움과 같은 것이다. 혼란이 느껴진다. 한 마디로, 기묘하고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