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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도
윤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메리야쓰, 빤쓰 바람으로 돌아다녀도 기껏해야 잔소리를 맞을 뿐, 칼침은 안 맞는다. 불가침 불문률에 힘입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부부싸움은 종종 새벽녁까지 건재하다. 시험점수에 상응하는 톡톡한 댓가들이 치러지는 현장은 복도 창문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집’ 이다. 즐거운 곳에서 아무리 오라고 꼬드겨도 내 쉴 곳은, 곧 죽어도 내 집뿐이란다. 집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왜 집으로 가야만 하는걸까. 가족 때문일 것이다. 집은 그저 형상일뿐, 가족이 본질일테니까 말이다.
형상이었던 과거의 집을 기억하게하는 <귀가도 - 철학잉어> 에서, 잉어는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외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집’ 이기도하며, 귀가의 유일한 이유, 그리고 석형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이기도 하다. 죽을 자유를 위해 물밖으로 연신 뛰어오르는 잉어를, "못 된" 잉어를 쉽사리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돌아갈 집의 이유를 잃어버릴까봐서였을까. 그것만은 아니다. 잉어가 "물속에서 진한 눈물" 을 흘리는 것에서 간절한 이유가 묻어난다. 도망치고 싶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라는 간절함을 보게된다. 습관적으로든 어떻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그다지 상심스럽지 않다. 그런데 유감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도망치고 싶다는, 바람직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강력한 충동이 정작 ’삶’ 과 이어지고 있을 때다. 집 나가야 숨통이 트일것 같다, 라고 말하게 될 때다.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에서의 혜순쯤 되고보면, 집이어서 죽을 것만 같다. "며느리를 쟁기 멘 소로 아는 시어머니" 와 그녀의 아들, 즉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징그러운 삶" 의 연속이다. 며느리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았지만 정작 혜순은 아내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길고도 징그러운 삶의 끝에는 도망이 기다리고 있다. 도망치고 싶다. 단지 살기위해서. "뜨뜻하게 물이 도는 눈"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남편의 짓거리에 한순간 속을 뻔했다. 이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로 어머니- 치매에 걸려 8년째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며 친자식임에도 5년만에야 방 문을 열어본, 바로 그 어머니- 를 들먹이고 있다니. 수모는 다 뭐고, 불효는 또 뭔지. 하지만 이런 신파적인 김명구때문에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는 분명한 배반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믿음에 또 한번 다가서게 만든다. 칼로 수 도없이 물을 베고 사는 부부들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정작 떠나지 말아요, 라고 말해야 할 사람은 순봉이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 미림엄마와 그녀의 두 자녀야말로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고마움의 이유를 달고 사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른다.그의 삶에서 현실은 구부정하고 엉거주춤하지만 "고맙습니다"만은 똑바르고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 책을 읽다가 한 순간 확 집어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때가 바로 이 양반을 만나서이다. 속이 틀리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편으로, 나의 익숙한 단면이 스멀거리며 파고들기에 들었던 책을, 유순봉을 내려놓는다. 삶을 위한 궁여지책으로의 ’거짓 고마움’들이 떠오른다. 영악스러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고마움은 구부정하고 유들유들하다. 고마움에 담긴 어쩔 수 없는 삶의 슬픈 변명을, 콱 쥐어박고 싶다.
"비겁한 남편"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도 끝내 남편을, 자신처럼 가엾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깊은 슬픔이 움츠려있다. "모든 죽은 영혼들이 그리워하는 삶의 독한 괴로움, 칼끝 같은 아픔을 나는 아직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116쪽) 빨간 원피스에 시장 바구니를 든 여느 아줌마들에게서 느껴지는 고단한 귀가가 <귀가도 - 아직은 밤> 에 유착되어 있다. "속으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겉으로는 여전한 미련과 이유를 기대하는 무거운 귀가에 비해 <귀가도2 -도시철도 999> 는 만화의 한 컷, 한 컷처럼 정밀하고 익살맞은, 그러나 차마 웃을 수만은 없는 씁쓸한 에피소드다. 세상과 사람, 사람과 이야기, 이야기와 질문이 탑승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숱한 군상들의 해묵은 귀가가 순환되고 있다. 답답한 웃음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건, 나의 여느 귀가와 다르지 않은 공감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삼가, 교훈이라면 노약자석이 비록 텅텅 비어있어도 절대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 전철 손잡이에 매달린 피곤이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지분거리는 하늘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몹시 필요한 것 말이다. 길을 걷고 있을 때 아는 체하며 뒷통수를 세게, 그냥 세게가 아니라 눈알이 툭 튀어 나오도록 거침없이 세게 치는 사람, 돌아보니 결코 아는 사람이 아니다. ’ 아쿠,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줄 알고...’. 멋쩍게, 그러나 기민하고 성급하게, 횡하니 사라진다. 겨우 튀어나오기만 하고, 미처 빠지지 않은 눈알을 팔뚝으로 문대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 핑계로 펑펑 울어 퍼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대로 망치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못질을 핑계로 손가락을 사정없이 벽에 박고는, 째려보고 흘겨보고 노려보는, 내 뿜을 수 있는 모든 독기를 담아 시선을 한 몸에 주리라. 망치 너에게. 핑계있는 울음, 핑계있는 원망을 퍼붓고 싶었다. 속이 시원해지고 싶었다. 윤영수의 소설을 읽는 내내. 그만큼 내게 바짝 들러붙는 이야기들이, ’살이’ 와도 닿아있기 때문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