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전우치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7
김현양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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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차별은 존재한다. 서얼 차별은 현재에도 다른 형태로 얼마든지 존재한다. 법과 원칙, 상식을 말하지만 첨단을 달리는 차별에 차별금지법을 뺨칠 정도다. 차별의 시대에 누구나 블랙리스트로 대학의 브랜드로 비정규직으로 부동산으로 자유롭게 처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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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장석준.김민섭 지음 / 갈라파고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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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이 가난할수록 대학의 브랜드가 가난할수록 직업의 브랜드가 가난할수록 햇살 비치던 시절로 돌아가 그 기원이 뭘까 탐구해 보라. 그러면 신분제 사회와 아주 닮은 사회 구조에 다다른다. 그로부터 사회를 설계하는 정치 세력의 선택부터 나의 학업, 직업, 모든 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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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rance 2024-02-1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 사회에서 계급은 안없어진다. 게임의 룰만 계속 바뀔뿐.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와 사회 135호 - 2022.가을
비판사회학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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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주변에는 동서로 때맞춰 정치개혁의 팻말을 들어올리나 얼만 안 돼 제자리 그대로다. 정치개혁은 비례대표제의 전면적 확대, 모든 선거의 결선투표제 적용 등 선거법 개정이 핵심이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 2 기득권 정당들이 보여준 막태는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선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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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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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같은 문학상이 주는 실망감을 어디서 보상받을까? 한국이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수상 없는 이 선집에 영광을 돌리고 싶다. 문학상이 작가에게 자극제가 되기보다 마케팅 수단이나 고시 합격증 주는 듯한 고루한 권위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문학상의 수석 합격이 달갑지 않다.

노벨상도 각국의 수상 대상자 선정과 나름의 엄격한 심사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 생존하는 뛰어난 작가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작가를 선정하는 결과만 보면 고개를 저을 때가 적지 않다. 도대체 수상 기준이 뭘까?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결에는 명확한 판정 기준이 있고 법관별로 최종 판결과 별도로 개인 의견을 낼 수 있다.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수상위원회의 편집된 몇 마디 말로는 전 세계 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전 세계 판정단을 뽑아 VAR로 다시 보면 어떨까? 오직 수석 합격 1명만 뽑는 상이기에 오랫동안 그 권위는 엄격하게 대대로 전해진다. 누가 감히 이 추상적인 권위를 우스개 정부 비판 하듯이 하겠는가? 그것은 종교 비판처럼 아무도 꺼내들지 않는 칼일 것이다.

노벨상의 다른 부문은 해마다 공동수상자를 내거나 때로는 단체에 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학상만은 1명만 뽑겠다는 외고집을 부리며 점수화하기 어려운 예술에 수석합격자를 낸다. 부커상이 영미권과 국제 부문을 나누듯이 대륙별로 수상자를 내거나, 전미도서상처럼 시, 소설, 논픽션 등 문학 장르별로 상을 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면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얼마든지 있다. 돈 때문이라면 차라리 상금을 주지 말자. 어차피 대부분의 문학상이 명예뿐이라면 돈으로 차별하지 말고 진짜 문제적인 작가들을 살려내자. 어차피 각 대륙의 작가들은 그들 영토에서 배고프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당신은 2011년 비현실적인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고난을 질머질 계약금과 인세에 기대기보다 문학을 半업, 專업하는 작가들이 경제적으로 당당한 제도를 누리게 하자. 노벨재단 같은 비영리 재단이든 사회적 조합이든 1회성 상금을 수여하기보다, 그런 자금은 국가나 어떤 형태의 조직과도 독립되어 운영되는 작가 펀딩, 작가 대출, 기금 조성 등 제도의 개발, 작가 급여 등 작가들의 집단 복지를 위해 쓰자. 그러면 작가들도 블랙리스트의 자유에서 자유로워지고 경제적으로 건강할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문학상이 1년에 한 번 오직 수석 합격 1명에게 몰아주는 건 너무 가혹하다. 마치 한국의 서울대와 지방국립대가 신분적으로 갈라지며 전국 수석 서울대가 온갖 혜택을 쓸어가듯이, 19세기 이전으로 회귀하는 능력주의의 제도는 이제 더는 만들지 말자.

작가들은 대부분 대학 안에 직업의 울타리를 치고 작품을 쓴다. 아마도 그들에게 대학 밖은 경제적으로 0점이 매겨지는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진로에서 결코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미국의 영향(e.g. creative writing 석사 과정) 받은 탓인지 국내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몰라보게 늘어났다. 이는 국문과의 창작 수업을 보다 전문화한 교육 제도로 보인다. 창작 교육 면에서 국내 유명 작가들이 교육 지도자가 되고 학생들이 체계적인 작가 수업 과정을 밟는 진일보한 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이 생긴다. 작가가 학교에서 배워서 성취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만 봐도 갑오개혁 무렵까지 작가들은 다수가 고시를 통과한 국가공무원이었다-詩人 정약용(丁若鏞)이 성균관에서 시작법을 배운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작가지망생들은 대부분 졸업 후의 진로가 막막하지 않을까 하는 선험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운좋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도 창작의 빈곤에 부딪치거나 생활고에 지쳐 버티기 힘들지 모른다. 작가의 자산은 프로그래머의 언어 C++를 다루는 기술보다 사회 속에 풍부하게 있다. 장강명이나 이케이도 준(池井戸 潤)같이 사회를 폭넓게 경험하면서 작가 수업을 쌓는 게 맞지 않을까? 우리는 신춘문예 당선이나 신인문학상 수상이 작가의 길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개인적으로 문예창작이나 문학 전공은 교원이나 학자가 될 사람만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한국을 대표하거나 그중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의 전공이 모두 문예창작이나 문학이라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나라면 목숨을 걸고 표현의 자유를 사수한 옌롄커나 살만 루시디에게 상을 주고 싶다. 만약 노벨상이 공동수상을 허용한다면 억압된 글쓰기보다 차라리 킬러들에게 쫒기거나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 미련없이 군대를 떠난 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상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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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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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보니 역시 문학상은 보수적이다. 사실주의라도 모든 걸 다 경험하고 쓸 수는 없다. 에르노의 말이 진리라면 작가는 곧 빈곤에 빠질 것이다. 풍아송은 그런 추상적인 권위를 단박에 걷어차는 진지한 발길질이다. 비판하지 않는다면 전체주의의 노예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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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2-10-0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노벨상은 옌롄커가 받아야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데, 이 글을 보니 반가워서 답글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