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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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같은 문학상이 주는 실망감을 어디서 보상받을까? 한국이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수상 없는 이 선집에 영광을 돌리고 싶다. 문학상이 작가에게 자극제가 되기보다 마케팅 수단이나 고시 합격증 주는 듯한 고루한 권위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문학상의 수석 합격이 달갑지 않다.

노벨상도 각국의 수상 대상자 선정과 나름의 엄격한 심사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 생존하는 뛰어난 작가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작가를 선정하는 결과만 보면 고개를 저을 때가 적지 않다. 도대체 수상 기준이 뭘까?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결에는 명확한 판정 기준이 있고 법관별로 최종 판결과 별도로 개인 의견을 낼 수 있다.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수상위원회의 편집된 몇 마디 말로는 전 세계 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전 세계 판정단을 뽑아 VAR로 다시 보면 어떨까? 오직 수석 합격 1명만 뽑는 상이기에 오랫동안 그 권위는 엄격하게 대대로 전해진다. 누가 감히 이 추상적인 권위를 우스개 정부 비판 하듯이 하겠는가? 그것은 종교 비판처럼 아무도 꺼내들지 않는 칼일 것이다.

노벨상의 다른 부문은 해마다 공동수상자를 내거나 때로는 단체에 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학상만은 1명만 뽑겠다는 외고집을 부리며 점수화하기 어려운 예술에 수석합격자를 낸다. 부커상이 영미권과 국제 부문을 나누듯이 대륙별로 수상자를 내거나, 전미도서상처럼 시, 소설, 논픽션 등 문학 장르별로 상을 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면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얼마든지 있다. 돈 때문이라면 차라리 상금을 주지 말자. 어차피 대부분의 문학상이 명예뿐이라면 돈으로 차별하지 말고 진짜 문제적인 작가들을 살려내자. 어차피 각 대륙의 작가들은 그들 영토에서 배고프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당신은 2011년 비현실적인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고난을 질머질 계약금과 인세에 기대기보다 문학을 半업, 專업하는 작가들이 경제적으로 당당한 제도를 누리게 하자. 노벨재단 같은 비영리 재단이든 사회적 조합이든 1회성 상금을 수여하기보다, 그런 자금은 국가나 어떤 형태의 조직과도 독립되어 운영되는 작가 펀딩, 작가 대출, 기금 조성 등 제도의 개발, 작가 급여 등 작가들의 집단 복지를 위해 쓰자. 그러면 작가들도 블랙리스트의 자유에서 자유로워지고 경제적으로 건강할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문학상이 1년에 한 번 오직 수석 합격 1명에게 몰아주는 건 너무 가혹하다. 마치 한국의 서울대와 지방국립대가 신분적으로 갈라지며 전국 수석 서울대가 온갖 혜택을 쓸어가듯이, 19세기 이전으로 회귀하는 능력주의의 제도는 이제 더는 만들지 말자.

작가들은 대부분 대학 안에 직업의 울타리를 치고 작품을 쓴다. 아마도 그들에게 대학 밖은 경제적으로 0점이 매겨지는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진로에서 결코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미국의 영향(e.g. creative writing 석사 과정) 받은 탓인지 국내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몰라보게 늘어났다. 이는 국문과의 창작 수업을 보다 전문화한 교육 제도로 보인다. 창작 교육 면에서 국내 유명 작가들이 교육 지도자가 되고 학생들이 체계적인 작가 수업 과정을 밟는 진일보한 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이 생긴다. 작가가 학교에서 배워서 성취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만 봐도 갑오개혁 무렵까지 작가들은 다수가 고시를 통과한 국가공무원이었다-詩人 정약용(丁若鏞)이 성균관에서 시작법을 배운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작가지망생들은 대부분 졸업 후의 진로가 막막하지 않을까 하는 선험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운좋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도 창작의 빈곤에 부딪치거나 생활고에 지쳐 버티기 힘들지 모른다. 작가의 자산은 프로그래머의 언어 C++를 다루는 기술보다 사회 속에 풍부하게 있다. 장강명이나 이케이도 준(池井戸 潤)같이 사회를 폭넓게 경험하면서 작가 수업을 쌓는 게 맞지 않을까? 우리는 신춘문예 당선이나 신인문학상 수상이 작가의 길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개인적으로 문예창작이나 문학 전공은 교원이나 학자가 될 사람만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한국을 대표하거나 그중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의 전공이 모두 문예창작이나 문학이라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나라면 목숨을 걸고 표현의 자유를 사수한 옌롄커나 살만 루시디에게 상을 주고 싶다. 만약 노벨상이 공동수상을 허용한다면 억압된 글쓰기보다 차라리 킬러들에게 쫒기거나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 미련없이 군대를 떠난 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상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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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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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보니 역시 문학상은 보수적이다. 사실주의라도 모든 걸 다 경험하고 쓸 수는 없다. 에르노의 말이 진리라면 작가는 곧 빈곤에 빠질 것이다. 풍아송은 그런 추상적인 권위를 단박에 걷어차는 진지한 발길질이다. 비판하지 않는다면 전체주의의 노예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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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2-10-0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노벨상은 옌롄커가 받아야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데, 이 글을 보니 반가워서 답글 남깁니다.
 
악마의 시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7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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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어디서나 종교나 정부 비판은 인생이 끝장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물며 종교 지도자가 정부의 주인이라면 설상가상일 겁니다. 많지 않지만 지구에도 문학이 존경받을 때가 있습니다. 뒤따르는 수난은 학교와 직장보다 가혹하지만 玉지켜야 할 자유 때문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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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커머스의 역사 - Since1996 현직자의 인사이트로 살펴본 IT 플랫폼 26년사
이미준(도그냥)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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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만 해도 인터파크, 전자랜드, 알라딘 등 극소수의 인터넷 쇼핑몰밖에 없었다. 그 옛날 어떻게 잰걸음으로 광화문 교보문고나 용산 전자상가를 헤매고 있었을까? 어느새 11번가나 쿠팡에서 0시 아이폰 사전주문을 하려고 눈과 손이 긴장되어 있다. 한국 클릭질 쇼핑의 역사를 펼쳐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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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검사들 - 수사도 구속도 기소도 제멋대로인 검찰의 실체를 추적하다
최정규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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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곧 선거에서 잘못된 선택에 이를 수 있다. 법 조문에는 '처분 등'으로 표현되는 포괄적인 자구가 있다. 최근 검찰의 수사권 확대는 이런 불성실한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잦은 개정 때문인지 그동안 명확성의 원칙이 눈감아 주고 있었다. 우리가 현재 아는 건 검찰의 '처분 등'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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