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은 역시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말했듯이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현실주의적 입장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전통적 사유와 만날 수 있을까.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제1회 대안담론 포럼 (2010년 6월 11일)
제2세션 발제문 요약
발제자 :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자유주의를 한국의 정치 현실로 가져오는 문제
: 정치적 실천의 관점에서 그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무엇에 기여할 수 있나?


들어가며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자유주의의 위상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화 이후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건국 이후 자유민주주의는 국가건설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치적 실천을 통해 보편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은 데 반해, 자유주의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이 자유주의의 중심 가치를 포괄하는 동안에도 자유주의가 정치이념으로서 중심적인 위상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과부하(過負荷)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의 민주화가 자유주의적 계기를 가져왔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과정에서 독재권력을 타도하는 정치적 목표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평등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와 원리가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 그러한가? 한국의 민주화는 정치체제를 민주화하는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원리들은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로 획득되기 이전에 이미 헌법 조문을 통해 법적으로 명문화돼 있었다. 법의 실제가 아닌 형식만을 본다면 한국은 처음부터 민주주의 국가였고 자유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실제 현실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1) 보편적 인권 사상, 2)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3)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세 가지 문제영역에서 자유주의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1) 보편적인 인권 사상

한국의 민주화는 헌법 조문으로 존재했던 정치적 자유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권리에 대해 법의 실제적 효능을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본권은 민주주의 실천에 의존적인 유동성을 보여왔다. 서구에서 자유주의의 이념과 가치는 시민 개개인과 사회 전체의 규범이자 가치로서 널리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체제나 정권의 성격을 넘어서는 효능을 갖는다. 현재 한국의 보수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실천이 위축되면서 시민적 기본권이 곧바로 위협되는 현상들은 이와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 정부에 대한 반대를 차단하고 약화시킬 목적으로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치적, 법적 조치들이 일상적으로 널리 시행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사례 가운데 최근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불심검문개정안"(5월 27일 국회행정안전위 통과, 법제사법위원회 계류 중)이 그것이다. 경찰이 범죄가 의심되는 누구에게나 불심검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강화한 것이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국가인권위는 이 법안이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국회에 수정보완을 권고했다.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국회 안팎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별다른 비판과 문제제기 없이 어떻게 국회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었나 하는 것이다. 냉전시기 권위주의 하에서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헌법 위에 있었던 법이다. 탈냉전과 민주화는 헌법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보안법의 지위를 헌법에 종속시키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은 서구의 왕정이나 귀족정 시기와 같이 여전히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제한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시민사회에서도 이러한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다. 민주주의 하에서도 국가의 목표와 의사가 개개 시민의 자유 위에 군림하기 때문에 시민의 자유는 항상적인 위협 하에 놓여있다. 여기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간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과 다수 지배의 원리를 통해 집합적 결정을 만들어내며 그것은 곧 법으로 구현된다. 이에 비해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 대해 평등하게 인신, 양심과 종교, 안전, 재산소유 등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며 이러한 권리는 법적, 형식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불평등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현실의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에 비해 진보적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기반을 갖지 않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법적, 절차적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권을 구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질적 측면에서도 그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국가 공(강)권력에 의해 이뤄지는 개인자유의 침해는 그 대상이 기존의 지배적 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거나 사회적 소수자들 혹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파들이 보수파들에 비해 민주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구현하는데 더 열성적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를 수호함에 있어 자유주의 가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개인의 권리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나 합의 또는 특정집단 내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행동양식보다 개인의 자율성과 기본권이 우선한다는 관념과 문화, 사회적 가치가 자리 잡을 때 실현된다. 이 점에서 한국의 진보파들이 얼마나 이러한 가치와 관점을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2)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중앙집중화에 대응하는 자율적 결사체와 지방으로의 권력분산

60년대 미국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위계적으로 중앙집중화된 권력의 정점을 향하여, 공간적으로 서울로의 집중을 결과하는 "소용돌이의 정치"로 특징지은 바 있다. 이후 이 현상은 더욱 강화되어왔다. 6,70년대의 국가주도 산업화는 산업과 경제엘리트의 구조를 집중화시켰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의 도래는 이 구조를 완화시키지 못하고 더욱 강화시켜, 서울하고도 강남, 경제엘리트 중에서도 소수의 재벌, 문화·교육에 있어서도 소수의 대학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초집중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토크빌의 이론을 빌어 말한다면, 분단국가의 건설과 이념갈등의 과정에서 기존의 중간집단들은 해체된 반면 사회변화와 발전에 따른 사회의 자율적 중간집단이 발전하지 못한 결과이다. 과거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지방적 자원들과 자율성들은 국가건설, 전쟁, 산업화 등의 격변적 사회변화로 해체되었다. 산업화가 동반한 생산자집단과 사회적 약자의 조직들, 기존 사회질서에 이견을 말하는 지적, 문화적 비주류엘리트가 자율적 조직화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치와 이념의 다원화, 사회경제적, 교육문화적 자원의 다원화가 허용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의 지배적 가치, 이념, 정점을 향해 치닫는 일원적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흥미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병폐로 지적되는 지역주의, 지역감정은 지역에 대한 충성, 지역의 자율성과 그에 바탕한 발전을 위한 지역의 열정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지역 지지기반을 배경으로 한 정치엘리트들이 중앙의 권력과 자원을 어떻게 획득하거나 분점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중앙을 향한 지역간 경쟁은 지역분권화, 권력과 사회경제적, 문화적 자원의 지방분산을 가져올 수 없다. 서울로의 중앙집중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엘리트들의 정점을 향한 수렴현상이 만들어낸 공간적 특성이다. 

 

 

 

 



몽테스큐나 토크빌의 이론은 봉건적 지방분권으로부터 중앙집중화한 절대주의체제로의 이행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귀족적 권력의 자율성이 해체되면서 중앙집중화를 가져오는 프랑스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토크빌이 자율적 중간집단을 말할 때, 그것은 지방의 자율성과 근대화에 의한 기능적 분화에 의한 자율적 집단 모두를 포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봉건적 지방분권의 경험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국가건설과 산업화이후에도 지방분권화의 경험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 현실에서 지역적, 공간적 분권화를 곧바로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효과를 갖기 어렵다. 이점에서 중앙집중을 완화하는 기능적, 계층적 수준의 자율적 집단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있다. 자율적 집단의 발전이 집중화한 중앙권력을 그리하여 지역적으로 집중화된 서울중심 권력을 완화하는 가져오게 될 때, 그것이 지방분권화의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앙집중화와 서울집중에 대한 해결책은 사회의 주요 영역과 수준에서 이익, 가치, 열정을 달리하는 사회집단들이 자율적으로 결사체를 형성하여 사회관계와 가치의 구조를 다원화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자율적 결사체를 조직, 형성하고 민주주의의 제도 안에서 이들이 자기의사를 대표하는 것을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동심원적 엘리트구조를 다변화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강화를 의미한다.

토크빌은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그로 인한 국가집행부권력의 강화를 제한하고 한 사회가 자유로운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방편으로 사회적 가치, 풍습, 행동양식을 특징짓는 문화(moeur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이를 시현하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행부권력의 강화는 단지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현상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양식과 깊이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허약한 사회의 기초 위에 강력한 국가가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가치는 국가중심적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는 처음부터 민족공동체의 제도화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내재적으로 정당한 것이고, 국가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정치공동체인 것이다. 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도, 이를 최대의 효율성을 통해 집행하는 것도 이 목표달성을 위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동원하는 것도 국가이고, 국가의 집행부이고, 대통령이다. 이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국가 권력의 작동방식에서 잠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갖도록 하는 측면이다. 일이 되게 하는 것도 국가의 행정기구와 그것과의 연계이고,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도 국가를 향한 국가중심성이 특징을 이룬다. 이러한 과정과 조건에서 개개시민들이 권위주의적, 온정주의적(paternalism) 가치관과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행동양식은 압도적으로 국가와 개개시민들이 대면하는 영역에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여기서 자율적 결사체, 그것의 가장 포괄적 정치조직으로서 정당의 역할이 왜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가치를 습득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가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토크빌이 민주주의에서 결사체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결사체(곧 정당)의 역할에 주목했던 까닭은 그것이 다른 자발적 결사체의 활동을 자극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당은 정치를 경험하고 그 효능을 스스로 터득하는 정치교육의 場이다. 자율적, 자유주의적 인간은 이 장, 이러한 공적 공간에서 발생한다. 좁게는 대통령, 넓게는 국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좌와 우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정치의식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소극적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수용하고, 얼마나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 문제에 대한 고려를 회피하는 태도는 개혁의 열정이 강한 진보파들 사이에서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3)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자유주의

한국의 민주화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에 대항했던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특징된다. 운동이 수반했던 엄청난 열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은 특정의 민주주의관을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구질서가 존중하지 않았던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었고, 자유주의도 그러했다. 민주주의를 추동했던 중심적인 사회세력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였고,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이렇다 할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 결과 자유주의의 기반 없는 민주주의가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을 이념적으로 주도했던 민중주의는 민주주의와 (혁명적/급진적) 민족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민주주의관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대의제민주주의의 범위를 훨씬 넘어 이상주의적이고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적인 공동체는 진보적이고 올바른 이론과 그 기획에 의해 일거에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 진보적 엘리트들 사이에서 정서적 급진주의 또는 급진적 정서주의를 만들어 내는 배경이 되었다.

철학에서 정서주의(emotivism)는 어떤 실재성/현실성을 서술하지 않고 또한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를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진술은 단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감정/정서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서주의가 추상적 이념과 과도한 열정으로 덮씌워지면서 급진화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이러한 급진주의가 수반하는 정치관은 현실에 천착하는 사고와 행동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정치적 실천은 현실로부터 괴리되는 경향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러한 경향이 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천이나 과정과 쉽게 접합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가 자유주의의 냉정한 현실주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 있다. 자유주의의 정신적 원천은 신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도덕적 의무감을 개인 생활의 중심에 놓는 신교, 특히 칼비니즘으로부터 왔다. 여기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현실을 변화시키려 하든 수용하려 하든 신의 명령에 복무한다는 격렬한 열정을 냉정한 열정으로 그 성격을 전환시킨 힘이다. 그것은 어떻게 격렬한 도덕적 감성이 현실을 냉엄하게 다룰 수 있는 힘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것은 로크의 "정부에 대한 두 개의 논설"이나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한국에서 분출되는 정치적 열정은 이러한 냉정한 현실주의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최근 년에 들어와 보수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운동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유주의를 속류화하거나 급진화하여 실제로는 자유주의로부터 일탈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여기서는 진보적 운동이 변혁이론을 중심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지자체선거 이후 한 진보적 지식인 서클은 변혁적 민주주의관을 어떻게 대중과 결합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부르조아적 반자본주의, 지역생태주의, 제3세계민족주의, 글로벌케인즈주의, 사회운동노조주의, 사회주의"등 급진적 또는 진보적 이념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급진민주주의 프로젝트를 제시하였다(경향, 6/5일자). "한국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이러한 이념과 운동이 한국 사회의 진보 전체를 말하거나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혁이론과 운동전략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민주주의관의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운동전략과 방향이 한국 사회의 일반대중, 소외계층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키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렇게 추상화된 이념은 전혀 현실에 기초하거나 현실을 대면하고 있지 못하다. 고도로 추상화된 급진이론은 진보적 엘리트의 지적 프로그램일 수는 있어도 대중의 삶의 조건을 실제로 다루는 문제를 둘러싼 관심사항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그것이 대중과 결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이 지체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시민들이 대의제민주주의 그 자체가 갖는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대의제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제도들과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이 대의제민주주의가 상정하는 이상적 기준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조차 크게 제한되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변혁적 운동론에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내용에서도 반자본주의적 생산체제 혹은 사회주의가 이념적 준거로서 진지하게 고려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신자유주의 혹은 총체적으로 오늘의 경제조건을 이상주의적으로 바꾸고자하는 변혁적 모토나 이론을 천명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해결의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회계층에 예외 없이 그러나 차등적으로 몰아닥친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의 충격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 다음으로 경제와 시장에서 개혁할 수 있는 범위가 무엇이고, 그로부터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를 발견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정치를 통해 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깊이 사고하고,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변혁적 사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권력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현상에 대한 이해가 미약하다는데 있다. 자유주의의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실천이성은, 인과관계를 통해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 현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한 겸허함과 권력의 사용을 수반하는 정치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성의 한 유형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조건, 정치문화에서 자유주의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상념되는 이상과 목표가 과도하게 높게 설정돼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도한 열정을 차가운 열정으로 전화시켜, 현실 문제의 복합적 구조 속으로 침투하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예술을 창출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자유주의를 논의하는 데 있어 다음의 세 가지 맥락이 중요하다. 첫째, 한국 사회는 이데올로기갈등이 심하고 좌우이념대립이 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어떤 위상과 역할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둘째, 보다 중요하게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풍요롭게 하는 사회윤리적 가치의 이념적 자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대한 고려이다. 셋째, 정치적 이념은 비전, 가치, 정책방향을 통해, 여러 사회세력들 사이의 정치적 경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앞에서 본 발표자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자유주의는 어떤 지위와 역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본 발표자의 관점에서 위의 문제영역 모두에서 자유주의는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유주의를 논의하는데 있어 본 발표자는 자유주의만이 중요한 이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정치이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이념으로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어떤 이유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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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형도 - 영국의 신좌파와 문화연구 - 이택광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목은 비단 프랑스의 이론가들에 국한해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영국의 ‘신좌파’도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정치와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장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스튜어트 홀은 <뉴레프트리뷰> 50주년 기념호에 실은 회상기에서 영국 신좌파의 탄생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홀은 신좌파의 탄생을 유발한 두 가지 사건을 지목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리쾨르에게 <정치적 역설>을 집필하게 만든 소련의 헝가리 혁명 진압이었고, 두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침공한 일이었다. 두 사건은 각각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와 영연방의 공익성에 대한 희망을 접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에게 이 사건들은 충격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 붐에 힘입어서 사회의 진보를 낙관했던 지식인들은 헝가리와 수에즈 사건을 계기로 현실사회주의국가와 복지국가 모델 모두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신좌파는 이런 회의에서 출발한 새로운 영국의 지식인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신좌파를 지칭하기 위한 시기구분은 1968년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홀은 이때 형성된 신좌파는 1956년 신좌파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홀의 지적은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후자의 의미를 되새겨보려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은 1956년 이후에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국의 신좌파는 <뉴리즈너>(New Reasoner)와 <대학좌파리뷰>(Universities and Left Review)를 각각 발간하던 세력들이 힘을 합쳐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하면서 결성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의 신좌파에게 매체 발간이 대단히 중요한 ‘활동’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체를 발간하고, ‘사회주의클럽’을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2-300명의 청중을 모아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문화적 활동’을 전개했다.

영국의 신좌파를 구성하는 세력 중 하나인 <뉴리즈너>그룹은 산업화 지역인 요크셔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저작을 남긴 E. P. 톰슨이 대표적인 참여자였다. <뉴리즈너>그룹의 특징은 인간주의로 대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대학좌파리뷰>그룹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는 젊은 학생들로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신좌파그룹에게 시급했던 것은 현실사회주의와 복지국가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길’이었다. 이 길은 곧 현실사회주의와 현실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지식인들도 프랑스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전자보다 후자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주요한 정치적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법인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의 포섭전략이 급속하게 정치사회적인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신좌파의 판단이었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전통적인 좌파의 관점을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적 부흥에 고무 받은 다양한 분석들은 마침내 분배의 문제를 복지국가나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학을 통해 완전히 해결했다는 지표를 던져주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영혁명이나 복지정책의 확대는 협동조합주의(corporatism)라는 공동체적 합의를 공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결과는 전통적인 계급관계를 침식하고, 노동계급을 부르주아화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보는 그룹과 낡은 것의 귀환으로 보는 그룹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그 배후에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아주 단순한 결론이었다. 계급과 계급투쟁은 건재한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것은 반혁명적인 것이라는 관점이 팽배했다. 장구한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당연지사이지만, 신좌파는 이런 ‘구좌파’의 의견과 팽팽하게 맞서면서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한다. 신좌파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라는 것이 모순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양가적이기 때문에 결정하기 곤란한 어떤 문화적 현상을 통해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의미했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운위되는 정치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외연 확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신좌파적인 주장은 ‘사적인 문제’와 ‘공공적인 쟁점’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변증법을 전제한다. 결국 신좌파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둘의 접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반이론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글턴처럼 알튀세르주의를 도입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홀이나 앤더슨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좌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그람시였다. 반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은 특정한 이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한다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개입해서 정치적인 것의 역동성을 포착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신좌파에게 ‘문화’라는 영역은 문화철학이나 인류학에서 다루는 특정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헤게모니의 장이었다. 신좌파는 생산력주의와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정치적인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왔던 것이다. 이 가정에서 문화는 정치적인 것이 출몰하고 갈등하는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하겠다.

물론 신좌파 중에서도 문화 분석에 대한 관점은 다양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겉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계급구조는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와, 매스미디어의 등장과 문화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같은 문화적 변동이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견해가 그것이었다. 전자는 훨씬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후자는 다소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문화적 영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대응도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소비주의에 현혹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는 장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홀의 주장처럼 실제로 수정주의처럼 보이는 이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급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새로운 사유재산 개념의 출현, 기업조직과 고용형태의 변화, 역동적인 축적체계와 소비방식이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근본적인 토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태도라고 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좌파의 입장 자체가 근원적이고 급진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임무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시대별로 우리는 숱한 ‘마르크스주의들’을 가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들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신좌파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신은 협소한 개념으로 정치를 규정하는 구좌파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일상생활 도처에 정치적인 것이 편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신좌파를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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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형도 - 이탈리아적인 차이 - 이택광 

 

현대사상의 지형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한 이탈리아일 것이다. 아감벤과 네그리를 제외하고 유럽의 사상 흐름을 논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로젠조 키에사나 알베르토 토스카노처럼 영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진이론가들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한 이론적 차이를 보이는 이들을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일한 그룹으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변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차이’를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탈리아는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지적 풍토를 드러내는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완강한 가톨릭 보수주의가 지배적인 국가에서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중심과 구별되는 온도차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최근 리-프레스 출판사에서 나온 『이탈리아적인 차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17년이나 지낸 한 여성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결심했을 때 정부와 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이탈리아는 북유럽과 상당히 다른 지배체제의 ‘권위주의’가 일상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성의 안락사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 수상 베를루스코니는 “이 여성이 아직도 젊고 생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락사를 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국가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해서 한 여성의 생명을 ‘수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아감벤의 용어인 생명정치의 ‘예외성’이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참으로 외설적으로 구현됐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아감벤의 용어에 묻어 있는 하이데거적인 엄숙함은 내파돼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정작 이탈리아에서 하이데거적 비장미를 간직한 예외적 인간 ‘호모 사케르’는 세속적 차원에서 국가와 교회에 의해 변용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외적 인간’이나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하는 이탈리아에서 지식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유럽국가와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특수성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20세기 초반 미래파의 등장부터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다른 유럽국가와 구별할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적인 것의 차이를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탈리아적인 특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들이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이탈리아 판본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적 특수성은 기 드보르가 지적했듯이, 폭력과 압제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드보르가 이탈리아를 하나의 ‘실험실’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관광엽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탈리아’(belle Italia)와 정반대의 풍경을 드보르는 발견한 셈인데, 이런 실상을 ‘실험실’로 규정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게 됐던 것이다.

이런 드보르의 문제의식은 네그리와 『제국』을 함께 집필한 마이클 하트에게도 이어진다. 하트는 탈노동자주의적인 급진이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이탈리아를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형태’가 출현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로 간주한다. 물론 이런 이탈리아의 특수성은 ‘제국’(empire)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경제적 영역에 대한 탈근대화와 사회문화적 영역에 대한 미국화라는 ‘총체적 국면’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지연당한 역사적 경험을 보편화하면서 특유의 이론들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탈리아적 예외주의야말로 이탈리아적 차이를 인준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탈리아적인 예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민족주의의 보편화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의 진행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 독일과 이탈리아를 만들어낸 결정적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적인 차이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당사자는 바로 네그리다. 그는 이탈리아의 지식계에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하이데거주의를 ‘약자의 사고’라고 지칭하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네그리는 약한 사고와 대립적인 관점에서 ‘근육질’을 갖춘 혁명적 주체성의 정치적 존재론을 역설한다. 다소 자의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강한 자의 사고와 약한 자의 사고를 구분하는 네그리의 분류법은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논쟁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네그리가 촉발한 논의는 이탈리아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친 유럽사상에 대한 점검을 요청하게 됐고, 이를 통해 ‘창조적인 차이’로서 이탈리아적인 이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유럽이론들의 백가쟁명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으로 특이한 편협성과 강력한 보편성이 마르크스주의라는 매트릭스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생생한 장면들을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네그리가 마르크스주의를 푸코나 들뢰즈의 이론과 버무려서 내놓는다면, 라보티 같은 반대자는 이런 프랑스산 이론이야말로 ‘약한 자의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프랑스산 이론에 대한 비판은 이탈리아적인 이론의 변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맥이 닿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네그리는 이런 하이데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바티모나 아감벤이 하이데거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하이데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아감벤은 역설적으로 약한 자의 사고에 대한 비판을 비켜가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감벤은 토종 이탈리아 이론가들에게 비판적인 검토 대상인 프랑스산 이론에 누구보다 경도돼 있는 이론가이고, 하이데거주의는 물론 푸코의 생명정치와 통치성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아감벤은 강자의 사고를 주창하는 네그리와 달리 약자의 사고를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서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예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네그리의 파리 망명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80년대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반동의 시기였다. 한국에서 광주가 그랬듯이, 권력에 의한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고, 이에 따라서 ‘약한자의 사고’가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경유해서 보완되고 풍부해진 프랑스산 이론들은 이런 이탈리아적 특수성을 보편화하기 위한 ‘외부적’ 관점을 제공했다. 넓게 본다면, 아감벤도 이런 이탈리아적 조건에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오늘날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은 민족적인 특이성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보편성의 구현이라는 ‘이론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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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상지형도 - 비서구적 이론의 가능성 - 이택광

 

우리에게 언제나 서양사상은 ‘첨단의 노래’였다. 김수영이「서시」에서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이라고 썼을 때부터, 서양사상의 수입에 대한 반성은 진지하게 제기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고, 근대적 세계관을 특징화하는 과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실천의 구체성이고, 들뢰즈의 말처럼, ‘영토’라는 터전이다.

영토는 사유이미지를 터 잡아주는 경계이자 토대이다. 따라서 서구사상과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이론에 대한 모색은 여러 인문학적 작업 중에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기보다, 인문학 자체를 규정하는 근본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인문학은 ‘수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을 일러 ‘백인 남성의 것’이라고 지칭했을 때, 인류사를 형성해온 사상의 지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논리에 근거해서, 바타이유처럼, 동양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기술할 수 있는 현대적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이런 발언에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내재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구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서양사상의 언어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동양이라는 ‘타자’를 설득시키지 않는 한, 서양사상은 ‘전 지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체제적 양분에 따른 역사적 경험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줬고, 이 와중에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서양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체계와 다른 가치들에 대한 관심들이 중요한 인문학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에 타개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7.16~2009.6.18)의 작업들은 자본주의의 소내로서 중국의 사회주의를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서양의 타자’에서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국면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해왔던 사상이나 이론의 ‘이동’과정에 대한 습관적 인식을 수정해야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처럼 무조건 서구가 최신의 이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비서구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론의 이동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역전현상은 단순하게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다기보다는, 비서구적 영토에 근거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눈에 띄고 있는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의 작업들은 단순하게 서구의 이론을 중국과 일본 사회를 위한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서구의 근대성에 근거한 이론적 탐색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사유가 구성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은 서구사상의 말석을 차지한다기보다, 그 사상전개의 첨단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사상의 지도에 보탠 가라타니 고진의 행보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기점들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한국 사상계에서 감춰진 기원이었던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와 연계해서 마르크스를 읽어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에서 붐을 이뤘던 탈근대이론의 수입에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마르크스와 칸트를 일본의 문맥에 맞춰서 새롭게 읽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단순하게 ‘텍스트 다시 읽기’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서양사상에서 제기하는 가치들의 문제를 재점검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트랜스크리틱』이 탈근대이론의 문제점을 넘어선 이론적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윤리21』은 이런 서양의 고전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고자 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고베 시 중학생 사건에서 ‘연소자’ 범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지 않고, ‘부모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가라타니 고진은 지적하고 있다. 사건을 저지른 부모가 사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 사회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양적 가치체계를 호소하는 ‘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무시하고 사죄에 응하는 정치가를 규탄하는 신문일수록 부모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애당초 이 사람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로 복귀한다. 선악의 기준을 부여할 사회가 부재할 때, 아니 설령 사회가 있더라도, 그 사회가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떻게 윤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을 ‘자유’로 간주한’ 칸트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부의 도덕이 곧 외부의 자유를 보증해주는 것이 될 수 있는 경우를 가라타니 고진은 비서구의 근대화에 필요한 윤리라고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다른 관점이긴 하지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왕후이는 서구근대화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 천착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왕후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동양과 서양을 구분했던 과거의 분류체계를 함께 아우르기 위해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중요한 이론적 교두보로 확보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통해 수행하고자 했던 목적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왕후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다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중국의 사상사를 파고 들어간다. 이를 통해 왕후이는 서구 근대화의 ‘거울상’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문제를 거론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서, 비서구적 근대성의 모델을 중국의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왕후이는 신좌파의 대표주자로서 중국 내에서 끊임없이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해온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 중국 지식계에서 그의 존재는 이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얼마 전에 그동안 집필한 글들을 모아서 『혁명의 종언: 중국과 근대성의 한계』라는 책을 영국의 버소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함으로써 서구사상사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저는 중국에서 나온 『중국근대사상의 흥기』이고, 이 작업에서 왕후이는 유럽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본주의에 가장 근접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의문점들을 해소시킬 야심찬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왕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침묵에 빠진 한국의 지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진석 교수는 언젠가 한국은 ‘이론 생산’에 실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실천의 맥락을 찾아 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로 이런 실패의 지점에 세계사상의 흐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론 생산의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굳이 ‘한국적’이라고 불러야할 이유는 없겠지만, 여하튼 김진석 교수가 예측했던 그 지점보다 세계사상사의 지도가 훨씬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흥미진진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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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워킹푸어] 지방대생은 스펙 쌓아봤자 '단기 알바직'?

 20대가 고통 받고 있다. 1000만 원에 달하는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태반이 백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의 문은 200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더 심해졌다.

지난 1분기 20대 취업자 수는 29년 전인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440만 명(1998년), 434만 명(1999년) 수준을 유지하며 400만 명을 거뜬히 넘겼던 20대 취업자 수가 1분기에는 370만 명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실업률은 급증했다. 지난 1분기 20대의 공식 실업률은 9.1%로 2000년 1분기의 9.4%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 13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는 무려 20만4000명에 달했다. 1년 전에 비해 15.2%나 늘어났다.

20대 대부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중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는 아니어도 'in 서울' 조차 되지 못한 지방대생들이다. 2009년 시도별 대학 재적학생수를 보면,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242만7662명 가운데 서울, 인천, 경기의 수도권 대학 학생 수는 107만 명(44%)이며, 그 외의 대학에 속한 학생은 135만 명(56%)이다.

비수도권 대학의 학생 수가 전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지방대 출신은 저임금의 임시 일자리일지언정 정부 대책으로 마련된 청년 인턴마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가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가 이른바 '대학 거부' 선언을 한 뒤, 한 지방대 학생은 김예슬 씨의 선언과 그 사회적 울림을 지켜본 소회를 이렇게 토로했다.
 

 

 

 

 


"그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은 좌절했다. 그 용자의 이름은 '고대 자퇴녀'였기 때문에. 만약 한밭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학력과 학벌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대학생들은 마음으로 이미 자퇴했고, 그들 중 일부는 조용히 교문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명문대 학생도, 비 명문대 학생도 진정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권연대 소식지에 이런 글을 쓴 한밭대 학생 임아연 씨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교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했다. '고대를 관둘 정도면…'이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빈곤한 교육철학으로 점철된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김예슬 씨를 더욱 빛나게 했던" 그 이름을 갖지 못한 이들. 만일 그들이 김 씨와 마찬가지 이유로 대학을 '거부'한다면,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을까? 임아연 씨가 느낀 '좌절감'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의 반응과 지방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 반응이 어떻게 다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대 김예슬'의 대학 거부 "스펙에 열중하는 대학이 싫었다"

이상호(가명, 28) 씨는 지난 2008년 대학을 그만뒀다. 두 번째 들어간 학교였다. 첫 학교는 사는 곳에서부터 왕복 4시간이 걸렸고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쳐 2001년 충북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꼭 7년 만에 이 씨는 학교를 스스로 뛰쳐 나왔다. 군대를 제대한 뒤 1년 간 휴학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다시 복학한 직후였다.

이 씨가 학교를 떠났던 3년 동안 "대학은 전혀 다른 공간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 변화가 이 씨에게는 낯설었다.

"모두 다 똑같은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수업 들어갔다가 도서관 갔다가 토입 수업 들으러 가고, 토익 학원 끝나면 의미 없는 술자리로 하루 일과를 끝내는 생활의 무한 반복. 사람과 사람이 모여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축제만 해도 그랬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각 동아리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을 들고 나오는 자리였다면, 2008년이 되니 형식은 과거와 똑같을지 몰라도 내용물이 아무 것도 없어졌다. 예전처럼 각 동아리가 친 천막도 있었지만, 창작물은 없고 끽해야 일일카페나 주점이 다였다. 대신 축제는 외부에서 데려 온 대중가수나 개그맨이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호 씨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 씨가 군대와 휴학을 거쳐 돌아온 뒤 학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애정을 쏟았다는 동아리 역시 전혀 다른 곳이 돼 있었다. 달라진 동아리의 모습에 대해 이 씨는 "관심사를 공유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존에 하던 동아리 활동은 점점 축소돼 갔다. "하자"고 해도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다 지치면 쉬어가는 쉼터"가 돼 버린 동아리는 이 씨가 활동하던 곳만은 아니었다. 영어 스터디, 주식 공부 등 "자기 경력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가 아니면 대부분 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대학의 가장 큰 변화였다.

따지고 보면 이 씨가 군입대 등으로 학교를 떠났던 3년 이란 세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학교는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 씨는 답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사회의 변화는 급격하게 눈에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질 기회 자체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이니, 다들 조급해진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등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은 점점 더 몰려들고. 적어도 적당한 일자리마저 없어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이 등록금도 가파르게 올랐다. 국립대인 우리 학교만 해도 내가 입학할 때 120만 원이었는데 군대 갔다 오니 230만 원이 돼 있었다. 학기마다 꾸준히 20만 원씩은 올랐던 것 같다. 학교 다니는 동안 이미 모든 대학생이 엄청난 빚쟁이가 돼 버린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일자리에 취직하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신은 신용불량이라는 올가미에 걸리는 걸 20대도 잘 알게 된 것이다."

스펙에 열중하는 20대의 모습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지만, 이 씨는 그런 대학이 싫었다고 했다.

"빚으로 다녔던 대학,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었다"

이상호 씨도 학자금 중 일부는 대출을 받아 냈다. 입학금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방학 등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해도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그만둘 때까지 모두 400만 원 정도의 학자금을 빌렸다. 이 씨는 내년이면 원금 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솔직히 대학을 그만둘 때 대출을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 씨의 여동생도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닌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을 다닌다는 이 씨의 동생은 한 학기에 500만 원 넘게 등록금을 낸다. 고향을 떠나 대학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생활비도 더 많이 드는데, 웬만한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도 빠듯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휴학을 자주 했고, 스물여섯 살인 여동생은 이제 겨우 대학 4학년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 동생도 대학을 간다면 똑같을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전라도 광주의 한 대학을 졸업한 박민재(가명, 35) 씨도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등록금은 거의 다 대출로 냈다"고 했다. 게다가 박 씨가 대학생일 때는 학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가 몇 개씩 발급이 되던 시절이었다. '카드대란' 직전이었다. 박 씨는 "생활비까지 다 신용카드로 썼으니 카드빚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뒤부터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박 씨는 2004년 대학 졸업 이후 7년 동안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프로야구 경기장 진행요원, 텔레마케터, 이마트 협력업체 직원, 학원 총무, 서울시 교통국에 소속된 행정 서포터즈, 한강사업본부 소속의 기간제, 샌드위치 가게, 돈가스 가게 등 이력도 다양하다. 평균 월 100~150만 원을 벌었다.

고향 나주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살기에는 결코 넉넉치 않은 돈이다. 박 씨는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이나 따로 연애를 안 하면 살 수야 있다"고 말했다. 매달 기본으로 들어가는 돈만 월세 20만 원에 휴대폰 비용 3~4만 원이다. 고시원에 살고 있어 각종 공과금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 서울에서 작은 인쇄업체에 다니고 있는 이상호 씨도 생계가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씨까지 직원이 3명인 이 인쇄소에서 그가 받는 돈은 월 100만 원이다. 사는 집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가 37만 원인 작은 원룸이다. 이 씨는 "이 월급에서 문화적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하면서 살려면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 뿐이라 먹는 게 늘 부실하다"고 말했다.

박민재 씨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통 한 끼를 밖에서 먹으려면 최소 5000원인데, 돈이 없으면 두 끼를 집에서 먹고 여유가 있으면 한 끼만 집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가끔씩 보내주시는 반찬에 그냥 밥만 해서 먹는 거다.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데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사먹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한다. 

1년 정도 다녔던 이마트 협력업체를 빼면 박 씨가 얻었던 일자리는 모두 단기였다. 따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고 일한 종로의 돈가스 가게나, 이태원의 샌드위치 가게도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아르바이트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더 이상 그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되면 박 씨는 다시 인터넷 등을 통해 새 일자리를 구했다. 박 씨에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사는 삶에 대해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하니까.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이 있는데 놀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폭은 굉장히 좁다."

박 씨는 안정적인 곳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기능직 공무원 시험도 봤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은 공부를 꾸준히 오래 해야 하는데 그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기능직 공무원은 택했다. 하지만 두 번 다 미끄러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딱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박민재 씨지만, 그는 높은 실업률을 놓고 '20대가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핀잔을 주는 주장에 대해 "일부 맞긴 맞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환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눈높이만 얘기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중소기업 근무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월급이나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면 중소기업 경력은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반면 부당한 대우는 정말 많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눈높이만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 하루 평균 13시간 노동에 월 100만 원 안팎

이상호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학 시절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 씨는 제일 좋았던 곳으로 대기업 계약직을 꼽았다.

한 대기업 화장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4개월 일했던 그는 "아무리 비정규직이어도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복지도 상대적으로 좋고 출퇴근도 정확했다"고 회상했다. 주5일제도 지켜졌고, 근무 시간도 정확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중간 휴식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고, 작업복도 돈을 받지 않고 회사에서 지급해 줬다. 연장근무를 하면 수당도 줬다. 그곳에서 월 95만~100만 원을 받은 것이 이 씨의 아르바이트 경력에서 최고액이었다.

반면 핸드폰 공장, 군납 낙하산 제조 공장, 신축 아파트 하자 보수, 대형마트의 청과물 판매 등 다른 일자리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2003년, 그가 대학생인 것을 속이고 정규직으로 들어가 두 달 정도 일했다는 경기도 안양의 핸드폰 공장에서는 하루 13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주말은 없었다. 회사에서 내준 기숙사와 공장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번 돈은 한 달에 70만 원 수준이었다.

경기도 광명의 낙하산 제조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 전에는 시급 3000원을 주겠다고 하더니 첫 달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시급 2500원으로 계산해 월급을 줬다. 노동시간도 하루 13시간이었고 2주일에 한 번 일요일만 쉬게 해줬다. 휴식 시간은 하루에 2번,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뿐이었다. 그것도 채 한 시간이 안 됐다.

"핸드폰 공장이나 낙하산 공장이나 노동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기숙사에서 아침 8시에 눈 떠 공장에 가서 퇴근하고 방에 돌아오면 밤 11시였다. 그러면 할 일은 잠 자는 것 뿐이다. 그래도 피곤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공장 안에 먼지가 정말 많은데 마스크 같은 걸 지급해주지도 않았다."

군대 제대한 뒤 바로 일자리를 얻었던 청주의 대형마트는 대형 유통업체였음에도 환경이 열악했다. 이 씨는 파견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4대 보험은 전혀 없고 심지어 유니폼도 하청업체가 파견 노동자에게 따로 돈을 받았다.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88만~92만 원 정도를 벌었는데 이 씨는 '아르바이트'였지만, 동료들 가운데는 그 일자리가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형들이 많았다. 나야 '알바'로 생각했으니 그렇지만, 직장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하거나 항의할 곳조차 없다. 몸이 아파서라도, 일단 무단결근이 생기면 바로 해고다."
 

박민재 씨가 전전했던 일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 '첫 경험'이었던 텔레마케터는 실적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서 출신 대학 동문 주소록을 가져다 줬고, 동문들에게 잡지 구독을 권유하는 것은 두 달로 끝이었다. 세 번째 달부터는 전혀 실적이 나지 않았고 결국 '잘렸다.' 마지막 달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마트 협력업체에서는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벌었지만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주중에는 각 이마트 점포를 돌아다니며 납품한 물건의 판매량과 진열 상태를 확인해야했고, 주말에는 용인에 있는 창고에 가서 물건 포장 작업을 도와야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하다보니, 이마트에서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각 점포마다 1년에 1~2회 '리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동원됐다. 한 점포에서는 1년에 한두 번이라지만, 납품 점포가 여러 개인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 리뉴얼을 하기 위해 밤을 샜다.

샌드위치 집이나 돈가스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에 12시간, 배달 일을 했던 돈가스 가게는 "오토바이 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오토바이 보험료, 기껏해야 1년에 20만 원이다. 대학 때 오토바이 사고가 난 경험이 있어서 보험을 꼭 들어달라고 주인에게 여러 번 요청했는데 번번이 묵살됐다. 보험 들어달라면 '사고 나면 책임져준다'는 말만 하는데, 사고 나면 정말 다 책임져줬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다행히 내가 일할 때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주차 단속 민원 처리가 주된 일이었던 서울시 교통국의 행정 서포터즈나, 한강시민공원에서 나무 심고 꽃 심는 일을 했던 기간제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경쟁도 만만치 않다.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인 셈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공무원? 00학번 이후 없다"

결국 20대가 '눈높이'를 낮춰 얻을 수 있는 일자리란, 이들의 경험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형편없는 복지,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일상인 '질 낮은 일자리'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둔 이상호 씨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스펙 쌓기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가 나뉘게 된다. 당연히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게 돼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일 아닌가."

이 씨는 "그렇게 희박한 승률의 도박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할까"는 회의감에 대학을 '거부'했지만, "졸업을 했더라도 인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취직한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없다"였다.

"같은 학교 사람 중에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은 99학번이 끝이었다. 99학번 선배 하나가 삼성전자에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없었다. 과도, 동아리도 마찬가지다. 공기업도 전혀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는 얘기는 엄청 많이 들었는데 됐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기들 중에 한 친구는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전혀 엉뚱하게 골프장에 가 있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했다면 정규직 취업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이 씨가 증언한 지방대생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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