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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중인 최무영의 글을 오래간만에 옮긴다. 과학의 무능성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어서이다. 사실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어느 영역에서나 이 무능성이라는 말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싶다. 그건 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의 만능성 혹은 철학의 유용성 혹은 필요성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무능성 혹은 무용성 혹은 유해성도 주장해야하지 않을까.

과학의 위험성
  
  현대기술은 과학을 응용한 것으로서 물질문명을 낳았습니다. 과학은 기술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현대기술을 낳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신문화라고 강조했지요. 대체로 우리는 정신문화를 과학보다는 문학, 예술, 철학, 종교 같은 것들로 생각합니다. 과학은 기술과 함께 묶어서 물질문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여러분은 그동안 많이 공부했으니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정신문화의 범주에는 과학과 함께 흔히 생각하는 문화, 예술, 철학, 종교 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철학이나 종교는 역사적으로 과학과 가끔 충돌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체로 과학의 합리주의와 종교의 초월주의 사이의 갈등인데, 철학도 근대와 달리 중세의 철학은 초월주의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소개한 러셀의 저서 중에 ≪종교와 과학(Religion and Science)≫이라는 짧은 논고가 있습니다. 부제목은 '독단과 이성의 투쟁사'이지요. 러셀은 철학과 수학에 중요한 업적이 있고, 물리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지적했지요. 정치가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고 교육자로서 상당한 교육철학의 저서도 남겼습니다.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도 받았지요. 무엇보다도 행동가여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널리 알려졌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무려 80세일 때에도 시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빨갱이로 낙인찍혔는데, 놀랍고 흥미로운 사람이지요. [러셀은 30여 년 전에 타계했는데 현재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 촘스키(Noam Chomsky)를 들 수 있겠습니다. 원래 언어학자로서 20세기 언어학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는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으로 유명하지요. 언어철학과 심리학에도 업적이 있는데 요새는 활발한 정치 비평, 특히 미국의 대외 정책의 위선과 야만성을 폭로하는 행동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저서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있지요. 그의 강연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고 있는데 아무래도 '미국적'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는 - 내가 '한국적'인 한계를 지녔듯이 - 지니고 있다고 느꼈어요.]
  

 

 

 

 

 


  과학에 대해 그릇된 인식은 이른바 과학만능주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만능주의는 희한하게도 종종 종교와 만나곤 합니다. 러셀의 저서를 독단과 이성의 투쟁사라고 했는데 물론 독단이란 종교를 가리키고 이성은 과학을 나타냅니다. 여기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물론 있겠는데 여기서 독단이란 종교의 독선주의, 배타주의를 말합니다. 잘못된 의미의 종교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러셀의 의미에서 독단과 이성이 만나서 투쟁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도리어 과학과 종교가 사이좋게 잘 만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는 그릇된 인식에 바탕을 둔 과학과 기술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과학만능주의는 이성이 아니라 독단으로서 문제가 심각하다 하겠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사이좋은 만남이란 것이 사실은 독단과 독단의 만남인 셈이니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요. 전형적인 예가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일어난 대표적 현상이 이라크 침략이겠지요. 과학만능주의가 종교의 배타주의, 초월주의와 만나서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서 얻어진 끔찍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걱정되는 과학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잠재적으로 더욱 큰 위험성은 무능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과학만능주의의 문제점은 기술과 관련되어 비교적 명백하게 나타나므로 쉽게 인식이라도 할 수 있지만, 독단이 아닌 정상적인 과학의 무능함은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정상과학은 워낙 세세하게 나뉘어 있고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능해졌어요. 제대로 된 과학자라고 해도 사실은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매우 좁은 전문분야의 지식밖에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도 여러 분야, 곧 입자물리, 원자핵물리, 원자분자물리, 응집물질물리, 그리고 통계물리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응집물질물리학자라고 해도 응집물질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응집물질 중에도 초전도체, 반도체, 금속, 자성체, 강상관계, 흐름체, 무른 물질 따위 여러 주제가 있는데, 보통 그 가운데에서 한 가지만 알지요. 그 한 가지에서도 대부분은 극히 일부만 압니다. 너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깊으면서도 넓게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좁은 주제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게 되고 멀리 넓게 전체를 내다보는 조감을 지닌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전체를 보고 판단할 수 없으면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의 진행이 위험한지 판단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위험성이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로 위험한지 아닌지는 대부분 모릅니다. 특히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좁게 대상 자체만 보면 제대로 판단할 수 없지요. 여기서 위험한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에는 당연히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을 예의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혹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위험성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험성 없음으로 판명된 것이 아닌데도 위험하다는 증거가 없으면 대체로 위험성이 없다고 받아들이지요.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 또한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미 논의한 핵발전과 핵폐기장, 그리고 우리 일상생활에 특히 중요한 유전자변형유기체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이른바 유전자 조작 식품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점심에 먹은 음식도 십중팔구 유전자를 조작하여 변형한 생물체로 만들었을 겁니다. 햄버거로 상징되는 간편하게 먹는 쓰레기음식(junk food)은 직간접적으로 상당 부분 유전자변형유기체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해로운가 아닌가는 완전히 확정된 결과가 없습니다. 강조하지만 위험하지 않다고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전하다는 증거가 필요한 것인데 일상에서는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며 마구 팔고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면 위험하다는 증거를 대라고 강변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동물 실험에서 위험하다는 실험적 증거가 있는데 이를 감추고 왜곡해서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이처≫ 잡지던가요? 심사가 통과되어 게재하기로 했던 실험 결과가 편집자에 의해 취소되고 어이없게 정반대 결과의 논문이 실린 예도 있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위험성뿐 아니라 제어하지 못하는 교차수분의 위험성, 유전자 오염과 생물 다양성 훼손 등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습니다. 파국이 올 수도 있지요.
  
  현재 세계에서 유통되는 유전자변형유기체의 다수가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특히 몬산토(Monsanto)회사가 악명이 높지요. 이 초국적 기업은 베트남 침략 전쟁 당시 고엽제로 이름을 떨쳤고 - 이 때문에 아직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지요 - 유전자를 조작해서 번식을 하지 못하는 콩과 허위 선전으로 독성 제초제를 팔고, 판매한 돼지가 낳은 새끼들에까지 특허권 소송을 걸고 독극물을 방류하는가 하면 어린이를 포함한 노동력 착취 등 화려한 활약을 자랑합니다. 이 대부분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미국에서는 디즈니랜드(Disneyland)와 손을 잡고 있으며 - 양의 탈이 생각나지요 -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엄청난 로비를 통해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실상을 알면 너무나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 외에도 여러 미국의 기업들이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사실 디즈니랜드의 진실을 보면 그 자체가 전형적인 양의 탈이지요.)
  
  환경오염과 관련해서 대기에 미세먼지가 얼마고, 일산화탄소나 질소산화물이 얼마 있는데, 이는 기준값보다 낮으니까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기준값보다 낮다고 해서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기준값을 정했는지도 문제가 있지만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준값보다 높으면 크게 해롭다는 뜻이고, 기준값보다 낮아도 일반적으로 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이 정확한 의미입니다. 그러니 기준값보다 낮다고 무조건 안전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가공식품에 많이 쓰는 첨가물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예가 매우 많습니다. 위험성 관계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예가 앞 강의에서 언급한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은 소에게 고기, 곧 동물의 사체를 먹여서 발병했지요. 풀을 먹고 살아야하는 소에게 고기를 먹인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소를 빨리 키우고 무게를 늘려서 비싸게 팔고 젖소에게 최대한 많은 젖을 짜내어 이익을 늘리려고 양을 비롯한 동물의 사체를 갈아서 사료에 섞여 먹였지요. 그런데 양에게는 두뇌의 신경그물얼개 조직이 스펀지 모양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스크래피(scrapie)라는 해면상뇌증이 있었는데 그 양을 갈아 먹인 소에 옮겨서 광우병이 생겼다고 여겨집니다. 심지어 소의 사체도 갈아 먹였으니 소끼리 옮겨졌는데 이는 사람에게 사람을 먹인 셈입니다. (사람의 사체를 먹어서 걸리는 쿠루(Kuru) 병과 흡사한 조건이 되었네요.) 광우병 인자를 가진 소가 발병할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데 그 사이에 인간이 그 소를 먹으면 옮아서 변종 크로이츠펠드-야콥병, 이른바 인간광우병에 걸리게 되지요. 감염된 후 10∼20년, 때로는 30년이 지나서 발병할 수 있으니 여러분도 쇠고기를 먹고 나서 30년은 지나봐야 그 쇠고기가 문제가 없는지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을 먹인 것이 그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지요. 이미 말했지만 광우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이 아니라 프리온 흰자질입니다. 생명체는 물론 아닌데 우리 몸속에 들어가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번식해서 뇌를 파괴합니다. 병에 걸린 소의 뇌나 척수를 비롯한 신경조직에 많지만 피나 살코기에도 소량 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극소량으로 발병할 수 있어서 먹지 않아도 수혈이나 혈액제제, 심지어 젤라틴을 포함한 화장품과 수술실 등 가공품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고 하지요. 일단 걸리면 고칠 수 없고, 늦추는 방법도 없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죽음밖에 길이 없지요. 영국에서 처음 환자가 생겼는데 세계적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리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만 또는 수십만 명이 걸리게 될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고, 일반 (산발성) 크로이츠펠드-야콥병(sporadic Creuzfeld-Jacob disease; sCJD)은 물론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사망자의 상당수가 사실은 인간광우병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몇 해 사이에 미국에서 알츠하이머 환자가 수십 배로 급증했는데, 일반적으로 진단방법이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환자의 병력이 길지 않은 경우 사망 후 부검하지 않으면 알츠하이머병인지 인간광우병 따위 해면상뇌증과 관련이 있는지 확진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그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흰자질이 스스로 증식해서 치명적인 병을 가져오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더욱이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종 사이에 장벽이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 장벽을 뛰어넘어 발병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위험성과의 연관관계를 몰랐다가 나중에야 치명적인 위험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안전한지 확실하지 않은데 위험성이 없다고 간주해버린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 주지요. 이러한 교훈을 볼 때 유전자조작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얻어질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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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최무영의 글이다. 이렇게 띄엄띄엄 옮기는 이유는 이해가 되고 관심 있는 부분만 옮겨오기 때문인데 ...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번 정리해 볼까요? 첫째로 살아있는 것은 짜임새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직되어 있지요. 일반적으로 모든 생물은 적절한 구조로 잘 짜여 있습니다. 예컨대 곤충이 알에서부터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를 거쳐서 어른벌레가 되는 일련의 발생(development) 과정을 보면 매우 잘 조직 되어 있고 시간에 따라 특징적인 변화를 보이지요.
  
  둘째로 살아있는 것은 물질대사(metabolism)를 합니다. 물질대사란 외부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용한 여러 가지 생화학 반응을 통해서 에너지를 이용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수 있고 자라기도 하지요. 중요한 점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자유에너지가 들어오고, 이를 통해서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바꿔 말하면 정보를 늘리는 것으로 이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역학 둘째 법칙에 따라서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다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가 최대로 되려면 모든 물질이 고르게 섞여서 모든 지점이 똑같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을 구성하는 탄소나 산소, 질소 등이 대기에 있는 탄소나 산소, 질소와 똑같이 고르게 섞여 있어야 하니까 우리도 존재할 수 없고 이런 물질도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균일하게 섞여 있어야 하고, 그런 상태라면 생명은커녕 아무것도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생명체의 분화는 분명히 더 정돈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늘어나지 않고 도리어 줄어들어서 점점 더 질서를 찾아갑니다. 따라서 생명현상은 열역학 둘째 법칙에 위배되므로 뭔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기 쉽지요.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열역학 둘째 법칙은 어디까지나 닫힌계, 외떨어진 계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떨어진 계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생명체는 반드시 열려있는 계지요. 외부세계와 계속 물질이나 에너지 등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자신의 엔트로피가 늘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소적으로 생명체 자신은 엔트로피를 줄일 수 있으나 주위 환경까지 다 합쳐서 전체의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늘어나지요.
  
  앞에서 논의하였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외떨어진 계는 전체 우주밖에 없지요. 그런데 우주가 현재 열죽음, 다시 말해 열평형 상태에 있지 않은 이유는 우주가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라 지적했습니다. 그러니 생명현상은 불어나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셋째로 생명의 중요한 특징은 번식(reproduction)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계속 만들어내지요. 그리고 이러한 번식은 유전(heredity)이라는 현상을 보입니다. 자신의 특성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자신과 닮은 녀석을 만들어냅니다. 그림 1에 보인 아이는 나와 닮았어요? 내가 어렸을 때는 이 아이와 똑같이 생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전의 증거지요.
  
  그런데 이 개체는 나라는 개체와 유전정보가 얼마나 똑같을까요? 반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으니까 50% 라고요? 글쎄요, 침팬지 같은 영장류와도 아마 95% 쯤 같고, 웬만한 동물과도 줄잡아 80% 이상은 같을 겁니다. 이 아이와 나는 99.9% 이상 같습니다. 물론 일란성쌍둥이가 아니면 100% 같진 않지요.
  
  넷째로 생명체는 환경의 변화에 응답(response)합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토끼 털빛깔이 희게 되지요. 흰 눈이 내리면 그 환경에 맞게 응답해서 갈색이 흰색으로 바뀝니다. 이른바 보호색이죠. 그런데 삵이 나타나면 토끼는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잡혀서 죽게 되지요. 그러니까 환경의 변화에 알맞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지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비가 오면 우산을 받아야 됩니다. 환경에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산을 받지 않으면 체온이 내려가서 결국엔 죽을 수 있어요. 생명체에는 환경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빛이나 전기, 소리 자극, 또는 옆에 앉은 학생이 손가락으로 찌를 수도 있지요. 그런 자극에 대해서 적절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옆 사람이 자꾸 귀찮게 찌르면 한방 쥐어박던가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끝이 없을 테고 이는 스트레스 등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응답이란 환경에 적응(adaptation)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이른바 되먹임(feedback)으로 조절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비를 맞아서 체온이 너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이를 막아서 원래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것입니다. 옆 학생이 자꾸 찌르면 옆구리에 압력을 받으니까 이를 없애서 원래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요. 되먹임 조절이란 결국은 생명체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함인데 이를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다시 말해서 죽지 않고 계속 존재하려면 여러 가지 상황이 일정하게 유지돼야 하는데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항상성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응급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자극을 줄 때 적절한 응답이 있는지 살펴보지요.
  
  마지막으로 생명체는 변화합니다. 진화라고 부르지요. 세균을 비롯한 미생물, 공룡, 어룡, 그리고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 벌레와 조개도 생겨나고, 물고기, 개구리, 개와 원숭이, 고릴라도 생겨나고 결국 사람도 생겨납니다. 우주에 진화만큼 놀라운 현상도 없지요. 더욱 놀라운 점은 생명의 단일성으로부터 엄청난 다양성이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단일성이란 세균으로부터 인간이나 닭이나 느티나무 등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서 본질적으로 놀라운 공통성을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서 느티나무하고 여러분은 유전자가 얼마쯤 같을까요? 정확한 값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은 넘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생명체의 유전정보는 똑같이 하나의 기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DNA의 네 가지 염기 서열이 유전정보를 이루는데 이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흰자질이 생명체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데 이것도 모든 생명체가 똑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흰자질은 아미노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미노산은 스무 가지로서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지요. 이러한 면에서 놀라운 단일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일성으로부터 엄청난 다양성이 얻어집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생물권만큼 생명의 다양성을 보이는 곳을 더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지구 외에는 우주 어느 곳에도 있을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지구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행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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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최무영의 글이다.

 

 

 

 

 

 

가장 흥미로운 복잡계는 역시 생명현상을 보이는 생체계일 것입니다. 생체계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소개하지요. 그런데 생체계란 단순히 개체(유기체; organism)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체분자와 세포, 기관(organ)이나 기관계(organ system), 인구가 늘어남이나 생태계(ecosystem), 생명의 진화 같은 것도 복잡계 현상으로서 포함됩니다.
  
  혹시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이란 거 들어본 적 있어요? 중추신경계를 침범해서 움직이거나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퇴행성질환입니다. 두뇌의 신경세포에 흰자질이 잘못 쌓여서 신경세포가 파괴되면서 생겨나는데, 유명인사 중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이 꽤 있습니다. 히틀러(Adolf Hitler), 마오쩌똥(毛澤東)과 덩샤오핑(登小平),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가 포함되고, 특히 아직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알리(Muhammad Ali)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의 어느 신문에서 알리를 '일개 검둥이 복서'라 부른 황당한 일이 기억나는데 사실 그의 삶은 놀랍지요. 권투선수로서 역사상 가장 뛰어났지만 사상과 삶의 변화는 더욱 놀라운 사람이지요. 이름이 원래 노예를 뜻한 클레이(Cassius Clay), 곧 진흙이었는데 이른바 '일개 검둥이 복서'로 끝날 수 있었을 그를 노예로부터 알리로 만들어준 사람이 말콤엑스(Malcolm X)입니다. 알리의 스승인 셈이지요. 말콤엑스나 알리에 대해서 왜곡되게 배웠거나 또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지요? 우리의 교육환경에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아무튼 파킨슨병에 걸리면 흔히 손이 떨리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 경우에 이른바 뇌자도(magnetoencephalogram; MEG)를 재면 두뇌의 다른 부분 사이에 특징적인 때맞음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경세포는 전기신호로 작동하는데 전류가 흐르면 자기마당이 생겨납니다. 그 자기마당을 측정하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알 수 있으므로 여러 진단의 목적으로 쓸 수 있지요. 아무튼 신경세포들의 거동도 때맞음 현상을 보일 수 있고, 위에서 보기로 든 다양한 계들과 마찬가지로 결합떨개들로서 해석하려는 점이 보편지식을 추구하는 이론과학으로서 물리학의 특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사회경제계(socioeconomic system)에서 널리 알려진 문제로 죄수의 난제(prisoner's dilemma)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어떤 범죄의 두 공범을 잡아서 격리 수용해 놓고 죄를 자백하라고 권유합니다. 둘 다 불지 않고 버티면 무죄로 풀려나게 되고 둘 다 불면 모두 5년형을 받게 되지요. 한편 한 사람만 불고 다른 공범은 불지 않는다면, 불지 않은 사람은 10년형 받고 분 사람은 1년형만 받게 됩니다. 그럴 때 한 공범의 입장에서 자백하는 편이 나을까요, 끝까지 버티는 편이 나을까요?


  

 

 

 


  자연과학이나 공학뿐 아니라 이러한 사회과학에서도 널리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가 최적화(optimization)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외판원문제(traveling salesperson problem)를 들 수 있지요. 외판원이 서울에 있는 본사에서 가방에 팔 물건을 들고 나와서 대전, 전주, 광주, 목포, 순천, 부산, 울산, 대구, 포항, 강릉 등 전국의 도시를 한 바퀴 돌려 합니다. 그런데 한 번 간 곳은 다시 가면 안 됩니다. 아까 판매한 것을 다시 환불해 달라고 할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도시를 방문하되 각 도시를 한 번씩만 들러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짧은 거리로 돌아오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똑똑하게 한 바퀴 도는 방법을 찾자는 것인데, 이를 외판원 문제라고 합니다.
  

▲ 그림 3: 외판원 문제


  아주 명확하고 간단하죠? 이 문제는 사실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로서 전기공학에서 고집적회로의 설계나 실생활에서 벽지 자르기를 들 수 있지요. 지물포에 가서 벽지를 살 때 벽지의 무늬를 잘 맞춰서 잘라야 합니다. 잘못하면 버리는 부분이 많게 되지요. 여러 벽에 벽지를 바를 때 벽의 넓이에 따라 여러 크기의 벽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벽지가 말려있는 두루마리에서 필요한 크기의 벽지를 어떤 순서로 잘라내어야 무늬를 잘 맞추면서 버리는 부분이 가장 적을까 하는 문제가 '벽지 자르기'인데 외판원 문제와 수학적으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풀면 다른 것도 모두 풀 수 있지요.
  
  이와 동등한 문제를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자체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무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계의 크기가 커지면 풀이법(algorithm)도 길어지게 마련이지요. 쉬운 문제는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이 크기에 멱급수(power series)로 주어지는데 이를 다항식시간(polynomial time; P) 문제라 부릅니다. 이러한 다항식시간 풀이법이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미정다항식시간(non-deterministic polynomial time; NP) 문제라고 하지요. 대체로 NP는 다항식시간 풀이법이 존재하지 않고 푸는데 걸리는 시간이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늘어나서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풀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NP는 P가 아니라고 믿어지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문제로서 만일 이를 정확히 보이면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러한 NP 문제는 본질적으로 쩔쩔맴을 지닌 복잡계의 전형으로서 물리학, 특히 통계역학의 문제라 할 수 있지요.
  

▲ 그림 4: 666개 도시를 방문하는 가장 짧은 거리의 세계일주


  가장 똑똑하게 세계를 일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림 4는 세계 666개의 도시를 가장 짧은 거리로 일주하는 방법입니다. 서울과 부산도 있고, 북극과 남극도 지나갑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세계 일주를 잘 하려고 해도 이러한 물리를 알아야 되겠네요. 그림 5는 독일을 가장 짧은 거리로 일주하는 방법입니다. 무려 15,112개의 마을을 똑똑하게 도는 방법이니 혹시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이걸 잘 보고 하면 좋겠네요.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정확히 푼 가장 커다란 외판원 문제입니다. 푸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초셈틀(슈퍼컴퓨터)를 동원해서 엄청나게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 그림 5: 15112개의 마을을 지나는 독일 일주


  자연에는 여러 가지 그물얼개(network)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두뇌는 천억 개쯤으로 추산되는 신경세포들이 얽혀서 복잡한 그물얼개를 이루고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신경그물얼개(neural network)는 어떤 모양을 보일까요? 질서정연하게 규칙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질서하게 마구잡이로 있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 사이에서 복잡성을 지니고 있지요.
  
  최근에는 뭇알갱이계를 이러한 그물얼개로 나타내고 그 구조로부터 계의 특성을 알아내려는 시도가 많이 행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뭇알갱이계에서 구성원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각각 꼭지점(마디; node)과 변(연결선; link)으로 나타내면 그물얼개의 구조를 얻게 되지요. 이는 결정(crystal) 등에서처럼 질서가 있는 경우에는 규칙적 그물얼개(regular network), 곧 살창(lattice)이 되며, 완전히 무질서하면 마구잡이 그물얼개(random network)로 주어집니다. 복잡그물얼개(complex network)는 이러한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복잡성을 보이는 구조를 지녔으며, 그 예로서 신경그물얼개 외에 인터넷 및 웹 연결, 교통 그물얼개, 사회적 관계, 흰자질 상호작용, 신진대사 등이 알려졌습니다.
  
  복잡그물얼개는 일반적으로 각 마디의 연결선 수 또는 연결되어 있는 다른 마디의 수가 서로 달라서 모든 마디가 동등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디는 연결되어 있는 마디가 매우 많은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마디를 허브(hub)라고 부르며, 이는 마디 중에 당연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터넷 연결이나 항공로, 흰자질 상호작용이나 신진대사 그물얼개들이 이러한 허브 구조를 지닌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러한 경우에 연결선 수에 따른 마디의 분포는 일반적으로 멱법칙(power law)을 따릅니다. 곧 연결선 수가 적은 마디는 많고 연결선 수가 많은 마디는 적은데 마디 수는 연결선 수에 대해서 대수적으로(algebraically) 감소합니다. 이는 바로 고비성을 뜻하지요.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친구들의 그물얼개를 생각할 수 있지요. 각 사람을 마디, 그들 사이에 친구 관계를 연결선으로 나타내면 그물얼개가 얻어지는데 친구가 특히 많은 사람, 이른바 마당발인 사람이 허브가 되겠지요. 비슷한 예로서 친구 대신에 성관계 상대로 그물얼개를 만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식이는 누구누구랑 잤고 미정이는 누구누구랑 잤는지 엮어보자는 거지요. 그러면 복잡그물얼개를 얻는데, 역시 상대의 수가 많은 사람은 적습니다. 우습고 장난 같은 얘기지만 실제로 ≪네이처≫, ≪사이언스≫ 따위에 나온 논문들이지요.
  

▲ 그림 6: 복잡계 연구의 그물얼개 (Newman & Girvan)


  요샌 과학자가 혼자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여러 사람들이 협동으로 연구를 합니다. 나는 이 사람과 저 사람하고 협동해서 연구했고, 저 사람은 또한 어떤 다른 사람과 협동했고, 이런 식으로 협동한 사람들끼리 연결할 수 있겠지요. 그림 6은 복잡그물얼개 분야에서 각 연구자를 마디로 하고 협동연구자끼리 연결선을 그어서 만든 그물얼개를 보여줍니다. 오른쪽 아래에 우리나라의 연구자들도 몇 사람 볼 수 있습니다. (제 이름도 들어있지요.)
  경제계도 역시 복잡계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계를 다룬 책들이 있습니다. 물리, 수학, 화학, 생물,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서 복잡계 연구를 수행하는 산타페 연구소(Santa Fe Institute)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펴낸 ≪전개하는 복잡계로서의 경제(The Economy as an Evolving Complex System)≫라는 책이 있지요. 유명한 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이 복잡계 관점에서 쓴 ≪스스로 짜이는 경제≫는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제까지 물리와 생물, 공학, 그리고 사회과학 따위 여러 분야에서 복잡계의 예를 몇 가지 들었습니다. 이렇듯 여러 분야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에서 어떤 보편성을 찾아내고, 이에 따라 다양한 현상을 하나의 틀로 해석하려 합니다. 이른바 보편지식 체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지요. 이것이 바로 물리학의 독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물리학은 보편지식 체계를 추구하므로 복잡한 현상은 다룰 수 없다는 것이 기존의 생각이었습니다. 비교적 간단한 현상들만 보편지식 체계로 해석할 수 있고, 반면에 복잡한 현상, 예를 들어 생명과 인간이나 사회현상은 보편지식 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물리학의 방법이 정립되면서 부분적으로 '간단한' 복잡계 현상은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힘을 얻어서 일반적인 복잡계에 대해서 보편지식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잡계는 21세기 물리학의 핵심적인 연구 주제로 자리매김하리라 예상합니다. 이는 물리학의 지평을 크게 넓히고 생명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얻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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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프레시안에 연재된 종교와 과학의 대화란 장대익의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답변 가운데 하나를 올려본다. 내용이 길다.

 

 두 분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윌슨과 데닛, 두 석학과의 만남에 관한 장 선생님의 생중계도 잘 들었고요. 학기가 본격화하여 강의며 연구며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없이 지내는 저로서는 마냥 부럽기만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도킨스, 데닛, 윌슨이 같은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를 대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사 도킨스와 전략가 데닛, 그리고 협상가 윌슨이라…. 꽤 그럴듯한 구분이네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 저로서는 이런 차이가 과연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세 사람이 똑같이 무신론적 신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형이상학적 신념으로서 무신론
  
  방금 저는 '무신론적 신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신념이죠. 전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견해와 관련되며,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운동과 관련됩니다. 저는 도킨스, 데닛, 윌슨을 비롯한 많은 무신론 과학자들에게 무신론은 이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일종의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들의 무신론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형이상학적 신념입니다. 물론 무신론에는 형이상학적 차원만 있지는 않습니다. 방법적 차원도 있죠. 과학은 자연이라는 물리적 실재를 설명할 때 실험과 관찰이나 수학적 증명처럼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방식만 사용해야 합니다. 신이나 초자연처럼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요소를 끌어들인다면 그건 더 이상 과학이 아니겠죠. 자연을 설명할 때 자연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상정하지 않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오컴의 윌리엄. ⓒ프레시안


  올바른 과학이라면 그 설명에서 신이나 초자연을 일단 배제해야 합니다. 이론 체계는 간결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 흔히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이 원리는 중세의 여러 학자들이 거듭 제시한 것으로 14세기 영국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자 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 1249-1835)이 특히 자주 강력히 제시했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 필자) 원리는 과학의 과학다움을 판별하는 주요 기준인데, 이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신이나 초자연을 끌어들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죠.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종사하는 한 그들도 (신과학이나 또는 신 선생님이 정확히 비판하신 유신론적 과학을 추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개는 자신이 마치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인 것 같은 태도로 작업을 합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과학과 별개의 문제이거나 과학적 작업 이후에 시작되는 개인적 문제일 뿐이죠. 사실 그래야 하고요.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일환으로서 무신론 내지 불가지론은 과학의 불가피한 토대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신론이 자연적 실재의 특성이나 원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부터는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죠. 무신론은 방법적 차원에서는 과학의 핵심 토대지만,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견해에서는 그저 여러 선택지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 방법이 아닌 신념의 문제가 되는 거죠. 신이나 초자연이 있다고 보든 없다고 보든,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물리적 세계에서는 어느 쪽에도 확실한 경험적 증거란 없습니다. 신이나 초자연에 대해 누가 어떤 생각을 하건 그건 모두 경험적 검증과 무관하게 각자의 지식과 선호에 따라 전제되는 특정한 형이상학적 신념일 뿐입니다.
  
  물론 증명의 부담 면에서 무신론자보다는 유신론자가 어깨가 좀 더 무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관계된 한, 증명의 부담은 그것이 없다고 보는 쪽보다는 있다고 보는 쪽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신이나 초자연을 믿고, 비록 남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어도 때때로 신이나 초자연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그 수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죠. 신이나 초자연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현존 자체는 일단 인정해야 할 겁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무신론자도 증명의 부담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많은 무신론자들이 신이나 초자연이 없음을 증명하려 부단히 애써 온 것도 이 때문이죠.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에서 근대의 데이비드 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오귀스트 콩트 같은 사상가들, 20세기 전반기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 정신 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현대의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신론자들이 그랬습니다.
  
  도킨스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과거 유신론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시도들을 하나하나 격파한 후에,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우연, 자연 선택, 창발성만으로 얼마든지 생명의 출현과 진화나 자연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따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단언합니다.
  

▲데이비드 흄. ⓒ프레시안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을 격파하는 그의 작업은 흄이나 러셀이 이미 했던 작업에 과학의 옷을 살짝 덧입힌 것이기에 좀 진부하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신 존재 증명의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건 맞습니다. 이는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신론자들도 이미 오래전에 인정한 바죠. 인간의 사유와 논리로 간단히 증명될 정도의 존재라면 애초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고, 설령 궁극적인 무언가가 정말 있다고 쳐도 그것이 꼭 인격적 신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 인격적 신이 꼭 그리스도교의 신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죠. 눈치 채셨겠지만, 방금 이 말은 흄이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Natural Religion)>(1779년)에서 자연의 정교함 뒤에는 설계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신이라는 식의 '설계 논증(design argument)'을 비판하면서 한 말을 빌려온 겁니다.
  
  그런데 일전의 편지에서도 썼듯이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이 실패했음을 보여 주었다고 해서 이로부터 바로 그러니까 신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무신론자인 데닛조차 도킨스가 신 존재 증명을 격파하는 데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신 존재 증명의 실패를 입증하는 일보다는 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 주거나,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신이라는 상상의 존재에게 투사되는지를 보여 주거나, 신이 있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반문을 던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 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신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똑같이 동어반복이기 때문이죠. 둘 다 애초의 전제를 반복하는 순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신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신이 있다는 결론으로 끝나고, 다른 쪽은 신이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신이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죠.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를 이 자리에서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무신론과 유신론 중에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도 없고,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에 말려들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신론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다소 장황히 다룬 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신론의 또 다른 차원, 즉 신념적 차원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신념으로서 무신론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무신론은 실재의 궁극적 토대에 대한 견해로서 형이상학적 신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운동과 관련된 실천적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 실천적 신념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신념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하는 윤리적 물음은 두 신념을 이어 주는 고리들 중의 하나죠.

 

 

 

 


  
  많은 무신론자들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신 따위는 없다는 증거이며, 진보를 저해하고 신의 이름으로 악행을 조장하며 정당화하는 종교야말로 악의 근원이자 악 자체라고 비난합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외에도 무신론의 고전인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1927년)나 최근의 문제작인 샘 해리스(Sam Harris)의 <종교의 종말(The End of Faith)>(2004년)도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대표적인 무신론 책들이죠.
  

▲스티븐 와인버그. ⓒ프레시안


  별도의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도 이런 견해를 표명해 온 대표적인 무신론자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처음 편지를 주고받던 때에 장 선생님께서 그의 말을 인용하셨죠?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뉴욕타임스> 1999년 4월 20일)
  
  와인버그의 이 유명한 말은 짧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이죠. 도발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 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우선 선과 악이 종교의 유무와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은 분명 맞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착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은 논리적 비약이고 아무 근거 없는 독단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와인버그는 우주의 출현과 진화는 순전한 우연의 산물일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고 따라서 우주에 인격적 신이 끼어들 여지란 없다고 보는 전형적인 무신론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종교가 때때로 악에 연루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종교를 공격하고 신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되지요.
  
  물론 역사와 현재 속에서 종교가 악과 밀접히 연루된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전쟁과 학살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수많은 테러와 지역 분쟁에서 종교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그러니까 종교가 이런 전쟁, 학살, 테러, 분쟁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가 이런 일들의 배경이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가 연루되지 않거나, 연루되더라도 별 영향력이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전쟁이나 테러 같은 악에 종교가 연루된 때에도 많은 경우 종교가 유일하거나 직접적이거나 핵심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종교는 그저 전쟁과 테러를 야기하는 복잡하게 얽힌 많은 원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죠.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흔히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핵심에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대립이 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말한 '문명의 충돌' 이론의 대중적 판본이기도 하죠.
  

 

 

 

 


  하지만 종교학자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은 <거룩한 테러(Holy Terrors: Thinking about Religion after September 11)>(2003년)라는 책에서 이런 식의 단편적이고 이분법적인 통념을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링컨이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화씨 9/11>(2004년)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것처럼 부시의 석유 욕심 따위를 들먹이는 건 아니고요. 링컨은 빈 라덴과 부시의 연설문, 테러범들의 지령문과 편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의 발언, 언론 기사 등에 대한 치밀한 담론 분석을 통해 빈 라덴과 부시의 대립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단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대립만은 아님을 밝혀냅니다. 거기에는 종교, 정치, 문화, 경제의 온갖 요소들이 근대적 욕망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종교적 요소는 실질적으로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대중 동원의 정치적 수사 차원에서 도드라지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브루스 링컨. ⓒ프레시안


  물론 링컨이 9·11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종교학자들 중에는 9·11을 주로 종교적인 대립으로 보는 이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하지만 링컨 식의 견해가 중요한 이유는 종교를 마치 무슨 독립적 실체처럼 다루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으로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체로서 종교 따위는 없다는 견해가 점점 더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는데, 정작 다른 학문 분야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오히려 종교를 실체화하고 그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 다시 와인버그로 돌아오자면, 저는 와인버그가 종교가 악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비난할 때 그가 종교에 대한 너무 안이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쟁과 테러 같은 악을 양파 껍질 벗기듯 벗겨 가면 그 핵심에는 종교라는 알맹이가 떡하니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는 러셀, 도킨스, 해리스를 비롯한 다른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링컨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그런 알맹이로서 '종교'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껍질부터 속까지 다른 온갖 요소들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종교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죠.
  
  저는 세상의 악에 종교가 연루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종교들 간의 대화 운운하며 종교의 좋은 측면만 말하는 책들보다는 링컨 같은 비판적 종교학자의 책이나 러셀, 도킨스, 해리스 같은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향해 쏟아 붓는 독설을 읽는 게 더 흥미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와인버그나 러셀이나 도킨스처럼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악과 관련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종교가 인류의 선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전쟁이나 테러 외에도 성 차별,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향 차별 등 온갖 차별과 억압에도 오랜 세월 종교가 연루되어 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근대 이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사회의 근간이 아닌 곳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근대 이후에도 종교적인 것들은 여전히 다른 요소들과 복잡하게 뒤엉켜 있죠.
  
  성 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해 온 뿌리 깊은 차별적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특정 시점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습성입니다. (본성과 습성은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고, 페미니스트들도 생물학적 성별(sex)과 사회적 성차(gender)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이는 일단 접어 두기로 하죠.) 물론 종교 역시 역사적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고요.
  

▲거다 러너. ⓒ프레시안


  그렇다면 종교와 가부장제의 관계는 어떨까요? 무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이거나 반종교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종교는 가부장제의 핵심 원인이며 종교가 사라지면 가부장제도 약화되거나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다 러너(Gerda Lerner)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가부장제가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부장제는 무엇보다 권력과 소유의 분배를 둘러싼 성차 정치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에 종교가 깊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인이 아닌 결과였을 뿐이죠. 게다가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가부장제의 보루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타파에 현저히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이 가부장제와 종교적 광기의 끔찍한 결탁을 보여준다면, 가부장적 유대 관습을 어기고 여성들도 제자로 받아들였던 예수는 종교가 어떻게 양성 평등의 전망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주죠. 가부장제는 거대한 사회적 제도이고, 종교는 그 속에서 제도를 강화하거나 파열시키는 요소일 뿐입니다.
  
  계급 차별, 인종 차별, 성향 차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소들이 뒤엉키며 차별들이 형성되는 과정이 있고, 종교적 요소는 그 속에서 차별을 심화하거나 약화하는 이중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종교는 권력자와 부자의 편이기도 했지만, 약자와 가난한 자의 편이기도 했습니다. 계급 차별과 종교의 관계가 무엇이든, 계급은 그 전부터 있었고, 종교의 존속 여부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한동안 사라지지는 않겠죠.
  
  또 성서에 인종 차별적 구절이 수두룩하고,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가 인종적 우열의 기원 신화로 둔갑해 노예 제도를 정당화한 것은 사실입니다(창세기에서 대홍수 이후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자는 것을 보고 차남인 함은 이를 비웃었지만 장남인 셈과 막내인 야벳은 노아의 몸을 이불로 가려주었다. 잠에서 깬 노아가 이를 알고 셈에게는 큰 축복을, 야벳에게는 중간의 축복을, 함에게는 대대로 종노릇 하리라는 저주를 내렸다. 셈족을 중심으로 한 종족 기원 신화에 불과했던 이 이야기는 8세기 아랍 노예 상인들에 의해 인종 기원 신화로 각색되었고, 중세 이후 그대로 가톨릭과 개신교에 스며들었다. 심지어 미국과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교인들이 적지 않다 : 필자). 그래서 도킨스나 해리스 같은 이들은 종교가 인종 차별 철폐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별을 조장해 왔다고 비판하기도 하죠. 하지만 당장 개신교의 마르틴 루서 킹이나 이슬람의 말콤 엑스 같은 흑인 지도자들만 떠올려도 종교가 인종 차별 철폐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겁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타자 인식에 뿌리박혀 있는 한 인종 차별은 종교의 지원이나 저항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지속될 겁니다.
  

  또 그리스도교가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해 탄압과 심지어 살해를 조장하기도 했고, 지금도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 교단들은 여전히 동성애 혐오를 고수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창조의 섭리를 운운하는 종교가 극심한 성향 차별적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세상을 음양의 조화로 이해하는 종교적 사고도 양성 이분법에 갇혀 동성애에 대한 경멸을 조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다종교 사회이자 세속 사회이기에 종교의 영향력이 분산되어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 혐오와 성향 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것에 비하면, 퀴어 신학이 발전하고, 성적소수자 교단과 교회가 생기고, 게이나 레즈비언 사제와 목사가 증가하고 있는 서양의 혁신적인 개신교 교단들이 훨씬 더 평등적이며 진보적입니다. 결국 종교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든 이와 무관하게 양성 관계가 성과 사랑의 정상성(正常性) 범주를 계속 규정하는 한 성향 차별의 편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런 사례들은 종교가 때로 이런저런 사회적 악에 연루되기도 하는 사례들을 들어 종교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너무 단편적인 생각임을 말해 줍니다. 사례들을 모아서 구축한 일반화는 반대 사례들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죠. 종교 비판자들이 종교와 악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면, 종교인들이나 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종교가 선을 증진시킨 반대 사례를 얼마든지 제시할 겁니다. 어느 쪽이든 사례는 무궁무진하죠.
  
  저는 무신론적 신념에 근거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특히 무신론 운동이 합리성과 인간성의 증진에 기여하는 바는 분명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신론 운동이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모습은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 비판은 건전하고 유용한 충고를 넘어 흔히 맹목적인 비난이 되어 버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서로 다른 신념의 소유자들 사이의 대화 자체를 가로막습니다. 대화는커녕 갈등만 조장할 뿐이죠.
  
  전략가 데닛과 협상가 윌슨은 유신론자들과의 대화마저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달리 전사 도킨스에게는 유신론자들과의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 굳이 유신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킨스는 아마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과학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며, 무신론자는 물론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그 어떤 대화도 거부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인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다시 요약하자면, 무신론은 과학적 방법으로서는 필요불가결하고, 형이상학적 신념으로서는 유신론과 나란히 다양한 선택지들 중의 하나이며, 실천적 신념에 따른 운동으로서는 합리성과 인간성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신념이 맹목적이 되어 다른 신념들에 대한 비난과 매도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에 기여할 바가 별로 없습니다.
  
  무신론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고립된 개인들에 불과했던 무신론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이론 투쟁이자 사회적 실천으로서 무신론 운동의 역사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습니다. 이런 계몽적 시기에 싸울 대상을 설정하고 비판적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무신론 운동이 좀 더 진전된다면 비판과 비난을 넘어 대화와 소통의 창구를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운동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교 연구자들이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 역사적 맥락
  
  무신론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종교인들이나 종교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장 선생님의 물음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으니, 저는 종교학에 관련해,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살짝 포함해 여러 종교들에 관련해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비교적 간단한 종교학자들, 아니 종교 연구자들의 경우부터 이야기를 해 보렵니다. 잠시 옆으로 새자면, 제가 '종교 연구자'라고 한 것은 '종교학자'라는 용어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history of religions'라고 불리던 좁은 의미의 종교학은 현상학이나 역사학의 방법을 활용해 문헌 분석에 치중하던 진영을 주로 지칭해 왔습니다. (영어권에는 우리처럼 한자를 조합해 만든 '종교학'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죠.)
  
  하지만 종교는 종교학 외에도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도 꾸준히 연구되어 왔고,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이 분야들 간의 경계는 아주 희미해졌죠. 따라서 지금은 종교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연구들을 포괄하는 '종교 연구', 영어로 'religious studies', 'study of religion', 'academic study of religion' 같은 용어가 더 자주 쓰입니다. 제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도 좁은 의미의 '종교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종교 연구'에 관련됩니다. (포괄적인 종교 연구의 모든 분야를 다 다루기는 힘든 일이니 일단은 인류학과 종교학 위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제가 간단하다고 말한 건 종교 연구 진영에서는 최근까지도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종교 연구가 거쳐 온 역사적 과정에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프레시안


  좁은 의미의 종교학 또는 현대적 의미의 학문적 종교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고대 문헌을 다루는 문헌학에서 출발했습니다. 종교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영국의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년.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작 시집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를 쓴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아들로 영국으로 이주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학문적 저작 외에도 자전적 소설 <독일인의 사랑>이 잘 알려져 있다 : 필자)는 산스크리트 어를 전공한 고대 인도 문헌 전문가였죠. 그에게는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의 전체 학문적 노작들과 특히 1873년 저서 <종교학 입문(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은 특정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비교하며 유적 범주로서 '종교'의 보편적 특성을 파악하려는 종교학의 기본 원칙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남긴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는 말은 지금도 종교학의 금과옥조로 여겨질 정도죠.
  
  하지만 뮐러 식의 종교학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종교 연구는 주로 인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년)는 그 핵심 인물이죠. 인류학은 주로 '미개 사회'로 여겨지던 소규모 부족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었고, 따라서 타일러의 관심도 '원시 종교'에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의 기원을 알아내겠다는 거였죠. 그는 현지 조사는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작성한 다양한 현지 조사 자료를 가지고 일반 이론을 세우려던 이른바 '안락의자 인류학자'였는데요, 어쨌든 그는 긴 연구 끝에 종교의 기원은 '정령 숭배'(animism)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타일러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920∼1903년) 식의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죠. 사회 진화론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 영역에 적용하면서 서구 중심주의로 치우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개념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킨 사상 체계입니다. 그렇기에 타일러는 부족 사회를 인류의 진화와 진보의 초기 단계를 보여 주는 화석으로 여겼고, 정령 숭배를 미개한 원시인들이 사물의 인과 관계를 잘못 파악한 사고의 오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죠.
  
  이후 사회 진화론에 근거한 타일러 식의 종교 이론은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이며 서구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20세기 전반기 인류학에서는 사회 진화론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적 분위기 속에 부족 사회를 그 자체의 고유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의 총체 속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20세기 전반기 종교학계는 크게 두 진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하나는 철저한 역사학 방법에 따라 사료를 분석하며 종교들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학적 종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 중지와 감정 이입을 중시하며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현상학적 종교학이죠. 물론 둘 다 사회 진화론을 거부하고 종교를 진화나 진보의 기준에 따라 파악하지 않으려 한 점은 비슷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사회 진화론이나 진보의 서사가 거부된 것은 이 학문들이 서구 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더불어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까지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된 것이죠. 인류학은 기원이나 진보보다는 사회와 문화에서 종교가 지닌 기능이나 의미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종교학에서는 통계 연구에 근거한 사회학적 종교 연구, 프로이트 식의 정신 분석학적 종교 연구, 행동 심리학이나 실험 심리학에 열중하던 심리학적 종교 연구를 '환원주의'로 비판하면서 종교 경험의 고유성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점점 강해졌죠.
  
  루마니아 출신으로 1945년 이후는 프랑스에서, 1956년 이후 평생 미국에서 활동한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년)는 그 정점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20세기 후반 들어 엘리아데의 막강한 영향력 속에 종교학에서는 '성스러움'은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解? 공감적 태도 및 해석학적 방법에 따라 종교를 '종교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종교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고,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도 별다른 학문적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죠.
  
  종교 연구자의 과학 보기: 메타적 관심과 분리주의
  
  한편, 종교 연구 진영에서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미약했던 데는 역사적 맥락 외에도 다른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종교 연구 자체의 학문적 속성입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은 그것이 과학적 진리든 종교적 진리든 '진리'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신'이나 '초자연' 같은 비경험적 실재에도 별로 관심이 없죠. 인류학과 종교학은 메타적인 학문입니다. '진리' 자체보다는 '진리에 관한 주장들이나 담론들', 또 '신'이나 '초자연' 자체가 아니라 '신에 관한 생각', '초자연에 관한 담론', '신이나 초자연을 상정하고 행해지는 실천'이 주요 관심사죠. 진리니, 신이니, 초자연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류학과 종교학의 학문적 관심 바깥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학자와 종교학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특정 종교의 신자나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을 중시하는 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을 그 학문적 작업 속에 끼워 넣으려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아주 많죠. 특히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주류 종교학계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인류학과 종교학에서는 좀 더 철저한 학문성을 추구하면서 이런 경향을 탈피하려는 흐름이 크게 대두했죠. 인류학은 문제가 비교적 덜했지만, 종교학은 종교학 자체가 종교화되는 데 대한 위기의식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종교학의 탈종교화 내지 세속화가 종교학의 학문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관건으로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국내외 종교학계는 종교적인 성향의 종교학자들과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의 종교학자들이 종교학의 정체성과 학문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종교학자들은 진리, 신, 초자연, 성스러움 등에는 직접적인 관심을 갖지만,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또 세속적인 종교학자들은 진리, 신, 초자연, 성스러움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종교와 과학 논의에 역시 별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들은 사회, 문화, 역사의 맥락에서 진리 주장들이나 신과 초자연에 관련된 담론과 실천을 둘러싼 관계와 권력의 역학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 ⓒ프레시안


  종교 연구자들이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를 나름의 고유성을 지닌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죠. 물론 이런 태도는 다른 과학자나 종교인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자인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0년)는 과학과 종교는 "중첩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을 지니며, "각기 인간의 삶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고유한 영역의 주인"이라고 봅니다. 과학이 사실적 지식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이라는 거죠.
  
  개신교 신학자 랭던 길키(Langdon Gilkey, 1919∼2004년)도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과 종교를 분리합니다. "과학은 객관적 자료를 설명하며, 종교는 우리의 내적 경험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다룬다. 과학은 '어떻게'를 물으며, 종교는 '왜'를 묻는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종교 연구자들도 과학과 종교를 두 개의 언어 또는 두 개의 게임으로 보아 양자를 분리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애초에 역할이 다르기에 서로 만나거나 부딪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런 식의 분리주의들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제각기 특정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굴드의 분리주의에는 사실과 의미를 분리하고 종교를 의미의 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종교가 감히 사실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의 문제는 과학이 전담할 터이니, 종교는 가치와 의미를 찾는 데나 신경 쓰라는 거죠. 비록 도킨스보다 부드럽기는 해도 굴드 역시 철저한 무신론자입니다. 그리고 도킨스가 전투적 방식으로 종교와의 대화를 거부한다면, 굴드는 분리를 통한 타협이라는 온건한 방식으로 종교와의 대화를 회피하죠. 거부든 회피든 대화가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이와 상반되게, 길키의 분리주의는 과학을 사실의 영역에 가두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본분에나 충실해야지 인간 삶에 관련된 가치와 의미에는 함부로 관여하지 말라는 거죠. 여기서도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필요 없고, 사실상 대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종교 연구자들의 분리주의에도 역시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크게 상식적 관점, 과학적 관점, 미학적 관점, 종교적 관점으로 나누고, 이들 네 관점은 서로 구별되며 각기 고유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과학과 종교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죠. "종교적 관점은 일상적 삶의 실재들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때 세계의 소여성(world's givenness)을 그럴듯한 가정들의 소용돌이 속으로 해체시켜 버리는 제도화된 회의주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교적 관점은 더 넓은 비가정적 진리들로 여겨지는 것에 의존한다." 기어츠는 과학이란 단지 그럴듯한 가정이자 제도화된 회의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 삶에 관련된 실존적 물음에 답할 능력이 없는 반면, 종교는 가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런 물음들에 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거죠. 기어츠는 종교를 상징 체계로서 문화의 일부로 파악하는 해석학적 인류학자인데요, 그는 과학을 그 한계 안에 묶어두는 한편 가치와 의미를 문화로서 종교의 독점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기어츠의 이런 분리주의는 상징이나 문화에 관한 협소한 이해에 근거합니다. 흔히 상징은 어떤 고유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상자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미란 상자 속에 이미 들어 있던 고정된 내용물이 아니라, 상자를 여는 순간 그 행위가 만들어 내는 효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어츠는 상징과 의미를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죠. 문화와 종교를 상징체계로 보는 그의 견해도 역시 이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문화를 다양한 의미들의 총체로 봅니다. 하지만 문화는 단지 의미의 영역이 아닙니다. 문화는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의 영역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복잡한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이한 집단들 사이에서 담론과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역동적인 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을 의미, 가치, 상징, 문화, 종교 등으로부터 떼어놓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과학을 의미와 분리하려 해도 과학은 언제나 의미의 영역에 개입하곤 합니다. 또 온갖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스며들기도 하죠. 과학은 설명의 모형으로 상징을 활용하기도 하고, 과학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과학은 종교를 비롯한 다른 많은 문화적 요소들과 더불어 문화의 엄연한 일부로서, 다른 문화적 요소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기어츠는 과학을 애써 문화나 종교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호 작용들을 애써 무시합니다. 굴드나 길키가 그랬던 것처럼 기어츠 식의 분리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대화란 애초에 불가능하죠.
  
  지금까지 종교 연구 진영에서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들을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관심이 전혀 없던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학적 종교학자들은 특정 시대나 지역의 종교사를 다루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루기도 합니다. 또 이론적 문제를 다루는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와 과학에서 은유나 상징이 사용되는 방식을 분석하기도 하죠.
  
  최근에는 생명 공학의 발전이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 사이에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자 여기에 직접 참여하거나 논의의 과정과 구조를 분석하는 종교 연구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은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대폭발 이론, 진화론, 카오스 이론, 인지 과학, 뇌과학 등의 주제가 중심이 되어 온 과학과 종교 논의 지형 전반에서 보면 단지 주변적 위상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 연구 진영에서는 역사적 맥락이나 그 학문적 속성과 방법의 독특성으로 인해 과학과 종교 논의가 별다른 관심거리가 되지 못해왔고, 관심을 보이는 일부의 경우에도 과학과 종교의 주요 주제들이 아닌 주변적 주제들만 건드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좀 상황이 달라지고 있는데요, 특히 인지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지적 종교 연구' 분야가 생겨나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지 과학은 종교와 과학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현재 가장 활발하고 왕성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인지적 종교 연구의 출현과 발전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게다가 이 논의에는 무신론적, 종교적, 중립적 성향의 다양한 종교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죠.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겠죠.
  
  과학과 종교'들'의 관계 유형
  
  이제 여러 종교들은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종교들은 그 종류가 워낙 많고, 종교들마다 과학에 대한 견해도 천차만별이기에 이를 일일이 설명하거나 간단히 유형화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명하자면 제 답장이 늦어진 것도 사실 이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참에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 중에 이슬람이나 불교에 관련된 종교와 과학 논의를 정리해 보려 했었죠. 두 분도 아마 저에게 그런 기대를 하셨겠죠? 그런데 사실 제가 불교 전문가가 아닌지라 이제야 오랜만에 이쪽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좀 놀랐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불교학자들이나 불자 과학자들의 논문, 저서, 번역서가 생각보다 많이 쌓였더군요. 몇 년 전만 해도 저역서 두세 권과 논문 몇 편이 고작이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일본어나 영어로 된 논문과 저서까지 치면 읽을거리는 훨씬 더 많아지죠.
  
  또 국내에는 아직 별로 없지만 외국에서는 이슬람과 과학에 관한 연구도 꽤 많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 비하면 불교나 이슬람 쪽 논의는 아직 그 양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만, 일반적 주제에서 세부적 주제까지 상당히 넓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교나 이슬람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이런 방대한 양의 논문과 책을 섭렵하기도, 복잡한 과학적 지식과 교리적 논의를 수반한 까다로운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제 공부가 모자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설령 제가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요약하고 정리한들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교와 과학, 이슬람과 과학, 이런 이야기는 어쨌거나 불교 전문가와 이슬람 전문가에게 직접 듣는 게 더 낫겠지요.
  
  그렇다고 종교 연구 진영에서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며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나 번역서나 원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좀 난감했습니다. 그러니 두 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종교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들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짚어 보도록 하죠. 저는 그 관계 유형을 무관심, 갈등, 분리, 대화/통합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유형화는 존 호트(갈등, 분리, 접촉, 지지)와 이언 바버(갈등, 독립, 대화, 통합)가 제시한 유형화를 빌려와 살짝 합치고, 거기에 무관심이라는 유형을 추가한 겁니다.
  
  우선 무관심은 언뜻 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좀 다릅니다. 분리는 나름의 이론적 틀에 따라 과학과 종교를 각자의 고유한 영역에 배치하려 하죠. 거기에는 나름대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일정한 성찰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무관심은 말 그대로 무관심이죠. 과학자들과 종교인들 중에는 과학과 종교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외 학자들은 대개 그리스도교 위주로 논의를 해 온 데다 갈등을 극복하고 대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무관심이라는 문제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무관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특정한 태도입니다.
  

▲캉유웨이. ⓒ프레시안


  우선 무관심은 과학자나 종교인, 또 종교의 종류를 막론하고 두루 나타나지만, 특히 무관심이 지배적인 것은 유교(儒敎), 무교(巫敎), 그리고 대개의 신종교들입니다. 유교는 과연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종교적 여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가 복잡하게 뒤엉킨 복합적 총체입니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한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줄곧 제기되어 온 오랜 문제입니다. 19세기 말 중국의 근대 개혁가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년)가 최초로 유교 종교화를 선언했던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1995년에 성균관에서 유교 종교화를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죠.) 게다가 오늘날 유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서가 아니라 충효와 예절, 가족 제도와 제사 등으로 우리 일상 속에 녹아 있는 가치관이나 관습 정도로만 존재합니다.
  
  종교의 문제는 어쨌든 과학과 나름의 윤곽을 지닌 특정 종교 사이의 문제죠. 하지만 유교는 그런 윤곽이 희미하니 딱히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를 않는 거죠. 무교나 대개의 신종교들의 경우는 좀 다른데요, 과학과 종교 논의는 나름의 교리적 체계를 갖춘 종교들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민간 종교인 무교나 아직 형성 단계 초기에 있는 신종교들은 그런 체계가 미약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 자체가 벌어질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갈등은 여러 종교들의 안팎에서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일전의 편지에서도 소개했듯이, 센서스 결과를 보면 '종교가 없다'라고 답한 사람이 우리나라 총인구의 거의 절반에 이릅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무신론자이거나 반종교주의자인 것도 아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귀신이나 운명을 믿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토정비결을 보는 등 일정한 종교적 사고를 하고 종교적 실천을 행하기도 하죠. 하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나 반감의 정도가 매우 높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에서 무신론자들이나 과학 지상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 그리고 반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종교란 '미신'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과학과 공존할 수 없으며, 과학이 진보하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과학이나 종교에 별 관심이 없고요. 어떤 경우든 과학과 종교 논의는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죠.
  
  종교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가 그 안팎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반면, 다른 종교들과 관련해서는 이런 견해가 주로 그 바깥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그리스도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과학적으로 온통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죠. 또 그리스도교인들 중에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자들은 과학이 오류로 가득하며 오만하다고 여기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니 여기서 더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경우는 종교마다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외부자들이 특정 종교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종교와 과학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우는 여전히 많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와 달리 다른 종교들에서는 종교가 나서서 과학을 거부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신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그리스도교에서 유독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심한 것은 창조주 절대자 신에 대한 생각, 로고스 중심주의, 그리고 문자주의적인 경전 이해 때문이죠. 하지?다른 종교들에서는 대개 이런 측면들이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갈등의 소지가 그리 크지 않은 거죠.
  

▲만다라. ⓒ프레시안


  불교처럼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법칙으로 본다면 우주의 생성이나 생명의 진화에 관련된 창조주 신의 문제가 제기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불교에는 방편설이 있어서 경전과 교리에 상식이나 과학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도 이게 그리 심각하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상징적 수단 정도로 보면 그만이죠. 예를 들어 티베트 불교에는 현실 세계와 초월 세계를 아우르는 우주를 묘사한 만다라가 있는데, 온갖 붓다들, 보살들, 신들이 그려진 것이든 순수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그려진 것이든 그 이미지들은 액면 그대로가 아닌 고도의 상징적 장치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방금 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주로 엘리트적 불교에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불자들 중에도 경직된 문자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불교가 과학보다 우월하다거나 과학과 불교가 상충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또 대개의 불자들은 무관심 유형에 속하는 경우가 많죠. 애초에 단일한 실체로서 '불교'가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신앙과 실천의 복합체로서 '불교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태도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까지 고려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너무 복잡해지니 일단 여기서 접겠습니다.
  
  세 번째로 과학과 종교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하는 분리 입장도 종교의 유무나 종류에 상관없이 두루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원불교에는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창시 이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을 실체적으로 구분하는 서구의 경직된 근대적 이분법과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각각 물질과 정신의 영역에 관련되는 것으로 적당히 분리되죠. 원불교에서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이루지고 있는지는 아직 살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질 개벽과 정신 개벽을 구분하는 것을 보면 논의가 그리 활발할 것 같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대화 내지 통합 유형입니다. 종교들 바깥에서는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아마 없겠죠. 반면에 종교들은 과학과 종교의 적극적인 만남을 추구하고, 그 만남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받아들여 변화를 도모하며, 나아가 과학에 새로운 동기와 전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물론 종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신학이나 교학 체계가 정교하고, 과학이라는 거대한 상대와 마주할 수 있는 규모와 세력을 가진 일부 종교들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경우 그런 종교는 주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다루어 주셨으니, 저는 두 종교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종교들의 과학 보기: 그리스도교와 불교, 비슷하면서도 다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프레시안


  "과학은 종교를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정화할 수 있으며, 종교는 과학을 우상 숭배와 절대화로부터 정화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좀 더 넓은 세계, 즉 과학과 종교가 함께 번성할 수 있는 세계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가 되어야 할 바가 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메시지', 1990년)
  
  "과학적 발견들이 우주론 같은 지식 분야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면, 불교의 설명들은 때로 과학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분야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 우리의 대화는 과학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유익을 제공해 왔습니다. (…) 과학은 물질적 세계를 이해하는 탁월한 도구였으며, 우리 삶이 크게 진보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내적 경험들에 관해서는 별로 진전을 이루지 못해 보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깊은 탐구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학문적 차원에서 과학자들과 불교학자들 간의 더 많은 논의와 협동 연구는 인간 지식의 확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과학과 종교의 협력', 2003년)
  

▲달라이 라마. ⓒ프레시안


  두 인용문에서 교황과 달라이 라마의 생각은 아주 비슷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비록 그 역할이 다르지만 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얽혀 있기 때문에 함께 대화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는 거지요. 두 사람은 가톨릭과 불교의 세계적 지도자들인 만큼 이들의 생각은 가톨릭과 불교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와 통합이 추구되고 있는 지배적인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물론 신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이런 입장은 주류 개신교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죠.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세부적인 논의에서마저 비슷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다르고 교리가 다른 만큼 이들이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내용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죠. 우주론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영역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우주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주요 이론인 대폭발(Big Bang) 이론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냅니다.
  
  대폭발 이론 이전에 과학계에서는 우주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죠. 당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듯합니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창조와 종말을 말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도무지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겠죠. 그런데 1960년대에 대폭발 이론이 사실상의 정설로 굳어지면서 이는 종교와 과학 논의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작은 물질로부터 어마어마한 폭발과 더불어 생겨났다는 대폭발 이론은 우주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신의 창조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잘 부합했기 때문이죠.
  

▲대폭발(Big Bang). ⓒ프레시안


  하지만 대폭발 이론은 지금도 계속 발전 중인 이론이며 거기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시작이 있었다면 끝도 있을까 하는 문제, 폭발의 시발점인 작은 물질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것인가 아니면 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다면 이는 유일한 일인가 아니면 반복되는 일인가, 우주는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하는 문제들이죠.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우주가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기 시작해 결국 블랙홀 특이점이 될 것이라는 대붕괴(Big Crunch) 이론이 나오면서 일단 해소되는 듯했습니다. 우주는 대폭발이라는 시작과 대붕괴라는 종말 사이에 놓은 유한한 피조물이라고 볼 수 있게 된 거죠. 하지만 대붕괴는 우주의 미래에 대한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주는 점점 팽창이 느려지다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팽창을 멈춘 채 차갑게 죽어버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견해도 우주의 미래에 관한 가능성 있는 이론이죠. 두 이론 중에 좀 더 지지를 많이 받는 것은 전자이고, 그리스도교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 교리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죠.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냐 아니면 반복적 사건이냐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대폭발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고 대붕괴와 더불어 다시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대폭발과 대붕괴는 일회적 사건이라고 보는 이도 있는가 하면, 비록 지금 같은 우주의 모습이 그대로 재연되지는 않겠지만 대폭발과 대붕괴는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는 식의 진동 우주론도 있습니다. 또 우주는 지금의 우리 우주밖에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무한히 많은 우주들이 서로 연결된 채로 제각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과정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는 다우주(multiverse) 이론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라는 입장, 그리고 지금 우리의 우주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주라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대폭발 이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불교는 우주의 시작과 종말이나 우주의 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입장을 취하죠. 불교는 그리스도교와 달리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보는 진동 우주론 쪽을 택합니다. 불교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또 불교는 우주가 여럿이라는 다우주 이론도 진지하게 수용합니다. 우주가 무한히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불교 교리와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죠.
  

▲안드레이 린데가 다우주의 생성 원리로 제시한 거품 우주론 모형도. ⓒ프레시안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폭발 이론을 비롯한 우주 이론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서로 사뭇 다릅니다. 이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실재관과 시간관, 그리고 궁극적 실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시간이든 공간이든 물질이든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공(空), 즉 무한히 서로 얽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만이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비록 고전적 실재론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 공간, 물질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또 불교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순환적 우주관을 갖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우주는 단 한 번만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의 근본인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 보느냐 아니면 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죠.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으로 보기에 창조자 따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창조자의 의도나 목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보기 때문에 창조자의 창조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창조자가 우연으로 가득한 이토록 무심한 우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과 씨름 합니다.
  
  이런 차이들은 우주와 생명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 양자 역학, 진화론 같은 다른 과학적 주제들에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불교는 인간의 고유성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고유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죠.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곧 그 창조주인 신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고전적 물질관을 대체한 양자 역학에 대해서도 상이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양자 역학이 말하는 확률적 실재를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불교적 이해와 결부시키려 하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확률과 신의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熾? 진화론에서도 불교는 생물계 중심적 입장에서 종들 간의 연기 관계 자체에 관심을 두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인간 중심주의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이 주요하게 고려되는 방식으로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며, 생명과 인간의 진화에 관련된 신의 의도와 목적을 끊임없이 묻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보다는 불교가 과학과의 대화에서 좀 더 문제들을 쉽게 해결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일부 불자들이 이런 점을 들어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과학에 더 잘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폭발 이론에서 우리의 관찰과 추론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인 플랑크 시간(폭발 후 10-43초)과 최초의 특이점(t=0) 사이의 시간에 벌어진 일들을 알아내는 일이나, 대폭발과 대붕괴가 한 번인지 여러 번인지 하는 문제 등을 경험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상이한 이론들이 여러 이유에서 지지를 더 받거나 덜 받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이론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힘들죠. 물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우주관 사이에서도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불교와 과학, 그리스도교와 과학 사이의 만남과 대화는 다양한 이론들과 다양한 종교 교리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진화론의 경우도 저로서는 오히려 다윈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진화의 낭비, 적자생존, 생물들과 인간의 분투와 고통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스도교의 노력이 좀 더 흥미롭습니다. 불교는 이런 문제들을 상호연기 교리로 간단히 정리할 뿐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불교와 과학의 만남이든,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만남이든, 어느 쪽이나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상이한 종교들 각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라는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하는 판단은 각 종교에 속한 신자들의 신앙일 뿐 제3자에 의한 과학적 확증도 객관적 검증도 불가능하죠. 비록 과학과의 대화가 시도되기는 하지만 그 대화는 어디까지나 각 종교의 신앙과 교리에 부합하는 한도 안에서의 대화일 뿐입니다. 한편 영원한 과학 이론은 없고 이론이란 계속 수정되다가 언젠가는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과학 이론이 바뀐다면 종교인들은 이제껏 축적한 만남과 대화의 성과들을 버리고 다시금 새로이 만남과 대화를 모색해야만 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이런 만남의 흔적들을 더듬는 일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흔적 속에서 저는 과학과 종교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대에 뛰어들어 진리를 추구하고 의미를 구축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분투들을 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좀 더 나은 앎을 위해 끝없이 분투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며칠 걸려 쓴 답장인데도 영 부족하기만 합니다. 과학 공부를 여간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네요. 불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개별 종교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 같고요.
  
  참, 신 선생님이 잠깐 다루신 창조와 진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한국 개신교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이 특이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두 분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이번 주 강의 끝나는 대로 며칠 내로 다시 편지를 드리죠. 봄기운이 완연한 캠퍼스지만 뒷산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아직 제법 서늘하네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고요,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7년 4월 1일
  
  오산에서
  김윤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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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퍼오지 않았던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최무영 교수의 과학이야기이다 . 수학과 관련된 도식이 나오면 피곤하여 그냥 지나가곤 했는데 관심가는 영역이라서 퍼온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의 문제를 정보와 엔트로피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정보의 문제. 그것도 중요한 화두이다.

우주와 시간

 

 

 

 

 

지난 시간에는 우주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우주의 구조와 기원, 진화 등에 대해 논의하였죠.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 존재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우주가 펼쳐져 나가는 모습은 결국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마지막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일부로서 인간은 우주라는 시공간의 규모에서 보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존재 같지만 놀랍게도 우주 전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에서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먼저 시간과 우주를 살펴보고, 우주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을 되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우주와 관련해서 시간되짚기 문제를 논의하고 자연과학을 통한 우주 해석의 의미를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시간과 우주
  
  시간은 흔히 화살로 표현합니다. 영어에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Time flies like an arrow)"는 격언이 있지요. 미래와 과거가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시간의 의미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미래와 과거는 분명히 다르지요. 우리는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미래를 기억한다는, 곧 예측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기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미아리고개에 많았는데 요즘에는 무슨 교회에도 많은 듯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다시 어려지지 않고 나는 유감스럽게도 늙어가기만 하지 다시 젊어지지는 못합니다. 나도 여러분 같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기는 사실 나이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젊었을 때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새로이 즐길 수 있는 삶도 있지요.
  
  어쨌든 시간을 화살에 비유하는 것은 방향을 지녔다, 곧 미래와 과거가 다르다는 뜻인데, 이는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기본적 이론체계, 곧 동역학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고전역학 체계도 시간에 대해서 대칭입니다. 곧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어요. 앞 강의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공을 던져서 날아가는 거동을 비디오카메라로 찍고 그 결과를 거꾸로 돌려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주어진 힘에 대한 가속도로 표현되는데 위치를 시간에 대해 두 번 미분한 가속도는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도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운동의 법칙은 시간되짚기에 대해 꼴이 바뀌지 않으며, 이는 고전역학에서 미래와 과거의 구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슈뢰딩거방정식에서 시간을 되짚으면 부호가 바뀌지만 복소켤레를 택하면 원래 부호로 돌아오므로 역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태함수와 그 복소켤레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확률은 절대값의 제곱으로 주어지므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상태를 규정짓는 이론체계인 동역학은 시간에 대한 대칭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시간화살이 없지요. 그런데 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의 일상에는 명백하게 시간되짚기에 대해 대칭이 없는 현상이 많습니다. 이러한 시간화살이 존재하는 현상, 예컨대 우리 몸과 생명을 비롯한 일상은 많은 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뭇알갱이계의 현상입니다.
  
  시간의 화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러한 뭇알갱이계에 존재하는 열역학적 화살(thermodynamic arrow)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기억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뜻하는 심리적 화살(psychological arrow)을 들 수 있겠고, 마지막으로 우주가 불어나고 있음에 해당하는 우주론적 화살(cosmological arrow)이 있습니다.

 

 

 

 

  


  열역학적 화살은 앞서 여러 번 논의했던 열역학 둘째 법칙이 주는 것입니다. 엔트로피가 저절로 감소할 수 없다는 것이 시간의 화살을 정해주지요. 강의실에서 향수병을 열면 향기가 저절로 밖으로 퍼져나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반대 과정, 곧 향기가 다시 모여서 향수병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니,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열역학적 화살이지요.
  
  심리적 화살을 거스른다는 신들린 사람이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미래를 기억(예측)하지 못하므로 심리적 화살이 있지요. 그런데 사실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적 화살 때문에 생기므로 결국 열역학적 화살의 한 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만 기억하고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기억이란 무엇입니까? 두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란 엔트로피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음의 엔트로피입니다. 곧 엔트로피는 모자라는 정보이죠. 그러니까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엔트로피 증가를 수반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 둘째법칙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심리적 화살은 열역학적 화살의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래를 기억한다는 사람은 자연법칙 중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한 열역학 둘째법칙을 위배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열역학적 화살로 돌아와서 둘째법칙을 살펴보지요. 둘째법칙에 따르면 외떨어진 계의 엔트로피는 계속 늘어나므로 결국 최대가 되면 더 이상 변하지 않게 됩니다. 열평형 상태라고 부르지요. 이는 주어진 조건에서 정보가 가장 모자라는 상태를 말합니다. 엔트로피가 최대라면 접근가능상태가 가장 많은 경우로서,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가능한 상태가 매우 많고 그 중에 어느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만큼 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물질이 고르게 섞여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공기나 우리 몸이나 구분이 없이 물질이 모두 균질해야 하므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우리를 비롯한 생명체는 외떨어진 계가 아닙니다. 바깥세상, 곧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 및 정보를 주고받으므로 열역학 둘째법칙을 어기지 않고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구도 외떨어진 계는 아닙니다. 해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있으므로 열평형 상태에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역학 둘째법칙은 외떨어진 계에만 적용됩니다. 그러면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외떨어진 계는 과연 어디 있을까요?
  
  엄밀한 의미에서 외떨어진 계는 바깥세상을 가지지 않은 전체우주 뿐입니다. 따라서 우주에는 둘째법칙이 적용되고 이에 따라 엔트로피가 최대인 열평형 상태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 전체에 물질이 고르게 섞여져야 하므로 은하도 별도 지구도, 그리고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이러한 상태가 바로 우주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암울한 우주의 미래인데, 이를 열죽음(heat death)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현재의 우주는 열죽음 상태는 분명히 아닙니다. 우주는 아직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았고, 엔트로피가 상당히 작아서 은하도 있고 별도 있고 생명체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왜 엔트로피가 작을까요? 우주가 꽤 나이가 많은데 왜 아직도 열평형에 도달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열역학적 화살로 대표되는 시간의 화살이 결국 우주의 문제로 귀착됨을 제시합니다.
  
  우주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으로 파동에 관련된 시간화살도 들 수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나요? 파문이 일지요. 이를 캠코더로 찍어서 거꾸로 돌리면 어떻게 보일까요? 갑자기 사방 호숫가에서 물결이 일어서 가운데로 모여들더니 가운데서 돌이 하나 튀어 오르게 됩니다. 그런 것 본 적이 있어요? 없죠? 파동의 진행에서도 역시 시간의 화살이 있는 것 같네요. 일반적으로 파동방정식을 풀면 시간되짚기 풀이도 얻어지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는 결국 우주의 둘레조건에 따라 정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역학 둘째법칙과 시간의 화살은 우주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탄생할 때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에서 출발하였고, 증가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가 아직 열평형에 다다르지 않은 이유는 우주가 계속 불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만일 멈춰져 있었다면 일찌감치 열평형이 되어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 등 생명이 존재하고 별과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정지우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다행히 우주가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열죽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열역학적 화살도 우주론적 화살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네요.
  
  태초에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탄생했는데 스스로 지켜야 할 규칙, 물리법칙이라고 표현하는 규칙을 선택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뉴턴의 운동방정식이나 슈뢰딩거방정식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선택했고, 이에 더해 초기조건도 우주가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 따라 우주는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누가, 왜 선택했느냐는 것은 수수께끼지요. 아무튼 우주는 다행히도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를 초기조건으로 선택했고, 일반상대론의 마당방정식에 따라 계속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규칙에 대해서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주에서 가능한 규칙이 사실은 한 가지 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앞에서 논의했지만 '모든 것의 이론(TO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초끈이론이 그러한 역할을 하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몇 해 전에 해외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초청강연을 했는데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노벨상 받은 사람들도 여럿 참석했는데 한 분의 강연 제목이 "모든 것의 이론은 어떤 한 가지의 이론이라도 될 수 있는가(Is theory of everything theory of anything?)"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것은 과연 어느 한 가지라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되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이론(TON)인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것의 이론을 믿는다면 우주를 기술하는 이론은 한 가지이고 우주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초기조건은 어떻게 된 것이냐, 우주가 초기조건은 왜 하필 그렇게 결정했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초기조건도 선택의 여지가 없이 둘레가 없는 초기조건으로 정해졌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호킹의 의견이지요.
  
  글쎄요, 설사 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최후의 수수께끼는 남습니다. 만일에 우주의 진화를 결정하는 시간 펼쳐짐을 지배하는 법칙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할 필요가 없고, 우주의 초기조건도 한 가지라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도대체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번거로운데, 왜 우주가 스스로 존재의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는 진정한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코의 작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원래 제목은 소설과 같았는데 우리말로 희한하게 번역했지요. 영화 제목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번역했으니, 참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요?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 동유럽이 소련의 정치, 경제 블록 안에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자 노선을 걷다가 소련의 침공으로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소련이 침공하기 전의 잠깐 동안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렀지요. 그것은 물론 서구의 시각에서 본 것입니다. 아무튼 소련이 침공한 상황에서 마치 공산주의에 맞서서 싸우는 걸 그린 영화라는 식으로 왜곡되게 해석해서 그렇게 붙였습니다. 실제로는 '프라하의 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정확한 제목입니다. 좋은 작품으로 기회가 생기면 보라고 권합니다.
  
  이를 본떠서 1980년 5월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던 것 압니까? 이제 5월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지난주에 5월 18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나요? 요즘 대부분 학생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1980년이라고 하면 아직 30년도 되지 않았네요. 오래 전이라면 오래 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의 입장에서는 30년 전이면 결코 오래 전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과 30년 만에 그렇게 망각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믿기 힘듭니다. 내가 여러분 같을 때였죠. 처절하고 치열한 삶과 죽음의 문제였는데 불과 20여년 사이에 이렇게 잊어져서 대학 캠퍼스에서는 축제 마당이 되어버렸네요. 치열한 삶의 문제였는데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되어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5월의 캠퍼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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