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일이 산적하다. 

그냥 쉬엄쉬엄 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한겨레21에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이토록 짜릿한 비밀 연애 [2011.04.08 제855호]  

 

비밀은 줄다리기다. 감추려는 쪽의 힘이 크거나, 감추려는 쪽과 밝히려는 쪽의 힘이 팽팽하면 비밀은 비밀로 남는다. 그러나 밝히려는 쪽의 힘이 커지면 숨기려는 쪽은 앞으로 넘어지기 마련이고, 숨기려는 쪽이 줄을 놓아버리면 밝히려는 쪽은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비밀의 줄을 잡고 있는 손은 잠시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숨기려는 쪽의 손은 더욱 그렇다. 그 비밀이 사랑일 경우, 줄다리기는 더 흥미진진해진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30대 직장인 김희진(가명)씨는 2년이 다 되도록 같은 회사의 동료와 열애 중이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업무상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서로 감정을 키워간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1년 동안 둘은 아무도 모르게 만남을 이어갔다. 회사 휴게실이나 계단에서 회사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깐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남자친구가 속한 부서의 소식을 김씨가 잘 알고 있다는 점과 회사에서 간혹 부딪히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주변 동료들은 둘에게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했고, 결국 몇몇 친한 동료들에게만 연애 사실을 털어놓았다. 결혼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결혼 계획은 아직 없는 시점에 서서히 소문이 퍼지자 둘은 고민에 빠졌다. 비밀이라서 더 짜릿했던 연애 감정은 이제 종종 불안감으로 엄습한다.


연애 사실을 밝힐 수 없는 대표적인 비밀 연애는 사내 연애다. 사내 연애는 회사마다 차고 넘치는 반면, 밝혀지는 경우는 드물다. 김희진씨는 “나도 사내 연애를 하고 있지만 주변에 내가 알고 있는 사내 연애만 세 커플이 넘는다”고 말한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이별을 맞은 커플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많은 수의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연애 중이라는 얘기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20대 중·후반의 남녀부터 회사 생활이 슬슬 지루해지는 30대 초·중반의 남녀에게 사내 연애는 자연스럽고도 보편적인 연애 방식이다. 회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인에게 옆자리나 옆 부서의 동료가 자연스럽게 이성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주인공 동진(감우성)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내일을 기다려지게 하는 것이 ‘어른들의 연애’인데, 내일을 기다려지게 하는 사람이 회사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설레겠는가. 연애칼럼니스트인 ‘라이너스’ 김종오씨는 “아침 출근길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즐거워지기 마련”이라며 “원할 때 볼 수 있고, 회사에서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한다.


‘스릴 만점의 데이트’는 사내 연애를 하는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재미다. 아무도 모르게 오가는 눈빛과 미소, 서로의 책상에 몰래 밀어넣는 음료수나 과자, 메신저나 휴대전화로 오가는 둘만의 대화, 회사 구석구석에서 잠시 만나 살짝 손을 잡고 지나치는 긴장감 등이 그렇다. 사내 연애를 포함해 주변인들 몰래 비밀 연애를 하는 커플의 감정이 더 깊어지는 건 두 사람만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두 사람만이 통하는 언어나 표현, 신호 등은 둘 사이에서 자극적으로 작용해 애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고, 심리적 거리를 단번에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비밀 연애는 이토록 짜릿하다.


사내 연애를 밝힐 수 없는 이유


짜릿함이 전부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비밀은 자발적 의지보다 주변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내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라는 일터에서 개인감정이 오가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 요소가 많다. 사내 연애 경험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를 비밀의 첫째 이유로 꼽는다.

회사에서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직급은 낮은 남자 직원과 사귀는 한영선(가명)씨는 “남자친구가 부하 직원이다 보니 둘의 관계가 알려지면 주변인들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며 “내 눈치를 보느라 직원들이 남자친구에게 해야 할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것 같다”고 설명한다. 한씨는 같은 사무실에서 남자 동기가 후배인 여직원과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이미 목격했다. 동료 커플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회사에 연애하러 오는 거야?” 식의 비아냥이나 둘의 사적인 부분에 관한 도가 넘은 질문이 오갔다. 회사 안에서 오가는 ‘뒷담화’식의 이야기도 사내 연애 커플에게는 쉽지 않은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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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연애는 남자 직원보다 여자 직원이 공개를 꺼린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손해를 보는 건 여자 쪽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같은 회사를 다니던 동료와 회사를 그만두고 연애를 시작해 결혼한 이미진(가명)씨는 “같은 회사를 다녔던 상황이라면 절대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회사 상사들은 이미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같은 회사 직원과 연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는 그들에게 직원도 여직원도 아닌 그냥 여자로 보일 것이 뻔하다”고 단언한다. “헤어지고 난 다음의 후폭풍이 두렵다”는 점도 사내 연애가 숨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역시 여직원에게 좀더 가혹하다. 사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면 둘의 관계도 어색해지지만, 그 연애가 ‘과거’가 되어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

사내 연애에 관한 회사의 눈총은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12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인사 담당자 750여 명을 대상으로 사내 연애에 대한 생각을 조사한 결과 61%가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찬성 이유로는 ‘직원들의 사생활 존중’ ‘직장 생활의 활력소’ ‘가족적인 분위기’ 등을 꼽았다. 반면에 반대하는 39%의 기업은 ‘사적인 문제가 업무에 이어진다’ ‘헤어진 뒤 이직률이 높다’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다’ ‘헤어지면 동료들까지 어색해진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사내 연애에 반대하는 기업 중 15.4%는 사내 연애 커플에게 인사발령 등의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밀 연애 자체가 갈등 요소가 되기도


비밀 연애는 사내 연애뿐 아니라 친구의 오빠나 여동생 등 지인의 가족과 연애를 하거나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상대를 만나는 경우에 발생한다. 비밀 연애의 짜릿함이 지나고 나면 비밀 연애 자체가 연인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기도 한다. 비밀의 무게 때문이다. 소설가 강지영씨는 “계속 주변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데이트는 남들의 눈을 피해 바퀴벌레처럼 숨어들게 되면서 연애 자체가 밝아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연애 사실을 밝힐지 말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면 서로에 대한 사랑 자체가 위험해진다. 일하며 만나게 된 사람과 사랑에 빠진 회사원 박상혁(가명)씨는 공개 여부를 두고 여자친구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여자친구에게 쏟아지는 뭇 남자들의 ‘러브콜’을 차단하기 위해 공개하고 싶었던 박씨와 사생활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여자친구는 이로 인해 몇 차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연애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때로 ‘사랑의 확인’이 되기도 한다. 힘들더라도 연애를 밝혀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여기게 되지만, 거꾸로 공개를 꺼리면 ‘이 사람이 나를 숨기고 싶어하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유부남·유부녀 등 기혼자들끼리, 혹은 기혼자와 미혼자가 연애를 할 때 비밀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다. ‘신정아 스캔들’이 터지고 8개월이 흐른 2008년 3월12일, 학력 위조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신정아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비밀은 있다. 몇 개월 동안 나는 완전히 발가벗겨졌고, 속에 있는 창자까지 모두 다 까발려졌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봄을 기다리는 초라한 여인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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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의 항변처럼 누구나 비밀은 있다. 신정아씨의 비밀은 하필 외국 명문대학의 박사학위 위조와 정부 고위 인사와의 관계라는, 선정적 제목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중에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던 부분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사랑이었다. 30대 신정아와 50대 유부남 변양균의 비밀스러운 연애는 그들이 주고받았던 전자우편까지 모조리 세상에 공개되며 ‘까발려졌다’. 그리고 또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난 3월, 신씨는 사람들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자신의 비밀에 관한 책 <4001>(사월의책 펴냄)을 내놓았다.

이 책에는 변양균과의 비밀 연애가 자세히 적혀 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둘만의 비밀 연애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신씨는 이렇게 적었다.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되면 자기는 끝장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우면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 왜 숨어서 나쁜 짓은 혼자 다 하면서 나만 이용해먹느냐고 큰소리를 냈다. 역시 힘든 사랑이었다.” 신씨가 학력 위조 의혹에 시달리다가 미국 뉴욕으로 떠났을 때에 관한 내용에도 밝혀져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똥아저씨(변양균)는 뉴욕에 도착하면 변호사 선임부터 하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매일 글을 쓰라고 했다. 단 ‘우리 두 사람 이야기만 빼고’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세상은 이들의 관계를 ‘스캔들’이나 ‘불륜’이라고 했지만 신정아씨는 “우리는 정말 ‘사랑’이라는 말, 또는 ‘불륜’이라는 말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다”고 적었다. 불륜이라는 비밀 연애는 이처럼 무겁고 복잡하다.


영원한 비밀 혹은 신중한 공개


무겁든 가볍든 비밀 연애가 갈 길은 두 가지다. 연애의 결론이 이별 아니면 결혼(혹은 계속된 만남)인 것처럼, 비밀 연애 역시 이별로 영원히 비밀이 묻혀지거나 결혼 등으로 세상에 밝혀진다. 비밀 연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면 자연스럽게 공개하라고 조언한다. 김종오씨는 “둘 사이의 친밀한 모습을 단계적으로 주위에 공개하면서 서서히 밝히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한다. 다만 사내 연애의 경우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자칫하면 둘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에 먼저 회사의 선례나 분위기를 참고하고, 되도록이면 결혼이 결정된 뒤 공개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비밀 연애로 상처받은 사람이나 이제 막 한 차례 비바람 같은 비밀 연애를 끝낸 이들에게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강지영씨는 이렇게 말한다. “비밀 연애는 그로 인해 아파도 누구에게 위로받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비밀스럽게 시작한 연애를 끝냈다면 그것으로 인해 분명 깨닫고 배우고 성장하는 게 있을 거다. 비밀 연애는 수많은 연애 중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이런 연애 한 번쯤 해도 괜찮지 않나?”




 



사내 연애를 들키지 않는 방법

연인을 우선순위에서 제외할 것, 단 직장에서만!


사내 연애가 얼마나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지 안다고 해도 상대에게 끌리는 마음을 제어할 수 없다면, 어쩌겠는가. ‘잘’ 하는 수밖에. 사내 연애에 임하는 자세, 또 사내 연애를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는 뭐가 있을까.


△직장과 직장 밖을 구분하라.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밟혀도 직장에서는 동료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연인’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한다. 대신 직장 밖에서는 ‘연인’을 오로지 ‘연인’으로만 대한다.


△아래 직급의 직원과 데이트를 할 경우에는 상대가 직속 부하가 아니거나 다른 부서에 근무하더라도 그 사실을 상사에게는 알려야 한다. 오직 당신의 직속상관에게만 이야기하라. 당신의 직급에만 공개되는 중요한 회사 정보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연인과 관련되는 결정 사항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당신의 연인이 직속상관이라면 둘 중의 한 명은 부서 이동을 요청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이다. 사랑하는 당신의 연인이 상사와 잠자리를 같이했기 때문에 승진했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공적인 동료로서 대인 거리는 서로 양손을 뻗쳐서 몸에 닿지 않는 120cm 이상이다. 120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다. 무턱대고 손을 대지 않는다. 뒤로 돌아서 어깨를 누르거나 접촉하게 되면 특별한 감정의 표현이나 섹슈얼한 행동으로 비친다. 되도록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서로 응시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야기를 들을 때 열심히 수긍하지 않는다. 상대를 보면서 열심히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횟수도 많아지게 되어 자칫 친한 사이라는 느낌이 든다. 허물없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상대와 이야기하는 방법, 앉는 방법, 말씨 등이 노출되면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 쉽다.

△함부로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늘 같은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면 편애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하고, ‘저 두사람은 수상해’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함께 휴가를 가지 않는다. 같은 날 휴가를 얻거나, 퇴근 시간을 맞추거나, 회식 중 둘이서 사라지는 것 같은 노골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참고 문헌: <처세의 심리학>(제우스 존 지음·휘닉스 펴냄), <여자 직장인 잔혹사>(임기양 지음·마젤란 펴냄),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신시아 샤피로 지음·선돌 펴냄)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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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형도 - 영국의 신좌파와 문화연구 - 이택광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목은 비단 프랑스의 이론가들에 국한해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영국의 ‘신좌파’도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정치와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장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스튜어트 홀은 <뉴레프트리뷰> 50주년 기념호에 실은 회상기에서 영국 신좌파의 탄생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홀은 신좌파의 탄생을 유발한 두 가지 사건을 지목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리쾨르에게 <정치적 역설>을 집필하게 만든 소련의 헝가리 혁명 진압이었고, 두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침공한 일이었다. 두 사건은 각각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와 영연방의 공익성에 대한 희망을 접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에게 이 사건들은 충격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 붐에 힘입어서 사회의 진보를 낙관했던 지식인들은 헝가리와 수에즈 사건을 계기로 현실사회주의국가와 복지국가 모델 모두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신좌파는 이런 회의에서 출발한 새로운 영국의 지식인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신좌파를 지칭하기 위한 시기구분은 1968년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홀은 이때 형성된 신좌파는 1956년 신좌파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홀의 지적은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후자의 의미를 되새겨보려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은 1956년 이후에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국의 신좌파는 <뉴리즈너>(New Reasoner)와 <대학좌파리뷰>(Universities and Left Review)를 각각 발간하던 세력들이 힘을 합쳐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하면서 결성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의 신좌파에게 매체 발간이 대단히 중요한 ‘활동’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체를 발간하고, ‘사회주의클럽’을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2-300명의 청중을 모아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문화적 활동’을 전개했다.

영국의 신좌파를 구성하는 세력 중 하나인 <뉴리즈너>그룹은 산업화 지역인 요크셔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저작을 남긴 E. P. 톰슨이 대표적인 참여자였다. <뉴리즈너>그룹의 특징은 인간주의로 대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대학좌파리뷰>그룹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는 젊은 학생들로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신좌파그룹에게 시급했던 것은 현실사회주의와 복지국가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길’이었다. 이 길은 곧 현실사회주의와 현실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지식인들도 프랑스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전자보다 후자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주요한 정치적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법인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의 포섭전략이 급속하게 정치사회적인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신좌파의 판단이었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전통적인 좌파의 관점을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적 부흥에 고무 받은 다양한 분석들은 마침내 분배의 문제를 복지국가나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학을 통해 완전히 해결했다는 지표를 던져주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영혁명이나 복지정책의 확대는 협동조합주의(corporatism)라는 공동체적 합의를 공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결과는 전통적인 계급관계를 침식하고, 노동계급을 부르주아화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보는 그룹과 낡은 것의 귀환으로 보는 그룹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그 배후에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아주 단순한 결론이었다. 계급과 계급투쟁은 건재한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것은 반혁명적인 것이라는 관점이 팽배했다. 장구한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당연지사이지만, 신좌파는 이런 ‘구좌파’의 의견과 팽팽하게 맞서면서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한다. 신좌파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라는 것이 모순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양가적이기 때문에 결정하기 곤란한 어떤 문화적 현상을 통해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의미했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운위되는 정치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외연 확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신좌파적인 주장은 ‘사적인 문제’와 ‘공공적인 쟁점’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변증법을 전제한다. 결국 신좌파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둘의 접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반이론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글턴처럼 알튀세르주의를 도입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홀이나 앤더슨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좌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그람시였다. 반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은 특정한 이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한다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개입해서 정치적인 것의 역동성을 포착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신좌파에게 ‘문화’라는 영역은 문화철학이나 인류학에서 다루는 특정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헤게모니의 장이었다. 신좌파는 생산력주의와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정치적인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왔던 것이다. 이 가정에서 문화는 정치적인 것이 출몰하고 갈등하는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하겠다.

물론 신좌파 중에서도 문화 분석에 대한 관점은 다양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겉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계급구조는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와, 매스미디어의 등장과 문화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같은 문화적 변동이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견해가 그것이었다. 전자는 훨씬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후자는 다소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문화적 영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대응도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소비주의에 현혹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는 장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홀의 주장처럼 실제로 수정주의처럼 보이는 이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급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새로운 사유재산 개념의 출현, 기업조직과 고용형태의 변화, 역동적인 축적체계와 소비방식이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근본적인 토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태도라고 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좌파의 입장 자체가 근원적이고 급진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임무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시대별로 우리는 숱한 ‘마르크스주의들’을 가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들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신좌파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신은 협소한 개념으로 정치를 규정하는 구좌파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일상생활 도처에 정치적인 것이 편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신좌파를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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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형도 - 이탈리아적인 차이 - 이택광 

 

현대사상의 지형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한 이탈리아일 것이다. 아감벤과 네그리를 제외하고 유럽의 사상 흐름을 논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로젠조 키에사나 알베르토 토스카노처럼 영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진이론가들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한 이론적 차이를 보이는 이들을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일한 그룹으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변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차이’를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탈리아는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지적 풍토를 드러내는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완강한 가톨릭 보수주의가 지배적인 국가에서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중심과 구별되는 온도차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최근 리-프레스 출판사에서 나온 『이탈리아적인 차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17년이나 지낸 한 여성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결심했을 때 정부와 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이탈리아는 북유럽과 상당히 다른 지배체제의 ‘권위주의’가 일상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성의 안락사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 수상 베를루스코니는 “이 여성이 아직도 젊고 생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락사를 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국가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해서 한 여성의 생명을 ‘수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아감벤의 용어인 생명정치의 ‘예외성’이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참으로 외설적으로 구현됐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아감벤의 용어에 묻어 있는 하이데거적인 엄숙함은 내파돼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정작 이탈리아에서 하이데거적 비장미를 간직한 예외적 인간 ‘호모 사케르’는 세속적 차원에서 국가와 교회에 의해 변용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외적 인간’이나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하는 이탈리아에서 지식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유럽국가와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특수성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20세기 초반 미래파의 등장부터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다른 유럽국가와 구별할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적인 것의 차이를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탈리아적인 특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들이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이탈리아 판본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적 특수성은 기 드보르가 지적했듯이, 폭력과 압제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드보르가 이탈리아를 하나의 ‘실험실’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관광엽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탈리아’(belle Italia)와 정반대의 풍경을 드보르는 발견한 셈인데, 이런 실상을 ‘실험실’로 규정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게 됐던 것이다.

이런 드보르의 문제의식은 네그리와 『제국』을 함께 집필한 마이클 하트에게도 이어진다. 하트는 탈노동자주의적인 급진이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이탈리아를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형태’가 출현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로 간주한다. 물론 이런 이탈리아의 특수성은 ‘제국’(empire)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경제적 영역에 대한 탈근대화와 사회문화적 영역에 대한 미국화라는 ‘총체적 국면’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지연당한 역사적 경험을 보편화하면서 특유의 이론들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탈리아적 예외주의야말로 이탈리아적 차이를 인준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탈리아적인 예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민족주의의 보편화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의 진행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 독일과 이탈리아를 만들어낸 결정적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적인 차이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당사자는 바로 네그리다. 그는 이탈리아의 지식계에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하이데거주의를 ‘약자의 사고’라고 지칭하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네그리는 약한 사고와 대립적인 관점에서 ‘근육질’을 갖춘 혁명적 주체성의 정치적 존재론을 역설한다. 다소 자의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강한 자의 사고와 약한 자의 사고를 구분하는 네그리의 분류법은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논쟁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네그리가 촉발한 논의는 이탈리아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친 유럽사상에 대한 점검을 요청하게 됐고, 이를 통해 ‘창조적인 차이’로서 이탈리아적인 이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유럽이론들의 백가쟁명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으로 특이한 편협성과 강력한 보편성이 마르크스주의라는 매트릭스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생생한 장면들을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네그리가 마르크스주의를 푸코나 들뢰즈의 이론과 버무려서 내놓는다면, 라보티 같은 반대자는 이런 프랑스산 이론이야말로 ‘약한 자의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프랑스산 이론에 대한 비판은 이탈리아적인 이론의 변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맥이 닿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네그리는 이런 하이데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바티모나 아감벤이 하이데거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하이데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아감벤은 역설적으로 약한 자의 사고에 대한 비판을 비켜가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감벤은 토종 이탈리아 이론가들에게 비판적인 검토 대상인 프랑스산 이론에 누구보다 경도돼 있는 이론가이고, 하이데거주의는 물론 푸코의 생명정치와 통치성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아감벤은 강자의 사고를 주창하는 네그리와 달리 약자의 사고를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서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예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네그리의 파리 망명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80년대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반동의 시기였다. 한국에서 광주가 그랬듯이, 권력에 의한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고, 이에 따라서 ‘약한자의 사고’가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경유해서 보완되고 풍부해진 프랑스산 이론들은 이런 이탈리아적 특수성을 보편화하기 위한 ‘외부적’ 관점을 제공했다. 넓게 본다면, 아감벤도 이런 이탈리아적 조건에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오늘날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은 민족적인 특이성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보편성의 구현이라는 ‘이론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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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상지형도 - 비서구적 이론의 가능성 - 이택광

 

우리에게 언제나 서양사상은 ‘첨단의 노래’였다. 김수영이「서시」에서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이라고 썼을 때부터, 서양사상의 수입에 대한 반성은 진지하게 제기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고, 근대적 세계관을 특징화하는 과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실천의 구체성이고, 들뢰즈의 말처럼, ‘영토’라는 터전이다.

영토는 사유이미지를 터 잡아주는 경계이자 토대이다. 따라서 서구사상과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이론에 대한 모색은 여러 인문학적 작업 중에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기보다, 인문학 자체를 규정하는 근본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인문학은 ‘수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을 일러 ‘백인 남성의 것’이라고 지칭했을 때, 인류사를 형성해온 사상의 지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논리에 근거해서, 바타이유처럼, 동양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기술할 수 있는 현대적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이런 발언에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내재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구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서양사상의 언어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동양이라는 ‘타자’를 설득시키지 않는 한, 서양사상은 ‘전 지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체제적 양분에 따른 역사적 경험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줬고, 이 와중에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서양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체계와 다른 가치들에 대한 관심들이 중요한 인문학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에 타개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7.16~2009.6.18)의 작업들은 자본주의의 소내로서 중국의 사회주의를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서양의 타자’에서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국면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해왔던 사상이나 이론의 ‘이동’과정에 대한 습관적 인식을 수정해야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처럼 무조건 서구가 최신의 이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비서구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론의 이동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역전현상은 단순하게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다기보다는, 비서구적 영토에 근거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눈에 띄고 있는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의 작업들은 단순하게 서구의 이론을 중국과 일본 사회를 위한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서구의 근대성에 근거한 이론적 탐색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사유가 구성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은 서구사상의 말석을 차지한다기보다, 그 사상전개의 첨단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사상의 지도에 보탠 가라타니 고진의 행보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기점들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한국 사상계에서 감춰진 기원이었던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와 연계해서 마르크스를 읽어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에서 붐을 이뤘던 탈근대이론의 수입에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마르크스와 칸트를 일본의 문맥에 맞춰서 새롭게 읽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단순하게 ‘텍스트 다시 읽기’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서양사상에서 제기하는 가치들의 문제를 재점검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트랜스크리틱』이 탈근대이론의 문제점을 넘어선 이론적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윤리21』은 이런 서양의 고전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고자 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고베 시 중학생 사건에서 ‘연소자’ 범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지 않고, ‘부모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가라타니 고진은 지적하고 있다. 사건을 저지른 부모가 사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 사회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양적 가치체계를 호소하는 ‘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무시하고 사죄에 응하는 정치가를 규탄하는 신문일수록 부모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애당초 이 사람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로 복귀한다. 선악의 기준을 부여할 사회가 부재할 때, 아니 설령 사회가 있더라도, 그 사회가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떻게 윤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을 ‘자유’로 간주한’ 칸트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부의 도덕이 곧 외부의 자유를 보증해주는 것이 될 수 있는 경우를 가라타니 고진은 비서구의 근대화에 필요한 윤리라고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다른 관점이긴 하지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왕후이는 서구근대화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 천착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왕후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동양과 서양을 구분했던 과거의 분류체계를 함께 아우르기 위해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중요한 이론적 교두보로 확보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통해 수행하고자 했던 목적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왕후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다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중국의 사상사를 파고 들어간다. 이를 통해 왕후이는 서구 근대화의 ‘거울상’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문제를 거론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서, 비서구적 근대성의 모델을 중국의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왕후이는 신좌파의 대표주자로서 중국 내에서 끊임없이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해온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 중국 지식계에서 그의 존재는 이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얼마 전에 그동안 집필한 글들을 모아서 『혁명의 종언: 중국과 근대성의 한계』라는 책을 영국의 버소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함으로써 서구사상사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저는 중국에서 나온 『중국근대사상의 흥기』이고, 이 작업에서 왕후이는 유럽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본주의에 가장 근접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의문점들을 해소시킬 야심찬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왕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침묵에 빠진 한국의 지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진석 교수는 언젠가 한국은 ‘이론 생산’에 실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실천의 맥락을 찾아 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로 이런 실패의 지점에 세계사상의 흐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론 생산의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굳이 ‘한국적’이라고 불러야할 이유는 없겠지만, 여하튼 김진석 교수가 예측했던 그 지점보다 세계사상사의 지도가 훨씬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흥미진진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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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글을 또 옮겨 온다.  

주어진 것으로서 '있는' 사유의 샛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 

<이택광의 세계사상 지도 읽기2> - 프랑스 철학과 내재성 탐색

프랑스철학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이제 ‘철학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프랑스에서 프랑스산 철학이 반드시 환영을 받는 건 아니다. 현실의 프랑스인들을 만나서 듣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보수주의 쪽에 가깝게 위치시켜야할 것 같다. 한국처럼 프랑스에서도 지식인에 대한 ‘단죄’는 여지없이 일어난다. 마치 친일파 문제처럼 프랑스를 지배하는 정서는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는데, 발리바르가 슈미트를 복권시킨 뒤에 친나치적인 철학자로 비난을 감수해야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이해해야 프랑스산 이론들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짐작하게 해주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사르트르이다. 그는 프랑스에 하이데거주의를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했고,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의 진리를 문학에 위임해버리는 ‘시적 봉합’을 앞서서 실천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사르트르에 대한 프랑스사회의 반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알제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파트에 폭탄테러가 가해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상황을 짐작할 만할 하다.


   
     

오늘날 우리가 고찰해야할 이론적 지형도의 한 구석에 사르트르가 위치해야할 이유는 명확하다. 실존주의보다도 삶의 방식으로 프랑스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방인의 이미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유들이 출발했다. 사르트르는 고향집에 남겨놓고 온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들뢰즈도, 바디우도 젊은 시절에 모두 ‘사르트리언’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이론가로 라캉이 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와 결별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휴머니즘’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이 낡은 시계를 다시 찾아냈을 때, 들뢰즈는 분노에 차서 비판을 가했다.


이 들뢰즈야말로 프랑스의 작가 투르니에가 한때 ‘반체계의 악마’라고 묘사했던 젊은 들뢰즈이다. 사르트르에 대항해서 반휴머니즘은 이후 프랑스산 이론에서 밀교적 표지로 통한다. 헤겔을 밀어내면서 스피노자가 부상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변방에서 날아온 영악한 자객 지젝은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적 지형도에서 틈새시장을 탁월하게 공략했다. 스피노자가 올라선 봉우리에서 헤겔을 이야기하고, 알튀세르의 유령이 출몰하는 곳에서 라캉을 들이민다. 물론 숨은 지젝의 라이벌은 바디우이지만, 이 사실은 종종 커다란 바디우의 덩치 때문에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사르트르와 라캉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우호적 관계는 아마도 두 ‘별종들’이 보여준 주체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젊은 들뢰즈가 비판했듯이, 일방적으로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르트르는 주체에 대해 라캉과 비슷한 반휴머니즘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체는 허상이지만 폐기할 수 없는 범주라는 공통지반에 이들은 서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르트르도 라캉처럼 데카르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출발시킨다.

라캉과 사르트르의 ‘주체의 해체’


라캉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통찰은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판본과 거울상을 이룬다. 물론 사르트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생각’ 이외의 존재방식 즉 감정, 상상력, 감각, 꿈같은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 없는 주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휴머니스트처럼 보이지만 라캉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빗대어 말했던 놀랄만한 반휴머니즘의 ‘교육자’였고, 레비스트로스나 푸코와 마찬가지로 현대철학사상의 창시자들 중 하나로 간주됐다. 라캉의 세례는 강렬해서 1960년대 반휴머니즘의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킨 계기들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물론 완전히 라캉에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라캉 역시 『세미나 11: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에서 사르트르에 대한 찬사를 헌정하고 있다. 특히 시선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시선을 대상소타자와 관련해서 이론화한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사르트르와 라캉의 현전성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말년에 들을 수 있었던 푸코의 고백에 오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사르트르를 일컬어 ‘침묵의 미소’로만 반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푸코는 사르트르에 대한 외경을 한꺼풀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푸코 역시 사르트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르트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통속적 사유로 철학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푸코를 공격하면서 푸코가 내세운 탈마르크스화가 허망한 ‘부르주아의 방어벽’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마침내 ‘주어진 시대의 순간에 생산되는 주체’로 관심을 돌렸을 때, 하나의 결정적 문제를 사르트르와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대적 진보와 실천, 그리고 사건의 결과로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투에서 사르트르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푸코의 발언은 앞으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주체화’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sujectivation)라는 명제는 ‘나의 세분화’라는 사르트르의 기획에서 핵심적인 범주였고, 이 또한 철학에 대한 라캉의 공헌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이론들이 사르트르와 라캉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거인의 영향력을 빼놓고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들뢰즈가 익히 사르트르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디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학생시절 똑똑하긴 한데 너무 사르트르 흉내를 낸다는 지적을 받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는 클레르 파르네와 나눈 대화에서 “다행히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고백을 쏟아놓는다. 사르트르야말로 그의 세대를 지탱시켜준 ‘외부’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외부라는 것은 사유된 것을 통해 사유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증언에 따르면 들뢰즈는 사르트르를 ‘마지막 철학자’로 불렀다. 20세기가 사르트르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들뢰즈의 시대가 될 수 있었다는 레비의 지적은 그래서 상당히 설득력 있다.

들뢰즈와 모든 사유의 출발점, 생명


사르트르와 라캉이 제시한 것들은 공고한 환상으로 존재했던 주체의 해체였다.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보다 훨씬 많이 나아간 이론가였다. 사르트르를 일컬어 외부라고 한 것은 데카르트, 후설, 사르트르, 그리고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지형도에 비견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메를로 퐁티로 흘러내리는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다. 퐁티는 들뢰즈와 같은 지세에서 무기적 사물과 융합돼 있는 생명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에게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허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고정점을 만들어낸 주체라기보다 주체화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 시급했던 것은 주체라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성에 대한 탐구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내재성은 생각보다 그렇게 ‘내재’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는 하나의 차원, 바로 생명 자체이다. 메를로 퐁티에게나 들뢰즈에게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은 무기체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주체화를 사물의 융합과 섞어버린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은 주체화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이들에게 주체화는 ‘~인양 굴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거기 사유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주어진 것(es gibt)으로서 ‘있는’ 사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가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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