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글을 또 옮겨 온다.  

주어진 것으로서 '있는' 사유의 샛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 

<이택광의 세계사상 지도 읽기2> - 프랑스 철학과 내재성 탐색

프랑스철학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이제 ‘철학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프랑스에서 프랑스산 철학이 반드시 환영을 받는 건 아니다. 현실의 프랑스인들을 만나서 듣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보수주의 쪽에 가깝게 위치시켜야할 것 같다. 한국처럼 프랑스에서도 지식인에 대한 ‘단죄’는 여지없이 일어난다. 마치 친일파 문제처럼 프랑스를 지배하는 정서는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는데, 발리바르가 슈미트를 복권시킨 뒤에 친나치적인 철학자로 비난을 감수해야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이해해야 프랑스산 이론들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짐작하게 해주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사르트르이다. 그는 프랑스에 하이데거주의를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했고,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의 진리를 문학에 위임해버리는 ‘시적 봉합’을 앞서서 실천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사르트르에 대한 프랑스사회의 반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알제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파트에 폭탄테러가 가해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상황을 짐작할 만할 하다.


   
     

오늘날 우리가 고찰해야할 이론적 지형도의 한 구석에 사르트르가 위치해야할 이유는 명확하다. 실존주의보다도 삶의 방식으로 프랑스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방인의 이미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유들이 출발했다. 사르트르는 고향집에 남겨놓고 온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들뢰즈도, 바디우도 젊은 시절에 모두 ‘사르트리언’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이론가로 라캉이 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와 결별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휴머니즘’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이 낡은 시계를 다시 찾아냈을 때, 들뢰즈는 분노에 차서 비판을 가했다.


이 들뢰즈야말로 프랑스의 작가 투르니에가 한때 ‘반체계의 악마’라고 묘사했던 젊은 들뢰즈이다. 사르트르에 대항해서 반휴머니즘은 이후 프랑스산 이론에서 밀교적 표지로 통한다. 헤겔을 밀어내면서 스피노자가 부상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변방에서 날아온 영악한 자객 지젝은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적 지형도에서 틈새시장을 탁월하게 공략했다. 스피노자가 올라선 봉우리에서 헤겔을 이야기하고, 알튀세르의 유령이 출몰하는 곳에서 라캉을 들이민다. 물론 숨은 지젝의 라이벌은 바디우이지만, 이 사실은 종종 커다란 바디우의 덩치 때문에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사르트르와 라캉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우호적 관계는 아마도 두 ‘별종들’이 보여준 주체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젊은 들뢰즈가 비판했듯이, 일방적으로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르트르는 주체에 대해 라캉과 비슷한 반휴머니즘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체는 허상이지만 폐기할 수 없는 범주라는 공통지반에 이들은 서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르트르도 라캉처럼 데카르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출발시킨다.

라캉과 사르트르의 ‘주체의 해체’


라캉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통찰은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판본과 거울상을 이룬다. 물론 사르트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생각’ 이외의 존재방식 즉 감정, 상상력, 감각, 꿈같은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 없는 주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휴머니스트처럼 보이지만 라캉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빗대어 말했던 놀랄만한 반휴머니즘의 ‘교육자’였고, 레비스트로스나 푸코와 마찬가지로 현대철학사상의 창시자들 중 하나로 간주됐다. 라캉의 세례는 강렬해서 1960년대 반휴머니즘의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킨 계기들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물론 완전히 라캉에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라캉 역시 『세미나 11: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에서 사르트르에 대한 찬사를 헌정하고 있다. 특히 시선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시선을 대상소타자와 관련해서 이론화한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사르트르와 라캉의 현전성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말년에 들을 수 있었던 푸코의 고백에 오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사르트르를 일컬어 ‘침묵의 미소’로만 반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푸코는 사르트르에 대한 외경을 한꺼풀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푸코 역시 사르트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르트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통속적 사유로 철학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푸코를 공격하면서 푸코가 내세운 탈마르크스화가 허망한 ‘부르주아의 방어벽’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마침내 ‘주어진 시대의 순간에 생산되는 주체’로 관심을 돌렸을 때, 하나의 결정적 문제를 사르트르와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대적 진보와 실천, 그리고 사건의 결과로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투에서 사르트르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푸코의 발언은 앞으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주체화’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sujectivation)라는 명제는 ‘나의 세분화’라는 사르트르의 기획에서 핵심적인 범주였고, 이 또한 철학에 대한 라캉의 공헌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이론들이 사르트르와 라캉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거인의 영향력을 빼놓고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들뢰즈가 익히 사르트르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디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학생시절 똑똑하긴 한데 너무 사르트르 흉내를 낸다는 지적을 받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는 클레르 파르네와 나눈 대화에서 “다행히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고백을 쏟아놓는다. 사르트르야말로 그의 세대를 지탱시켜준 ‘외부’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외부라는 것은 사유된 것을 통해 사유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증언에 따르면 들뢰즈는 사르트르를 ‘마지막 철학자’로 불렀다. 20세기가 사르트르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들뢰즈의 시대가 될 수 있었다는 레비의 지적은 그래서 상당히 설득력 있다.

들뢰즈와 모든 사유의 출발점, 생명


사르트르와 라캉이 제시한 것들은 공고한 환상으로 존재했던 주체의 해체였다.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보다 훨씬 많이 나아간 이론가였다. 사르트르를 일컬어 외부라고 한 것은 데카르트, 후설, 사르트르, 그리고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지형도에 비견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메를로 퐁티로 흘러내리는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다. 퐁티는 들뢰즈와 같은 지세에서 무기적 사물과 융합돼 있는 생명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에게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허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고정점을 만들어낸 주체라기보다 주체화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 시급했던 것은 주체라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성에 대한 탐구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내재성은 생각보다 그렇게 ‘내재’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는 하나의 차원, 바로 생명 자체이다. 메를로 퐁티에게나 들뢰즈에게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은 무기체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주체화를 사물의 융합과 섞어버린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은 주체화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이들에게 주체화는 ‘~인양 굴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거기 사유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주어진 것(es gibt)으로서 ‘있는’ 사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가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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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연재하는 이택광의 글이다.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나오는 물줄기들 … 슈미트와 아렌트 또는 ‘적대’와 ‘협의’  

[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3>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 

 

오늘날 인기어가 돼버린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칼 슈미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독일어인 ‘das Politische’를 불어인 ‘le politique’로 옮기고, 이것을 다시 영어로 옮긴 것이 ‘the political’이다. 이 말을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글자만 놓고 본다면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하기 모호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1932년에 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슈미트의 책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다른 사회적 영역과 구별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적과 아’라는 구체적 분별에 정치적인 것의 특이성을 위치시킨다. 윤리적 영역에서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하고, 미학적 영역에서 미와 추가 대립하고, 경제적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이 대립하듯이, 정치적인 것에서도 적과 아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객관적 본성이나 자율성으로 인해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화와 범주화가 가장 강력하게 부딪히는 그 긴장의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은 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른 영역에 비해 특권적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우선성을 갖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슈미트는 이런 정치의 특권성을 설명하기 위해 전쟁을 예로 든다. 전쟁은 사회적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극단적인 비상사태를 의미한다. 이 비상사태의 국면에서 모든 것은 ‘적과 아’라는 정치적인 것의 긴장관계로 복속된다. 기존의 공동체를 구성했던 원칙들은 돌연 ‘적대’라는 분열을 통해 해체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협소하게 정치의 영역에 묶어 놓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정치철학의 서막을 새롭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발명은 단순하게 ‘정치’라는 명사형을 ‘정치적인’이라는 형용사로 바꾼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슈미트는 특정한 제도적 장치에 정치적인 현상을 묶어놓지 않을 수 있는 방도를 제공했다. 정치적인 것을 고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편재하는 ‘장’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슈미트의 공인 것이다.


정치에 대한 슈미트의 재정식화는 리쾨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리쾨르는 정치라는 것이 위대한 ‘위기’의 순간에 오직 존재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 위기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전환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 서구 지식인 사회에 가져온 파장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중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직면해서 리쾨르가 『정치적 역설』을 집필했을 때,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현실사회주의라고 불리던 ‘국가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정치를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역사의 전환기와 새로운 정치의 개념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리쾨르는 구체적인 정치적 합리성과 정치적 악마성을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내장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는 경제로부터 정치의 영역을 분리해냈다. 경제나 정치 모두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각각의 합리성은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기획은 경제결정론에 경도돼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리쾨르는 경제적 영역과 대립하는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헝가리 사태가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지위를 복권할 기회로 비쳐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정치와 다른 것으로 개념화한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리쾨르가 말하는 ‘역설’이라는 것은 결국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 더 나아가서 갈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갈등의 원인을 리쾨르는 정치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리쾨르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계급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관계를 지칭하고, 정치는 정치적 권력의 악마성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권력의 악마성은 ‘경제적 소외’로 환원해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이런 권력의 악마성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경제적 소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었다.


리쾨르의 용어법에서 정치적인 것은 권력에 대립적인 ‘살아있는 관계’이자, 동시에 악마적인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떻게 말하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를 작동하게 만드는 엔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구분법에 따르자면, 정치적인 것은 ‘정체’(polity)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정치는 정책을 만들거나 결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은 합리적인 일치의 구현체이고, 정치는 권력의 국면이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빚어낸다.


이후에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성’을 입법의 문제로 좀 더 구체화하지만, 초기에 정립한 분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은 헌법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한 합리적이라는 것이 리쾨르의 생각이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와 대립하지만,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상대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리쾨르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역설’이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설은 서로 다른 믿음이 ‘나란히’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선구적이지만 단순한 리쾨르의 접근


이처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리쾨르의 정의는 선구적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그의 개념화에서 핵심적인 것은 경제적인 합리성에 대해 정치적인 합리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런 방식은 초기 프랑스 이론에서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리쾨르의 용어법은 한나 아렌트와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용어의 계보학에서 아렌트는 프랑스적 맥락과 다른 위치에서 정치적인 것을 정의한 이론가이다. 정치적인 것의 정의에 있어서 아렌트는 슈미트와 다르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을 자유의 공간이라고 파악했는데, 이런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권력의 공간으로 파악했던 슈미트와 일정하게 다른 관점이다.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적대와 갈등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렌트에게 이 공간은 공적인 협의를 보장하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는 이론들이 아렌트적인 관점과 슈미트적 관점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렌트와 슈미트라는 물줄기를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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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워킹푸어] '노동권 사각지대' 농어업 이주노동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인구의 2.2%에 달하는 수치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은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결과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흐름 못지 않게 국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이동도 늘었다. 외국인들은 노동자, 결혼상대, 외국어 강사, 엔터네이너 등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다. 이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소위 '3D'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1991년 산업연수생 제도 도입된 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한국사회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문제로 떠오르자, 2004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됐다. 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도 침체에 빠지면서 노동시장의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은 더욱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다. 네팔에 살면서 평생 바다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시얌(35. 가명) 씨와 마가르(37. 가명) 씨는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건너와 어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지난 5-6개월의 한국 생활은 생전 처음 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못지않게 낯설고 두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1920년대 일본 어업노동자들의 끔직한 노동 현실을 담아 최근 뒤늦게 화제를 모았던 <게공선>의 주인공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최근 천안함 수색을 돕던 금양호 선원들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어선 선원들의 열악한 생활이 알려졌다. 힘겨운 노동과 열악한 보수로 선원들을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 '빈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뉴시스

어업비자로 들어온 이주노동자, 한국판 '게공선'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각각 작년 10월과 11월에 고용허가제(EPS)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조업 비자가 아닌 어업 비자를 받았다. 그래서 공장이 아니라 충남 대천의 한 고기잡이배에 선원으로 취직했다. 시얌 씨가 입국할 때는 71명 중 2명이 어업비자로 입국했고, 마가르 씨가 입국할 때는 106명 중 7명이 어업비자로 들어왔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주위에서 한국이 좋다고 들었어요. 또 한국에 오기 전 두바이에서 2005년부터 2년간 호텔 종업원으로 일했어요. EPS 시험을 볼 때 서비스업종으로도 올 수 있다고 들어서 한국을 선택했죠. 말레이시아 등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경제수준도 높으니까 대우도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네팔에서는 보험회사에 다니던 시얌 씨는 한국에서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1지망 서비스업, 2지망 제조업, 3지망 어업, 4지망 농업을 적어냈다. 네팔에서 가구공장을 하고 있던 마가르 씨는 한국에서 연관된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왔다. 하지만 그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어업노동자로 일하게 됐다.

이들은 한 어선에서 한국인 선원 3명과 함께 일했다. 새벽 3-4시에 바다에 나가 일찍 돌아오면 오후 2시, 늦게 돌아오면 저녁 7시까지 있었다. 하루 평균 14시간 정도 일했다. 휴일은 따로 없었다. 한달 내내 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날씨가 안 좋아 조업이 불가능한 날이 휴일이었다. 하지만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육지에 있을 때는 고기잡이 그물을 손보는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작업복만 입고 맞는 칼바람도 큰 고통 중 하나였다. 이들이 일한 배는 9월부터 12월까지는 멸치를 잡고, 1월부터 지금까지는 꽃게를 잡았다. 꽃게철이 지나면 오징어, 물메기 등을 잡는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휴식 시간은 따로 없었다. 끊임없이 그물을 던지고 잡힌 고기로 묵직해진 그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수십킬로그램의 그물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평지에 비해 몇 배 더 고된 일이었다. 자칫 그물의 무게에 중심을 잃고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실제 고기잡이 배에서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마가르 씨는 그물을 끌어올리다가 그물추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30분 정도 의식을 잃은 일이 있었다. 시얌 씨도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쿵'하는 충격에 갑판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진 적이 있다.

그물을 올리는 속도가 빨라지면 휴식은커녕 끼니를 때울 시간조차 없었다. 배에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에 속했다. 선장의 기분과 날씨와 조업 속도, 이 삼박자가 갖춰져야 라면을 먹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날엔 생으로 굶거나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일이 거친 만큼 사람들도 거칠었다. 욕을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뱃일에 익숙한 한국인 동료들에 비해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체력도, 체격도 형편없이 뒤졌다. 파도가 거세지면 일하는 이들의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시얌 씨가 작은 실수를 하자 한국인 동료는 그의 멱살을 잡고 배의 가장자리로 끌고 가 "이대로 바다에 밀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출렁이는 배 안에서 그의 목숨도 출렁이는 것 같았다. 마음은 철렁 가라앉았다.

"그 순간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왜 낯선 한국 땅에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서글퍼졌어요. 한국인들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네팔인에게 한국음식 못 한다 타박하는 한국인 동료들

육지에서 생활도 선상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등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 '과욋일'을 해야 했다. 바로 한국인 동료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일이다.두 사람은 항구 근처의 여인숙에 묵었다. 선장은 방 2개를 잡아 하나는 이들 둘과 한국인 두 명, 다른 하나는 고참 한국인 선원 한명이 쓰도록 했다. 육지에 있을 때 식사는 선장이 장을 봐다 주면 직접 요리를 해서 먹었다. 당연히 한국음식이었다. 익숙지 않은 한국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더 힘든 것은 한국음식을 만들어 한국인 동료들에게 바쳐야 하는 일이었다. 동료들은 식사와 설거지 등 귀찮은 일은 이들에게 미뤘다. 네팔인들이 한국음식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얌 씨와 마가르 씨에겐 또 한번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 달을 일하고 두 사람이 받는 월급은 90만 원.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시간당 4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다 받지 못했다. 시얌 씨는 2번, 마가르 씨는 1번 밖에 월급을 받지 못했다. 올해 최저임금이 올라 92만8000원을 받아야 하는데, 작년 이후로는 월급을 받지 못해 법정 최저임금이 오른 것도 몰랐다. 한국인 선원들은 똑같은 일을 하고 한 달에 300만 원을 받았다. 그래도 일이 힘들어 한두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일을 그만뒀다.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선장이 임금을 주지 않으니까 아이들 학비도 제때 못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달 전에는 부인이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게 돼서 밀린 월급을 달라고 선장에게 얘기하니까 '내일 준다, 모레 준다' 하면서 지금까지도 안 주고 있어요. 선장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못 믿겠어요." (마가르 씨)

"한국에 올 때 EPS 시험도 치고 정식절차를 다 밟고 노동자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한텐 외국인등록증도 없고, 여권도 없어요.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난민이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시암 씨)

▲ ⓒ이주노조

"월급이나 제때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업비자로 입국한 이들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어업 밖에 없다. 지난 2005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업종 변경을 금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비자로 입국한 노동자들은 제조업 공장에 취업할 수 없다.

또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3회로 제한하고 있고 변경 사유도 고용주의 고용계약해지 및 갱신 거절, 회사의 휴폐업, 상해.산재 등 회사의 귀책사유가 분명할 때로 국한된다. 노동자가 원해서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근로 계약 갱신 거절'로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나 가능하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의 앞날이 막막한 것도 이처럼 일방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고용허가제 때문이다. 선장이 순순히 계약해지신고서에 사인을 해줘야 당장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데, 선장은 사인을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임금체불이라는 고용주의 귀책사유가 있더라도 노동부 직권으로 사업장 변경을 승인해주려면 다음달 15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돈도 없고, 당장 머물 숙소도 없는 이들이 한 달 동안 일하지 않고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회사를 그만두면 사장이 밀린 임금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

"우선 밀린 임금을 빨리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일은 힘들어도 월급이 제때 나오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의 바람이다.고용허가제의 취업기간인 3년이 끝난 뒤 네팔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재취업이 가능한 3년 동안 한국에 더 머물고 싶은지 묻자 시얌 씨는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네팔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음지의, 음지의, 농어촌 이주노동자

1996년 여름 일어났던 '페스카마호' 사건. 6명의 중국동포 선원이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 등 1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선상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포 6명은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인은 우리 보고 개라 부르고 마누라 보고는 암캐라 부릅니다.…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나며, 선원의 인권과 건강을 해쳤습니다. 음식 배불리 못 먹고, 눈칫밥,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텅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1996년 10월 1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중)

고용허가제 이전에도 산업연수생제도로 수산업협동조합을 통해 외국인 선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선원법'을 적용받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현재도 20톤 이상의 대형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들어온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처럼 20톤 이하의 연근해 어선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다.

노동부 외국인력정책과 관계자는 "지난해 농축산업으로 1000명, 어업으로 100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힘든 일에 비해 보수가 적어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농축산업, 어업 쪽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를 이유로 제조업으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 규모를 대폭 줄였지만, 농축산업과 어업 규모는 유지하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제조업, 농축산업, 어업,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들어오는데, 본국에서 친 한국어시험 결과에 따라 업종이 나뉜다. 제조업이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건설, 농축산업, 어업은 커트라인이 더 낮다.농어촌의 이주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시얌과 마가르 씨는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했지만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한 법정 최저임금만을 받았다. 시간외수당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 휴일도 보장받자 못했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할 것들을 이들은 보장받지 못했다. 농축수산업이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는 등 근로시간이 불규칙하다는 이유로 시간외 수당과 휴일, 휴계 적용 등을 예외로 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63조 1,2호 때문이다.

정영섭 이주자노동조합 사무처장은 "농축수산업에 대한 예외조항을 고용주들이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보니 제조업은 사업장 이탈률이 6.9%인데 반해 농어업은 15.9%로 2배 이상이다"고 말했다.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농장의 경우 겨울철 등 농한기에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장을 3번 이상 옮길 경우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데,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엔 사업주의 일방적인 해고로 원치 않게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외 근무 수당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2008년말 기준으로 국내 취업 중인 이주노동자는 70만 명에 이른다. 국내 총 취업자의 3%로 1991년 이후 12배 증가했다. 이들 중 체류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는 전체 이주노동자의 73.5%인 51만934명이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8만4377명이다.

이들의 절대 다수인 94.9%(66만83명)가 단순기능직 노동자로 일하며, 교수, 어학강사, 연예인 등 전문기술인력 이주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체류 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 중에는 방문취업제로 취업 중인 재외동포가 절반 가량인 29만8003명, 나머지가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파키스탄, 네팔 등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 이주노동자(15만6429명)들이다. 현재 한국과 인력도입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송출국가는 15개국이다.

이주노동자들의 88.9%가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고, 나머지는 농축산업, 건설업 등에서 일하고 있다. 1만5000여 명 정도가 농어촌이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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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연재기사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는 주로 '인권'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어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의 행태가 중심이었다 


그런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했던 청소년들이다. 가난은 단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때로 그 청소년의 가정을 통째로 부숴버리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잔인함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동·청소년 가운데 최저 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층은 7.8%였고 상대빈곤층은 11.5%였다. 전체 청소년의 87%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반해, 빈곤 아동·청소년 가운데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됐다.

당연히 그들 중 많은 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그들은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 있지만,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빈곤 청소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흉터 가득한 두 팔…"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따져보고 싶었어요"

스물한 살 지은(가명, 21)이의 양 팔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가득했다. 사는 것이 힘에 겨울 때마다 스스로 만든 상처였다. 지은이는 양 팔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그 흉터들을 보여주며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또 언제 나를 버릴까. 내가 또 버려지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초조할 때면 자살 시도를 했어요."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지은이는 마음의 아픔을 잊었다고 털어놨다. 살기 위해 지은이는 스스로의 몸에 손을 댔던 셈이다. 그때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세상을 정말 많이 원망"하면서. 지은이의 그런 몸부림은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아빠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에게 하나하나 따져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나 이런 핍박을 받고 자라나게 했는지. 나는 왜 저런 부모 밑에 태어나지 못한 건지. 엄마한테도 '이렇게 괴롭힐 거면 나를 왜 낳았냐'고 독한 말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얘기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학대했던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서 엄마한테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엄마는 늘 '미안하다'고만 했지만."

그러면서 지은은 웃었다. 지은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가진 맑은 웃음을 비로소 되찾은 것은 부모로부터 떨어진 후였다. 아니 정확히는 열네 살에 집을 나와 열여섯에 공동체가정, 그룹 홈(group home)을 만나면서 웃을 줄 알게 되었다.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친구들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어느덧 3학년 최고참이다. 50~60대의 나이 많은 '반 친구'들에게는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기도 하다. 지은이 곧잘 "명자 씨, 옥순 씨"하고 부른다는 '늙은' 반 친구들은 부탁하지도 않은 '대출(대리출석)'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공동체가정을 통해 배우고 싶던 것들도 많이 배웠고, 요즘은 대안학교 하자센터 내의 사회적 기업이 지원하는 '영 셰프 요리학교'도 다니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반짝이고, 좋아했던 사람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촉촉해지는 것은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사람에게 받았던, 미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상처는 여전히 지은을 괴롭히고 있다.


▲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연관 없습니다) ⓒ연합뉴스

"아빠와 양오빠의 폭력…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다니던 학교를 뛰쳐나온 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물론 속해 있던 필드하키팀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하지만 결정적 계기는 아빠였단다.

"그날 학교를 안 갔는데 친구들이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난 거예요. '너희 아빠 때문에 선생님이 오열하고 난리가 났다'면서. 아빠가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하고 교장 선생님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대요. 필드하키부 없어지고 나서였어요. 선생님들한테 '너희가 뭔 상관이냐'고 막 소리쳤다대요. 다음날 학교 가니까 소문이 쫙 퍼졌더라고요. '쟤네 아빠 조폭이라더라. 새 아빠라더라.' 하루 사이에 걷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지은은 그날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왔다. 자궁암에 걸린 엄마의 치료비와 약값 때문에 어차피 돈도 벌어야했다. 이미 그 전부터 학교가 끝난 4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지은은 '알바 전선'에 뛰어들었다. 핸드폰 고리를 만드는 공장 등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라면 거의 전국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지은이 어릴 때부터 수시로 가정 폭력을 행사했다. 엄마 뿐 아니라 어린 지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생활비도 벌어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지은은 "아빠는 돈을 벌어도 늘 자기 혼자 썼지 집에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심지어 자궁암 진단을 받은 엄마의 수술비도 아빠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니, 엄마에게 돈을 오히려 달라고 하고 "돈 없다"고 하면 또 때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빠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긴 엄마나 지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은은 "엄마에게도 애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자라서 더 그런지도 몰라요. 어릴 때 엄마 젖을 빨아 본 적이 없어요. 만져본 적도 없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셨지만 눈치도 보이고 늘 외롭게 자랐죠. 유일한 친구가 외갓집에서 키운 삽살개였어요."

"기숙사에 살기 위해 들어간 필드하키부"

복잡한 집안 사정 탓에 지은에게는 큰 아버지의 아들이 호적상 오빠로 올라 있다. 지은은 "엄마는 걔를 키우느라고 사실상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딸을 낳고 돌아온 며느리를 마당에서 걷어찼대요. 그래서 엄마가 더 걔한테 집착했는지도 모르죠. 엄마가 얼마나 나한테 관심이 없었냐면 내가 자해하는 것도 몰랐어요, 엄마는."

지은의 학교 준비물은 돈이 없다며 안 사줬던 엄마는 '오빠'의 생일날 친구들을 불러 피자치킨을 한 상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지은에게 '아빠'와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걔는 너무 싫어요. 어떻게 보면 나랑 엄마를 매일 때리고 학대했던 아빠보다 더요. 아빠 엄마가 집에 없으면 걔가 나를 때렸거든요. 걔가 컴퓨터 중독인데 게임하다가 자기 캐릭터가 죽거나 그러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한테 와서 나를 발로 차고 때려요. 화장실 변기에 내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고."

지은의 자리는 그 집안에 없었다. 지은은 "네 식구 가운데 아빠도 나를 때리고, 엄마는 아빠한테 맞은 화풀이를 나한테 하고, 오빠란 사람도 나를 때렸다. 이 집안에서 나는 살 수가 없었다"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즈음에 지은이 필드하키라는 여자에게는 힘겨운 운동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면서 기숙사에서 살거든요. 집에 갈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했어요. 아, 또 하나 있다. 필드하키를 하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고기가 먹고 싶어서 들어간 것도 있어요. 이런 얘기는 창피해서 처음 하는 거예요."

물론 필드하키부 역시 쉬운 곳은 아니었다. '군기'라는 이름으로 선배들도 코치도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곳이 지은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랬던 필드하키부는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해체됐다. 지원을 받기 힘든 비인기종목인 탓이 컸다.

지은에게는 부상으로 십자인대가 파열된 다리만 남았다. 다친 무릎은 "돈이 없어" 고치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 병원비 대기도 힘들었는데 내 다리를 어떻게 고치냐"며 지은은 여전히 불편한 무릎을 만졌다. 지금 있는 공동체가정에 들어온 뒤에야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아 4년 만에 무릎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어 원래의 다리로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했다. 한때 하키 채를 들고 몸싸움을 하던 지은은 지금 전혀 뛰지 못한다.

87세 외할머니와 사는 은서네 수입은 한 달에 50만 원

하늘이 '평범한' 가정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은서(가명, 17)도 마찬가지다. 은서는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외할머니와 살았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은서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와는 네 살 때 헤어졌다. 그 후로 은서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 은서가 중학생일 때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은서는 "돌아보면 내 인생이 너무 드라마 여주인공 같다"고 했다.

길지 않은 세상에서의 삶이 "현실과 드라마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막막하고 잔인했다"는 은서는 부모의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은서에게 말로 못할 소중한 존재인 할머니는 올해로 여든 일곱. 은서가 태어났을 때도 할머니는 70세 노인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어디도 없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두 사람은 매달 나오는 50만 원으로 먹고 살아야했다. 은서의 학비야 국가 보조가 됐다지만, 50만 원은 넉넉한 생활비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모들과 가까이 살기 위해 부산에서 남양주이사를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은서와 할머니의 집은 월세 10만 원 짜리 방 한 칸이다. 겨울에는 전기세를 포함해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든다. 은서는 "그 돈으로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그땐 내가 벌어야죠."

"고등학교 그만둔 이유? 어차피 대학을 못 가니까요"

가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는 이모들도 자기 삶이 녹록지 않긴 마찬가지다. 은서가 태어날 때 즈음 치암으로 수술을 받아야했던 할머니는 고혈압, 관절염 등 지금도 수많은 약을 달고 사신다. 고등학교 1학년 말, 은서가 자퇴하기까지 가장 걸림돌이 됐던 것도 생활비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서도 잘릴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그건 아니라 하더라고요. (웃음) 물론 내가 스무살이 되면 결국 끊기겠지만요. 내가 스무살이 됐다고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닌데도 나이가 찼으니 그냥 자르는 거예요. 어찌 보면 사회가 손 쉽게 외면해 버리는 거죠. 만약에 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한테는 한 달에 20만 원밖에 안 나오겠죠. 아무리 혼자여도, 사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요?"

고등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묻자 은서는 "어차피 대학에 못 간다는 걸 알아서"라고 했다.

"돈이 없으니까요.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대학을 다니고 싶지는 않았어요. 빚 지는 것도 두렵고. 대학도 못 갈 텐데, 학교에는 내가 왜 다니는 걸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단지 어쩔 수 없어서 다니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스무 살이 되면 결국 혼자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

은서는 그런 두려움 대신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만두기 전에는 다 무너져 내려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되진 않을까 싶어 너무 불안했다"지만 지금은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며 탐색기를 보내고 있다. 물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말이다.


빈곤과 학업중단은 '밀접한' 상관관계…실업계 학업중단율 2배

지은이나 은서와 같은 청소년이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지난 2008년 한해 동안 학업을 중단한 고등학생의 숫자는 3만3000명 정도다. 전체 학생 가운데 약 0.02%가 학교의 울타리를 밖으로 나온 것이다.

구체적인 사유는 다양하다. 질병이나 가정사정, 학교 부적응 등으로 스스로 그만둔 경우도 있고, 강제로 학교에서 쫓겨난 경우도 있다.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와 같은 특목고에서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일부러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고 조기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끝까지 학업을 이어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빈곤임은 분명하다. 지난 2009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내놓은 '학업중단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전체 고교생의 학업중단율보다 실업계 학생의 학업중단율이 2배나 높음을 알 수 있다. 실업계생과 특목고생을 비교하면 그 격차는 2008년 4.3배, 2007년에는 3배나 된다.

2008년만 놓고 봤을 때, 학생 1000명을 기준으로 특목고는 9명, 전체 고교에서는 15명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실업계는 30명이 자의로 타의로 학교를 그만뒀다. 특히 실업계의 학업중단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실업계 학생 1000명 가운데 25명이 중간에 학교를 떠났지만, 그 비중은 30명(2007년), 34명(2008년)으로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


▲ ⓒ프레시안

집단에 속한 학생들의 부모 소득 수준과 이 통계를 겹쳐 놓고 보면 이런 확연한 차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직업이 상위직인 학생의 비중이 특목고는 33.6%인데 반해, 실업계고는 3.7%에 그쳐 특목고가 9배나 높다. 반면 아버지 직업이 하위직인 비중은 특목고가 12%, 실업계고는 32.3%였고, 무직인 아버지를 둔 학생의 비중은 특목고는 0.7%, 실업계고는 7.8%였다. 실업계 학생일수록,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실업계 학생들이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할 확률 또한 월등히 높은 셈이다.

저소득층 자녀 급식비 지원액과 고등학교 자퇴학생수 사이의 회귀 분석과 국민기초생활수급권수와 실업계고 학생수 간의 회귀 분석을 종합해 봐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온다. 이들 사이의 밀접도를 보여주는 다중상관계수는 각각 2008년 기준 0.694와 0.71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이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해가 지나면서 자퇴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해도 꿈 크게 가지라'는데 그럴 수 없다"

똑같이 공교육에서 뛰쳐나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음 길은 달라진다. 은서는 자신과 같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을 종종 만난다. 교육공동체 등 탈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는 각종 활동을 하면서다.

"자퇴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안학교를 가요. 사실 내가 처음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안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담임 선생님이 대안학교를 알아보라고 했었어요. 하지만 갈 생각은 못 했죠. 이미 모집 기간이 끝나기도 했고, 돈도 없고. 게다가 대안학교는 더 이상 '대안'학교가 아니다 싶거든요. 인가 받은 학교는 일제고사도 보고 시험도 봐요."

미인가 대안학교의 학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부의 지원 대신 학부모의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교육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인가 대안학교는 모두 94곳. 이들 학교의 연간 학비는 수업료와 기숙사비 등을 포함해 최고 2200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입학할 때 예치금 성격의 '예탁금'을 내는데 이 돈 역시 150만~700만 원(2007년 교육부 <대안교육백서>)에 달한다.


▲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연합뉴스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빈곤 청소년이 고용과 소득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의 배경내 상임활동가는 "집안 형편이 괜찮은 청소년은 대안학교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경제력을 이용해 자영업 등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있지만, 가족 해체나 저소득층에 속한 청소년이 학교를 그만두면 당장 생존을 위해 날품팔이 형태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꾸는 꿈 역시 빈곤이라는 현실의 벽에 매번 부딪힌다. 꿈 얘기를 묻자 지은은 "사람들은 꿈이라고 하면 의사나 선생님 같은 직업을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꿈이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꿈은 "항상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꿈이야 그렇다지만, 어린 시절 지은이도 되고 싶었던 직업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요리사 뿐 아니라 특수분장사, 가수, 헤어디자이너, 스포츠마사지사,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까지…. 누구라도 어린 시절 꿈이 한결 같았겠냐 마는, 지은의 꿈이 바뀐 이유는 남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 꿈이 매번 바뀐 것은 가정형편 때문이었어요. 왜냐면 다 안 되니까요. '엄마, 나 이거 배우고 싶어'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거든요. '우리 형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라는. 사람들이 소년소녀 가장이라도 꿈은 크게 가지라고, 꿈은 크게 가져도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빈곤 청소년은 급격한 무력감에 빠진다. '교육공동체 나다'의 변중용 선생은 "빈곤 청소년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무기력증"이라고 말했다. 아직 부족하긴 하나, 이들을 보듬어 안는 유일한 곳인 "청소년보호기관의 대부분은 이런 빈곤 청소년이 사고 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만 집중할 뿐이어서 결국 빈곤 청소년은 무기력한 빈곤 어른으로 재생산되고 만다"고 변 선생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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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연재를 옮겨와 본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한국의 워킹푸어] 5명 중 1명이 '노동'하는 청소년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는 주로 '인권'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어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의 행태가 중심이었다.

그런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했던 청소년들이다. 가난은 단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때로 그 청소년의 가정을 통째로 부숴버리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잔인함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동·청소년 가운데 최저 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층은 7.8%였고 상대빈곤층은 11.5%였다. 전체 청소년의 87%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반해, 빈곤 아동·청소년 가운데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됐다.

당연히 그들 중 많은 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그들은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 있지만,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빈곤 청소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다른 사람은 놓치지 않는 것들을 가난하면 놓칠 수밖에"

가고 싶은 곳이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것은 또래와 다를 리가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이 때로는 넷북이나 아이폰, 해외여행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가 입는 5만 원짜리 티셔츠 대신 만 원짜리 티셔츠 5장"이 되기도 한다. 87세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나오는 월 50만 원이 수입의 전부인 은서(가명, 17)는 "다른 사람은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가난하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말로 그 둘이 사실 같음을 설명했다.

가난해서 불편했던 기억을 물어보자 은서는 고등학교를 자퇴할 때 얘기를 꺼냈다.

"자퇴하기로 결정하고 다 얘기가 끝났는데 학비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내가 기초생활보호대상자여서 학비를 국고에서 지원을 받거든요. 근데 3분기 수업료가 내내 안 들어와서 이상하다 생각만 하고 못 내고 있었는데 자퇴할 때 보니 그 돈이 할머니 통장으로 들어가 있었던 거죠. 할머니는 당연히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이미 다 써버렸고. 학교를 다니고 있으면 상관이 없는데 그만두려니 학비를 다 정산하지 않으면 자퇴 처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은서의 '자퇴 결심'의 마지막 걸림돌이 됐던 3분기 학비는 20만 원이다. 결국 은서는 자신 앞으로 나오는 그달 생활비를 몽땅 학교에 갖다 주고야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은서는 "그러고 나니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그때 '알바(아르바이트)'를 미친 듯이 했다"며 웃었다.

공동체 가정, 그룹 홈(group home)에서 사는 지은(가명, 21)은 그나마 나은 편인지 모른다. 지은과 함께 사는 6명의 동생들에게 나오는 수급비를 모아 2명의 선생님들이 샴푸도 사고, 먹을 것도 사고, 매달 차비도 지원해주면서 가계부를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물론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이들이 받는 돈은 거의 대부분 생활비에 들고 핸드폰 요금 등 다른 비용은 모두 지은이 감당해야 한다. 1년에 30만 원 정도 드는 방송통신고등학교 학비도 지은이 모아서 낸다. 일반 고등학교였다면 국가로부터 학비 지원까지 받았겠지만, 방통고는 보조교육기관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입원 역시 아르바이트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을 때 번 돈을 조금씩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 쓴다"는 지은은 "사실 나는 돈 관리 하나는 자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넌 가난한 집 애 같지 않다'고 해요. 가난하면 꼬질꼬질하게 입고 다니고 못 배워서 무식하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런 생각이 편견인데 그걸 모르고. 사실 내가 은근히 꼼꼼하고 깔끔하거든요. 나도 유행 따라가는 거 아주 좋아하고요. 발품을 많이 팔아서 싸게 모든 것을 해결하죠."

▲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이들이 받는 돈은 거의 대부분 생활비에 들고 핸드폰 요금 등 다른 비용은 모두 지은이 감당해야 한다. 물론 그 수입원 역시 아르바이트다.ⓒ연합뉴스

지은의 머리는 옅은 갈색으로 염색돼 있었다. 지은은 "이 머리가 얼마짜리로 보이냐"고 물었다.

"머리 염색도 가지가지예요. 10만 원, 12만 원 주고 할 수도 있고 6만 원, 아님 3만5000원 짜리도 있고요. 내 머리? 4900원이예요. 사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12만 원 짜리 염색약에 들어간 성분이 뭔지도 알 수 있고, 발품을 팔면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염색약 중에 같은 성분의 약도 찾아낼 수 있죠. 지금 이 옷도 마찬가지고요.(웃음)"

"돈이 없어 재능을 버려야하는 아픔, 아세요?"

그 뿐 아니다. 공동체가정에 들어온 뒤 지은은 한 달에 10~20만 원씩 엄마에게 보내준다. 자궁암 수술을 받았던 엄마가 최근 재발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전부터도 호르몬제 등 다달이 들어가는 약값에 보태라고 보내주는 돈이다. "솔직히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은에게도 가난은 너무 자주 자존심을 건드린다.

학교에 다닐 때가 제일 심했단다. 학기 초, 교실 환경미화를 할 때부터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 형편이 괜찮은 아이를 불러 "교실에 커튼 좀 달게 엄마한테 얘기 좀 해 줄래" 묻던 선생님은 가난한 집 아이에게는 "너희는 그냥 청소나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많아요. 내가 왜 준비물을 못 챙겨왔는지 뻔히 알면서 애들 앞에서 '너는 왜 매일 준비물을 안 사 오냐'고 구박을 하고요. 급식비도 늘 문제죠.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해도 급식비 지원이 잘 안 되던 때였거든요. 한 번은 전교에 교내 방송으로 급식비 밀린 애들 명단을 부르면서 일으켜 세운 적도 있었어요."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가난은 지은과 은서의 삶 제일 가까이 있다. "배우는 것에 대한 욕심이 워낙 많다"는 지은은 그룹 홈에 들어온 뒤에 많은 것을 배웠다. 웃음치료사 자격증, 레크레이션 자격증도 땄고 미술치료, 목공예, 양초공예, 천연비누 만드는 법 등도 배웠다. 어떤 것은 기관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수업을 들었고, 또 어떤 것은 사정을 얘기하고 어깨 너머로 눈치로 배우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통기타다.

"비 오는 날 집에 불 다 꺼놓고 통기타 쳐 봤어요? 장난 아니게 좋아요. 기타 치는 법도 어깨 너머로 배웠는데 기타 살 돈이 없어서 요즘은 다 까먹었죠. 남들은 '나중에 다 기억날 거야'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너무 속상해요. 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모른다니까요. 10만 원짜리 기타 하나 살 돈이 없어서 내가 어렵게 얻은 재능을 잃어버려야하는 아픔 말예요. 그럴 땐 참 원망스러워요."

요즘 지은이 제일 하고 싶은 건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이다. 정식으로 학원에서 배우려면 75만~100만 원 가량 든다. 지은은 "싸게 딸 수도 있다고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운전만큼은 제대로 배우고 싶은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 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이 늘 하는 말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은 많아"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지은이 대안학교 하자센터에서 운영하는 '영 셰프 요리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올해부터는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수업이 있는 요리학교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가야 하고, 일요일은 고등학교 수업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은 토요일과 월요일 뿐인데 지은은 "내 처지에 딱 맞는, 그런 알바는 세상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하는 날 조절? 사장들이 그런 걸 왜 해줘요.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 많아.' 늘 듣는 얘기예요."

지은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당구장, 전단지 돌리기, 주유소, 핸드폰 부품 납땜 공장, 스크린 경마장, 고깃집, 만두집, 편의점, 카페, 녹취 풀기. 종류만 나열해 봐도 이렇다. 제일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열네 살 때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 평균 40만 원을 벌었다.


미술에 소질이 있는 은서는 혼자 포토샵을 배워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한다. 인터넷 사이트도 만들어주고, 홍보물도 만들어준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많아야 10~15만 원.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요청하는 것은 무료로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서도 "여름부터는 디자인 알바 말고 본격적으로 알바를 구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비로는 87세 외할머니와 도저히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단순한 사회 경험이 아니다. 은서가 너무 갖고 싶다는 "아이폰이나 넷북" 등을 사기 위한 부차적인 수입도 아니다. 아직 정식으로 취직할 수 있는 나이가 못 된 빈곤 청소년에게 아르바이트는 먹고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5명 가운데 1명은 '노동'하는 청소년

일하는 청소년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지난해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만 15~19세의 청소년 329만4000명 가운데 일하는 청소년은 6.5%인 21만3000명에 달한다.

이 조사는 조사 시점에 아르바이트 등 일을 갖고 있는 청소년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 번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비중은 이 조사보다 크게는 4배 가까이 난다. 지난 2007년 국가청소년위원회 조사에서는 21%가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2009 아동청소년 백서'에서는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1년 내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청소년이 19.3%에 달했다. 청소년 5명 가운데 1명은 '노동'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서 취업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48.0%는 "학업·학원수강·직업훈련·취업준비 등을 병행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라는 답도 14.3%나 됐다.

이들은 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세한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점, 까페, 음식점, 편의점, PC방, 주유소 등이 그 예다. 통계청 조사에서 일하는 청소년 가운데 44.9%는 숙박음식점 등 개인서비스업에서, 26.6%는 도소매 등 유통서비스업에서 일을 했다.

사업장 규모를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이 45%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5~9인 사업장은 23%, 10~29인 사업장은 13%였다. 10인 미만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청소년이 전체의 78%나 되는 셈이다.

주유소 과장의 성희롱에 사장은 "니들이 조심했어야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든, '추가 용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든 이들은 처음으로 경험한 노동의 현장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뿐 아니라 약자일수록 약자에게 더 잔인한" 세상을 만난다. 힘없는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묻자 지은은 생각할 틈도 없이 "성희롱 당했을 때"라고 털어놨다.

"주유소에서 일할 때였어요. 거기 과장이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뒤에서 껴안더라고요. 그 과장이 그때 36살이었고 내가 15살이었으니 스무 살 차이도 더 나는 거죠. 사장한테 말을 했더니 오히려 '니들이 조심해야 한다'며 '그냥 잊어버리고 조용히 하라'고 하던데요? 문제가 커지는 게 싫었나보죠."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지은은 바로 그 주유소를 그만둘 수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돈이 필요해서." 사장은 잊으라 했지만, 지은은 잊을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은서도 비슷한 얘기를 털어놨다. 자신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은서는 아르바이트 삼아 10대 여성의 아르바이트 경험을 증언한 녹음 파일을 문서로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별별 사례를 다 봤다.

"한 청소년은 고깃집에서 일할 때 자기가 하녀인 줄 알았다고 했어요. 고기 굽는 것 뿐 아니라 아저씨들이 자꾸 '술 한 번 따라봐라'고 그런다고. 팔을 잡고 안 놔주는 사람도 많대요. 나 같으면 물수건이라도 던졌을 꺼야. '정신 차려' 이러면서.(웃음)"

"최저임금 어겨도, 근로기준법 어겨도, 공무원과 사장은 '사바사바'"


▲ 몇몇 "정신 나간" 아저씨들의 일상적인 폭력 외에도 청소년 노동은 사회가 용인해주는 '노동 착취'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 법정 최저임금은 의미가 없다. ⓒ연합뉴스
몇몇 "정신 나간" 아저씨들의 일상적인 폭력 외에도 청소년 노동은 사회가 용인해주는 '노동 착취'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 법정 최저임금은 의미가 없다. 야간 노동을 할 때 줘야하는 수당은 18세 미만의 야간 노동이 금지된 현행 근로기준법 때문에 달라는 말도 차마 못 한다. 식대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하나"라도 주면 다행이다.

"법 안 지키는 곳이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요. 최저임금이 3770원일 때도, 처음 들어가면 무조건 3000원부터 시작했어요. 최저임금 얘길 꺼내면 점점 올려준다고만 하죠. 그러면 나는 한 시간 일할 때마다 770원을 못 받는 건데. 10시간이면 7000원, 7000원이면 담배가 3갑이잖아요?(웃음) 편의점에서 일할 땐 음식물 쓰레기가 돼야 할 걸 나보고 점심으로 먹으라고 줘요. 삼각김밥 하나로 배가 채워지지도 않지만, 내가 무슨 개, 돼지도 아니고."

지은은 말했다. 성남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친구들과 작정하고 노동부에 신고도 해 봤다. 물론 달라지지 않았다.

"만두집이었는데, 최저임금을 안 줘서 신고한 거거든요. 그랬더니 노동부 사람 말이 '거기 원래 그래요. 또 그랬어요?' 이러대요. 그리곤 사장님 바꾸라고. 어른들끼리 통화하더니 유야무야 끝났죠. 어른들끼리는 '사바사바'가 되잖아요. 청소년은 싼 맛에 쓴다고 생각들 하니까요."

"법대로 하자"고 따지면 당연히 잘린다. 지은은 "거기서 잘리면 나는 돈 벌 곳이 없는데 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2008년부터 방통고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일을 할 수 없어지자 지은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친구들은 성년이라고 호프집에서도 일하는데 나는 미성년자니까 갈 곳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참아야죠. 날씬하고 예쁜 애들은 호프집에서 짧은 치마 입혀 놓고 시급 6000원도 줘요. 그 친구가 한 달에 120만 원씩 벌 때 나는 편의점에서 주 5일, 9시간씩 일하고 37만~42만 원 벌었거든요. 그 조건에 나를 써 주는 곳이 거기밖에 없는데 거기다 대고 시급 작다고, 왜 식대 안 주냐고 대들어 봤자죠. 어차피 질 것도 뻔하고."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 노동부는 1.3% vs 통계청은 63.7%


▲지난해 8월 이영희 전 노동부 장관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을 만난 자리의 모습. ⓒ연합뉴스
지은과 은서가 자신들이 경험했던 최악을 토대로 '과장'된 얘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경험이 '알바생' 대다수의 경험과 비슷함은 각종 실태조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지난해 11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청소년 10명 중 3명은 아르바이트 중 폭언·폭행·성폭력 등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폭력이 21.6%로 가장 많았고, 폭행(4.2%)이나 성희롱·성폭력(2.7%)도 적지 않았다. 가해자는 사업주, 상사, 고객으로 다양했다.

하루 평균 6시간 넘게 일하는 청소년이 44.3%에 달했지만, 휴식 시간이 따로 없는 경우도 62%나 됐다. 근무 중 식사 문제에 대한 조사에서는 13.6%가 "팔고 남은 재료로 밥을 먹는다"고 답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식대 대신 준다"는 답도 1.4%였다.

2009년 시간당 4000원이었던 법정 최저임금 미만의 시급을 받는 청소년은 무려 34%나 됐다. 3500~4000원이 15%, 3000~3500원이 13%, 3000원 미만도 5%였다. 지난해 8월의 통계청 조사는 그 비율이 더 높게 나온다. 당시 법정 최저임금 4000원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이 12만3000명, 무려 63.7%로 나타났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노동부는 청소년 고용 사업장 807개를 대상으로 벌인 근로감독 결과,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한 사례는 1.3%, 28건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런 차이에 대해 배경내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상임활동가는 노동부의 근로감독이 형식적으로 벌어지는 데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배 활동가는 "노동부는 서류가 갖춰져 있는, 즉 감독하기 편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피상적 법 위반 정도만 감독하며 사업주 얘기만 들을 뿐 청소년의 말은 반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3월 노동부 장관과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청소년 노동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며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를 위해 관계 법령 및 정책을 개선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노동부에는 "근로감독행정 강화를 위한 조치 강구"를, 교과부에는 "노동인권교육을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다.
 

아버지와 오빠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지은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가정다운 가정이 되어 주었던 그룹 홈도 올해가 지나면 떠나야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은 적어 대기자가 많은 만큼 성인이 되면 떠나야하는 것이 그룹 홈이다. 지은은 20세가 넘었음에도 방통고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다. 내년 2월이면 방통고도 졸업이니 "자립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자립은 지은의 삶에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당연히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지은은 "요즘 밤에 한숨을 쉬면서 깨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고민이 됐어요. '나중 일이야'가 안 되는 거예요. 엊그제가 1월이었는데 벌써 4월이잖아요. 자립 고민을 많이 하면서 같은 집에 사는 동생들에게 잔소리도 늘었어요. '언니 봐라, 시간 진짜 빨리 간다'는 잔소리요. 애들은 아직 모르죠. 14살 막내한테 '애니메이션은 조금만 보고 30분이라도 영어 공부 좀 해' 그러면, '얘가 뭐라는 거야'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봐요.(웃음)"

역시 방통고를 다니는 학생이란 이유로 스무 살이 넘도록 받고 있는 한 달에 30만 원 가까운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수급비도 끊길 것이다. 내년 3월이면 지은은 정말로 오롯이 혼자 힘으로 다시 살아가야 한다. 서울 이 비싼 땅 덩어리에서 혼자 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라도 가야하는데 학비는 또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은 태산이지만, 그래도 지은은 "남들보다 비록 조금 늦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함께 당당하게 살 길 찾고 싶다"

은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당당함이지만, 나는 가난한 사람도 당당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옷을 사러 가도 가난한 사람은 가격표를 먼저 본대요. 돈 많은 사람은 가격표 상관없이 우선 '이거 입어봐도 되요?'라고 말하고. 음식점에 가도 가난한 사람은 싼 음식만 찾지만, 부자들을 질을 따진다죠. 그런데 나는 잘 웃고 (가난한) 티도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해요."

은서의 꿈은 "가난으로 무기력해진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힘없는 소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요. 특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 청소년들요. 사실 남성보다 여성이 소수자고 그 중에서도 가난한 여성은 더 소수자고 가난한 여성 중에서도 나이 어린 청소년이 더 약자잖아요.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배고픈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날라리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하는 지은의 꿈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세상은 그들에게 별로 해 준 것이 없는데, 그 팍팍한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것마저 자신처럼 고통 받는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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