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워킹푸어] 지방대생은 스펙 쌓아봤자 '단기 알바직'?

 20대가 고통 받고 있다. 1000만 원에 달하는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태반이 백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의 문은 200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더 심해졌다.

지난 1분기 20대 취업자 수는 29년 전인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440만 명(1998년), 434만 명(1999년) 수준을 유지하며 400만 명을 거뜬히 넘겼던 20대 취업자 수가 1분기에는 370만 명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실업률은 급증했다. 지난 1분기 20대의 공식 실업률은 9.1%로 2000년 1분기의 9.4%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 13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는 무려 20만4000명에 달했다. 1년 전에 비해 15.2%나 늘어났다.

20대 대부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중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는 아니어도 'in 서울' 조차 되지 못한 지방대생들이다. 2009년 시도별 대학 재적학생수를 보면,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242만7662명 가운데 서울, 인천, 경기의 수도권 대학 학생 수는 107만 명(44%)이며, 그 외의 대학에 속한 학생은 135만 명(56%)이다.

비수도권 대학의 학생 수가 전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지방대 출신은 저임금의 임시 일자리일지언정 정부 대책으로 마련된 청년 인턴마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가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가 이른바 '대학 거부' 선언을 한 뒤, 한 지방대 학생은 김예슬 씨의 선언과 그 사회적 울림을 지켜본 소회를 이렇게 토로했다.
 

 

 

 

 


"그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은 좌절했다. 그 용자의 이름은 '고대 자퇴녀'였기 때문에. 만약 한밭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학력과 학벌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대학생들은 마음으로 이미 자퇴했고, 그들 중 일부는 조용히 교문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명문대 학생도, 비 명문대 학생도 진정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권연대 소식지에 이런 글을 쓴 한밭대 학생 임아연 씨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교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했다. '고대를 관둘 정도면…'이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빈곤한 교육철학으로 점철된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김예슬 씨를 더욱 빛나게 했던" 그 이름을 갖지 못한 이들. 만일 그들이 김 씨와 마찬가지 이유로 대학을 '거부'한다면,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을까? 임아연 씨가 느낀 '좌절감'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의 반응과 지방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 반응이 어떻게 다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대 김예슬'의 대학 거부 "스펙에 열중하는 대학이 싫었다"

이상호(가명, 28) 씨는 지난 2008년 대학을 그만뒀다. 두 번째 들어간 학교였다. 첫 학교는 사는 곳에서부터 왕복 4시간이 걸렸고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쳐 2001년 충북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꼭 7년 만에 이 씨는 학교를 스스로 뛰쳐 나왔다. 군대를 제대한 뒤 1년 간 휴학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다시 복학한 직후였다.

이 씨가 학교를 떠났던 3년 동안 "대학은 전혀 다른 공간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 변화가 이 씨에게는 낯설었다.

"모두 다 똑같은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수업 들어갔다가 도서관 갔다가 토입 수업 들으러 가고, 토익 학원 끝나면 의미 없는 술자리로 하루 일과를 끝내는 생활의 무한 반복. 사람과 사람이 모여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축제만 해도 그랬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각 동아리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을 들고 나오는 자리였다면, 2008년이 되니 형식은 과거와 똑같을지 몰라도 내용물이 아무 것도 없어졌다. 예전처럼 각 동아리가 친 천막도 있었지만, 창작물은 없고 끽해야 일일카페나 주점이 다였다. 대신 축제는 외부에서 데려 온 대중가수나 개그맨이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호 씨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 씨가 군대와 휴학을 거쳐 돌아온 뒤 학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애정을 쏟았다는 동아리 역시 전혀 다른 곳이 돼 있었다. 달라진 동아리의 모습에 대해 이 씨는 "관심사를 공유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존에 하던 동아리 활동은 점점 축소돼 갔다. "하자"고 해도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다 지치면 쉬어가는 쉼터"가 돼 버린 동아리는 이 씨가 활동하던 곳만은 아니었다. 영어 스터디, 주식 공부 등 "자기 경력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가 아니면 대부분 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대학의 가장 큰 변화였다.

따지고 보면 이 씨가 군입대 등으로 학교를 떠났던 3년 이란 세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학교는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 씨는 답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사회의 변화는 급격하게 눈에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질 기회 자체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이니, 다들 조급해진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등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은 점점 더 몰려들고. 적어도 적당한 일자리마저 없어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이 등록금도 가파르게 올랐다. 국립대인 우리 학교만 해도 내가 입학할 때 120만 원이었는데 군대 갔다 오니 230만 원이 돼 있었다. 학기마다 꾸준히 20만 원씩은 올랐던 것 같다. 학교 다니는 동안 이미 모든 대학생이 엄청난 빚쟁이가 돼 버린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일자리에 취직하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신은 신용불량이라는 올가미에 걸리는 걸 20대도 잘 알게 된 것이다."

스펙에 열중하는 20대의 모습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지만, 이 씨는 그런 대학이 싫었다고 했다.

"빚으로 다녔던 대학,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었다"

이상호 씨도 학자금 중 일부는 대출을 받아 냈다. 입학금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방학 등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해도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그만둘 때까지 모두 400만 원 정도의 학자금을 빌렸다. 이 씨는 내년이면 원금 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솔직히 대학을 그만둘 때 대출을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 씨의 여동생도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닌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을 다닌다는 이 씨의 동생은 한 학기에 500만 원 넘게 등록금을 낸다. 고향을 떠나 대학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생활비도 더 많이 드는데, 웬만한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도 빠듯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휴학을 자주 했고, 스물여섯 살인 여동생은 이제 겨우 대학 4학년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 동생도 대학을 간다면 똑같을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전라도 광주의 한 대학을 졸업한 박민재(가명, 35) 씨도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등록금은 거의 다 대출로 냈다"고 했다. 게다가 박 씨가 대학생일 때는 학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가 몇 개씩 발급이 되던 시절이었다. '카드대란' 직전이었다. 박 씨는 "생활비까지 다 신용카드로 썼으니 카드빚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뒤부터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박 씨는 2004년 대학 졸업 이후 7년 동안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프로야구 경기장 진행요원, 텔레마케터, 이마트 협력업체 직원, 학원 총무, 서울시 교통국에 소속된 행정 서포터즈, 한강사업본부 소속의 기간제, 샌드위치 가게, 돈가스 가게 등 이력도 다양하다. 평균 월 100~150만 원을 벌었다.

고향 나주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살기에는 결코 넉넉치 않은 돈이다. 박 씨는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이나 따로 연애를 안 하면 살 수야 있다"고 말했다. 매달 기본으로 들어가는 돈만 월세 20만 원에 휴대폰 비용 3~4만 원이다. 고시원에 살고 있어 각종 공과금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 서울에서 작은 인쇄업체에 다니고 있는 이상호 씨도 생계가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씨까지 직원이 3명인 이 인쇄소에서 그가 받는 돈은 월 100만 원이다. 사는 집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가 37만 원인 작은 원룸이다. 이 씨는 "이 월급에서 문화적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하면서 살려면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 뿐이라 먹는 게 늘 부실하다"고 말했다.

박민재 씨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통 한 끼를 밖에서 먹으려면 최소 5000원인데, 돈이 없으면 두 끼를 집에서 먹고 여유가 있으면 한 끼만 집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가끔씩 보내주시는 반찬에 그냥 밥만 해서 먹는 거다.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데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사먹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한다. 

1년 정도 다녔던 이마트 협력업체를 빼면 박 씨가 얻었던 일자리는 모두 단기였다. 따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고 일한 종로의 돈가스 가게나, 이태원의 샌드위치 가게도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아르바이트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더 이상 그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되면 박 씨는 다시 인터넷 등을 통해 새 일자리를 구했다. 박 씨에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사는 삶에 대해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하니까.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이 있는데 놀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폭은 굉장히 좁다."

박 씨는 안정적인 곳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기능직 공무원 시험도 봤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은 공부를 꾸준히 오래 해야 하는데 그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기능직 공무원은 택했다. 하지만 두 번 다 미끄러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딱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박민재 씨지만, 그는 높은 실업률을 놓고 '20대가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핀잔을 주는 주장에 대해 "일부 맞긴 맞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환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눈높이만 얘기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중소기업 근무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월급이나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면 중소기업 경력은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반면 부당한 대우는 정말 많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눈높이만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 하루 평균 13시간 노동에 월 100만 원 안팎

이상호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학 시절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 씨는 제일 좋았던 곳으로 대기업 계약직을 꼽았다.

한 대기업 화장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4개월 일했던 그는 "아무리 비정규직이어도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복지도 상대적으로 좋고 출퇴근도 정확했다"고 회상했다. 주5일제도 지켜졌고, 근무 시간도 정확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중간 휴식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고, 작업복도 돈을 받지 않고 회사에서 지급해 줬다. 연장근무를 하면 수당도 줬다. 그곳에서 월 95만~100만 원을 받은 것이 이 씨의 아르바이트 경력에서 최고액이었다.

반면 핸드폰 공장, 군납 낙하산 제조 공장, 신축 아파트 하자 보수, 대형마트의 청과물 판매 등 다른 일자리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2003년, 그가 대학생인 것을 속이고 정규직으로 들어가 두 달 정도 일했다는 경기도 안양의 핸드폰 공장에서는 하루 13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주말은 없었다. 회사에서 내준 기숙사와 공장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번 돈은 한 달에 70만 원 수준이었다.

경기도 광명의 낙하산 제조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 전에는 시급 3000원을 주겠다고 하더니 첫 달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시급 2500원으로 계산해 월급을 줬다. 노동시간도 하루 13시간이었고 2주일에 한 번 일요일만 쉬게 해줬다. 휴식 시간은 하루에 2번,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뿐이었다. 그것도 채 한 시간이 안 됐다.

"핸드폰 공장이나 낙하산 공장이나 노동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기숙사에서 아침 8시에 눈 떠 공장에 가서 퇴근하고 방에 돌아오면 밤 11시였다. 그러면 할 일은 잠 자는 것 뿐이다. 그래도 피곤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공장 안에 먼지가 정말 많은데 마스크 같은 걸 지급해주지도 않았다."

군대 제대한 뒤 바로 일자리를 얻었던 청주의 대형마트는 대형 유통업체였음에도 환경이 열악했다. 이 씨는 파견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4대 보험은 전혀 없고 심지어 유니폼도 하청업체가 파견 노동자에게 따로 돈을 받았다.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88만~92만 원 정도를 벌었는데 이 씨는 '아르바이트'였지만, 동료들 가운데는 그 일자리가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형들이 많았다. 나야 '알바'로 생각했으니 그렇지만, 직장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하거나 항의할 곳조차 없다. 몸이 아파서라도, 일단 무단결근이 생기면 바로 해고다."
 

박민재 씨가 전전했던 일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 '첫 경험'이었던 텔레마케터는 실적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서 출신 대학 동문 주소록을 가져다 줬고, 동문들에게 잡지 구독을 권유하는 것은 두 달로 끝이었다. 세 번째 달부터는 전혀 실적이 나지 않았고 결국 '잘렸다.' 마지막 달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마트 협력업체에서는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벌었지만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주중에는 각 이마트 점포를 돌아다니며 납품한 물건의 판매량과 진열 상태를 확인해야했고, 주말에는 용인에 있는 창고에 가서 물건 포장 작업을 도와야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하다보니, 이마트에서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각 점포마다 1년에 1~2회 '리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동원됐다. 한 점포에서는 1년에 한두 번이라지만, 납품 점포가 여러 개인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 리뉴얼을 하기 위해 밤을 샜다.

샌드위치 집이나 돈가스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에 12시간, 배달 일을 했던 돈가스 가게는 "오토바이 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오토바이 보험료, 기껏해야 1년에 20만 원이다. 대학 때 오토바이 사고가 난 경험이 있어서 보험을 꼭 들어달라고 주인에게 여러 번 요청했는데 번번이 묵살됐다. 보험 들어달라면 '사고 나면 책임져준다'는 말만 하는데, 사고 나면 정말 다 책임져줬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다행히 내가 일할 때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주차 단속 민원 처리가 주된 일이었던 서울시 교통국의 행정 서포터즈나, 한강시민공원에서 나무 심고 꽃 심는 일을 했던 기간제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경쟁도 만만치 않다.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인 셈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공무원? 00학번 이후 없다"

결국 20대가 '눈높이'를 낮춰 얻을 수 있는 일자리란, 이들의 경험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형편없는 복지,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일상인 '질 낮은 일자리'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둔 이상호 씨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스펙 쌓기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가 나뉘게 된다. 당연히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게 돼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일 아닌가."

이 씨는 "그렇게 희박한 승률의 도박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할까"는 회의감에 대학을 '거부'했지만, "졸업을 했더라도 인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취직한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없다"였다.

"같은 학교 사람 중에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은 99학번이 끝이었다. 99학번 선배 하나가 삼성전자에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없었다. 과도, 동아리도 마찬가지다. 공기업도 전혀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는 얘기는 엄청 많이 들었는데 됐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기들 중에 한 친구는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전혀 엉뚱하게 골프장에 가 있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했다면 정규직 취업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이 씨가 증언한 지방대생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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