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지형도 - 영국의 신좌파와 문화연구 - 이택광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목은 비단 프랑스의 이론가들에 국한해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영국의 ‘신좌파’도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정치와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장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스튜어트 홀은 <뉴레프트리뷰> 50주년 기념호에 실은 회상기에서 영국 신좌파의 탄생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홀은 신좌파의 탄생을 유발한 두 가지 사건을 지목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리쾨르에게 <정치적 역설>을 집필하게 만든 소련의 헝가리 혁명 진압이었고, 두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침공한 일이었다. 두 사건은 각각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와 영연방의 공익성에 대한 희망을 접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에게 이 사건들은 충격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 붐에 힘입어서 사회의 진보를 낙관했던 지식인들은 헝가리와 수에즈 사건을 계기로 현실사회주의국가와 복지국가 모델 모두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신좌파는 이런 회의에서 출발한 새로운 영국의 지식인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신좌파를 지칭하기 위한 시기구분은 1968년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홀은 이때 형성된 신좌파는 1956년 신좌파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홀의 지적은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후자의 의미를 되새겨보려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은 1956년 이후에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국의 신좌파는 <뉴리즈너>(New Reasoner)와 <대학좌파리뷰>(Universities and Left Review)를 각각 발간하던 세력들이 힘을 합쳐 <뉴레프트리뷰>를 창간하면서 결성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의 신좌파에게 매체 발간이 대단히 중요한 ‘활동’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체를 발간하고, ‘사회주의클럽’을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2-300명의 청중을 모아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문화적 활동’을 전개했다.

영국의 신좌파를 구성하는 세력 중 하나인 <뉴리즈너>그룹은 산업화 지역인 요크셔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저작을 남긴 E. P. 톰슨이 대표적인 참여자였다. <뉴리즈너>그룹의 특징은 인간주의로 대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대학좌파리뷰>그룹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는 젊은 학생들로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신좌파그룹에게 시급했던 것은 현실사회주의와 복지국가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길’이었다. 이 길은 곧 현실사회주의와 현실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지식인들도 프랑스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서 전자보다 후자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주요한 정치적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법인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의 포섭전략이 급속하게 정치사회적인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신좌파의 판단이었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전통적인 좌파의 관점을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전후에 맞이한 경제적 부흥에 고무 받은 다양한 분석들은 마침내 분배의 문제를 복지국가나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학을 통해 완전히 해결했다는 지표를 던져주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영혁명이나 복지정책의 확대는 협동조합주의(corporatism)라는 공동체적 합의를 공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결과는 전통적인 계급관계를 침식하고, 노동계급을 부르주아화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보는 그룹과 낡은 것의 귀환으로 보는 그룹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그 배후에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아주 단순한 결론이었다. 계급과 계급투쟁은 건재한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것은 반혁명적인 것이라는 관점이 팽배했다. 장구한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당연지사이지만, 신좌파는 이런 ‘구좌파’의 의견과 팽팽하게 맞서면서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한다. 신좌파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라는 것이 모순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양가적이기 때문에 결정하기 곤란한 어떤 문화적 현상을 통해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의미했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운위되는 정치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외연 확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신좌파적인 주장은 ‘사적인 문제’와 ‘공공적인 쟁점’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변증법을 전제한다. 결국 신좌파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둘의 접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반이론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글턴처럼 알튀세르주의를 도입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홀이나 앤더슨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좌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그람시였다. 반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은 특정한 이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한다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개입해서 정치적인 것의 역동성을 포착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신좌파에게 ‘문화’라는 영역은 문화철학이나 인류학에서 다루는 특정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헤게모니의 장이었다. 신좌파는 생산력주의와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정치적인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겨왔던 것이다. 이 가정에서 문화는 정치적인 것이 출몰하고 갈등하는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하겠다.

물론 신좌파 중에서도 문화 분석에 대한 관점은 다양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겉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계급구조는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와, 매스미디어의 등장과 문화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같은 문화적 변동이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견해가 그것이었다. 전자는 훨씬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후자는 다소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문화적 영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대응도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소비주의에 현혹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는 장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홀의 주장처럼 실제로 수정주의처럼 보이는 이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급진적인 것일 수가 있다. 새로운 사유재산 개념의 출현, 기업조직과 고용형태의 변화, 역동적인 축적체계와 소비방식이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근본적인 토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태도라고 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좌파의 입장 자체가 근원적이고 급진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임무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시대별로 우리는 숱한 ‘마르크스주의들’을 가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들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신좌파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신은 협소한 개념으로 정치를 규정하는 구좌파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일상생활 도처에 정치적인 것이 편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신좌파를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