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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리스틱(heuristic)이란 의사결정과정 단순화한 지침이다. 세상의 변화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결정할 때 현실적으로 모든 요소들을 고려할 수 없지만 다양한 변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정보의 부족과 시간적 제약 때문에 모든 것을 고려해서 완벽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제한된 정보와 시간적 제약을 고려해서 빠르면서도 현실적이며 실현 가능한 해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휴리스틱 접근법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현실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모든 변수와 조건을 검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고정된 편견을 가질 수 있으며 애매하고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속하고 현실적이다.
물론 제한된 정보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한 판단 미스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할 사항이다. 이것이 나의 한계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러한 휴리스틱에 의한 편견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해결방법이 불가능하므로 실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편향(bias)이란 휴리스틱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사판단과 의사결정의 쏠림 현상이다. 편향이란 실제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평균적 차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인간의 삶은 편향적이다.
예를 들면 감정 편향(affect heuristic)이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것은 사실 명제가 아니라 당위 명제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감정 편향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없으면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이성적 판단 이전에 감정의 호불호가 있을 뿐이다. 이성적 판단과 논리는 감정의 호불호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일 뿐이다. 누적된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이성적 논리를 압도하는 것도 인간이다.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로서 예상되는 후회와 기쁨을 과도하게 신경 쓰면서 선택을 한다. 후회를 최소화하려다가 효용이 떨어지는 쪽을 선택하는 비합리적 선택도 한다.
몸을 가진 동물인 인간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호불호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성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베케트의 말에 주목할 수 있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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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곳에 올렸던 나의 닉네임에 대한 설명 헐. 

 

우쑵니다.
난감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로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나의 형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로 가서
우쑤가문에서 파문 당했던 제비우스.....
(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거야, 그런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ㅠㅜ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시큰거리다니요. 제가 어디 노친넵니까.
하여 우쑤 가문의 영광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 허리우스의 정체를 xco에게 베이찡 거리의 그 당혹스러움으로 설명할까합니다.
마블의 동지들이여.... 혜량하여 주시길....

에잇! 자 짱꼴라 베이찡 샤오지에! 우쑤의 칼을 받아라!

Hi xco!!!
You wonder What means my nickname 허리우스? really?
허리우스=herrius, in short, ussu! yes! ussu.
translate 허리우스 to chinese = 虛裏憂愁,
허리우스 means 虛裏面的憂愁!
虛(허) means not nothing but potentialities in which all thing is.
裏(리) is the inside
憂愁(우스) means not fear or sadness but melancholy
so 허리우스 means the melancholy man in the empty(虛)

xco! understand my nickname!
thanks.
So I present my best favorite song to you.
Do you know the Rock group Queen?
I pray for you to meet good korean guy like me! yes, like me.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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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명창이 있어야 명창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명창이 없다고 불만하기 전에 먼저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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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연재 가운데 하나이다. 강금실. 눈여겨 볼 사람인듯하여. ^^;;; 

변호사 강금실(52)과 가까운 시인(남자다!) 한 사람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여전히 멀쩡한 사람은 강금실이 유일해!"라고 말한 적 있다. '멀쩡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멀쩡하다는 게 멀쩡하다는 거지 무슨 뜻이 있겠냐"고 영양가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말이 '변하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라는 뜻이리라 짐작했다. 그 시인의 지인들 가운덴 넓은 의미의 정치판(다시 말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가 보기에 그들 대다수가 그 뒤 '멀쩡하지 않'게 돼 버렸나 보다.

항심(恒心)을 지녔다는 점에서 강금실은 공직 안팎에서 멀쩡했다. 내가 그녀와 가까이 어울리기 시작한 건 그녀가 법무부 장관이 되기 다섯 해쯤 전이었는데, 그 다섯 해와 그 뒤 여섯 해 동안 내게 비친 강금실은 다름이 없었다.

내가 그녀의 단점이라고 판단하는 특질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혹시 그녀와 일을 같이 해본 사람, 공적으로 얽혀있던 사람은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가 오직 '함께 노는 것'이었던, 그러니까 그녀와 사적으로만 얽혀있던 내게, 그녀는 세월과 떨어져 여일(如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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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것의 한 측면은 (정신적) 성장이나 쇠락이고, 성장이나 쇠락은 한 개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므로,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낸 지난 11년 동안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칭찬이 되는 건지 흠잡기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년이 돼서야 친구가 된 처지에서, 그녀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게 다행이었다. 강금실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예측가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를 근원적으로 옥죄고 있는 일종의 '양식(良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녀와 공적으로 얽히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법률가 강금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가 판사나 변호사로서 유능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전혀 모른다.

법무부 장관 강금실, 정치인 강금실에 대해선, 유권자로서 판단하는 바가 있지만, 그걸 떠벌리지는 않겠다. 강금실에 대한 내 사적 우정이 공인(公人) 강금실에 대한 내 판단을 오염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강금실의 (정치활동을 포함한) 공직생활에 대한 내 태도는, 여느 친구들의 '밥벌이'에 대한 내 태도와는 달랐다. 나는 강금실이 법무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했다.

그 심정은 가족이나 친구를 격투기장 위에 올려놓고 관전하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강금실이 미덥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남자나 여자보다 강금실이 그 자리에 덜 어울려 보여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우정은 나로 하여금 국무위원 강금실의 행보를 무심하게, 대범하게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에게 찬사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기뻤고, 야당에서든 언론에서든 그녀에게 말의 돌멩이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아팠다. 그래서 그녀가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나는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강금실이 공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말려왔다. 친구에 대한 내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실은 강금실의 속마음을 알고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예측하고도, 내가 부질없는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두고 그녀가 의례적으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국 출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그 정권에 대한 책임감으로 옭아맸다. 그리고 당시의 여권에서 그런 논리를 들이댔을 때, 그녀에게는 그것을 부정할 만한 뱃심이(뻔뻔함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질 줄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사람들의 도움 요청에 그녀가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녀가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결국 그 선거판에 끼어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측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선에 임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본인 생각엔 그렇지 않았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제1당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출마를 하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녀에게는 민주당(이라고 부르든 열린우리당이라 부르든 통합신당이라 부르든)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지만, 그 책임감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 책임감은 권력의지가 결여된 책임감이었다. 또는 자신의 권력의지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무릅쓸 뱃심까지는 갖추지 못한 책임감이었다.

권력의지는 정치인의 첫 번째 자질이다. 그 점에서, 강금실에겐 '성공적인' 정치인의 자질이 모자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캐기 위해 온 세상의 광산을 뒤지고 다닐 미욱함(검질김?)이 그녀에게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염결하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이 그녀에겐 너무 넉넉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그녀에겐 권력의지 못지않은 정치인의 자질인 '철면피'가 결여돼 있다.

총선이 끝난 직후에 쓴 칼럼에서, 나는 강금실의 권력의지 부족을 지적하면서 그녀에게 시민사회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석에서 그 칼럼에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결국 그녀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지금도 민주당적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정치 일선에는 발을 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선의의 유권자가 내리는 판단이다.

나는 천분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다. 군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고 사업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듯, 정치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강금실은 직업정치인으로 늙어 죽을 운명은 아닌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의 자질로서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꼽은 바 있다.

강금실에게는 상인의 현실감각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하겠으나, '성공적' 정치인이 되기엔 좀 모자라 보인다. 그녀는 현실정치인이 되기엔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너무 높은 이상은, 너무 높은 기대지평은, 좌절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강금실과 어울려 지낸 11년 동안 그녀가 여일했다고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 다섯 해쯤 전에 가톨릭에 입교한 것이다. 그 전에 그녀는, 딱히 무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아무런 종교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속세의 일에 너무 바빠 세상 너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그녀에게는 어떤 종교적 심성 같은 것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얘길 나누다가,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외경 같은 것을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신자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같은 것을 '양서(良書)'라고 판단하는 나는 강금실의 회심(回心)이 그리 기껍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이 행성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지닌 종교에 내 친구도 한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금실의 가톨릭은 그저 스타일이나 패션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코스튬으로 삼는 게 아니라, 제 피와 살로 삼을 기세(였)다. 다시 말해, 세월과 더불어 그녀의 믿음은 점점 굳건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달리기 선수들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걸 겪듯, 내 친구도 문득문득 '빌리버스 하이'(believer's high)라고 부를 만한 것을 느끼는 듯하다. 그것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이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유물론자니까.

얼마 전, 나는 강금실의 사무실 근처엘 가 그녀와 낮술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믿음' 얘기가 나왔다. 나는, 비웃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러니까 신자들이란 결국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 아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소위 '신자'들의 나약함과 이기주의를 타박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내 친구의 대답은 진지했다. "물론이지,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있을까?"

친구의 '순순한' 대답에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내 알량한 이성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강한가? 정말, 세상의 이 모든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 비참을 통해 역사하는 초월적 존재가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닐까? 내 무신론은 내 교만의 그림자가 아닐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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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잊고 지냈던 고종석의 연재를 옮겨 본다.  

 

고종석의 여자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이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1~1952)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기여한 바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녀가 혁명 러시아(나 그 뒤의 소련)에서 맡았던 정치적 역할도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러시아혁명 또는 혁명 러시아와 관련해 가장 널리 거론되는 여성 가운데 하나다. 이름이 실체를 넘어선 경우라 할 수 있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콜론타이는, 혁명 러시아나 소련의 권력 핵심부에선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 여성으로선 독특한 이력을 걸었다. 우선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재(在)외국 공관에 여성을 파견한 나라는 있었겠지만, 그 수장으로서는 아니었다.

콜론타이는 노르웨이와 멕시코에서 소련 공사를 지냈고, 스웨덴에서 소련 공사와 대사를 지냈다. 혁명정부의 첫 사회복지 인민위원을 지냈고 1919년에는 세계 최초로 여성부를 창설해 이끌었지만, 1920년대 이후 그녀의 일터는 거의 외국이었다.

그녀 시대에 사람들은 외교를 남자의 일로 여겼다. 그것은 정치를 남자의 일로 여긴 것과 비슷하다. 외교는 국경을 넘어선 정치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정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의 비속함과 잔혹함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외교는 번잡한 프로토콜 속에, 화사한 연미복 속에, 강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국가의지를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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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속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꿈꿨던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


 

그런 외교의 일선에 여성이 나섰으니, 세상의 눈길을 끌 만했다. 아버지가 제정러시아의 장군이었고 어머니가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딸이었던 덕에, 콜론타이는 훌륭한 교육(좌파들이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경멸하는)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교육은 그녀의 외교관 생활에 도움이 됐을 게 분명하다.

콜론타이는 또 혁명 초기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따라서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담한 당내 좌파 '노동자의 반대'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 레닌이 '노동자의 반대' 그룹을 해산한 뒤, 콜론타이는 권력핵심에서 더 멀리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핵심부의 독선에 대한 비판을 콜론타이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1930년대 '모스크바 재판' 때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피고인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녀를 박해하지 않은 스탈린의 심사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 외교관이라는 점, 국내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따위가 고려됐는지 모른다. 사연이 어찌 됐든, 콜론타이는 당 지도부의 정책에 투덜거렸으면서도 고종명한, 드문 스탈린 시대 관료였다.

콜론타이라는 이름을 소련 안팎에 결정적으로 알린 것은 그녀의 소설과 논문에 담긴 전투적 페미니즘일 것이다. 혁명 이후에 러시아인들은 이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일부일처제를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은 혁명 러시아에서도 국가를 이루는 기본 단위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일처제와 마찬가지로, 혁명 러시아의 일부일처제도, 실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였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완전한'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한, 배타적이고 동등한 성애를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소련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완전한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콜론타이의 견해는 적극적이었다. 혁명은 종국적으로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해체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결혼이나 전통적 가족관계는 소유권에 바탕을 둔,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과거의 유물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콜론타이에 따르면, 남성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했다.

또 타인의 마음은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지적 사랑이어야 했다. 이 사랑은 그러므로 일부일처제 너머의 사랑이었다. 콜론타이는 이런 사랑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 불렀는데, 이것은 좌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소란스러운 논쟁을 낳았다.

우선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 예로 꼽았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성애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예사이니 말이다. 곧이곧대로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날개 없는 에로스'일 것이다. 그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라 해서 그것이 다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방어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남녀 불평등 때문에, 그런 섹스는 여성을 착취하고, 자녀 양육의 의무와 함께 내팽개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부른 사랑은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게 되면, 아이를 둔 여성도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돼 상호 존중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콜론타이에 따르면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소설 <붉은 사랑>의 주제가 이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소설 <삼대의 사랑>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를 한 여자를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마저 충격적으로 거부했다. 그녀의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콜론타이의 관점이 너무 낙관적이었든지 순진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 테다. 나로서는, 북유럽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현대의 '프리섹스'와 콜론타이가 주장했던 '날개 달린 에로스'를 구별하지 못하겠다.

콜론타이의 에로스관(觀)을 동료들이 곡해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그녀는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돼 퍼져나갔다. 그래서 콜론타이의 에로스 이론은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불렸다. 레닌 역시 이 '물 한 잔 이론'을 격렬히 비판했다. 혁명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콜론타이의 '자유결합'론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레닌은 위험스럽게 여겼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발걸음을 맞춰 성적 관계와 혼인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금욕적 자기 부정을 설교하는 것이 귀족적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생활의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물 한 잔 이론'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물을 마시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에로스관의 옹호자인 것은 분명했다.

콜론타이는 멘셰비키였다가 볼셰비키로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지워버릴 만한 업적(예컨대 트로츠키의 군사적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레닌과의 관계가 더 껄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콜론타이에 대한 내 견해는 어정쩡하다. 혁명 이후의 노동조합 옹호자 콜론타이, 관료주의 비판자 콜론타이를 나는 지지한다. 그러나 '자유결합' 옹호자 콜론타이, '날개 달린 에로스' 옹호자 콜론타이에는 덤덤하다.

비판적이 아니라 덤덤한 것은 그런 관점이 제 나름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나는 프리섹스주의자가 아니고, 에로스는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배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프리섹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특히 그 프리섹스가, 콜론타이의 '날개 달린 에로스'처럼, 질투와 억압이 사라진 상호평등의 사랑이라면. 에리히 프롬 이래 상투어가 된,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을 꿈꾼 콜론타이가, '시궁창의 흙탕물'이나 '가장자리가 더러워진 유리잔'을 거론한 레닌보다는 훨씬 더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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