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연재 가운데 하나이다. 강금실. 눈여겨 볼 사람인듯하여. ^^;;;
변호사 강금실(52)과 가까운 시인(남자다!) 한 사람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여전히 멀쩡한 사람은 강금실이 유일해!"라고 말한 적 있다. '멀쩡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멀쩡하다는 게 멀쩡하다는 거지 무슨 뜻이 있겠냐"고 영양가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말이 '변하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라는 뜻이리라 짐작했다. 그 시인의 지인들 가운덴 넓은 의미의 정치판(다시 말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가 보기에 그들 대다수가 그 뒤 '멀쩡하지 않'게 돼 버렸나 보다.
항심(恒心)을 지녔다는 점에서 강금실은 공직 안팎에서 멀쩡했다. 내가 그녀와 가까이 어울리기 시작한 건 그녀가 법무부 장관이 되기 다섯 해쯤 전이었는데, 그 다섯 해와 그 뒤 여섯 해 동안 내게 비친 강금실은 다름이 없었다.
내가 그녀의 단점이라고 판단하는 특질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혹시 그녀와 일을 같이 해본 사람, 공적으로 얽혀있던 사람은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가 오직 '함께 노는 것'이었던, 그러니까 그녀와 사적으로만 얽혀있던 내게, 그녀는 세월과 떨어져 여일(如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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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것의 한 측면은 (정신적) 성장이나 쇠락이고, 성장이나 쇠락은 한 개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므로,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낸 지난 11년 동안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칭찬이 되는 건지 흠잡기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년이 돼서야 친구가 된 처지에서, 그녀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게 다행이었다. 강금실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예측가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를 근원적으로 옥죄고 있는 일종의 '양식(良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녀와 공적으로 얽히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법률가 강금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가 판사나 변호사로서 유능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전혀 모른다.
법무부 장관 강금실, 정치인 강금실에 대해선, 유권자로서 판단하는 바가 있지만, 그걸 떠벌리지는 않겠다. 강금실에 대한 내 사적 우정이 공인(公人) 강금실에 대한 내 판단을 오염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강금실의 (정치활동을 포함한) 공직생활에 대한 내 태도는, 여느 친구들의 '밥벌이'에 대한 내 태도와는 달랐다. 나는 강금실이 법무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했다.
그 심정은 가족이나 친구를 격투기장 위에 올려놓고 관전하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강금실이 미덥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남자나 여자보다 강금실이 그 자리에 덜 어울려 보여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우정은 나로 하여금 국무위원 강금실의 행보를 무심하게, 대범하게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에게 찬사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기뻤고, 야당에서든 언론에서든 그녀에게 말의 돌멩이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아팠다. 그래서 그녀가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나는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강금실이 공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말려왔다. 친구에 대한 내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실은 강금실의 속마음을 알고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예측하고도, 내가 부질없는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두고 그녀가 의례적으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국 출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그 정권에 대한 책임감으로 옭아맸다. 그리고 당시의 여권에서 그런 논리를 들이댔을 때, 그녀에게는 그것을 부정할 만한 뱃심이(뻔뻔함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질 줄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사람들의 도움 요청에 그녀가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녀가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결국 그 선거판에 끼어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측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선에 임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본인 생각엔 그렇지 않았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제1당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출마를 하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녀에게는 민주당(이라고 부르든 열린우리당이라 부르든 통합신당이라 부르든)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지만, 그 책임감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 책임감은 권력의지가 결여된 책임감이었다. 또는 자신의 권력의지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무릅쓸 뱃심까지는 갖추지 못한 책임감이었다.
권력의지는 정치인의 첫 번째 자질이다. 그 점에서, 강금실에겐 '성공적인' 정치인의 자질이 모자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캐기 위해 온 세상의 광산을 뒤지고 다닐 미욱함(검질김?)이 그녀에게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염결하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이 그녀에겐 너무 넉넉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그녀에겐 권력의지 못지않은 정치인의 자질인 '철면피'가 결여돼 있다.
총선이 끝난 직후에 쓴 칼럼에서, 나는 강금실의 권력의지 부족을 지적하면서 그녀에게 시민사회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석에서 그 칼럼에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결국 그녀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지금도 민주당적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정치 일선에는 발을 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선의의 유권자가 내리는 판단이다.
나는 천분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다. 군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고 사업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듯, 정치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강금실은 직업정치인으로 늙어 죽을 운명은 아닌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의 자질로서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꼽은 바 있다.
강금실에게는 상인의 현실감각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하겠으나, '성공적' 정치인이 되기엔 좀 모자라 보인다. 그녀는 현실정치인이 되기엔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너무 높은 이상은, 너무 높은 기대지평은, 좌절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강금실과 어울려 지낸 11년 동안 그녀가 여일했다고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 다섯 해쯤 전에 가톨릭에 입교한 것이다. 그 전에 그녀는, 딱히 무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아무런 종교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속세의 일에 너무 바빠 세상 너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그녀에게는 어떤 종교적 심성 같은 것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얘길 나누다가,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외경 같은 것을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신자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같은 것을 '양서(良書)'라고 판단하는 나는 강금실의 회심(回心)이 그리 기껍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이 행성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지닌 종교에 내 친구도 한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금실의 가톨릭은 그저 스타일이나 패션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코스튬으로 삼는 게 아니라, 제 피와 살로 삼을 기세(였)다. 다시 말해, 세월과 더불어 그녀의 믿음은 점점 굳건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달리기 선수들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걸 겪듯, 내 친구도 문득문득 '빌리버스 하이'(believer's high)라고 부를 만한 것을 느끼는 듯하다. 그것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이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유물론자니까.
얼마 전, 나는 강금실의 사무실 근처엘 가 그녀와 낮술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믿음' 얘기가 나왔다. 나는, 비웃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러니까 신자들이란 결국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 아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소위 '신자'들의 나약함과 이기주의를 타박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내 친구의 대답은 진지했다. "물론이지,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있을까?"
친구의 '순순한' 대답에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내 알량한 이성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강한가? 정말, 세상의 이 모든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 비참을 통해 역사하는 초월적 존재가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닐까? 내 무신론은 내 교만의 그림자가 아닐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