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modernity)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서양 역사나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도 모더니티, 근대성의 문제는 핵심문제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학자들은 이 문제를 서양의 개념과 이론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견강부회였다. 이제 다시 서양의 근대성과는 다른 맥락속에 있는 동아시아적 근대성, 혹은 내재적 근대성 이론을 묻기 시작했다. 과연 동아시아적인 모더니티란 있을까? 
현대 신유학자들의 1세대와, 제 2세대의 대표인물로는 양수밍(梁漱溟), 시옹스리(熊什力), 펑여우란(馮友蘭), 치앤무(錢穆), 팡동메이(方東美), 탕준이(唐君毅), 머우쫑산(牟宗三), 쉬부관(徐復觀)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서양 문화의 충격에 대한 도전적인 응답으로 중국 문화의 주체성을 말한다. 물론 서양 철학을 융합해서 너희들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중국 철학이 있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동서 비교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주로 펑여우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택통의 공산당을 버리고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간 사람들이다.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대학원 때 펑여우란, 팡동메이, 탕준이, 머우쫑산, 쉬부관을 열심히 읽었다. 특히 머우쫑산과 탕준이. 머리 아픈 언어들이었다. 그러나 매우 필로소픽하다는 착각을 들게 했다. 현란한 자기 언어와 서양적 개념과 논리들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하는 언어들이었으니까?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이들을 버렸다. 현대 신유학자들이 등장했다. 위잉스(余英時), 뚜웨이밍(杜維明), 리우수시앤(劉述宣), 청중잉(成中英)이다. 이들 가운데 뚜웨이밍과 청중잉은 미국 가서는 중국 철학의 위대성을 자랑하고 중국 가서는 미국 철학 얘기를 떠들어 댄다는 미심쩍은 소문이 돌았다. 어줍잖은 동서비교 철학을 이쪽 저쪽에서 팔아먹는 것이다. 리우수시앤은 잘 몰랐고, 위잉스는 좀 달랐다. 
모더니티에 대한 문제였다. 그때 나는 미조구찌 유조의 책들을 읽고 있었다. 미조구찌 유조와 그의 제자들을 도쿄 학파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 제자 가운데 고지마 쓰요시 등 이들이 동아시아적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송명 유학을 새로운 시작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명 유학이 현대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이들의 작업은 어줍잖은 동서비교철학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 맥락 속에서 송명 유학을 바라보려는 시각이었다. 
당연하다. 서양의 근대성 개념을 강박적으로 의식하면서 중국 철학을 바라볼 때 중국 철학 자체의 내재적 논리를 놓쳐버릴 수 있다. 현대 신유학 1세대 2세대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때 눈에 들어온 학자가 바로 위잉스(余英時)와 피터 볼(Peter. Bol)이었다. 피터 볼은 단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방법을 문학사, 사상사, 철학사 등과는 다른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라고 명명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철학자 문학자 사학자라는 서양적 구별법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칭적으로 이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지성사를 택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 따라 쓴 책이 바로 <this culture of ours: 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이다. “사문(斯文):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라고 해석될 수 있다. 현대의 고전이고 당송 시대의 변화를 기존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논의하고 있다. 
이런 것이다. 중국의 당송 시대는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만큼이나 전혀 새로운 변혁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학(理學)을 이해할 수 없다. 위잉스의 문제의식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기존 학자들(물론 여기에는 서양학자 뿐 아니라 현대 신유학자들 모두 포함될 것이다.)들은 이학을 철학화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오히려 “이학의 철학화”로부터 잃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context)이다. 니체는 철학자들을 항시 비웃었다. 그들은 역사를 모른다. 역사적 맥락에서 추상화된 고정된 개념은 원래의 의미를 상실케 한다. 
위잉스는 이 “이학의 형이상학”는 유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화로 철학화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줍잖은 동서비교철학을 하기 전에 역사적 맥락을 드러냄으로써 이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적 언어들을 생동감있게 살려내는 것은 현실 문제적 맥락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현실적 구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철학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다시 근대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근대의 어원상의 의미는 단조, 장조 등의 음조를 뜻하는 라틴어 modus에서 왔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유행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mode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허례허식이나 거추장스러운 관습 등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미학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원상 ‘modern’은 ‘ancient’에 대립되는 의미로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이르러 ‘오래된’ 것에 대립되는 ‘새로운’ 이라는 개념으로 대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적 근대성은 당송 시대의 변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조구찌 유조는 송대 리학(理學)이란 하나의 사건(event)이었으며 세계관의 변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알란 우드(Alan T. Wood)라는 학자는 <Limits to Autocracy>라는 책에서 당송 시대를 서양의 르네상스 운동에 비견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송명시대의 변화란 오래된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와 삶의 방식을 창조한 시기였던 것이다. 거기에 주자학이 자리하고 있다. 주자학이란 반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 맥락에서 본다면 상당히 근대적?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송명시기에 등장한 유학을 신유학이라 하여 neo confucianism)라고 한다. 그때 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 네오(neo)인가,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가? 라는 문제다. 피터 볼은 그 당시 이학이 왕안석이나 소동파와 같은 주도적인 담론이 아니라 소수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양은 그들의 근대성 기획(modern project)를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포스토모던 담론이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새마을 운동으로 통칭되는 잘 살아보자는 경제적 발전이다. 그것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근대화되었는가?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거짓과 위선과 허례허식을 벗어던진 미학적 삶의 방식은 창조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린 과거의 역사를 지멋대로 치장하면서 전신 성형수술을 꾀하려고 하고만 있다. 성형수술로 이룬 미학적 아름다움인가? 성형수술한다고 해서 친일의 역사라는 원판은 지워질 수 없다. 원판은 결코 화장으로 치장될 수 없다.
해서 아직도 우린 모더니티를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에게 모더니티란 무엇이었는가? 위잉스의 주희의 역사세계라는 책은 그것에 대한 답변을 위해 거쳐야할 주자학을 역사적 맥락 속에 고스란히 담아보려는 노력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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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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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죽은 시대에 인간의 주체와 자유의지로 삶의 의미를 창조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성과 자유의지만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책임이 한 사람에게 지워지게 된다. 결국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게 될 수밖에 없다. 허무에 빠진다. 그렇다고 신과 같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 의지한다면 행운을 바라거나 의존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결국에는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응답은 없다. 응답하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허무에 빠진다. 긍정적인 자들의 허무와 수동적인 자들의 허무는 차이가 나는 것일까? 긍정적인 자들이 빠진 허무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수동적인 자들이 가진 허무는 또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이 세속적 허무주의의 시대에 어떤 삶의 스타일과 태도가 아름다운 것인가? “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즉 일상 속에 감춰진 목적을 찾는 대신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신적이고 영웅적인 태도는 파시즘으로 치닫고 만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함께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和而不同의 태도이다. 그것을 메타 포이에시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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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벽침사록 - 벽을 마주하고 홀로 생각하다
류짜이푸 지음, 노승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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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인적으로 에밀 시오랑, 라로슈푸코 등 간단하지만 뒤통수를 때리는 잠언식의 성찰을 좋아한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운 것은 중국 문화에서는 왜 이러한 잠언식의 에세이들이 없었을까였다. 고대의 문헌들에는 이러한 잠언식의 뒤통수 때리는 문헌들이 차고 넘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현대 작가들이 쓴 이런 책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인지.......

그러던 중 발견한 책이 바로 면벽침사록.

지은이 또한 고별혁명을 통해서 리저허우와 중국 문명 전반에 대해서 대담을 했던 류짜이푸 아니던가. 그의 간단한 사색의 편린 속에는 루신, 홍루몽, 그리고 선사들의 깨달음들이 녹아들어 사회와 인생 전반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벽을 마주하고 홀로 생각한다는 면벽침사록은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공간 속에서 마치 농익은 포도주를 음미하듯이 야금야금 혀를 적시며 맛을 보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시간은 출퇴근의 지하철 속에서 혹은 누군가 마냥 한없이 기다려야만 할 시간에 이 책의 잠언들을 맛본다면 좁아터진 속세의 공간은 텅빈 혼자만의 공간으로 화하고 한없이 지루한 시간은 응집된 한 순간의 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 그리고 또한 강추할 공간은 바로 화장실이다. 가장 집중도가 높은 공간이며 시간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어느 순간 뚝 터지는 황당함을 경험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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