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토론회] 김용철 변호사, 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있어야 하겠지만…. (부끄러우면) 인생 한 방인데 나와야죠!"

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에서 김용철 변호사에게 가장 많이 쏟아진 질문은 역시 '삼성'이었다. 2007년 양심 선언을 하고 나서, 최근에는 삼성 불매 운동에도 힘을 실어줬던 김 변호사는 사회자(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청중의 질문에 평소 고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건희 일가와 삼성 임직원의 '부당 거래'?

김용철 변호사가 가장 난감해한 질문은 청중에게서 나왔다.

청중 : 삼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건희 일가가 잘못 아닌가? 삼성과 삼성 임직원 전체를 싸잡아서 비판하는 게 과연 맞는가?

김용철 :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때 2500명의 임직원이 소환을 당했다. 나 말고도 한두 명은 진실을 말할줄 알았다. 그런데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중에 술 마시고 전화해서 '미안하다'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렇게 삼성을 다니는 임직원이 이건희 일가의 불법, 탈법을 알면서도 침묵한다면 그것 역시 문제 아닌가?

한 번은 '뇌물로 누구를 매수해라' 이런 임무가 떨어졌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상대가 그 돈을 받지 않게 만들었다. '형님, 이거 이건희가 갖다 주라는데 받을 거요?' 이렇게 물으면 (검사) 대부분은 차마 돈을 못 받는다. 그래도 기어이 받는 사람이 있었다. 내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런 비리를 수사하던 사람이 (뇌물 청탁을) 해야 하니 당연히 마음의 병이 났다.

물론 생계 중요하다. 나 역시 아들을 비롯한 가족에게 수차례 이런 얘기를 들었다. "가족을 위해서 (삼성에 다니면서) 그냥 사시면 안 되느냐." 그렇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계속 부끄러워하면서 삼성을 다녀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부끄럽다면) 인생 한 방인데 나와야지!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변호사는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이 자리에 나오는 게 불편했다"라고 말했다. 대형 범죄만 잘 처리해도 도덕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범죄 행위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게 영 불편했던 것이다.

"지난 특검 때 (밝혔듯이) 삼성 비자금만 10조 원 정도 된다. 10조 원이면 대한민국 등록금 전액이다. 아까 우석훈 박사가 유럽 대학 등록금은 몇 십만 원에 그치는 수준이라 부럽다고 했는데, 그 돈이면 우석훈 박사가 말한 유럽식 대학 등록금, 우리도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굳이 도덕까지 이야기할 것도 없다고 본다. 이런 범죄만 제대로 다뤄도 훨씬 괜찮은 사회가 될 것이다."

한국 사회, 문제는 무엇인가

김용철 변호사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사회를 맡은 성공회대학교 김민웅 교수는 무상 급식복지 국가를 화두로 꺼내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을 요구했다.

김민웅 : 보수 세력은 무상 급식과 같은 복지 정책이 열심히 일할 동기를 약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경쟁과 성취가 중요한 사회에서 복지가 보편화하면 이른바 '복지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김용철 : 양심 선언 때 친해진 신부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요즘에는 신학대학교강남 학생만 들어와서 걱정이라고. 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강북의 가난한 학생은 신부가 되기도 어려운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이웃을 살펴야 할 신부마저도 강남 학생 몫이 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그래서 나는 로스쿨 제도도 반대다. 졸업까지 생활비까지 염두에 두면 몇 억 원이 들어야 변호사 자격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사회야말로 계급 사회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무상 급식과 같은 복지 정책이야말로 이런 계급 사회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정책이다.

김민웅 :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 급식과 같은 복지 정책을 '망국적 파퓰리즘'이라고 몰아붙이는데….

김용철 : 세종로에 흉칙한 세종대왕상을 세우고, '한강 르네상스' 운운하는 쓸데없는 사업을 하는 돈으로 충분히 아이들 밥은 먹일 수 있지 않은가? 오세훈 시장이 저러는 걸 보면 자꾸 누구를 닮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최소한 한국이 밥은 학교에서 공짜로 먹일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한 것 아닌가?

미국 헌법이나 우리나라 헌법 어디에도 자본주의라는 말은 안 나온다. 우리 헌법에는 오히려 재산권을 공공 이익에 맞게 행사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나는 복지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한국 사회가 문제가 많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정치인에도 보수 언론에도 속지 말고 시민이 나서야"

김용철 변호사는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정치인에게도, 보수 언론에도 속지 말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정치인 이상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삼성에 들어가면 전부 취업을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 의식 속에 암암리에 '돈이 최고'라는 인식이 싹트고 있어서 재벌과 언론, 정치인이 '부당 거래'를 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당한 거래를 깨기 위해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나는 삼성을 다니면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돈으로 갖고 싶은 걸 다 갖게 되는 순간 눈빛이 탁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 자신도 (이건희 등과) 비슷한 사람이 돼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권력과 부를 확대할 고민만 하는 것은 불행한 영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삼성을 나온 이유다."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변호사는 한때의 잘못을 회개하려는 듯 여건이 된다면 최대한 선한 일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그게 비록 '위선'으로 보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장애인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도 하고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자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공부한다.

이렇게 밖에서 본 세상은 그가 삼성 안에서 보던 세상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았다.

"어느 날 학생들이 수업을 계속 빠졌다. 알고 보니 시위를 나가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중증 장애인에 대한 예산이 대폭 깎여서 항의 시위를 한단다. 연평도 포격 때 자기들 월급은 슬그머니 올리는 국회의원들이 중증 장애인 예산이 깎아는 데는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이런 정치인을 믿는 것보다는 시민이 나서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는 마지막으로 세상의 진실을 가리는 보수 언론을 놓고도 쓴소리를 했다.

"양심 선언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 만악의 근원 중 하나가 바로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보수 언론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조·중·동은 절대로 보지 말자. 아니, 조·중·동 보는 집과는 통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왜 도덕인가' 토론회③] 김규항, "'내 새끼'만 챙기지 말자"

 

"자녀가 초등학생일 때는 체벌에 펄펄 뛰다가도 중학생이 되면 '성적에 도움이 되는 한 어느 정도의 체벌은 괜찮다'는 심리를 갖는 학부모들이 있다. 이런 심리 하에 성적 향상이라는 이익과 체벌이 부당하게 거래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이자 <B급 좌파>의 저자인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의 말 속에는 언제나 '내 새끼'만 챙기는 한국 학부모에 대한 날카로운 날이 서려 있다. 그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위기의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에서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당 거래'의 예로 학부모의 이기심을 거론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최철원 M&M 전 대표의 '맷값 사건'을 화두로 삼으며 "폭력과 욕망, 자본이 굴러가는 밑바닥엔 부당 거래의 그물이 있다"고 지적하자 김규항 발행인은 "굳이 최철원처럼 '이상한' 사람을 표본 삼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폭력은) 거친 성격을 가진 특정한 사람에게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을 때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남의 '등수'를 빼앗는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입시 경쟁 하의 자녀 교육도 부당 거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경쟁 사회를 비판하는 '진보적'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김규항 발행인은 "보수적 부모의 꿈이 그냥 1류 대학을 다니는 아이라면 진보적 부모의 꿈은 1류 대학을 다니는 진보적인 아이 아닌가"라는 말로 한국 사회의 욕망을 정확히 짚어 낸다.

"보이지 않는 폭력에 눈을 떠라"

"최철원 같은 사람도 문제지만 포악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폭력도 문제다. 정몽구 회장이 직접 몽둥이를 든 건 아니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농성장 단수·단전에 고통 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을 얻은 노동자들에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과연 이런 건 폭력이 아닐까?"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맷값 사건'에 대한 논평에서도 김규항 발행인은 또 한 번 청중들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눈에 보이는 폭력에는 분노하지만 삼성 반도체 공장 문제 등 보이지 않는 폭력엔 무관심한 언론·시민사회를 정면으로 질타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의 이익에 기반을 둔 체제에 살고 있으며, 공권력은 자본 편에 서게 돼 있다. 공권력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것 같지 않지만, 힘없는 노동자들에게는 다르다. 쌍용차현대차 농성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자행된 폭력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수준의 시민들이 경험했던 촛불 집회에서의 폭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시민들의 무관심이 공권력의 은폐된 폭력을 내버려둘 때 야만적인 풍경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파업 등 노동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호소했다.

"노동자 문제가 남 얘기가 아닌데도, 시민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선 덜 민감한 경향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중교통 종사자들이 파업을 하면 시민들이 내 문제라는 생각을 갖고 불편을 감수한다고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촛불 집회 등에서 한국 시민이 보여줬던 성숙된 시민의식과 걸 맞지 않는 부분이다."

"삼성을 '먹고 살기 위해' 다닌다고?"

이와 같은 지적을 이어가며 김규항 발행인은 "불편한 얘기라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노골적으로 "불편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중 일부가 바로 "삼성에 다니는 분들"이다.

"삼성에 다니는 모든 분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나와도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 야만적 상황을 조금은 불편해하길 바란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한 청중이 "먹고 살기 위해 삼성에 다니는 노동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이어서 "삼성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니는 회사"라며 경제적 안위를 누리는 삶과 양심적으로 떳떳한 삶은 '선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2,30대 대기업 직원들이 '생활과 신념에 괴리를 느낀다'며 고충을 토로하는데, 나는 그들이 좀 더 정직해졌으면 좋겠다. 누가 그 사람을 강제로 그 회사에 입사시킨 것이 아니지 않나. 양심적 불편함을 무릅쓰더라도 경제적 안위를 누리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선택을 했으면서 품위나 양심까지 건사하겠다는 건 욕심이다."

김규항 발행인의 '선택'은 삼성 직원들의 그것과는 반대였다. 그는 "삶의 공간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윤리적 하한선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며 "삼성은 그걸 벗어나는 부분이 많으니 되도록 안 다니는 게 낫다"고 직언했다.

"복지 사회, 아이들이 맘껏 놀아야 온다"

김규항 발행인은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기업 회사원 노릇이나 대도시에서의 삶은 피하라"라며 '품위 있는 삶'을 권유한다고 한다. 그가 어린이·청소년용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하는 이유도 더 많은 아이들의 선택을 돕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교실 풍경은 그의 바람 같지만은 않다.

"얼마 전 아는 고등학교 교사 한 분이 반 아이들한테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심어주고 싶어서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읽힌 모양이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건희 폼 난다. 부럽다. 이렇게 살고 싶다'고. 어른들이 이건희를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중성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아예 어릴 때부터 그런 식의 인생을 멋지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요즘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 경쟁에 내몰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경쟁 사회를 내면화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 힘을 합해 뭔가를 하면 자기 혼자 욕심을 부렸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며 "그래서 (경쟁하기보다) 맘껏 놀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래야만 복지 사회가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복지 사회는 내 것만 욕심낸다고 오로지 나한테 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는 사회"라면서 "그래서 (아이들이) 경쟁에서 벗어나서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자의 선행, 세상 못 바꾼다!"

복지와 관련된 현안 가운데 최근 가장 '뜨거운 감자'인 무상 급식 논쟁을 놓고 그는 "무상 급식은 애들 눈칫밥 주지 말고 밥 주자는 것"이라며 "복지를 떠나 아이들 인권 문제, 염치와 윤리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서울시 무상 급식 조례안에 반발한 오세훈 시장에 대해 "서울시 1년 홍보비에 약 800억 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서울 시내 초등학교 1년 무상 급식 예산이 700~750억 밖에 안 된다"고 비판했다. 또한 무상 급식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우리 사회에 복지란 개념이 덜 확산된 것 같다. 그래서 부잣집 아이들까지 무상으로 밥을 줘야하냐는 생떼에 현혹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무상 급식의 보편화는 복지에 대한 시민의식이 정립되는 계기도 마련할 것이다."

한편, 무상 급식을 비롯한 복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화두라며 "우리가 지금 미국식 자본주의로 갈 것인지, 유럽식 자본주의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식 빈곤 해결 방법을 단순하게 말하면 '아름다운' 부자가 '불쌍한' 빈민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다. 부자의 기부·선행, 동정심에 의존하면서 빈곤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반면 복지를 제도로 안착시킨 유럽 사회에서는 빈민이 지원을 받으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이든 사회생활을 하다가 위기에 처했다면 당연한 권리로서 국가에 도움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다. 부자들도 기부가 아니라 세금을 통해 번 돈을 환원한다.

한국은 1980년대에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바꿔보자'는 급진적인 생각에 대한 반동인지 몰라도, 1990년대 들어서는 미국식 빈곤 해결 방법이 강조됐다. 그러나 소수의 내면에 의존하는 방식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빈곤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 '위기의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 ⓒ프레시안(최형락)


은근히 자행되는 폭력들, 학부모들의 '부당 거래', 선행에 숨은 위험성 등 김규항 발행인은 내내 지나치기 쉽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싶어 하는 문제들만을 지적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불편한 얘기만 늘어놔서 죄송하다"면서도 "많은 시민들이 좀 더 긴장하며 살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사람들을 무조건 때려잡는 방식이 아닌,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자본의 폭력과 지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야만적 폭력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시민들이 얼마나 긴장하느냐, 저항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그런 부분들이 강화된 시민 의식을 기대한다.

무엇보다 '내 새끼'만 생각하지 말자. 전부 내 새끼만 생각하니 '우리 새끼'들이 모두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왜 도덕인가' 토론회④] 우석훈 "한국 복지, 이제 걸음마 수준"

 

 
"오세훈 서울시장이 정 그렇게 '무상' 급식에 반대한다면, 우리도 무상으로 밥 먹겠다고 하지 말고 돈을 내고 먹자. 한 달에 500원만 내는 '500원 급식'을 하면 어떨까?"

<88만 원 세대>(박권일·우석훈 지음, 레디앙 펴냄)의 저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무상 급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멕시코에서는 국립대학교의 경우 공짜로 학교를 보내주되,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미안함을 가지라고 상징적으로 등록금을 2~4페소,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400원 정도 물렸다"고 말했다. 유럽은 물론이고 멕시코 같은 나라도 일찌감치 무상 교육을 하는 마당에, 고작 무상 급식에 훼방을 놓는 오세훈 시장을 비롯한 보수 세력을 꼬집은 것이다.

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에서 우석훈 소장은 젊은 시절 유럽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복지 관련 일화를 풀어냈다. 그에게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갈 길이 먼 사회'였다. 그만큼 한국과 유럽의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 지난 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 왼쪽부터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용철 변호사,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학비 공짜인 유럽은 '망국적 포퓰리즘' 국가?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김민웅 성공회대학교수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 급식 반대 논리에 대한 견해를 묻자, 우석훈 소장은 "유럽의 무상 교육에 비하면 무상 급식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운을 뗐다.

김민웅 : 무상 급식 논란을 두고 여론이 뜨겁다. 오세훈 시장은 "무상 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말했다.

우석훈 : 오세훈 시장 논리대로라면 대학교 학비가 공짜인 유럽은 벌써 망하고도 남았다. 유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스위스에는 세계적인 초국적기업 네슬레 회장 아들도 등록금을 50만 원만 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던가? 무상 급식은 무상 교육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유럽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국민소득이 8000~1만 달러일 때부터 대학생에게 등록금을 지원했다. 한국은 지금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인데도 등록금만 1000만 원 가까이 낸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공부를 잘 하던가? 공부를 못하면 밥이라도 맛있게 먹여야 하지 않겠나?

"반려동물 의료보험이 우습다고?"

서울 시장이 무상 급식을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과격한 언사로 공격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무상 급식을 포함한 복지 정책은 여전히 생소하다. 복지를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하는 이들도 드물다. 복지를 원하는 시민이 있는 반면 복지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민도 많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김민웅 교수는 "무상 교육이 진보의 정치적 구호였는데 시민들이 이를 외면했다가 최근에 무상 급식은 받아들였다"라고 현재 한국 사회가 가진 복지에 대한 인식 수준을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복지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느냐"고 우석훈 소장에게 물었다.

"유럽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복지가 왜 필요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생소하다. 복지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석훈 소장은 이렇게 대답하며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덧붙였다. 복지가 왜 필요한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복지를 확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우 소장은 한국과 유럽의 복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고자 반려동물의 예를 들었다.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영국에서 개,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에게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문제로 격론이 붙었다. 찬성하는 사람의 논리가 그럴 듯하다. 가난한 사람도 반려동물을 많이 키운다. 노숙인도 추우니 개를 끼고 잔다.

그런데 영국은 사람의 병원비는 무상인데 반해서 개,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의 병원비가 오히려 비싸다. 이런 사정 탓에, 반려동물 몇 마리까지 의료보험을 지원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결국 한 사람당 강아지 2~3마리까지 적용해주기로 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추운 날 밥도 못 먹는 사람이 많을 텐데 반려동물에게까지 의료보험을 적용해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복지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서 사람이 아닌 대상까지 복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개,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까지 복지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윤리의 대상도 넓어진다. 사람이 지켜야 하는 가치를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개, 고양이도 사람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같은 사람인 이웃에 대한 공감의 폭도 넓어질 수 있을 테고."

"사람을 때리느니 차라리 전화기를 던져라!"

유럽에서는 도덕의 대상에 사람이 아닌 동물까지 포함되고 있다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도덕성마저 등한시되는 사례가 많다. 최근에 한국 사회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재벌 2세인 최철원 씨가 이른바 '맷값'을 주고 운수업자를 폭행한 사건을 두고 여론이 들끓었다.

우석훈 소장은 "재벌들에게만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다"며 최철원 폭행 사건을 "소아병적인 현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긴 지 오래인데, 아직도 재벌들의 시계는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대기업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좋은 회사 사장실에는 전화기도 좋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1만 원짜리 전화기가 있더라. 왜 그런가 했더니 직원이 잘못하면 던지라고 있는 거였다. 그 전화기는 선이 있어서 던져도 앞에 떨어지지 맞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우리 재벌을 변화시켰던 민주화의 가장 큰 성과(?)였다. 차라리 전화를 부수고 말지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합의를 이룬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흔히 상사부하를 때렸다. 회사뿐 아니라 재벌, 운동권, 대학 동문회도 마찬가지였다. 밖에서는 민주화를 말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자기 부인을 때리는 게 부당하다는 것을 좌·우파의 상당수가 이해를 못하던 시기였다. 유독 재벌만 아직도 20~30년 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부당한 거래다. 그렇다면 언제 부당 거래가 생길까? 우 소장은 "뭔가 잘못됐는데 '얘기하면 너만 다쳐'라고 말하며 눈감을 때"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부당 거래가 생기고 용납되는 이유는 이를 고발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겁 혹은 먹고사니즘"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필연 몰락 바라는 시민들에 희망을 건다"

우석훈 소장이 경험한 두 가지 풍경, '민주화를 말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자기 부인을 때리는 운동권'과 '애완동물도 의료보험을 적용받는 유럽'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그러나 우 소장은 한국 사회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시민이 부정의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실은 오늘(7일)이 SBS 드라마 <자이언트>가 끝나는 날"이라며 "이 토론회를 9시에 끝내면 들어가서 볼 수 있는데…"라고 운을 떼 청중의 폭소를 이끌어냈다.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조필연'(정보석)이 총리 후보가 돼서 청문회를 한다. 과거에 돈 받고 사람 죽인 것을 다 감춰놔서 서류상으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면 한국 최고의 총리 후보가 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자이언트>를 보면서 한국이 안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 조필연을 싫어하더라. 드라마에서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좋아하면 현실에서도 그럴 거라고 본다. 도덕은 대중의 공감, 느낌, 감정의 흐름을 따라 간다. 한국은 아직 조필연이 안 죽고 총리됐다고 사람들이 기립 박수 치는 사회는 아닌 것 같다."

드라마에서 희망을 본다니 조금은 엉뚱한 답변 아닌가?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민의 '공감 능력'을 선거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대선이 경제 대선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조필연 같은 사람을 뽑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는 대선은 다를 것 같다. 조필연 같은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국민이 절반이니까. 우리가 꿈꾸는 도덕 사회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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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에서 특집좌담을 열었다. 역시 도덕에 관한 문제였던가.

[김용철-김규항-우석훈] '위기의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50대 운수업자를 폭행한 뒤 '맷값'을 던져 논란이 된 최철원 전 M&M 대표가 8일 경찰에 구속 수감됐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보는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법원 판결보다 '유전무죄, 유전무죄'가 현실의 원리가 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법마저 무력한 사회에서, 별안간 '도덕'이 화두가 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로 2010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새 책이 때마침 직설적으로 그것을 묻고 있다. <왜 도덕인가>(이수경·안진환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펴냄).

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센델 교수의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로 확장하는 '위기의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최철원 사건을 포함한 삼성 등 재벌의 부도덕성, 무상 급식 논란 등 최근 현안을 토대로 한 논의가 15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동안 펼쳐졌다.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사회로, 김용철 변호사,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이 패널로 나섰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로 삼성이 상징하는 대기업의 부패 문제를 환기시킨 장본인이며, 우석훈 소장은 토건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인물이다. 김규항 발행인은 다양한 저술 활동으로 한국 학부모의 이기적 욕망을 고발해 왔다.


▲ '위기의 한국 사회, 왜 도덕인가?' 토론회. 왼쪽부터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용철 변호사,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사회를 맡은 김민웅 교수는 지난 5일 타계한 리영희 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를 추도하는 말로 토론회를 열었다. 김 교수는 "리영희 선생님이 생전에 그토록 강조했던 도덕과 정의, 공동체라는 화두가 뒤늦게 외국 학자에 의해 환기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도 "누가 기회를 제공했건 그것을 발판 삼아 심도 깊은 논의를 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책을 통해 늘 선생님을 존경했다"고, 김규항 발행인은 "그는 정신은 늘 청년이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우석훈 소장은 "지식인은 학식뿐만 아니라 용기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두 가지를 지니고 계셨던 리 선생님이 떠나니까 한 시대가 가는듯한 생각이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은 '부당 거래' 사회다"


▲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민웅 교수는 먼저 뜨거운 현안인 '맷값 사건'을 화두로 꺼냈다. 삼성에서 법률 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재벌의 일상생활을 관찰한 경험이 있는 김용철 변호사는 "그들(재벌들)은 의식이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라며 "일반적인 도덕을 기준으로 얘기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김규항 발행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드러나지 않는 폭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철원처럼 겉으로 폭력성이 드러나는 이들도 문제지만,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처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단전·단수라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이들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촛불 집회 당시 시민들에게 가해진 공권력의 폭력도 문제였지만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 농성 현장에서 벌어진 폭력의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컸다"며 "시민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수록 더욱더 야만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민웅 교수는 재벌들의 비뚤어진 폭력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한국 사회를 '부당 거래'라는 열쇳말로 정리했다. "우리 사회의 자본과 욕망, 폭력이 굴러가는 밑바닥엔 부당 거래의 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부당 거래가 아무 윤리적 제재 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규항 발행인은 "굳이 최철원처럼 '이상한' 사람을 표본 삼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서 부당 거래는 일상적으로 목격된다"고 말했다. 그는 "가령 학부모들은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체벌에 펄펄 뛰지만 중학생이 되면 웬만한 체벌은 묵인한다"며 "체벌이 '어느 정도 아이 성적을 올리는 데 효과가 있겠지' 이런 심리 하에 부당하게 거래되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논의를 받아 우석훈 소장은 "한국에서 부당 거래가 자꾸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먹고사니즘'과 '귀차니즘' 때문"이라면서 "구성원 개개인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당 거래들을 계속 묵인한다면 아무리 잘 만들어진 사회라도 그 사회는 부패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복지'가 왜?

김민웅 교수는 이어서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시의회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무상 급식 논쟁을 화두로 한국 사회에서 복지와 관련된 현안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물었다.

먼저 무상 급식을 놓고 김규항 발행인은 "애들 눈칫밥 주지 말고 밥 주자는 것"이라며 "복지를 떠나 아이들 인권 문제, 염치와 윤리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서울시 1년 홍보비에 약 800억 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서울 시내 초등학교 1년 무상 급식 예산이 700~750억 밖에 안 된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우석훈 소장은 무상 급식이 '망국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오세훈 시장과 일부 한나라당 의원의 반발과 관련해 "유럽에서는 대학에서까지 등록금은 물론 식대 보조금까지 주는데, 겨우 초등학생 무상 급식 앞에 어떻게 '망국'을 붙일 수가 있느냐"며 "진짜 망국의 원흉은 무상 급식이 아니라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세 사람은 "복지란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인데, 한국에선 특수한 것이 돼버렸다"며 입을 모았다.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변호사는 "장애인 야간 학교에서 교사를 하는데, 학생들이 시위에 나가느라 계속 수업을 빠진 일이 있었다"며 "그들은 중증 장애인에 대한 지원 예산 삭감에 반발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헌법엔 재산권을 공공의 이익에 맞게 행사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며 "헌법과 달리 장애인조차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규항 발행인은 "한국 사회가 미국식 자본주의로 갈 것인지, 유럽식 자본주의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무상 급식을 비롯한 복지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자의 기부·선행에 의한 부의 재분배가 장려되는 미국과, 복지를 제도로 안착시킨 유럽 가운데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은 '아름다운' 부자와 '불쌍한' 빈민 간의 일회적 만남에만 의존하면서 빈곤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서 "진정한 복지 사회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에 당연히 먹고살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회, 부자들도 기부가 아니라 세금을 통해 번 돈을 환원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조·중·동'은 보지 말자(?)"

마지막으로 김민웅 교수는 내부 고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언급하면서 시민 각자의 도덕적 각성과 참여를 촉구했다. 그는 "그동안 음모나 추측으로 여겨졌던 일들의 진실이 밝혀지고, 미국 정부의 부도덕성이 드러난 데에는 줄리안 어샌지를 비롯한 <위키리크스> 참여자의 도덕적 신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패널들은 시민사회의 도덕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우석훈 소장은 "드라마 <자이언트>를 열심히 봤는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이 망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대중들이 드라마의 악역인 '조필연'(정보석 분)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우 소장에 따르면 조필연은 악독한 짓을 저지르며 경쟁에서 승리해 총리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조필연은 마지막 회에서 파멸이라는 대단원을 맞게 되는데, 우 소장은 그러한 서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면 현실에서도 그러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도덕은 감정 문제이기도 하다"며 "어떤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국민이 절반 이상이라면 절망적이진 않다"고 덧붙였다.

김용철 변호사는 시민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의 표심을 관찰해 보니 어려운 사람들이 오히려 한나라당을 뽑는다"며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급급해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놓치거나, 자신의 계층을 대변할 정치인을 뽑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적어도 정치에 속지 말고, '조·중·동'은 보는 집과는 통혼도 하지 말자"고 주장해 좌중의 폭소를 끌어냈다.

김규항 발행인 역시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함께 비판적인 시민 의식을 강조했다. 특히 김 발행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판적 사고의 기회마저 잃은, 경쟁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이웃들이 많다"며 "그런 이웃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는 관심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시안(최형락)

토론회에 참석한 주은광(27) 씨는 "사회 현안을 들어 (도덕이란 주제를) 쉽게 풀어줘서 좋았다"며 "앞으로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인의 권유로 토론회를 보러 왔다는 이철호(36) 씨도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삼성의 포장이미지를 벗겨준 김용철 변호사의 얘기가 와닿았다"고 말했다.

반면 아쉬움을 토로하는 참석자들도 있었다. 분당에서 온 손철수(62)씨는 "다소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얘기에만 머물렀다"고 말했으며 임선(28) 씨는 "<왜 도덕인가> 책 얘기가 궁금해서 왔는데 거의 다루지 않아 아쉬웠다"고 평했다. 임 씨는 그러나 "주변에 사회 문제를 논할 사람이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진보적 가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왜 도덕인가>를 번역·출간한 한국경제신문사 출판국(한경BP)의 전준석 기획편집부장은 "많은 시민들이 진보 정권 10년을 경험하면서 복지, 도덕과 같은 진보의 화두가 자신과 가까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며 "인문 서적의 인기에도 이런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예리하다, 청중들!

토론회의 진짜 주인공은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 강당을 가득 메운 150여 명의 청중들이었다. 청중들은 김용철 변호사, 우석훈 소장, 김규항 발행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웃음과 박수를 보내면서도 결코 날카로운 질문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은 청중들과 패널 사이에 오간 문답들이다.

청중 : 삼성 불매 운동 얘기가 나오면 LGSK, 현대 등 국내의 다른 대기업도 경영 승계를 하거나 부패를 저지르는데 왜 그들은 눈감아 주고 삼성만을 문제 삼느냐 하는 이들이 있다.

우석훈 :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을 보면 '무대뽀'(유오성)가 "난 한 놈만 팬다"고 하지 않나. 그 대사처럼 '삼성이 제일 세니까 팬다. 조금만 기다려 봐. 다 불매할 테니까', 이런 게 아닐까. (일동 폭소) 논리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드러나 있는 문제부터 '패야' 하지 않겠는가.

청중 :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 일가뿐 아니라 그 휘하의 삼성 소속 임직원들도 비판한다. 그런데 본인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삼성에 들어간 노동자도 있을 것 아닌가. 이런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김용철 : 삼성이 특검이라는 '폼 나는' 조사를 받을 때, 임원 2500여 명 가운데 진실을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줄 알았다. 한 명도 없더라. 물론 내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지지한다'고 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래서 "술 먹지 말고, 어디 글이라도 내라"라고 말했다.

삼성 임직원들 모두에게 공범의식을 갖고 부끄러워하란 얘긴 아니다. 그러나 경영자의 부도덕이나 잘못된 지배 경영에 대해선 알고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직장 상사라도, 심지어 부모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됐다면 존경할 수 없지 않나.

삼성에 있던 7년 1개월 동안 존경심을 버릴 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검사 누구를 매수하라는 지시에 직접 뇌물을 들고 선배들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이런 갈등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삼성 박차고 나와야지. 인생 한 판인데. (일동 박수)

김규항 : 질문 중에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삼성에 들어간'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질문이 좀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삼성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니는 회사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2,30대 대기업 직원들이 '생활과 신념에 괴리를 느낀다'며 고충을 토로하는데, 나는 그들이 좀 더 정직해졌으면 좋겠다. 누가 그 사람을 강제로 그 회사에 입사시킨 것이 아니지 않나. 양심적 불편함을 무릅쓰더라도 경제적 안위를 누리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그걸 택했으면서 품위나 양심까지 건사하겠다는 건 욕심이다.

이 얘길 반대로 적용하면, 품위 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삼성 같은 데에 몸담는 것은 손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삶의 공간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윤리적 하한선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삼성은 그걸 벗어나는 부분이 많으니 되도록 안 다니는 게 낫다.

삼성에 다니는 모든 분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나와도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 야만적 상황을 조금은 불편해하길 바란다.

청중 : 소수의 선행·기부로 이뤄지는 미국식 부의 재분배가 위험하다고 지적했는데 기부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특히 작은 시민단체의 기부 활성화나 공정 거래, 공정 무역과 같은 흐름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김규항 :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름다운 마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걸로 세상을 바꾼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부자들의 상당수에게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건 없건 부자들이 (복지에) 더 돈을 많이 내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

청중 : 한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데는 역사적인 문제가 크다고 본다. 역사적인 안목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우석훈 :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접수'하기가 쉽다. 그래서 현 대통령도 어영부영하다가 대통령이 됐다. (웃음) 하지만 집권한 후 통치는 정말 어렵다. 표는 줬지만 마음은 안 준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감성, 양심은 있는 것 같아서 희망적이다. 앞으로는 통치가 무엇인가 고민해야 한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통치의 전제조건인 소통에 나서야 하고 시민들도 늘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안은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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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국의 박근혜論]<8>박근혜와 야권의 경쟁자들 

 

한나라당은 이회창이 잃어버린 정권을 찾아오는데 10년 걸렸다. 민주당은 잃어버린 정권을 5년 만에 되찾아올 수 있을까?

정권을 찾아오는데 최소 몇 년이 필요하다는 공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권을 지키는 것보다 찾아오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지키는 쪽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거의 무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수단을 독점하고 있고, 인적자원의 가용 풀도 넓다. 무엇보다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에 비해 정권을 찾아와야 하는 쪽은 정책수단도 거의 없고 인력풀도 좁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도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모든 면에서 지키는 쪽은 성 위에 있고 찾으려는 쪽은 성 아래 있는 형국이다.

병법에도 성을 공격하려면 지키는 쪽보다 10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공격하는 쪽의 자원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정치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싸움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정권교체나 정권 탈환이 정권재창출 못지않게 빈번히 일어나는 걸 보면 과연 정치에는 산술적 계산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손학규, 유시민, 정동영 등 야권의 주자들은 이 산술적 계산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정치생명을 걸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서고 있다. 이들에게 박근혜는 넘을 수 없는 벽일 수도 있지만 화려한 비상을 위한 도약대일 수도 있다.

손학규, 진정성 보였지만 '표의 충성도' 낮아

손학규는 수도권 중간층에 강점이 있는 주자다. 경기도지사 이력도 그렇고 중도 개혁적인 정치 칼라도 그렇다. 민심대장정을 돌파해낸 손학규 특유의 돌파력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나름의 진정성도 젊은 층에게는 매력 있는 포인트다. 한마디로 손학규는 확산성이 큰 주자다. 중간층, 부동층을 흡수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주자다. 반면 표의 충성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손학규는 재야 시절에도 김근태 같은 리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나 비판적 지식인에 가까웠고 정치권에 입문한 후에도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유시민 전 장관, 손학규 대표, 정동영 최고위원 ⓒ뉴시스

당대표임에도 손학규에게서는 여전히 비주류의 냄새가 난다. 맏며느리 보다는 데릴사위 같은 느낌이다. 이런 한계적 성격은 중간층과의 접점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폭발력을 갖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제든 주저앉을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지지도가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 표의 충성도가 낮은 것이다.

그가 2007년에 끝내 한나라당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민주당으로 옮겨온 것도 따지고 보면 표의 충성도가 높지 않아서였다. 당장의 패배도 패배지만 그 패배를 딛고 일어서 2012년을 향해 도전할 단단한 기반을 한나라당 안에서 구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대효과가 꺼지면서 별다른 추가 상승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손학규 측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뚜렷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 탓일 것이다.

유시민의 경쟁력, 그리고 유시민의 '짐'

유시민은 손학규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매우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갖고 있다. '노빠' 못지않은 '유빠'의 존재가 지금의 유시민을 만들었다. 유시민은 '유빠', 즉 열광적 지지자를 만들어내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유빠'를 끌어들이는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한 어법을 받쳐주는 것은 폭넓은 독서와 필력이다. 그래서 유시민은 간단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국회 의석 하나 없는 국민참여당의 후보로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민주진영 단일후보가 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유시민 개인의 경쟁력 못지않게 국민참여당의 경쟁력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 세력의 일부가 모인 당이다. 노무현 세력을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인 안희정, 이광재는 민주당에 있고 김두관은 무소속이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의 영원한 비서실장 문재인은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유시민이 노무현 계승을 말할 수는 있으나 노무현의 적통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통 야당의 적장자를 자임하고 있는 민주당과의 세 대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손학규, 정동영은 민주당이 끌어주는대로 올라타면 되는데,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에 올라탄다기 보다는 국민참여당을 끌고 가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것이 6.2 선거 내내 유시민의 행보가 무거웠던 이유였다. 더 나아가 그가 경기도지사 야권후보 단일화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표를 모두 흡수하지 못해 김문수에게 석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표의 확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정동영, '균형잡힌 1등' 될까, '만년 2등' 머물까,

정동영은 손학규와 유시민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표의 충성도는 유시민만 못하고 표의 확산성은 손학규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점은 정동영에게 위험요소임이 분명하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은 안정적 2등으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는 균형 잡힌 1등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동영이 만약 만년 2등이 아니라 균형 잡힌 1등감 후보로 부상한다면 그가 지닌 화려한 미디어감각과 발군의 이슈감각 또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들은 어디까지나 공중전이 주로 이루어지는 본선에서 1:1 진검승부를 펼칠 때 발휘되는 것이지 백병전 양상으로 치러지는 예선에서 힘을 발휘할 요소들은 아니다.

'野 단일후보 vs 박근혜' 구도 생기면 초박빙 상황 올 것

박근혜에게도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와 어려운 상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예선을 통과하든 선거구도 자체를 바꾸어야 할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야권 후보가 누가 되건 같은 색깔, 같은 구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수도권 중간층에 강점이 있으나 표 충성도가 약해 전선이 복잡하게 만들어질 손학규, 표 충성도는 높으나 확산성이 떨어져 대결 구도가 간명하게 구축될 유시민, 전통적인 야권 후보로서의 안정감과 화려한 감각의 정동영. 결코 간단한 후보들이 아니지만, 확실하게 박근혜를 이길 필승카드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후보들이다. 여성후보 한명숙이 야권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여성 대 여성'식의 맞불전략으로 박근혜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박근혜에게 여성 후보는 '박근혜 브랜드'의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야권의 도전자들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핵심적 변수는 사실 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이들이 '더불어 하나가 되었을 때'의 시너지다. 손학규의 수도권 중간층에 대한 강점과 유시민의 충성도 높은 표, 거기에 정동영의 화려한 감각과 안정감이 더해진다면 각각의 전투력의 단순 합산을 넘어서는 위력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합할 수만 있다면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수도권, 영남의 일부, 계층적으로는 좌파, 중도좌파와 일부 중도우파까지 아우르게 될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들이 합체 로봇처럼 후보단일화의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유기적 유연성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박근혜와 야권 단일후보 간의 1:1 맞대결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초유의 혼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박근혜가 지금부터 대비해가야 하는 상황은 바로 이같은 초박빙의 혼전상황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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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국의 박근혜論]<7> 박근혜와 당내 경쟁자들 

 

11월 2일 열린 한나라당 중진 최고위원연석회의는 김문수, 오세훈의 중앙정치 데뷔무대였다. 김문수는 3선, 오세훈은 초선의 의정경력을 갖고 있으므로 중앙정치 데뷔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러 국회의원 중 한 명이 아니라 대권주자로 중앙정치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 데뷔무대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당헌까지 개정해 두 사람을 '중앙정치 무대'로 불러들인 한나라당 친이계의 고민은 박근혜에 맞설 친이계 주자가 마땅치 않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아무리 봐도 6.2 선거에서 나름대로 경쟁력을 보여준 김문수, 오세훈만한 후보가 없다는 것이다. 대권주자로서 행보하기 쉽지 않은 광역단체장들인 두 사람의 정치적 한계를 당이 직접 나서서 풀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 대항마에 대한 친이계의 갈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정몽준도 있고 이재오도 있다고 하나 이재오는 아무래도 메이커에 가깝고 정몽준은 설사 12월 초에 2022월드컵 유치에 성공해도 2002년과 같은 폭발력을 다시 끌어모으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몽준에게 6.2 지방선거의 패배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오세훈의 경우

오세훈의 경쟁력은 개혁 이미지서울시정의 성과들이다. 정치 입문 전 활발한 언론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개혁 이미지는 17대 국회를 거치면서 '오세훈 브랜드'로 굳어졌다. 오세훈의 개혁 이미지와 서울시장 경력은 부동층이 다수인 수도권 중간층을 흡수해낼 수 있는 요소다. 그가 대권주자로서 본격 행보를 하지 않고 있음에도 6~10%대의 지지를 안정적으로 얻고 있는 것은 그의 지지도가 높은 인지도에 얹혀진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그와 일체감을 느끼는 상당한 정도의 표밭에 기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표들 중에는 지난 4년간의 오세훈 시정에 '감동'받은 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서울'로 표현되는 오세훈 시정은 '이명박의 청계천' 같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충격적 시각효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사실 '청계천' 같은 시각효과는 오세훈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럴만한 소재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데뷔무대에서 오세훈은 자신의 강점, 즉 개혁성과 젊고 참신한 이미지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선명한 메시지를 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서울시의 그물형복지와 희망플러스통장 등을 예로 들면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서울형 복지정책'을 열심히 설명하려 했다. 민주당이 다수인 서울시 의회 때문에 어려우니 중앙당이 도와달라는 호소와 함께. 이것은 열심히 일하는 시장으로서의 스탠스는 될지 몰라도 대권주자에 걸맞는 스탠스는 아니다.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대권주자는 행정직인 시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더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2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왼쪽)과 김문수 경기도지사(오른쪽)ⓒ뉴시스

김문수의 경우

같은 자리에서 김문수는 4대강 사업을 둘러싼 갈등을 예로 들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야당의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민국이 다 같다는 건 여의도식 사고다. 당은 '골목민심'과 '골목정치'를 잘 아는 지자체와 함께 맞춤형 정치를 해야 한다."

김문수의 발언에는 현장을 누비는 단체장 특유의 감각과 강점이 살아 있고, 당에 대해 당당하게 할 말은 하는 대권주자의 배포가 담겨 있다. 김문수의 이런 스탠스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국정 전반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됐다.

"자고 일어나면 총리라고 나타나는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발언도 거침없다.

"CEO리더십만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CEO리더십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해 이윤을 내는 기업의 방식인만큼 국가 리더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국가는 효율성이 없더라도 복지를 챙기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등 기업 운영과 다른 퍼블릭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렇게 김문수는 이미 '김문수의 길'을 걷고 있다.

오세훈, 김문수의 부상 이유?…"수도권 중간층이 중요하다"

김문수, 오세훈이 압도적 1위를 지키고 있는 박근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이유가 있다. 수도권 중간층에 대한 소구력 때문이다. 과연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박근혜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여전히 대권주자로 주목받을 만큼 중요한가? 이들이 박근혜보다 더 강한 본선경쟁력을 가진 후보일 수 있다는 기대 섞인 희망을 만들어 낼 만큼 중요한가? 결론은 '중요하다'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이다.

'예선은 극으로, 본선은 가운데로', 이것은 미국의 대통령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일종의 경향적 법칙이었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다. 부시의 선거 참모 칼 로브는 이를 정면으로 뒤집는 발상의 전환을 감행했다. "예선, 본선 모두 극으로."

칼 로브의 주도 하에 부시는 매우 공세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낙태, 동성애 이슈 등 보수층 입장에서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이슈들을 공세적으로 먼저 들고 나왔다. 남부지역에 산재해 있는 윤리적 근본주의자들을 자극해 투표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칼 로브의 갈라치기 전략의 성공으로 부시는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부시 정권 8년은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의 세월이었다. 선거가 아무리 치열했다해도 일단 끝나면 "함께 다 같이"를 연출하는 미국 특유의 통합적 정치력을 부시는 보여주지 못했다. 갈라치기 선거전략이 국정운영을 잠식했던 탓이다.

부시의 갈라치기 선거전략은 미국의 선거사에서 부시의 인간됨만큼이나 엉뚱하고 생뚱맞은 것이었다. 사실 부시의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미국의 선거는 중간층 포용전략 간의 대결이었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승패는 중간층의 선택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단 뽑힌 자기당 후보가 중간층 공략에 적극 나서는 것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오죽하면 선거전략에 무지개연합이란 말까지 붙었을까.

무지개연합은 말 그대로 빨간 것부터 노랑과 녹색을 거쳐 보라에 이르기까지 '표 되는 것이면 뭐든지 하는' 전략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냉전시대의 전위정당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정당들은 모두 대중정당이고 국민정당이지 않은가. 표 있는 곳으로 정당이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것이 현대 정당정치의 '커먼센스(상식)'다.

오세훈·김문수, 박근혜에 맞설 '중간층 전략' 있나?

만약 중간층이 이미지로 움직인다면 정당과 주자들의 중간층 공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를 몇 달 만에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할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중간층이 이미지가 아니라 정책으로 움직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중간층이 매력을 느끼는 정책이라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정책은 이미지보다는 변신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전문가들의 동원도 상대적으로 손이 쉽다.

중간층의 이 같은 특성을 감안할 때 누구도 이미지나 지역연고 등을 막연하게 내세우면서 중간층에 대한 소구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 경력이 수도권에 상대적으로 많은 중간층, 부동층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 보다는 이들 중간층, 부동층에 어필할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수도권 중간층, 부동층이 갖는 관심 중 첫째는 일자리, 복지 문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젊고 서민층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이 그만큼 개방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오세훈, 김문수의 서울시장, 경기지사 경력보다 박근혜의 행복국가론이 소구력이 떨어질거라고 예단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수도권 단체장이라는 경력과 개혁이미지만으로 수도권 중간층과 부동층을 공략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상대는 거의 모든 지역, 계층, 세대에서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박근혜 아닌가.

김문수, 오세훈의 잠재력에 주목하면 할수록 현실화 과정의 어려움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선거는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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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국의 박근혜論]<6> 이명박과 박근혜 

 

지난 8월 21일 이명박, 박근혜 비밀회동이 청와대에서 있은 직후 박근혜는 이정현 의원을 통해 회동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두 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경제문제를 포함한 국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당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임을 잘 얻어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대화가 있었다."

일체의 배석자를 두지 않고 두 사람만 회동한 자리여서 전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청와대나 친박계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이 "분위기가 좋았다. 지금까지의 회동 중에서 가장 성과가 있었다"는 긍정 평가들이었음을 보면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한 회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시점에서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할만한 대화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정현 의원의 설명에 답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은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를 성공시키면 자신도 역사에 남고 퇴임 후 안전도 자동적으로 보장된다. 성공한 정부, 성공한 대통령만큼 강력한 보호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것은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대의 원조이자 가장 강력한 후원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8.21 평화합의', 과연 지켜질까?

박근혜 전 대표의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 후보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한나라당내 선두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는 때에 따라 결정적인 한마디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통령이 공정한 경선관리까지 약속한다면 금상첨화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더 이상 무얼 바랄것인가. 대통령과 부동의 대권 선두주자 두 사람이 만나 정부의 성공과 정권재창출을 다짐했다면 이미 그것으로 박근혜는 선두주자의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 지난 8월 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회동 모습 ⓒ청와대

문제는 이러한 합의가 지켜지는가이다. 약속이행과 관련해서 박근혜 전 대표는 상대적으로 홀가분하고 유리입장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국정전반에 대해 협조적 자세를 취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협조적 자세를 취하려 해도 '세종시 문제'같이 소신과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사안이 등장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박 전 대표가 정권의 성공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8.21 회동이 있은지 한 달 반쯤 후인 10월 1일 청와대 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는 간단한 건배사를 하는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박근혜 전 대표는 약속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 쪽은 어떨까?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을 위해 노력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당내경선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복잡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 어떤 일보다 더 어렵다는데 정치의 어려움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돼도 상관없다. 박근혜 전 대표가 돼도 괜찮다'고 마음을 먹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친이계와 다른 대권주자들이 대통령의 마음 즉 '이심'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주자들간 경쟁에 끌려 들어가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연 마음을 비울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가 아니라 아직 여러 선택지가 열려있고 어떤 길이건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과 자신감이 있는 임기 중반에 말이다.

'후계'는 북한에나 있는말…현실 정치에는 없다.

역대 대통령들 중 마음을 비운 대통령은 지금껏 한명도 없었다. 예외 없이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의지로 후계 구도를 만들려 했고 정 여의치 않을 경우에도 '누구는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시하려 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임기 마지막까지 레임덕 없이 대통령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차기 구도가 내손 안에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특히 대권주자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켜야만 했다. 이를 통해 대권주자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대권주자들에게 쏠리는 힘을 자신에게 다시 가져와야 했다. 둘째, 자신이 임기 중 추진한 정책들을 계승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맡게 된 역사적 소명이 더 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국정능력이 있건 없건 대통령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국정과제를 밀어붙였다.

일단 두 가지 부분만 얘기해보자. 세 번째는 밑에서 다루겠다.

대통령이 욕심낼만한 국정과제들은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끝마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통령들의 의욕이 강하고 소명의식이 클수록 그들이 손댄 국정과제도 1, 2년 또는 4~5년 안에 끝낼 수 있는 단기 과제들이 아니라 10년 정도는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할 역사적으로 중요한 과제들인 경우가 많았다. 임기가 제한돼 있는 대통령이므로 자신이 그토록 중시한 국정과제가 자신의 임기 종료와 더불어 실종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이 늘 마음 한켠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방식은 세 가지다.

1안은 임기종료까지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의 미련은 갖지 않는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구건 이제는 그의 몫이라고 담백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깨끗한 이 방식을 선택한 대통령은 아쉽게도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2안은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임기 종료 전에 마무리 하거나 최소한 다음 대통령이 되돌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못'이라는 거친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시도했던 방식이다. 이 방식은 국정운영의 여유와 품격을 유지하기 어려운 방식이며 동시에 반대세력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다. 그만큼 후유증도 크다. 반면 정권 실세들은 대체로 이 방식을 선호한다. '복잡한 정치'가 필요 없고 가시적 성과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을 밀어붙여온 그간의 과정도 크게 봐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안은 자신의 위업을 잘 계승할 후계자를 육성해 다음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대통령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한명도 없었다.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전두환, 김대중도 후계자인 노태우, 노무현을 자신의 뜻을 잘 받들고 자신이 추진한 국정과제를 잘 계승하는 대통령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노태우는 전두환 집권 내내 보신하고 근신하며 2인자의 조심스러운 처세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물태우'라 불릴 만큼 패기배포도 없었다. 그런 노태우도 대통령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 버렸다. 이것이 정치다.

노무현을 김대중의 후계자라 했지만 과연 노무현을 김대중이 '만든' 후계자로 볼 것인지는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다. 사실 김대중 입장에서는 후보시절의 노무현이 '탈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 아니었을까 싶다. 노무현도 집권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해 김대중 정부 최대의 치적인 대북정책에 큰 흠집을 남겼다. '후계'란 북한과 같이 완벽하게 통제된 폐쇄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경쟁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차기 권력은 역대 대통령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다

대통령이 자기 손으로 다음 대통령을 만들고 싶어하는 세 번째 이유는 퇴임 후 안전을 보장받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군부독재 권위주의 시절에 '퇴임 후 안전문제'는 주로 독재를 휘두른 대통령의 퇴임 후 신변안전 문제였다.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와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개인적 축재 문제에 면죄부를 얻는 것도 중요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모두 이 문제 때문에 퇴임 후 사법처리 됐다. 민주화된 이후 대통령들의 퇴임 후 문제는 주로 정치자금 특히 돈이 많이 드는 대선자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많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사법처리를 면했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으로 퇴임 후 활동을 계획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자금의 덫에 걸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의 '퇴임 후'를 다음 대통령이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역대 대통령들의 행적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금방 확인된다. '퇴임 후'의 보장은 대통령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함으로써 만들어 가는 것이지 누가 해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만들어내다시피한 차기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차기 권력은 역대 대통령들의 의도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다. 미래권력은 미래권력을 두고 벌이는 차기 주자들간의 경쟁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대통령이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이 아니다. 백보 양보해 현직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차기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의 의도와 구상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차기 대통령에게는 그의 시대가 있고 그의 국민이 있고 그의 권력이 있고 그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70~80% 아닌 40% 지지율에 과연 친이계가 끝까지 따를까?

과연 이명박 대통령은 중립과 공정관리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만드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과정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이며 자신의 이해에 가장 부합하는 선택이다. 그러나 정치가 합리적 계산만이 아니라 즉흥적 감정이나 가망 없는 도전, 또는 결과를 보고 나서야 납득하게 되는 심각한 착각과 오산에 의해 결정될 때가 더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할지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 간 이해관계의 분열이다. 친이계는 지금까지는 이명박 대통령과 이해관계를 같이 해왔다. 이명박정부의 성과는 곧 친이계의 성과였다. 그러나 임기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의 이해관계는 같이 갈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갈수도 있는 복합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의 이해관계가 같이 가는 주요한 동인은 4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다. 사실 과반에도 못 미치는 이 정도의 수치는 그렇게 높은 수치가 아니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초 10%대까지 추락했다가 회복했다는 점, 40%대의 지지율을 1년 넘게 안정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지지율이 일정한 정도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70~80%가 아니라 40%정도의 지지율은 친이계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통상 대통령의 지지율에 기대와 희망이 투영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40%의 대통령 지지율은 차기 권력 창출의 보증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과 친이계는 조만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공산이 크다.

유력한 친이계 주자인 김문수 경기지사와 청와대 간의 갈등이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는 김문수 지사에게 "경기도나 잘 챙겨라"는 발언을 작심하고 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런 정서가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비서들의 공통된 정서일 것이다. 대통령의 길과 차기 주자의 길은 이렇게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여당 후보들, 'MB와 차별화'는 불가피하다

정권을 성공시키고 그 성과를 계승하고 이어받아 정권 재창출을 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차기 대권주자가 있다면 어느 대통령이 그를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지금껏 어떤 대권 주자도 전 정권의 성과를 계승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건 적이 없다. 대선은 미래에 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것으로 경쟁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지난 정권을 계승하겠다"는 주장은 빛바랜 사진처럼 초라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야당 후보들의 주 메뉴가 "정권 심판과 새로운 권력 창출"인 점을 감안하면 스스로 전 정권의 짐을 짊어지고 야당의 심판을 자초할 어리석은 후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여당 후보들의 현 대통령과의 차별화 시도가 불가피한 이유다.

차별화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의 차별화다. 이회창 추종자들이 김영삼 인형을 불태웠던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방식은 무시하는 방식의 차별화다. 정동영이 노무현을 취급했던 방식이다. 정동영은 대선 기간 내내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언급을 교묘하게 회피했다. 야당의 공세도 무시했다. 이명박과 워낙 큰 차이가 나는 선거였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노무현과의 관계에서 정동영은 비교적 큰 부담없이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절충적으로 차별화하는 방식이다. 노무현은 대선기간 내내 줄곧 김대중 대통령의 공과 과를 모두 승계하겠다고 했다. 공은 공대로 계승하고 과는 적극적으로 지양하겠다는 뜻이지만 방점이 공의 계승보다 과의 지양에 있음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박근혜, MB와 차별화 시도할 것…양자 공멸은 피할 수 있을까?

차별화를 한다면 박근혜는 두 번째 방식. 즉 이명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하려 할 것이다. 선두주자가 대통령을 무시하면서 차별화 하면 결국 선두주자가 제시하는 비전을 중심으로 대립구도가 짜여지게 되는데, 이것이 박근혜가 선호하는 방식이고 가장 네거티브적이지 않은 방식이 된다.

반면 친이계 주자들이 차별화를 한다면 세 번째 방식이 불가피하다. 김문수는 "경기도나 잘 챙기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에 대해 "저는 대통령이 잘한다고 보고 있고, 말할 부분에 대해서는 직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제 책무가 아니고 도민을 섬기는 것이 제 책무다. 잘하는 것은 박수를 치고 잘못 하는 부분은 말해야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시시비비를 가려 공은 계승하고 과는 지양한다는 절충적 차별화 그대로다.

절충적 차별화를 시도하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선거일에 다가갈수록 그리고 전세가 불리할수록 공의 계승보다는 과의 지양을 더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차별화가 조금만 과열되거나 역으로 이 같은 절충적 차별화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통령 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게 되면 속절없이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차별화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도의 절제와 균형이 필요한 절충적 차별화를 과연 전세가 불리한 친이계 후보들이 끝까지 견지해 낼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2012 대선을 관전하는 재미있는 포인트 중의 하나다.

마지막 가능성으로 이명박과 친이계의 선제적 도발에 의해 박근혜가 수세에 몰린 나머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의 차별화를 감행하게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명박과 박근혜 모두에게 매우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명박은 권위의 심각한 손상을, 박근혜는 협량한 정치꾼 이미지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너무 큰 부담과 타격이 예상되는 이 길을 두 사람 다 피해가려 할 것이지만 정치가 때로 합리적 타산보다는 즉흥적 기분과 분위기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린 주위에 입을 벌리고 버티고 있는 벙커들처럼 양자 공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극단적 자극적 차별화의 늪을 과연 이명박과 박근혜는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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