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비평가로서 꽤나 글빨을 날리는 신형철이 한겨레에 연재하는 글이다.
사랑에 관한 글이라, 퍼왔다. 헐렁한 사랑, 원래 인간은 그렇게 찐한 사랑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교활하다.
[한겨레] 어른이 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두 편의 ‘19금(禁)’ 시
▣ 신형철 문학평론가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친구가 이렇게 위로한다.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걸 위로라고 하고 있다.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포인트는 ‘여자’가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떤 다른 ‘한’ 여자도 사내의 ‘이’ 여자를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위로는 허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그렇게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여자’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한 여자’로 전락할 때에만 고통은 사라진다. 철학자들이라면 단독성(‘이 여자’)이 특수성(‘한 여자’)이 될 때 실연은 극복된다, 라고 정리할 것이다. 대개는 그리 되게 돼 있다. 그 사내, 조만간 또 다른 ‘이 여자’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미망 속을 헤맸노라고.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 결국은 맞는 말이 되고 만다.
가라타니 고진이 단독성과 특수성이라는 철학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례 삼아 한 이야기를 옮겼다(<탐구 2>). 어려운 개념들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만, 저 사례는 서늘하니 마음에 얹힌다. 한 사람이 문득 이 사람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고, 이 사람이 떠나면서 세상이 잠깐 멈췄다가, 이 사람이 어느덧 다시 한 사람이 되면 애도는 끝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내막이 본래 이토록 헐렁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시가 있다.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 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에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러운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불귀 2’에서)
김소연의 두 번째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에서 한 대목 옮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기야 하겠는가. 때로 사랑은 거짓말의 힘으로 세월을 견딘다. 상대의 거짓말을 묵인해주는 거짓말, 그것이 같은 세월을 견디고 있는 이에 대한 예의가 되기도 한다. 날이 저물면 밥을 먹고 날이 밝으면 밥을 먹는 시간들이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청승을 떠는 게 아니다. 이것도 사랑 아닌가.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 사람’이 되어가기도 하겠다.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낙화유수’에서)
함성호의 세 번째 시집 <너무 아름다운 병>(문학과지성사)에서 옮겨 적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고 말했을 한 사내가 변했다.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때는 진실했다질 않는가. 꽃 지고 물 흐르듯 그렇게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이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투다. 위악이 아니다. 이것도 사랑 아닌가. 어차피 세상만사 낙화유수일 뿐이라고 청산유수로 주워섬기는 이 사내를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시들은 ‘19금(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자도 실은 잘 모르는, 어른들의 시다. 사랑에 대해 터무니없는 희망 혹은 절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약이 될 것이다. (부기: 위 시를 쓴 두 사람은 부부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지를 모르겠으면서도 이렇게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