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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ㅣ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윤희상의 한 마디
1980년 광주에서 내가 고등학생일 때 계엄군이 나의 시를 검열했다. 나는 한 편의 시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의 시를 내가 검열한다. 길에서 시를 쓴다. 죽으면 시궁창의 개뼈다귀다. 언제나 가출한 날의 첫날이다.
2014년 서울에서
시인은 오늘도 가출한 첫날을 걷고 있겠군요. 저도 오늘 가출했습니다. 집을 돌아보며 다시 여기에 오지 못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손톱
마음과 달리 자라요
발톱보다 더 빨리 자라요
천천히 자라는 느낌이 들어요
자라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요
그래서, 아파요
손톱은 피부라지요
도구이지만, 어쩌다가 장식이에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요
손톱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일하면서 다 닳았어요
전쟁터로 나서는 군인은 자른 손톱을
고향집으로 보내고,
외로운 창녀는 온종일 손톱을 다듬어요
멋쟁이는 손톱에 색을 바르고,
그러는 사이게 아이는 손톱을 깨물어요
어린 나느 대도시로 가출하고,
거리의 낯선 청년은 뒷골목에서
나의 손톱을 살펴요
뭘 보았을까요
손톱이 표정이군요
들킨 마음은 무서워요
손톱위에서 봉숭아꽃 물들이던 날들은
서둘러서 저물어요
아, 어떻게 해요
손톱은 거짓을 몰라요
거짓을 모르는 손톱이 있군요. 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손톱은 돌멩이처럼 단단했습니다. 이제 아이는 엄마가 잘라주는게 싫은지 열심히 입으로 뜯어먹고 있답니다. 아이 뱃속에서 손톱은 자라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봉숭아꽃 물들이던 순간들의 손톱도 있었군요. 그런 날들과 친구들의 손톱이 보고 싶어집니다.
얘들아! 너희들 손톱도 잘 있겠지?
갈 수 없는 나라
자고 일어나 방문을 열면 감나무 밑이 환했다 아침마다
누나와 함께 떨어진 감꽃을 주웠다 꽃밭에서
피는 꽃마다 하늘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꽃이 피면
들고 있던 하늘도 무너졌다 어버지의 양복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쳤다 훔친 돈을 담장 기왓장 아래
숨겼다 앵두나무 그늘이 좋았다 둥근 그늘 밑으로
들어가 돗자리를 깔았다 해 질 무렵,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뒤뜰에서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비가 오면, 마당의
백일홍 나무는 기가 오는 쪽만 젖었다
'갈 수 없는 나라'라고 쓴 시인의 말에 그 나라에 따라 갔다가 길을 잃은 느낌입니다. 아니, 감나무 아래 앵두나무 아래 백일홍 나무 아래에서 길을 잃고 한 철 나고 싶기도 합니다. 언니와 함께 조그만 수박을 지고 오던 길 아래 서고 싶기도 합니다. 내가 그 시절을 그리워할 줄은 그때는 몰랐죠. 너무 무거운 수박짐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던 어린 내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나라를 헤매다 울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합니다.
김승재
김승재는 나의 친구이다. 서울 장충초등학교 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다. 2008년 4월 10일, 집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죽었다. 오매, 우리집 대들보가 무너져부렀네. 고향에서 오신 어머니가 영안실에서 밤이 새도록 통곡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죽은 친구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제자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죽은 친구를 강진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 몰래, 죽은 친구에게 읽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유림이에요.
좋은 나라 가셔서
행복하게 사시고
다음 생에는 꼭 오래 사세요
김승재를 그리워하는 친구, 어머니, 제자가 살아 있습니다. 김승재를 모르는 저도 목이 멥니다. 김승재를 기억하듯이 우리는 죽은 누군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이죠. 김승재는 시인 친구에게 고마워할까요? "너나 잘 살아 임마" 하지 않을까요.
김대중주의자
너희가 대통령이라면
나의 대통령은 꽃피는 봄이다
너희가 대통령이라면
나의 대통령은 비내리는 여름이다
너희가 대통령이라면
나의 대통령은 단풍드는 가을이다
너희가 대통령이라면
나의 대통령은 눈 내리는 겨울이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나의 대통령은 이미 죽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더 오래 산다
내가 아무도 몰래 만나고 온다
너희가 대통령이라면
나의 대통령은 저 들판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꽃피는 봄과 비 내리는 여름, 단풍 드는 가을과 눈리는 겨울이 대통령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신이 납니다. 저 들판의 바람이 대통령입니다. 기죽지 말고 기운내자고요. 시인의 위문편지가 고맙습니다.
영산포 장날
광식이네 소 팔러 가는 날입니다
서둘러서 아침밥을 먹고
우리는 광식이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두 야단이었습니다
마당에서 광식이 엄마가
소의 고삐를 붙잡고
소에게 억지로 여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소는 더 먹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물을 다 먹은 소는 마치 새끼를 밴 것처럼
배가 부풀어올랐습니다
이제 광식이 아버지가 소를 이끌고 문을 나서는데
광식이 엄마가 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길에는 아카시아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소는 오줌을 싸며 걷고
우리는 그 길을 뒤따라 걸었습니다
읍내에 이르러 광식이 아버지와 소는 우시장으로 가고
우리는 학교로 갔습니다
그날 광식이 아버지는
술에 취했습니다
우리는 아카시아 향애 취했습니다
모두 흔들렸습니다
영산포 장날에 가고 싶습니다. 그 장날에 광식이네 소도 보고 아카시아 꽃 향기에 취해보고 싶습니다. 그리운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보여준 시인에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냅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라는 말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나'였던 아이에게 "고생했다 잘 가거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