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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양장) ㅣ 새움 세계문학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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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예절 감각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하게 나뉘는 것이다. -17p
한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은, 아름다운 작은 바보여야 할 테니까요. -61p
나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었고, 무궁무진한 삶의 다양성에 의해 매혹되기도 하고 동시에 역겨워지기도 했던 것이다. -111p
이 세상에 관해 수근거릴 필요가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그에 관해 수근거린다는 자체가 그가 곧 낭만적인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증거인 셈이었다. -133p
대부분의 가장은 결국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작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173p
마치 실재하는 믿기 어려운 존재로서의 그녀 외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267p
자신의 적응력을 쏟아부었던 사항들을 새로운 눈을 통해 바라보는 일은 변함없이 슬픈 일이다. -303p
“나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거야.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잖아.”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고? 왜 안 돼. 당연히 할 수 있네! 나는 모든 것을 이전과 똑같이 바로잡아 놓을 걸세” -321p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 그녀는 그를 위해 꽃처럼 피어났고 생은 완벽했다. -3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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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서평을 다시 읽어보니 ‘미친 사랑은 파멸을 부른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는 뉘앙스로 서평을 썼었다.(너무 못써서 다시 읽기 힘들었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 속에서도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단지 한 명의 연인을 미친듯이 사랑했다는 정도다. 이미 <이방인>으로 한차례 감동을 겪은 후라 이정서 번역가의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집어 들으면서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애잔한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설레임과 함께 내가 느끼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역시나. 이정서 번역가의 번역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다 읽고 난 후 전체적인 느낌 그 자체는 비슷했지만 내가 좀 더 어른이 된 후에 다시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번역 자체가 좋아서 그런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새로이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보니 줄거리는 과감하게 패스하고, 깊게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정서 번역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실 ‘직역’이라 하면 자연스럽지 못하고 딱딱한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때문에 자연히 가독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처음 이정서 번역가가 번역한 <이방인>을 접했을 때에도 그의 말이 이해는 됐지만 ‘그래도 독자를 위해서라면 자연스럽게 고쳐 쓰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동시에 힘들게 읽었기 때문인데, 이 기억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 집어 들면서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생겨났다. 다 읽고난 후에도 ‘그래도 조금 자연스러운게 더 좋기는 하겠다’ 라는 생각에 아직 직역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그의 번역을 두 번째 접해서 그런지 아니면 카뮈보다는 제럴드의 문체가 더 부드러운건지 훨씬 읽기 수월했으면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이면과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음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 도서는 왼쪽 페이지는 원문. 오른쪽 페이지는 번역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는 슬슬 인정해야 하지 않은가 싶다. ‘이정서’ 세 글자는 번역의 새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번역한 책을 손에 집어들 때는 내가 몰랐던 어떤 새로운 이면을 (사실은 그게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르지만) 발견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 거린다.
도대체 그의 어디가 ‘위대한’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아마도 도대체 그의 어디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일까? 가 아닐까? 나 역시 이전에 읽었을 때에 이러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제목에 괴리감을 느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그의 순정한 사랑. 저자는 이것 하나만으로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했던 걸까? 확실히 개츠비는 데이지 한 사람을 위해 온 인생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우연이었군요.”
“하지만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요.”
“왜요?”
“개츠비는 바로 그 만 건너편에 데이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을 샀던 거에요.” -229p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군인이었던 그는 데이지를 만난 후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고, 결국 그는 그 모든 것이 ‘애초에’ 자신의 것이었던 듯 두 손에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곳에 크고 화려한 집까지 구입한다. 빠르게 부를 손에 거머쥔 것도 놀랍지만 집을 구한 가장 큰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이 보이는 곳이라니. 오싹하기도 하지만 로맨틱하기도 하다.
개츠비는 오직 데이지 한 사람만을 사랑한 사람이자 빼어난 두뇌로 빠르게 부를 손에 거머쥔 사람이자 빼어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과거와 대항하며 현재를 꾸려나가려” 도전한 그의 모습이 ‘위대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쳐지면서. -523p” 이 유명한 마지막 문장은 개츠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논할 때 “데이지는 나쁜년”이라는 논제가 항상 따라온다. 역시 나 또한 1.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부를 따라 결혼한 것 2. 결혼한 몸으로 다시 만난 첫사랑을 흔들어 놓은 것 3. 다 줄 것 처럼 굴더니 결국은 다시 버린 것 을 토대로 “데이지는 나쁜년”에 한 표를 던졌다. 이정서표 번역을 다시 읽어보니 우리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 부분은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될 수 밖에 없으니 구구절절 적지 않겠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운명과 우연의 어긋난 사랑의 기구함을 뼛속 깊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되돌리려는 노력과 어쩔 수 없는 것 그리고 현재와 과거의 다툼.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어긋나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사랑이 맞는 걸까? ‘위대한’ 책은 언제나 우리에게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를 되려 건넨다.
-마지막으로 이정서 번역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위대한 것은 개츠비가 아니라 ‘닉’ 아닐까?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개츠비에 대해 독자에게 이야기 하지만 인품도 의리도 성실함도 적절한 맺고 끊음도 조금도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고 완벽하다. 개츠비가 아닌 닉의 성격에 집중해서 한 번만 이 책을 다시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지만 어쩐지 쉬이 써지질 않는다. 고전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건지,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질 않아서 그런건지, 좀 더 그럴싸한 글을 쓰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심 때문인지.. 계속해도 마음에 안들 것 같으므로 아쉽지만 조금 찜찜하게 마무리 하는 걸로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