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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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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른 채소를 불빛에 비춰보면서 굉장하구나, 하고 빠져드는 때가 있다. 이것저것 다 누군가 설계도에 기초하여 만든 것 같이 아름답고 정묘하다. ... 후지마루는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결국 요리란 건 생과 사를 잇는 멋진 행위라고 생각한다. -18p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잎사귀 안에 초롱초롱 펼쳐져 있는 세포의 우주. -55p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답다는 것과 쓸쓸하다는 건, 왜 이렇게 닮았을까. -101p
왜 ‘나’와 ‘당신’은 다른가에 대해 분석하고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성과 지성이 요구된다. 차이를 서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감정이 또한 반듯이 필요하다. ... 사고도 감정도 없을 터인 식물이, 인간보다도 타자를 더 잘 수용하고 더 초연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참으로 얄궃다. -146p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은데 한 사람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아요. -162p
그저 식물을 좋아해서, 식물을 좀 더 알고 싶기 때문에 연구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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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표지디자인에 <사랑 없는 세계> 라는 제목. 표지와 상반 되는 글자에 오히려 눈길이 가게 된다. 다소 도전적인 제목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랑이 넘치는 인간 세계에서 사랑이 결여 된 세계에 대한 소설이라니. 저절로 호기심이 샘솟게 된다. 작가는 과연 어떤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걸까? 싶어서 호기심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책을 펼쳐들었다.
-일류 요리사를 꿈꾸며 ‘엔푸쿠타이’에서 일하는(수련하는) 후지마루. 식물을 사랑해서 식물학자가 되어 박사논문을 앞두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있는 모토무라. 그들은 엔푸쿠타이의 직원과 손님으로 만나게 된다. 어느날 모토무라의 연구실로 배달을 가게 된 후지마루는 그녀의 이해하기 힘든 티셔츠 취향과 친절하게 자신이 하는 연구에 대해 설명해주는 모습, 그리고 분홍색의 작은 발뒤꿈치를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빠지게 된다. 후지마루는 모토무라의 연구실에 일주일에 한차례 가량 배달을 하면서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그들이 하는 연구를 옆에서 바라보고, 들으며 후지마루는 ‘연구와 요리는 닮은 구석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 자신도 점점 식물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후지마루는 행복하게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던 모토무라에게 자신도 모르게 고백을 하게 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연구소에서 이년간 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식물을 연구했기 때문에 내가 했던 연구들과 모토무라가 행하는 연구는 닮은 구석이 많아서 익숙한 연구 장비들과 연구 방식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얼마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연구 과정을 잘 설명 했는지, 번역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출판한 뒤 식물학 공헌자에게 수여하는 특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식물학자들이 어떻게 연구를 하고 어떤 고충이 있는지에 대해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상세하고 동시에 유쾌하게 소설을 집필했다. 책을 읽으면서 식물학 전공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나 놀랍게도 저자는 연극영상학과였다. 왠만한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요리와 식물 연구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가 <사랑 없는 세계>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요리에 대한 후지마루의 열정도 독자들로 하여금 감탄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지만 식물을 대하는 모토무라 연구실 일당의 진중함에도 감탄하게 된다. 게다가 ‘요리’와 ‘식물’, ‘연구’는 서로 상관없는 분야인 것 같은데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은 부분에 새삼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게 된다. 모든 일은 어딘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 모든 일의 소중함에 있어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멘트 가루와 물을 정량을 맞춰서 잘 섞어줘야 하고, 설계도를 보면서 순서대로 신중하게 쌓아 올려야 한다. 어쩌면 작가는 모든 직업의 존귀는 동등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제목부터 <사랑 없는 세계> 이며 오롯이 연구에만 집중하는 모토무라를 바라보면, 참 각박하다- 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이 마지막 페이지로 달려갈 수록 ‘사실 소설 속의 모든 내용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 모두가 어떠한 형태로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다. 그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어쨌든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으니까. 후지마루와 모토무라를 바라보며 두 사람의 사랑만을 기다리던 독자들은 페이지가 마지막에 다다를때 쯔음 작가의 의도를 깨닫고 훈훈한 마음이 된다. 이곳이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세계>가 아닌가.
-상세한 식물 연구 과정에 한 번 놀라고, 그 과정이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데 웃음 포인트를 적절하게 심어 놓아서 계속해서 빵빵 터지며 즐겁게 읽을 수 있음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덕분에 독자들도 자연히 연구 과정 자체에도 빠져들어 다음엔 어떤 실험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마저 샘솟게 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열정과 각자의 사랑은 흐뭇한 마음과 함께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나는 얼마나 스스로의 일들을 사랑했는가. <사랑 없는 세계>를 읽는동안 여러 모양의 사랑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이 가득담긴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