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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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맞닥뜨린 그 첫 순간과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94p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162p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162p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174p
아무 이유도 목적의식도 없이 세상에 내려진 후, 죽음만이 유일한 필연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조건이다. -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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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읽고싶었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제목이 사람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뭔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에 호기심이 동했는데 왜인지 도저히 손이 가질 않아서 이제서야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왜 손이 가질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예감’이라는 글자의 무게에 흥미와 기피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역시나 예감했던 대로,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내용에 책장을 덮은 후 멍하니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됐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친구 에이드리언이 어느 날 자살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저주를 담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었다는 것을 40여년이 지나서 알게 된다. 지독하게 평범한 삶을 살던 토니는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끊임없이 과거를 되풀이해 회상하는데..

*기억의 유동성에 관하여*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확신 하십니까? 가령, 어젯밤 지하철에서 당신의 구두를 밟은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확신할 수 있다면, 확신에 따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성이 당신의 구두를 밟았다고 가정합시다. 한 달 뒤 그 사람이 성인 이었는지 아이였는지는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한 달 뒤 그녀가 성인이었다는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면, 우리는 과연 그 기억을 신뢰해도 되는 걸까요? 또한 기억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95p” 사람은 정당화, 자기 합리화를 부여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기억을 신뢰할 수 있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는 이런 인간 기억의 모순적인 면을 낱낱이 까발리며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대부분 토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서술 되기 때문에 서스펜스적인 느낌은 아쉽게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잔잔하게 진행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자기 끼어드는 낯선 ‘사실’에 놀라움과 동시에 앞으로의 전개, 그러니까 토니가 했던 일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 되어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된다.

-생각보다 잔잔하게 흘러가서 쉽게 읽힌다.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반스의 모든 책을 이렇게 힘들게 읽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체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읽기 답답한 면이 있어서 꽤 고전해서 읽었다. 오래도록 힘겹게 읽은 것에 비하면 리뷰는 꽤 쉬이 쓰였는데, 그건 그만큼 책이 담고 있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는 누구인가. 누가 그를 소설가라 칭하는가? 나는 그가 알베르 카뮈 버금가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뒤늦게 읽으며 이전에 읽었던 그의 에세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기억과 죽음에 관한 고찰을 반스보다 더 깊고,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을 나는 또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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