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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줄리언 반스의 신작 연애의 기억. 제목 그대로 한 사람의 연애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 혹은 단 하나의 연애에 대한. 첫사랑이 인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서술한 책은 또 없을 것이다. 19살의 철없는 소년 폴이 중년 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소설, 동시에 그 소년의 인생이 담긴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첫사랑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그리고 시작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달콤하고 도전적이고 완벽했던 사랑이, 어떻게 서서히 망가지는지 샅샅이 나와있다. 이 소설이 최고이자 역설적인 이유는. 폴이 스스로의 기억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히 연애소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로 서서히 번져나간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 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 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13p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의 질문으로.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 한 가지는, ‘결국’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폴이 어째서 결국 이런 질문을 단 하나의 질문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은 폴의 사랑을 대하는 성향에 대해 알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릴적 자신의 첫사랑인 중년 부인의 ‘한 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76p’ 라는 말이 폴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모두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폴에게 그 이야기는 중년부인과의 밀회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하나의 이야기는 유일한 질문으로 폴에게 남고 만다.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는 폴의 생애 내내, 혹은 그녀의 생애 내내 지속 되고만다. 폴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며 보낸다. 또 그녀가 남편에게 받는 학대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면서. 시도때도 없이 터지는 그녀의 천덕스러운 웃음과 ‘우아한’ 귓볼에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가끔은 ‘타인과 다른 사랑’을 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더욱 사랑한다고 까지 느낀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바로 ‘옆’동네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부모와 가족들에게 모두 알린 상태로. 서로 사랑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알리지는 않는 사이로 함께 지내기로한 것이다. (둘 다 타인에게는 서로의 관계를 다른 핑계거리로 얼버부리고만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의 부정적인 측면을 아주 잘 알면서도 ‘사랑은 탄성이 있어. 희석되는 게 아니야. 늘어나. -102p’ 라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서로에게 기대기로 한다.
-그들은 그렇게 평생 행복할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동화가 아님을 폴은 곧. 깨닫게 된다.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지속하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301p’ 불로 지져진 심장으로 도착한 곳은 책임감을 동반한 죄책감과 의무.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302p’ 그러하여 이야기는 드디어 결말로 다가간다. ‘가장 열렬하고 가장 잔인한 사랑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해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 그의 사랑은 사라졌다, 쫒겨나버렸다, ... 하지만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랑을 대체한 감정이 전에 그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만큼이나 격렬하다는 점이었다. ... 그리고 이로써, 마침내, 그녀를 되돌려줄 수밖에 없을 때가 왔다. -313p’ 되돌려줄 수 밖에 - 폴은 마치 그녀를 잠시 빌렸었고, 빌려온 책임감에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다가 이제 더이상 할 수있는 것도 없고 의욕도 잃었을 때 폴은 비로소 그녀를 포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한 번 어떤 것들을 겪으면, 안으로 들어온 그들의 존재는 정말이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327p’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그녀는 그림자 처럼 영원히 그를 쫒아다니게 된다.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 곧 행복한 것이다. -329p 라고 말하는 폴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독자들이 추측할 수 있는건 폴이 과거에는 행복했을지언정 지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보면 폴을 행복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 되는 내내 후회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했던 연애에 대한 공허함과 크기를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136p’ 그렇게 그는 결국 단 하나의 이야기로 막을 내려버린다.
-줄리언반스의 글들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주제로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연애의기억’도 물론 마찬가지다. 단순히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속에 기억과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 사랑과 죄책감 등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어서. 항상. 한 권의 책을 읽고 너무 많은 정보를 흡수한 기분이 든다.
-“아니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내 유일한 아쉬움은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을 놓치게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세?”
“오 나는 그런거 믿지 않아. 그런 게 있다면 죄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킬 거야. 서로 멀리하면서 평생을 보낸 그 모든 사람들. 그런데 갑자기 거기 다 다시 나타나다니. 무슨 무시무시한 브리지 파티처럼” -64p 즐겁게 읽은 부분으로 서평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