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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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필책방에서 <경애의 마음>과 <그 많던 싱아...>를 고민하다 '경애의 마음'을 챙겨 온 것이 못내 미안(?)해서 아니 그 많던 싱아...도 궁금했던 까닭에 냉큼 도서관 찬스를 이용했다. 소설을 온전하게 읽었다면 '싱아'를 분명 기억할 테지만, 읽지 않은 까닭에 나는 자꾸만 '상아'라고 말하곤 했던 것 같다. '싱아'라는 말은 왠지 철자법이 틀린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89쪽



내 기억이 맞다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싱아가 언급되는 장면은 거의 저 장면이 유일하다. 심지어 누가 다 먹었는가..라는 말도 없다. 해서, 도입부에 등장했다면,프루스트의 '마들렌' 효과와 닮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싱아가...유년시절 부터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 그런데 살짝 비슷한 느낌도 있다. 조금은 독특한 소설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온전히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 소설의 정체성을 '허구'라고 규정한다면,<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묘하게 소설로 읽혀진다. 작가님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게 첫 번째 이유였고, 분명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교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할아버지와 애틋한 추억은 없지만, 애증하고 싶은 추억이 있어 웃음이 났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였나 싶다. 엄마에 대한 수만가지 모습들.... 해서 소설은 추억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혀지기도 하고, 한 시대를 관통한 기록물처럼 읽혀지기도 했으나, '엄마'에 관한 기록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식민시대와 해방 전후 그리고 6.25전쟁까지 경험한 시대의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면 책 몇 권은 쓸 수 있을 거란 말은 허언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한 듯 써내려간(아니 기억을 찾아낸) 이야기 속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과장되 있지 않아 더 절절히 와 닿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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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단종애사>와 강경애의 단편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단종애사>>를 읽고는 잠을 못 잤고 강경애의 단편을 읽고는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비위가 덧나 며칠 밥맛을 잃었다."/208쪽











그 짧은 순간에도 오독을 하는 바람에, <단종애사>를 쓴 이가 강경애작가인줄 알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생각만 했었는데, 이제는 읽어야 할 타이밍이 왔나 보다 생각했더니.. '단종애사'는 춘원의 작품이었다. 변절자가 되기 이전에 쓴 책이니까..읽어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최면 거는 중... 단종에 관한 소설이 궁금한 까닭이다. '인간 문제'도 읽긴 해야 할 텐데...자신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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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 쉽다는 뜻도 된다.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하여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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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전에 관한 묘사는 늘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만 만나왔던 터라,졸라선생의 시선으로 그려낸 풍경이 새롭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도.. 소설을 아직 다 끝내진 않았지만, 세잔이 졸라선생과 절교한 이유는 단지 자신을 묘사한 듯한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파주롤이 조소한 그림은 아무리 봐도 마네의 작품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파주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림을 관찰하면서 군중의 반응을 살폈다.(...) 그에게는 아직까지 클로드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그는 그것을 흠뻑 받아들였고,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다만 그는 그런 그림을 전시하는 클로드를 말도 안 되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지식 수준을 믿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옷을 입은 신사와 발가벗은 여자를 도대체 왜 함께 그리는가?배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두 여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파리 전체 시민을 웃기고 있는 이 화가에 대한 경멸이 파주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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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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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읽었을 것 같지만, 정작 읽지 않았을 것 같아 골랐다. '곰스크'란 지명이 왠지 실제로 있을 것 같기도 하고.해서 호기심에 검색까지 해보았다는..  '곰스크' 를 상호로 이용하는 팬션도 있는 듯 하다.  


두껍지 않은 책이라, 중편집정도의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단편집이었다.'곰스크로 가는 기차' 와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이 특히 좋았고, '양귀비'는 역자후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더 이해되는 마음이 컸다. 서로 다른 이야기인듯 하면서도, 곰스크... 단편에 대한 해석을 '철학자...'에서 한 줄로 설명받은 기분이 들었다. 

곰스크로 떠나려는 남자를 여자는 그녀의 고집(?)으로 그곳으로 가는 걸 포기(?)하게 만든다. 남편입장에서는 포기였고, 아내입장에서는 만류였을게다. 서로가 다른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남편은 꿈을 쫓는 것이 중요했고, 아내는 현실이 중요했다.그런데 구체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는 곰스크로 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두려워 꿈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 같은.그런데 운명이란 것이 거창한가? 라고 질문하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59~61쪽



남자가 곰스크로 가지 못한 것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한 것이 아니란 해석으로 읽혀진 것이 신선했다. 이것이 운명이다.라는 말이 체념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진 기분... 그래서일까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 에서 운명에 대한 생각을 한 번 정리 받은 기분이 들었다. 운명을 대하는 자세는 철학자처럼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끝임없이 움직임 속에서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은 아닐까.. 곰스크로 남자는 떠나지 못했지만,그래서 여전히 자신만의 무엇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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