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도 동아줄도 아닌 무엇인가를 끊을지 이을지를 생각해왔다.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무엇. 무례하거나 타당하거나 비겁하거나 정의롭거나 하는 잣대를 나는 찾기가 어려웠다. 대상을 읽는다는 것은 한 음반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귀 기울여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것과도 같았다. 종종 핸드폰 메모 어플에 뭔가 적거나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하는 것과는 달랐다. 왜곡된 기억과 굴절된 마음을 잡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일찍 일어나 꼬리뼈까지 의자 깊숙이 붙이고 책상에는 진하고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병 아래까지 숨어있던 인스턴트 커피 알갱이들은 굳이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뜨거운 물을 붓고 머그컵을 좌우로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녹았다. 잔을 꼭 잡으면 뜨거운 기운에 손 전체가 싸르르해지는데, 종종 그걸 어떻게 잡느냐고 신기하게 보던 이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얀 백지는 떠오르는 태양같이 눈 부신데 떠오르는 태양은 도리어 커피처럼 캄캄했다.
언젠가 비슷한 문제로 자주 괴로움을 겪는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우리는 왜 이럴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너는 왜 그럴까?' 였다. 각자의 문제가 달랐지만, 대뇌 변연계가 왜곡된 반응을 이끌어낸 모양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하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찾는다. 모진 학대를 당하며 살아온 여자가 폭력적인 남자와 데이트를 계속 하는 역설이 생겨나는 뇌의 신비롭고 이상한 행동. 너는 그런 적이 없었느냐, 물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모든 것에 끝이 있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면 우리는 왜 지금 이렇게도 무언가에 골몰하는가. 한 마리의 치타가 살다 죽는 거나 내가 살다 죽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도리어 친환경 생태 지향적인 치타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아름다운 가죽이라도 남기지 않는가.
그러던 찰나 떠오른 이들은 아니 에르노와 움베르토 에코였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 작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 기호학자.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나도 여기에다 내가 겪은 것, 혹은 감히 안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쓴다. 하필이면 그런 까닭과 무지몽매함으로 현재 장안의 화제인 도서정가제에 관해 한 마디도 보태지도 덜지도 못하고 있다. 에르노와 에코의 글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좀 더 범위를 넓혀보자. 그 글은 왜 다른가? 그들이 쓴 글을 왜 읽는가? 독서와 텔레비전 시청이 다른 건 무엇인가. 책 읽는 사람과 텔레비전 보는 사람, 신문 읽는 사람과 시 읽는 사람, 잡지 읽는 사람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애독하는 이가 각자 무엇이 다를까?
천 권에 가까운 책과 몇백 개에 가까운 비디오 테잎과 DVD를 진열해 두고 나날이 쌓이는 먼지를 닦으며 바쁘다고 칩거하던 시절, 어떤 이는 `와, 책이 정말 많으시네요.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시나요?'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에코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니오. 그냥 장식용으로 진열해둔 겁니다.'라고 말해야 했다. '그럼 내가 뭐하러 그 책을 다 갖고 있겠는가? 서가를 장식하려고?'하는 그의 음성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는 것에 지칠 무렵 경험은 글씨를 덮었고 기억은 글씨를 지웠다. 며칠 전엔 SNL에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뒤틀고 비꼬아 일구어낸 새로운 가치 창조였다. (차마 링크는 못하겠다.) 한마디로 그는 확실하게 망가졌으니 그의 팬이라면 모름지기 다니엘 크레이그 편을 보고 감복할지어다. 그것은 글씨가 주는 감동보다 직설적이었으나 더 편안하고 안온한 길이었다. 글씨 앞에서 하던 애꿎은 노력이 필요 없었다.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주인공의 긴 이름을 다시 외우려 앞장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보기만 하면 된다. 기억은 자료화면이 대신한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에 관련한 일인데, 문체와 영상이 왜 다른 것일까? 옳고 그름의 정언명령은 둘째치고,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효율적인 길로 가는 것이 효과적인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책 읽는 이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대설이 아닌 소설이라면, 시간을 보내는 작은 이야기, 있음 직한 꾸며낸 이야기에는 차이가 없다. 인간에 대한 이해, 타인을 판단하는 척도는 오히려 환경과 경험의 산물이다. 논리력과 주관은 인문학을 접하는 정도와 학력, 직관에서 나온다. 결국, 모든 것이 아닐지라도 어떤 것은 결국 받아들이는 개인의 문제이다.
미래의 관광객들은 우리 시대의 그 교수형가마리들을 구경하기 위해 돈을 낼 것이다. 다만, 옛날의 해적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건, 드레이크, 올로네, 플린트 선장, 키다리 존 실버따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미래의 공연에 등장할 해적들에 대해서는 성급한 거명을 피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현재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고 있을 뿐 아직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영국인들이 무인도에 갖고 가고 싶은 책 1위인 '오만과 편견'에 관해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그 묘한 틈을 찾아낸 적이 있다. 이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 감질나게 이야기를 따라나가던 기억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손뼉을 쳤고 미스터 다아시가 호수에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다아시 팬클럽 창단의 열기가 타올랐다. 그때였다. 친구가 이 말을 한 것은. 나는 독자였고 그는 시청자였다.
'콜린 퍼스 그 장면 찍을 때 컷이 마음에 안 들어서 몇 번을 반복했대.'
그는 나보다 방대한 지식을 자랑한다. 독일제 칼 진품 구별법과 날다람쥐의 생태, 우크라이나 여행 시 주의할 점 등. 자, 이쯤 되니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독서가 소설에 치우쳤으며 철학은 시도도 못 했고 미학은 슬쩍 들여다보기만 했으며 시를 읽는 스펙트럼은 부재하고 아예 어떤 분야는 관심 없음을 이유로 본 적도 없었다는 점을 시인한다. 건물에 있는 문의 위치와 용도보다는 문의 장식과 색상과 손잡이의 견고함에 집중했다. 미남 미녀의 실루엣에 두근거렸다. 늙어가는 이의 허심탄회한 웃음을 엿보았다. 서로 잃은 이들의 손짓을 애타게 따라갔다. 익사한 아이가 수면에 떠올라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라앉는 순서를 따라갔다. 고래 같은 집이 흥하거나 망해가는 순서를, 내가 태어나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풍속을 엿보는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결국, 내게 독서는 소설 읽기였으며 그것은 타인에 관한 관심이 아닌 나에 관한 관심이었다.
나만 그랬다.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움베르토 에코가 일 베리에 연재한 짧은 칼럼 모음집도 몇 페이지를 훑는다. 에르노와 에코, 두 사람 다 각자 할 수 있는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업을 해오고 있다. 어떻게 사실이 환상으로 엇나갈 수 있는지를 경계하며 살아가는 일에 지쳤을 때 거리 두기를 통해 생각의 깊이를 이끌어낸다. 경검과 가치를 환원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역사를 들춘다. 독서는 깊이에의 경험이다. 책 읽는 자라는 자부심을 위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읽는 자로서의 이해력과 객관성 확보의 문제이다. 보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다른 까닭은 여기서 나온다. 나는 여전히 원조 SNL의 확고한 팬으로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에 환호하며 유튜브 검색까지 할 자세가 되어있으나, 손에서 책을 완전히 놓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가 닥칠 수도 있다. 문제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자의 자세다. 쿡쿡 찌를 것인가, 완전히 잘라낼 것인가. 흔적을 남길 것인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인가. 이어나갈 것인가, 끊어버릴 것인가. 태어난 이상 치타로 변이할 수도 없고 유전자가 다른 이상 에르노나 에코가 될 수도 없으니 충직한 메아리로 남되 십 년 전과는 조금은 다른 울림을 내는 일에 골몰하기로 했다. 그 울림은, 십 년 뒤에는 또 다른 것이기를 바란다. 자기 위안은 그만, 이제 안 해왔던 일을 할 시간이 왔다. 나 스스로 하는 이해가 더 중요한 시기.
그래서 읽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물론 SNL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