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의 이미지들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에 순응하고, 또 그들의 흐름을 지속시켜야 한다."
<공기와 꿈> "결론"의 마지막 문단. 끝에서 세번째 문장. 남은 두 문장도 번역한다면: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의 이미지들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에 순응하고,
또 그들의 흐름을 지속시켜야 한다. 그 철학은, 명백히 살아 있는 언어여야 한다. 그 철학은 "문학적 인간"을 터놓고 연구해야 하는데, 문학적 인간이야말로 명상과 표현의 절정, 사유와 꿈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영어판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A philosophy concerned with human destiny must not only admit its images, but adapt to them and continue their flow.
불어판에서는:
Une philosophie qui s’occupe de destin humain doit donc non seulement avouer ses images, mais s’adapter à ses images, continuer le mouvement de ses images.
한국어판은:
인간 운명에 골몰하는 철학이라면 따라서 제 고유의 이미지들을 고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에 적응하며 또 그 이미지들이 갖는 운동을 계속 펼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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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와 꿈>의 "결론"은
상상력의 니체주의, 혹은 니체 사상에서 일어나는 상상력으로 철학하기.
이 책의 니체 장에서 탐구한 바인 이것의 재확인, 재긍정 같은 내용이고
일단 "니체의 경우 시인이 철학자다" 이걸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주장을 한 이들은 많지만, 바슐라르처럼 해보인 사람은 없다. 바슐라르가 유일)
바슐라르의 사유가 진정 대담하고 자유로운 사유라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오늘 오전 저 문장에서 그 점 새삼 다시 보면서 감탄했다.
저 문장도, 실은 니체주의를 그리고 니체를 그렇게 읽는 자신을 옹호하는 문장이다. 니체 철학이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고 그 철학이 가진 이미지를 "인정하고, 그에 순응하고 그를 지속시키는 일"은 바슐라르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그런데 이 문장에서, "그 철학은 인정해야 한다" 부분의 영어 문장 동사 admit은
불어판에선 avouer. avouer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주된 의미는 "고백하다"지만 "(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다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다)"는 뜻도 있고 에문들을 보면 "(의) 편에 서다" "옹호하다" 같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불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사전을 한 번 찾는 것만으로도
이 단어가 실은 대단히 의미 충만한 방식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는 대목.
""이미지"가 어떤 철학에선 불가결한 요소임을, 그 철학에선 "이미지"가 철학하고 있음을, 철학계는 인정하라!" : 바슐라르는 avouer 한 단어로 이런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고 담았던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 포스트.
불어를 잘 모르므로 확신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책 전체, "결론"의 내용, 이 문장의 앞뒤 문맥을 보면
이렇게 보는 게 진정 맞아 보인다. 나말곤 누구든 나노미터로도 측정 안될 정도만 관심 있는 문제겠지만
............. (혹은 내가 그렇게 쓰고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사상가의 연구는 그 사람이 쓴 그 언어를 알지 않고는 못한다는 게 맞다. 같은 생각도 적어둘 수 있겠다. 아효 그래서 이거 못하겠다..........ㅋㅋㅋ;; 어느 세월에. 쪽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