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주 옛날 책의 

개인 복제본이 집에 있다. 

원래 책은 어느 대학 교수가 (였던 분이) 그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책. 

"1972. 7. 15 A Bordeaux, (이름)" 그가 이렇게 내지에 적어둔 책. 보르도에서 서울로. 

서울의 한 복사실로. 


불어 공부에 진척이 좀 있다 싶으니 

이것 저것 꺼내 본다. 


이 책 18쪽에, 바슐라르가 읽었던 무수한 저자들, 과학과 문학, 예술을 아우르는 넓은 관심에 대해 말한 다음

"그의 저술들이 이처럼 넓은 관심들로 열려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여기 절충주의의 어떤 흔적도 없다. 이 모두가 서로 연결된다. 초합리주의는 상대성 물리학의 합리주의이며, 정신분석은 새로운 과학정신이 수행하는 충실히 프로이트적 기능 -- 정화의 기능 -- 의 예비고찰이다." 이런 문장으로 맺는 문단이 있다. 


"절충주의". 영어로는 eclecticism, 불어로는 éclectisme. 

이 단어는 처음 알 때 고생했던 기억이 나는 단어. 절충주의?? 그게 무슨 뜻?? 

물건이 혹은 사람이 어떤 점에서 부족하지만 적절히 타협하고 쓰는 태도?? 

A의 미흡함을 B가 채우게 하기, 혹은 그러는 방법??  


절충주의라는 말을 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번역서들에서 이따금 보긴 했는지도. 

어쨌든 보았고, 아! 이렇게 쓰면 되는구나! 했던 적은 없다고 기억한다. 


실제 뜻은 "관심의 다양함, 광범함". 이게 좋은 뜻으로도 쓰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편견이 없으며 지적 호기심이 강하다 보니 생긴 지적 습관. 좋은 쪽이라면 이 방향. 

이것저것 손 댄 건 많은데, 종합하는 힘 부족. 딜레탕트. 나쁜 쪽이라면 이 방향. 


하여튼...... 절충주의 ㅋㅋㅋㅋㅋㅋ 그냥 무맥락 궁시렁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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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이 책 "서문"이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이방인에 국한하면, 그들의 목적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

그러나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경우, 우리는 그들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에 따라 그들을 판단한다. 그들의 목적엔 반대하면서 방법과 의도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때도 많다. 철학적 체계들을 생각해 보자. 철학적 체계들은, 그걸 세운 사람들에게만 진실할 뿐이다. 대개 철학자들은 자기 이전의 철학 체계를 위대한 실수로 보며 철학자보다 못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것을 착오와 진실이 뒤섞인 유물 정도로 본다. 궁극적인 목적만 놓고 보면, 이전 철학 체계는 착오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를 싫어하는 건, 철학자의 목적이 그 사람들의 목적과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철학자 아닌 사람은 서로에게 이방인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대한 인간에게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면, 철학적 체계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그 체계가 오류로 가득찬 거라 하더라도. 철학적 체계에는 반드시 한 가지, 결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개인적 기질, 개인적 색채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게 어떤 철학이었나 재구성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지역의 토질의 특징을, 거기서 자라난 식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게 한때 존재했었지. 그러니까, 최소한 한 번은 이게 존재했었어. 이런 삶의 방식, 인간 세계를 보는 이런 방식이 하나의 가능성인 거야."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되는 것같다가 바로 그게 아닌. 바로 모호해지는 이상한 문장들. 

(영어로도 그렇다. 사실 이게 아직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은 니체 저술. 아마 불어판 니체 전집의 번역들이 

카우프만의 영어번역 포함해서 다수의 영어번역보다 더 좋은 번역일 것 같다. 실제로 "전집"이기도 하고....) 


그런데, 인문학에서 "세계 지식의 총합"에 기여하는 길. 

그 주제로 생각한다면, 이 "서문"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체계는 오고 가더라도, 사람은 남는다. 이 관점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너의 공부가, 너라는 사람의 증언이 되게 하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방향. 

그게 더 (일반적으로, 흔한 흔히 학자들이 하는 작업과 비교하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하기. 


"세계가 변하지 않은 이유. 해석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너무도 진실하다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증언(찬미, 규탄, 비방...... 어떤 방향이든)하는 작업이 축적될 때,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하게 해석을 증대할 거라 생각한다. 


*더 이어 쓰고 싶은데 

배가 고파서 ------ 여기서 일단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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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지 않는 The New Yorker Out Loud 팟캐스트. 

앱으로 들을 수 있는 에피소드는 모두, 그 중 어떤 것들은 여러 번 들었던 

애청했던 팟캐스트. 복수 진행자, 복수 출연자일 때가 많았다. 이것 저것, 방만한 주제. 거의, 아무거나. 

왜 역겨움은 우리를 매혹하는가. 이게 주제였을 때 어찌나 진지하게, 바퀴벌레와 곰팡이와 시체와 버블티와 

(버블티가 역겹다는 출연자 1인이 있어서) 등이 자극하는 혐오 + 매혹을 분석하던지. 내가 그러지 못할 바엔 

그걸 하는 다른 사람이라도 보아야, 그래야 살 거 같다........... 같은 심정이 이런 일에도 적용된다며 반색함. 


앱으로 들을 수 있는 에피 중 초기 (그래서 죽 멀리 죽죽죽 내려가야만 찾을 수 있는) 에피에서 

진행자, 출연자 전부 여자들이고 주제가 음식과 부엌이었던 적이 있다. 4-5인, 작가나 예술가 문명인 (아무튼 뉴요커지와 관련 있을 만한 사람들) 여성들이 진지하게, "부엌과 (음식과) 나"를 주제로 얘기하는데, 그 중 두 사람인가는 얘기를 어찌나 감각적으로 하던지 들으면서 그들 얘길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 그렸던 정경이 잊히지 않는다. 


"..."(요리 이름)은 스토브 약불에 올려두고 전날 저녁 내내 들여다봐야 하는 음식이죠. 

가서 꾸준히 저어주어야 하고요. 바로 그 이유로 나는 "..." 만들기를 사랑해요. 올려두고 

가서 저으면서 여러 생각들을 할 수 있어요. 사실 부엌이, 생각이 가장 잘 되는 곳이 아닌가요. 


대략 저런 얘기 ("대략".....). 내가 머리 속으로 그렸던 건 

대학원 시절 방 한칸 아파트의 부엌과 4구 전기 스토브. 나무 주걱. 

내가 똑같은 경험을 했던 건 아니지만, 할 수도 있었으므로. 거기 서서 팥죽이라도 젓고 있는 나. 

논문 진척을 생각하면서. 중요한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하면서. 


I do my best thinking in the kitchen. Don't lot of us do? : 대략 이런 문장을 말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집의 부엌은, ㅋㅋㅋㅋㅋㅋㅋ 그걸 부엌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여튼 생각을 할 공간이 

물리적으로 불가. 부엌이 좋은 곳으로 이사가고 싶어진다. 다른 모두가 좋은데 부엌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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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와 꿈>의 니체 장에 

우리 안의 무거운 것을 바다 속에 던져버리라는 니체의 구절 인용하고 

바슐라르가 논의하는 대목이 있다. "(바다로 우리 안의 육중함을 던질 때)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더블', 우리 안의 대지인 것, 우리 안의 '숨겨진 내밀한 과거'를 파괴한다." 이런 문장이 있는데 


"우리 안의 '숨겨진 내밀한 과거'" 이 구절이, 영어와 불어로:  

that which is our hidden inner past 

ce qui est passé intime caché


이탤릭체 세 단어가 사실 의미로도 온전히 번역되지 않지만 (불어의 intime은 영어의 inner + intimate. 공간적으로 내면일 뿐 아니라 은밀한, 내밀한...) 불어처럼 형용사를 명사 뒤에 두는 것과 영어처럼 앞에 두는 것이, 오직 단순히 전적으로 어순의 차이일 뿐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 문장의 경우엔, "과거"를 먼저 말하고 그 과거가 어떤 과거인가 덧붙이는 쪽이, 과거의 성격부터 말한 다음 "과거"를 말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극적이게 되는 것 같다. 


저 문장 다음엔 

"(그렇게 육중함을 파괴한 다음) 우리의 공기적 '더블'이 빛을 발하며 등장할 것이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 문장은: 

Then our aerial double will shine forth. 

Alors notre double aérien resplendira


이 짧은 문장의 경우도

동사구, 조동사가 아주 중요한 영어 vs. 그런 것 없이 동사로 직접 동사변화하는 불어. 이런 비교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거 순전히 자의적이거나 하여튼 다만 문법일 뿐인 게 아니지 않나. 적어도 이 문장에서는, (조동사 없이) 한 단어 동사 미래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없는 쪽보다 일단 시작부터 우세......... ;; 라고 생각해 보고 싶다. 불어의 이 동사와 어근 공유하는 형용사가 영어에 있다. resplendent. 이건 꽤 쓰이는 단어. 이 형용사의 동사형도 있긴 있어서, resplend. 이건 거의 (전혀)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불어 동사의 3인칭 단수 미래형 어미 "--a"는, 발음으로나 모양으로나 '열림'; (열린 교회 닫힘 생각남....) 말하는 것 같음 또한, 불어의 미래엔 '미래주의'가 있다고 ㅋㅋㅋ 한 번 우겨봅시다. 


독특한 단어로 독특한 생각을 전하는 문장이 하나 더 이어지는데 

"그 때 우리는 공기처럼 자유롭게, 우리의 비밀들과 같이 갇혀 있던 지하 감옥을 벗어나, 날아오를 것이다." 


Then we will rise up again, free as the air, out of the dungeon of our own secrets. 

Alors nous surgirons libres comme l'air, hors du cachot de nos propres cachotteries. 


cachot가 지하감옥

cachotterie는 비밀. 


<공간의 시학>에 나오는 매혹적인 문장들, 서랍과 장농, 구석 등등에 대한 문장들이 

불어에 이런 단어들이 (이것들만이 아닐 것이고) 있기 때문에도 쓰여질 수 있었던 거 아닌가는 

오래된 선입견, 편견... 끄집어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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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의 이미지들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에 순응하고, 또 그들의 흐름을 지속시켜야 한다." 


<공기와 꿈> "결론"의 마지막 문단. 끝에서 세번째 문장. 남은 두 문장도 번역한다면: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의 이미지들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에 순응하고, 

또 그들의 흐름을 지속시켜야 한다. 그 철학은, 명백히 살아 있는 언어여야 한다. 그 철학은 "문학적 인간"을 터놓고 연구해야 하는데, 문학적 인간이야말로 명상과 표현의 절정, 사유와 꿈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영어판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A philosophy concerned with human destiny must not only admit its images, but adapt to them and continue their flow. 


불어판에서는: 

Une philosophie qui s’occupe de destin humain doit donc non seulement avouer ses images, mais s’adapter à ses images, continuer le mouvement de ses images. 


한국어판은: 

인간 운명에 골몰하는 철학이라면 따라서 제 고유의 이미지들을 고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에 적응하며 또 그 이미지들이 갖는 운동을 계속 펼쳐 가야 한다. 



<공기와 꿈>의 "결론"은 

상상력의 니체주의, 혹은 니체 사상에서 일어나는 상상력으로 철학하기. 

이 책의 니체 장에서 탐구한 바인 이것의 재확인, 재긍정 같은 내용이고 

일단 "니체의 경우 시인이 철학자다" 이걸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주장을 한 이들은 많지만, 바슐라르처럼 해보인 사람은 없다. 바슐라르가 유일) 

바슐라르의 사유가 진정 대담하고 자유로운 사유라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오늘 오전 저 문장에서 그 점 새삼 다시 보면서 감탄했다. 

저 문장도, 실은 니체주의를 그리고 니체를 그렇게 읽는 자신을 옹호하는 문장이다. 니체 철학이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철학"이고 그 철학이 가진 이미지를 "인정하고, 그에 순응하고 그를 지속시키는 일"은 바슐라르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그런데 이 문장에서, "그 철학은 인정해야 한다" 부분의 영어 문장 동사 admit은 

불어판에선 avouer. avouer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주된 의미는 "고백하다"지만 "(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다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다)"는 뜻도 있고 에문들을 보면 "(의) 편에 서다" "옹호하다" 같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불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사전을 한 번 찾는 것만으로도 

이 단어가 실은 대단히 의미 충만한 방식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는 대목. 

""이미지"가 어떤 철학에선 불가결한 요소임을, 그 철학에선 "이미지"가 철학하고 있음을, 철학계는 인정하라!" : 바슐라르는 avouer 한 단어로 이런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고 담았던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 포스트. 

불어를 잘 모르므로 확신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책 전체, "결론"의 내용, 이 문장의 앞뒤 문맥을 보면 

이렇게 보는 게 진정 맞아 보인다. 나말곤 누구든 나노미터로도 측정 안될 정도만 관심 있는 문제겠지만 

............. (혹은 내가 그렇게 쓰고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사상가의 연구는 그 사람이 쓴 그 언어를 알지 않고는 못한다는 게 맞다. 같은 생각도 적어둘 수 있겠다. 아효 그래서 이거 못하겠다..........ㅋㅋㅋ;; 어느 세월에. 쪽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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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13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가 담고 있는 메시지들을 한참 생각해 본 아침, 이 글이 참 와닿습니다...

몰리 2017-01-13 12:00   좋아요 0 | URL
바슐라르의 이런 입장을 할 수 있는 한 잘, 말해볼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