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 적 없는 무엇을 미국은 

아무도 꺾을 수 없을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invincible" 이 대목에서 뭐라 해얄지). 

중간 계급이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작은 열정, 미완인 교육, 상스러운 습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용적이랄 어떤 지성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거면 족한 거였다. 


America demonstrates one thing invincibly that I have doubted up to now; that the middle class can govern a state. Despite their small passions, their incomplete education, their vulgar habits, they can obviously provide a practical sort of intelligence and that turns out to be enough." 





Writer's Almanac 팟캐스트에서 인용하는 걸 들으며 공감했다. 

심지어 (인구내 박사학위소지자 비율로 30위 안에 들 대학타운이라 해도) 캠퍼스 바깥이면 바로 

"작은 열정, 미완인 교육, 상스런 습관". 그러지 않았나? 이것들이 꼭 나쁜 뜻으로가 아니라 독특하게 미국적 방식으로 이런 면면들 있지 않았나. 왜 이리 정확하게 들리지? 그런가 하면 practical sort of intelligence 이것도. 뭘 말하는지 나도 그걸 본 거 같았다. 심지어 개신교 복음주의 광신도들이 아주 많은 도시라 해도, 뭔가 생활의 실제적 면들은 주로 늘 합리적이고 편리하단. 신앙은 오직 정신의 (정신에서도 신앙 생활 담당 부분의) 협소함에만 기여함. 


있을 땐 욕하다가 떠난 다음 칭송하기. 

있을 땐 거의 매일 불평했다. 여긴 구름도 독을 (광신의) 품고 있으며, 그 독이 모두를 적시고 있어. 이런 등등.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엔 집에 오면서, 개인이 개인에게 개인으로 하는 존중.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어디 살고 뭐하는 사람인가와 아무 상관없이 (그것들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알면 그걸로 무시할만한 것이지만), 나를 모르면서도, 그가 개인이고 나도 개인이므로 하는 존중. 그런 건 미국 있을 때만 받았던거 아닌가? 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정말인가? 8할 정도가 아니라 전부? 


당연히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지금 내 이 삶의 무엇이 문제인가? 

버몬트 같은 곳 시골마을 마을회관에서 마을회의하는 걸 보면 이게 민주주의다..... 며 감동하기도 한다던데, 

대학원 시절 이런저런 대학원생 회의나 미팅,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선 아직도 일어날 수 없는 분위기 (평등하고 존중하는) 있었다. 뭐 어쨌든 개인적 경험이 그러했으니 나는 그 면만 봐야겠다...... 해선 안되겠지만. 좋기만 했던 건 아니어도, 좋았던 시절인 건 분명. 책장의 이런 저런 책들 넘겨보다가 감사가 밀려들 때도 많다. 요즘 특히. 이런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일. 아무나 해주는 일이 아니지. ;; 대학원생은 할 수 있는 한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주기. 이것 말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인구밀도와 실은 아주 상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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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가 편집, 해설한 니체 잠언집. 

나는 왼쪽 책으로 갖고 있다. 


그대 vs. 너

어느 쪽이 더 좋을까? 


한국어판 니체 읽으면서 (아주아주 미미하지만) 매번 움찔하고 고쳐읽는 단어, "그대". 

당신들은 아니었나요? 너, 너희, 너희들.. 이 쪽으로 바꾼다. 


위의 잠언집을 열면,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제목 아래 <짜라투스트라>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이건: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 쪽이 낫지 않나? 이 쪽이 니체에게 조금 (조금이라도) 더 가깝지 않나? 

<아침놀>에서도 "그대"는 아주 자주, 거의 중단 없이, 나온다. 지금 보고 있는 215번 단장: 


"아마 그대들은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도덕은 그대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그리고 그대들은 진정으로 그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물로 만들어, 신이든 인간이든 그대들그대 자신을 바치는 강력한 존재와 지금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취되는 것이다. 그대들그대들의 희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저 강력한 존재가 갖는 힘의 느낌에 탐닉한다." 


니체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이건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기도. Nietzsche is rude! 느낌표까지.) 

그렇다는 합의가 있다. 표면적인 무례함이겠지만. 그렇담 그대.. 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대가 좋은 사람?! : 묻고 싶다 정말. 

















219번 단장은 이렇다. 

겸양에 깃들어 있는 기만. — 그대는 사려 없는 행동을 통해 그대의 이웃에게 깊은 고통을 주었고 그의 행복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 이제 그대는 자만을 버리고 그를 찾아간다. 그대는 그 앞에서 그대를 비하하고 그대의 사려 없는 행동을 그로 하여금 경멸하게 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가혹하고 매우 힘든 상황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명예를 상실함으로써 타인이 비자발적으로 상실한 행복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함께 그대의 기분은 고무되고 그대는 자신의 미덕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하며 물러간다. 그러나 타인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느끼며 그대가 사려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가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에서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대가 그 앞에서 그대 자신을 경멸하면서 그에게 보인 고통스러운 모습조차 그대 때문에 입은 새로운 상처처럼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으며 그대가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상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그대는 그 장면을 그대 앞에서 그대 자신을 위해 상연한 것이다. 그대가 그러한 장면에 증인을 초대한 것 역시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지 그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런 단장에서 "너" 대신 "그대"를 쓸 때 일어나는 일 하나는 

이게 전혀 독자에게 (독자를 향한) 자기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사전적 어법으로는 2인칭이라도 3인칭처럼 들리지 않나?  


"너"는 한국어에서 실은 이미 욕인가? 

공식적으로는 쓸 수 없어 완곡어법(euphemism)이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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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번 단장. 제목은 "완벽한 적수를 원하는 것". 기독교적 이상의 실현에서 가장 탁월한 나라였던 프랑스에서 

그것의 정반대, 비기독교적 자유정신도 생산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장의 끝으로 가면서: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은 다른 어떤 곳의 사람들보다도 이러한 개화(開花)를 잘 이해하고 있다. 결코 피상적인 존재가 아니면서도 위대한 프랑스인은 항상 자신의 표면, 즉 자신의 내용과 깊이에 부합되는 자연스러운 피부를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위대한 독일인의 깊이는 대부분 복잡한 상자 안에 밀봉되어 있다. 흡사 딱딱하고 기이한 껍질을 통해 빛과 경박한 손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영약(靈藥)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의 완전한 전형을 구현한 이 민족이 왜 비기독교적인 자유정신이라는 완전한 반대 전형 역시 산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라! 프랑스의 자유정신은 항상 위대한 인물들과 싸웠던 것이지 다른 나라들의 자유정신처럼 단지 도그마들과 숭고한 괴물들하고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밑줄 친 문장에서 "숭고한 괴물"은 케임브리지판에서는 sublime abortions, 

독어판에서는 erhabenen Missgeburten. 영어 단어 abortion엔 '낙태'의 뜻만 있지 않고 실패, 좌절, 중단, 이런 뜻 있다. 독어단어 Missgeburt는 어원 혹은 조어의 면에서 영어론 abortion보다 miscarriage (miscarry)에 더 가까운 단어일 것같단 짐작. 독한사전 찾아보면 "기형" "불구"의 뜻. 독한사전의 정의만 보면, 이 단어에도 "실패"의 의미가 있는 듯한데 그게 abortion의 "실패"와는 좀 다를 듯. 앞쪽은 결과의 실패, 뒤쪽은 결과에 가지 못함으로서의 실패. 


박찬국 번역의 책세상판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여기 역주가 있었기를 짧은 순간 소망. "괴물"이라는 역어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원문의 독어단어엔 이런 뜻들이 있고, 

"괴물"로 번역되지 않은 다른 작은 의미들도 실은 모두 작용하고 있으니 유의 바람.. 이 구절로 니체가 염두에 둔 건, 무엇보다 --- 이었을 것이다. 같은 역주. 독일어와 니체를 잘 안다면 내가 "독자주"로라도 달고 싶었으나, 좌절.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니체 책들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둘 다 경탄, 감사하며 읽었고 

내겐 "믿고 보는" 역자. 아카넷에서 나온 저 두 책들에선 역주가 상세하고 많은 편이다. <아침놀>은 그렇지 않은 편. 


프랑스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얘기 읽을 때 

거의 늘 바슐라르부터 생각하는데, 오늘 이 단장에서 프랑스적 자유정신에 대한 니체의 말은 

바슐라르에게 그대로 할 수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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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genröte. 니체에게 "도덕에 맞서는 전투"의 시작이었던 책. 

책세상판은 <아침놀>, 케임브리지판은 Daybreak. 스탠포드판은 Dawn. 


이 책도 책 전체 제사가 한국어판에 누락되어 있는 걸 보고 쓴다. 

영어판, 그리고 독어판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There are so many days that have not yet broken.' Rig Veda 

„Es giebt so viele Morgenröthen, die noch nicht geleuchtet haben.“ Rigveda 


독어 문장은 직역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새벽들이 있다"일 것같다. 

어쨌든 문장 속 Morgenröthen은 책의 제목 Morgenröte (니체 생전의 표기로는 Morgenröthe)의 출전이 되기도 하는 셈. 그렇게 보인다, 니체가 여기서 이 책 제목을 가져왔음. 케임브리지판의 영어 문장에선 day, 그리고 broken이 있으므로 Daybreak라는 제목의 "출전"까지는 아니지만 명확한 인유처럼은 보이는데, <리그베다>의 가장 널리 쓰이는 영어번역이 저렇게 번역하고 있을 따름일 수도 있겠으니, 그런지 아닌지 스탠포드판에선 같은 문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볼만도. 


여하튼 이 제사가 빠져 있다.  

이 경우엔 이게 설령 책 본문 어딘가에서 그대로 등장하며 게다가 니체 자신이 그에 대한 논평을 한다 해도, 

그래도 이건 빠져선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 책들에 비해 한국어 책들에 제사가 있는 경우가 희귀한 건 

그 자체로, 우리의 지적 유산의 매우 작음....... 혹은 작기도 하고 작기도 한데 간수(건사)도 안함. 이것의 증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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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스스로 라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니체는 메타포의 

절대를 실현하는 한편, 이류 시인이라면 덕지덕지 사용하였을 사소한 메타포들을 파기하며, 메타포의 절대적 현실을 살기 위해 메타포의 부조리함까지도 유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너 전신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기 위해, 전신으로 뛰어내리라'라고 니체는 말하는 바, 그것은 또 하나의 행위로써 위버멘쉬의 해방과 정복을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위와 아래라는 이러한 단어 사이의 모순 너머에서, 상상력은 완전한 일관성을 견지하는 상징들의 분석 속에 작용하고 있다. 즉, '너 바다에 뛰어들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거기 망각 속에서 죽음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모든 육신적이며 대지적 존재, 이 모든 인식의 잿더미, 이 모든 결과의 집적, 인간 존재에 다름 아닌 이 모든 탐욕스런 수확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럴 때, 너에게 위버멘쉬의 표지를 부여할 결정적 역전이 실현되며, 너는 공기적이 되어 자유로운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위로 떠오를 것이다. 


전에는 내게 무거워 보이던 모든 것이 

망각의 푸르른 심연에 삼켜지다. 





260쪽이다. 원문에선 '니이체'인데 '니체'로 수정. 

"그것이 인간 존재인 탐욕스런 수확" 영어판에서 that whole avaricious harvest that makes up a human being, 

불어판에서 cette récolte avaricieuse qu’est l’être humain. 이 구절에서 특히 "탐욕스런 수확" 이 두 단어는, 오직 이 두 단어를 읽기 위해 4년을 보내야한다해도 그렇다면 그 4년을 보내도 좋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이 소중한 두 단어였다. 처음 읽던 때. 이것도 벌써 한 10년쯤 전인가. 바슐라르의 개성과 뛰어남과 오직 그만이 가진 것같은 종류의 지성과, 이런 것들이 압축되는 구절들이 (그렇다고 그것들이 따로 노는 경우가 없으며, 전체 속에서 바슐라르적 조화를 이루면서) 그의 책들을 열면 곳곳에 숨어 있다 독자를 놀라게 함. 


베버에 따르면 이렇다지만: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유용한 업적은 항상 전문적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다른 (비슷하며 다른) 종류의 "영혼의 운명"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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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