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 더 then and now 검색해 보다가 

크리스테바가 했다는 이 말 발견. Love is the time and space where "I" give myself the right to be extraordinary. 

생각해 보니 그런 것(그런 것도) 같고, 어쨌든 기억해 두고 싶은 말이다. 이 사진에서 크리스테바 얼굴은, Manhattan에서 우디 앨런이 "인생을 살 가치가 있게 하는 것?" 이 질문에 자답하면서 내놓는 긴 리스트. 스웨덴 영화들, 말론 브란도, 모차르트의 교향곡, 세잔이 그린 그 놀라운 배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쌤우네 가게에서 파는 게요리, 등등. 등등등 나열하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Tracy's face. 그 Tracy's face같은 얼굴. 


이 말을 남자 사상가가 했다면, 

굉장히 유치하게 들릴 것같다. 아니 자뻑도 아닌 것이. 에고의 과잉이자 결핍?

그런데 여자가 하는 말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정말 남과 여는 다르게 인간이 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인가 보다...;;;; 





장 바니에, 내겐 금시초문인 분의 사랑 정의도 같이 발견. 

"Love doesn't mean doing extraordinary or heroic things. It means knowing how to do ordinary things with tenderness. 사랑은, 비범하거나 영웅적인 무얼 하는 게 아냐. 평범한 일들을 다정하게 하는 법을 아는 게 사랑이지." tender, tenderness. 이것도 거의 번역불가인 말 아닌가. 부드럽고 다정하고 약하고. 


이 말은 크리스테바의 위의 말과 반대를 말하는 것 같다가,

조금 생각하니 거의 같은 말로 들린다. 





번역하기 힘든 아도르노의 말. 

출전은 <미니마 모랄리아>다. 

"힘(공격)을 도발하지 않으면서 약해질 수 있는 곳. 

사랑은 그 곳에만 있다." 이거 뜻밖에도, (그리고 여기처럼 '헬'에선 더더욱) 진리이지 않나? 

약한 모습; 보이는 순간, 그게 누구든 상대의 먹이가 되는 일. 이 말을 이런 정도, 이런 방향으로 이해함은 온당치 못한 것이겠으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adies and gents, I present to you a young Ozzy Osbourne



오지 오스본 then. 

젊음에만 허락되는 종류의 머릿결이 있나봄. ;;; 

눈빛은 물론이고. 피부는 어떻고. 입술까지도.   






오지 오스본 now. 

노인을 보면 한때 그였던 젊은 사람; (....;;;) 상상하고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억의집 2016-07-2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많이 늙었네요. 마약을 달고 살아서 그런가 아닐까 싶습니다. 80년대 락과 메탈 좋아했던 저는 블랙사바스는 오지보다는 로니 제임스 디오때를 좋아했는데, 디오도 몇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뜨더라구요.

몰리 2016-07-23 22:28   좋아요 0 | URL
오지가 미청년이던 때 사진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 ;;
<토탈 이클립스>에서 디카프리오와 지금 디카프리오 사이의 격차 정도,
어쩌면 그 이상, 있는 거 같았고 깜놀했어요.;
 
















어제 대출한 책엔 이것도 있다. Composing the Soul: Reaches of Nietzsche's Psychology (1994). 

아래가 책 전체의 제사(에피그래프):  


As happens in great men, he seemed, by the variety and amount of his powers, to be a composition of several persons. -- Ralph Waldo Emerson, Representative Men (위대한 인간들에게서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가 가진 많고 강한 힘들에서 그 역시 여러 인물들로 구성된 사람이었다). *한 문장일 뿐이라도 거의 예외없이, 번역을 시도하면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느낄 기회가 된다. 이 문장, 별 생각없이 시도했다가 (바로 좌절하며) 머리 뽑음. 같은 텍스트의 다수 번역이 있고 각각의 번역이 갖는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보는 일. 그런 일이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듬. 에머슨의 이 문장, 다른 좋은 번역 보고 싶다.


책장을 넘겨 보면 에머슨을 계속 인용한다. 이런 문장들이다. 


The moment our discourse rises above the ground line of familiar facts, and is inflamed with passion or exalted by thought, it clothes itself in images. ("Language") 우리의 담론이 친숙한 사실들의 세계 위로 부상하고, 열정으로 불타거나 사고로 고양되는 순간, 담론은 이미지의 옷을 입는다. 


[Man thinking] then learns, that in going down into the secrets of his own mind, he has descended into the secrets of all minds. ("The American Scholar") 생각하는 사람이면 알게 되는 일. 자기 정신의 깊은 비밀 속으로 내려감이, 모든 정신의 깊은 비밀 속으로 내려감이라는 것. 


Let me remind the reader that I am only an experimenter. . . . No facts are to me sacred, none profane; I simply experiment, an endless seeker. ("Circles") 나는 실험가일 뿐임을 독자가 기억하길 바란다. 어떤 사실도 내게 신성하지 않으며, 비속하지도 않다. 중단없는 추구자, 나는 다만 실험한다. 


The greatest genius is the most indebted man. . . . The great man finds himself in the river of the thoughts and events, forced onward by the ideas and necessities of his contemporaries. ("Shakespeare") 가장 위대한 천재, 그는 가장 많이 빚진 사람이다. 위대한 인간은 사상과 사건들의 강에서 헤엄치는 자신을 본다. 그를 앞으로 미는 건 그와 동시대 사람들의 관념, 그리고 요구들이다. 


It seems to be a rule of wisdom never to rely on your memory alone, scarcely even in acts of pure memory, but to bring the past for judgments into the thousand-eyed present, and live ever in a new day. ("Self-Reliance") 기억에만, 순수 기억의 행동이라도, 의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혜의 법칙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천 개의 눈을 가진 현재로 가져와 판단해야할 것이며, 어느 날이든 새로운 날처럼 살아야한다. 





















갖고 있는 에머슨 책으론 왼쪽의 선집 하나가 다다. 

오래전 헌 책으로 구입. 표지를 열면, 격렬한 필체 오렌지색 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다. 

"네이트, 오직 우리의 믿음만이 우리의 한계임을 기억해! 우주가 너의 것이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Nate, Remember that we are only limited by what we believe! The universe is yours! God bless!" (*옮겨 적으면서 바꾸긴 했는데 실제론 전부 대문자로; 적혀 있음. 그러고 보니 손글씨 쓰면서 대문자로만 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격정적인 자기 격정이 감당이 안되는 사람들일 가능성 클 것같기도). 준 사람 이름은 Scott. 네이트는 스코트가 선물한 이 책이 싫었던가, 단 하나의 읽은 흔적이 없다. 


하이고 어쨌든 그래서, 

전부터 읽고 싶었던 에머슨인데 이렇게 많이 에머슨을 인용하는 니체 연구서를 대출하고 보니 (위에 옮겨 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끝없이; 인용하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기는대로 계속 나온다) 무엇보다 일단 에머슨 책들을 제대로 사두어야; 하겠어서 Library of America 판들을 검색함. Library of America 판 책들 참 좋다. 독자 누구라도 팬으로 만들 책들. 어쨌든 아마존에 저렴한 중고본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큰 타격 없이 사둘;; 수 있을 듯. 킨들판은 거의 전부가 무료다. 


에머슨-니체 커넥션, (Composing the Soul 이 책은 그걸 '웅변하듯' 수립하는 책이기도 할 것같고), 

외에 에머슨-바슐라르 커넥션도 있을 것같음. 근본적으로 동류인 영혼. 굉장히 다른 발현. 19세기 미국의 엘리트. 20세기 프랑스의 평민. ;; 이런 잡념도 스쳐갔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6-07-2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님께서는 영어로도 자유롭게 책을 접하시는 것 같아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많은 책들을 미리 접하고 비교적 원서에 가깝게 보실테지요. ^^; 부럽습니다.

몰리 2016-07-23 08:26   좋아요 1 | URL
에효 제 전공인걸요..;;;; 영어로 공부하면서 그 긴 세월을 보낸 걸 감안하면
실은 잘 읽지도 많이 읽지도 못하는 형편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읽으신 책을 보면 쉽지 않은 책인 것 같아요. 언어는 문화를 잘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문학이나 철학 등의 책은 같은 서양권 언어로 이해되어야 보다 정확한 의미전달이 된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낀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영어로 된 서적과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만 쉽지 않네요 ㅋ 그래서 잃어버린시간님 같은 분을 뵈면 많이 부럽습니다^^; 행복한 휴일 되세요

몰리 2016-07-23 10:15   좋아요 1 | URL
카우프만이 번역한 니체 책들 보면 역주가 꽤 많고 역주의 적지 않은 부분이
자신의 역어 선택을 해명하고, 그러면서 니체 사상의 일면(혹은 여러 면;)을 해설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게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고 철학서 번역은 이런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놀랍게도 영어권에서 (역자들이든 독자들이든) 카우프만이 한 것같은 번역이 모범이다.. 쪽은 소수인 것 같더라고요. 같은 서양언어끼리인 독어, 영어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서양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은 더더욱, 방대하고 상세한 역주, 역주를 통해 단단한 도입 기반 다지기.. 이게 관행이 되길 바라지만 아마 한국에서도 이 쪽은 소수;;일듯해요. 주석이 읽는 데 방해된다는 얘기는 사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냥 안 읽으면 되는 걸;;; 아무튼 한국에서 외국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논의가 더더 많고 진지해야할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6-07-2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잃어버린시간님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아직 뜻을 담기에도부족해서 번역의 미묘한 부분까지 신경쓰지 못합니다만, 잃어버린 시간님의 리뷰와 같은 좋은 글은 핵심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반납하기 전에 넘겨보니 아도르노의 스트라빈스키 비평을 비판하는 글이 있다. 제목이 "말썽 많은 악의 아름다움." 처음 두 문단이 이렇다: 


아도르노가 나를 화나게 하는 점은 예술 작품을 끔찍할 만큼 쉽게 정치적 (사회적) 원인이나 귀결, 혹은 그 의미들과 연결짓는 직접 교섭 방식이다. 여러 가지 차이를 고려한 지극히 신중한 성찰들(아도르노의 음악학적 지식은 칭찬할 만하다)이 결국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몇몇 결론으로 이끌리고 만다. 한 시대의 정치적 성향이 언제나 단 두 가지 상반된 성향으로 환원되며, 결국 우리는 예술 작품을 진보 편에 분류하거나 반동 편에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반동이란 곧 악이기에, 엄한 취조로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봄을 되살리려고 죽는 한 아가씨의 희생으로 끝맺음하는 발레곡이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스트라빈스키는 야만 편에 있다. 그의 "음악은 스스로를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파괴적인 심급과 동일시한다." (의아하다. 왜 "동일시"라는 명사를 쓰는가?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을 무엇과 "동일시"하는지 아닌지 아도르노가 어찌 아는가? 왜 "그리다" "초상을 만들다" "형상화하다" "표상하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오직 악과의 동일시만이 유죄이며 소송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학이론>에 위의 인용문이 나오나 찾아보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가 네 번 정도 언급되긴 한다. 직접 인용하고 인용문에서 어휘 선택을 왈가왈부하려면 출전을 밝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아도르노는 음악에 관한 저술도 많이 남겼으니 출전은 그 중 어디선가 봄. 


첫 문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끔찍할 만큼 쉽게"는 아도르노가 무엇을 하든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쉬워 보이는" 경우는 있을지도 모름. 남이, 그것도 거장이 해보이니까 경탄이 일게 쉬워 보이는. 하지만 제대로 추적, 혹은 동참해 보면 어김없이 강도 높게 "사고/개념 노동" 해야 하고 그래서 not for the feeble-minded. 하여간) 그리고 예술 작품을 정치적 사회적 원인, 귀결, 의미들로 연결한다는 말은, 음 이런 주장에야말로 "끔찍할 만큼 쉽게"란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끔찍할 만큼 쉽게 아도르노를 타락시킴, 저급화함 (영어 단어 "bastardize"). 어떻게 이렇게 간단히 말해버릴 수 있나, (독자를 어떻게 봤길래? 혹은 누구로 봤길래?), 진짜 이렇게 쓰고 있는 게 맞나 원문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직접 교섭" 이 구절이 마지막으로, 이해되지 않음. 불어와 영어가 어휘가 (특히 조금 고급 어휘면) 겹치는 게 많아서, 영어라면 이런 단어였겠고 불어로도 그랬겠네.... 번역서들 보면서 그러는 때 가끔 있지만 이 경우엔 아무 감도 오지 않는다. 


아도르노 읽으면 갖게 되는 굉장히 유용한 자산.  

지식인들 판단을 위한 척도. 이런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책에 대한 반응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잇는 것들이 있다니깐. ;;;;; 그게 얼마나 쓸모 있는지. ;;;; 오늘은 이 점을 놓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할 상태가 아니어서, 이쯤에서 그만. 나중에 재방문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lacker (1991). 

로버트 솔로몬은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 철학과에 재직했고 

오스틴 출신이며 오스틴 배경 영화들도 만든 링클레이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영화가 이거 Slacker 아니었나? 해서 찾아보니, 이 영화가 아니고 그가 출연한 건 이로부터 10년 뒤, Waking Life. 그런데 이 영화에도 솔로몬은 아니지만 텍사스 오스틴 철학과 교수가 출연하는데 그는 Louis Mackey. 바로 위의 장면이다. (영화 전체도 유툽에 올라와 있다. 좀 있다 맥주 마시면서 보면 좋겠다고......... 유혹 든다). 


대학원 시절 이 영화 보고, 특히 이 장면 좋아서, 노인이 읽어주는 수첩 속 문장들 포함 뭐라 적어두었다: 


진짜 전사가 넘어야할 최초의 장애물:

"내가 아끼고 믿는 인간들을 향해 빈다. 그들에게 고통이, 버림받음이,

질병이, 냉대가, 모욕이 있기를. 그들에게 심오한 자기-혐오가 남의 일이 아니기를.

그들이 자기-불신이라는 고문과 패배라는 비참에 친숙하기를. 그들을 향한 연민은 나의 몫이 아니다.

오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그가 버텼는가이므로."

 

The first hurdle for a true warrior:

"To those humans in whom I have faith, I wish suffering, being forsaken,

sickness, maltreatment, humiliation. I wish that they should not remain unfamiliar with profound self-contempt,

the torture of self-mistrust, and the misery of the vanquished. I have no pity for them because I wish them the only

thing that can prove today whether one is worth anything or not: that one endures."

 

*총 백명쯤 되는 인물들이 출연했다 하고, 그중 다수가 끝없이 말을 하는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사는 이것이었다. 은퇴한 대학 교수로 짐작되는 노인 남자가 딸과 함께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서,

5단 책장 두 개에 책이 가득한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강도 청년과 마주친다. 총까지 준비해 오긴 했으나, 강도짓은 영 어설픈 청년을 붙잡고 이 노인 남자 ("경찰을 부르진 않을 거야. 내가 자네보다 더 경찰을 싫어할 걸세"),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서의 아나키즘에 대하여, 자신의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에 대하여, 그밖에도 여러 주제에 대해, 들려준다. 그리고 헤어질 때, "잠깐!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있어"하고 수첩을 꺼내더니 위의 문장들을 읽어준다. That one endures. 동의한다. 박노자가 얼마전 썼던 말을 빌면, "지구라 불리는 정신병원에서 정신 온전히 유지하기".






Waking LIfe에는 솔로몬도 출연하고 매키도 출연. 매키가 철학 얘기 하는 장면이 이것. 

"고통을 겪는 유형에서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삶의 부족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과, 삶의 과잉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 

생각을 좀 해보면, 인간의 행동과 활동이 동물의 행동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네. 가장 진보한 테크놀러지라도 우릴 기껏해야 가장 똑똑한 침팬지 수준이 되게 할 뿐이야. 사실 플라톤이나 니체같은 인간과 보통의 인간 사이의 차이가, 침팬지와 보통의 인간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네. 진정한 정신의 영역, 진정한 예술가, 성자, 철학자의 세계는 아주 드물게만 성취돼. 왜 그토록 적을까? (....)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진짜의 잠재력,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두려움일까, 게으름일까?" 


업로드한 사람이 대사 전체를 영어로 올려두었다: 

There are two kinds of sufferers in this world: those who suffer from a lack of life and those who suffer from an overabundance of life. I've always found myself in the second category. When you come to think of it, almost all human behavior and activity is not essentially any different from animal behavior. The most advanced technologies and craftsmanship bring us, at best, up to the super-chimpanzee level. Actually, the gap between, say, Plato or Nietzsche and the average human is greater than the gap between that chimpanzee and the average human. The realm of the real spirit, the true artist, the saint, the philosopher, is rarely achieved.


Why so few? Why is world history and evolution not stories of progress but rather this endless and futile addition of zeroes. No greater values have developed. Hell, the Greeks 3,000 years ago were just as advanced as we are. So what are these barriers that keep people from reaching anywhere near their real potential? The answer to that can be found in another question, and that's this: Which is the most universal human characteristic - fear or laziness?


정작 Waking Life에서 솔로몬이 출연하는 장면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이 영화 남자 주인공이 대학 강의실을 가고, 강의실에선 한 노교수가 열정적인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 실존주의의 적실성. 우리 삶을 우리가 만든다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설 힘을 실존주의에서 찾으라. 이런 장면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철학자가 솔로몬일 것이다. 


Slacker에서 "진짜 전사가 넘어야 할 장애물"로 시작하는 짧은 문장들은 니체의 직접 인용이고 <힘에의 의지>가 출전. 영화를 볼 때 몰랐고 몇 년동안 몰랐다가 누군가가 알려줘서 찾아봤었다. <힘에의 의지>에서 910번 노트. Waking Life에서 나오는 대사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가 출전. "fear or laziness" 이 구절은 그대로 인용. 내용엔 명확한 니체의 메아리? 


벌써 8시 반을 향해 간다. 유툽에서 이것들 찾아보다가 대학원 시절이 그리워졌었다. 

그 시절에, "지나고 나면 이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며? 심지어 진심으로 그리워한다며?" 그랬었는데 사실 그 때도 그게 전적으로 안 믿겨서 했던 말이 아니었.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건지 그때도 알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