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학기 종강이 겨우 나흘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아침. 

한 시절이 끝나고 나면, 끝난 바로 다음 날이면 이미, 그 시절이 전생의 어느 희미한 기억같아지는 일. 

이거 혹시 한국적인 거 아닌가? 생각한 적 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어지기. 특히 한국에서 절실한 무엇 아닐까? 

















아도르노에게 (아마 비판이론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경험의 위기." 미국의 비판이론 연구자들은 특히 이 주제일 때, 믿을 수 없어하는 것 같다. 이 문제로 그들이 진정 고심했을 거라고는. 마틴 제이의 저 책도 한 예. 사실 이 주제만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고심했던 많은 문제들이, 그가 하는 여러 심란한 말들이, 서구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적실하다는 생각을 글쎄요, 아도르노 책들을 읽다보면 피할 수 없는 것같습니다만. Minima Moralia에서 중요한 주제인 "중요성의 위계" (그걸 허물라는 요구가 있으니 그 주제가 저 책에서 중요하다고 지목함이 아이러니... 아이러-닉;) 그게 정신을, 프랑스나 독일 미국에서라면 이 정도로 옥죄진 않을 것같다. 비교 대상을 브라질이나 터키, 일본으로 해보란다면, 옥죔에선 우리가 덜할지라도 어쨌든 위계의 물신화.... 이런 면에선 우리가 짱드실 것같은 건, 망상인가. 


벌써 7월도 후반으로 진입.  

서재질이 저절로 뜸해지게끔 올해 꼭 하기로 한 일들에 집중하는 여름이 되어야 한다고 

조금 전 다짐했으나, 오늘은 일요일이고 청소 포함해 밀린 집안일들이 있고, 집안일들을 하기 전에 

집안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써 두면 좋을 것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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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역사는 역사철학이어야 한다"는 아도르노 말을 따라해 봄. 

출전이 아마 <역사와 자유>일 것이다. 이것도, 아도르노 강의록. 대학원 시절 "역사는 역사철학이어야 한다"는 말을 읽고 (아무렴, 그렇고말고, 옳다!) 흥분해서 논문 커미티에 계셨던 철학과 선생님께 사석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샘께서, 더 이상 시큰둥할 수 없는 반응을 하심. (응?) 정도. ;;;; 


















나만 좋아하는 게 분명한 무엇이면, 출전이나 기원을 서서히 잊게 되는 일이 그래서 그 말에도 일어남. (그래도 아마 저 말 출전은 저 책이 맞을 것이다). 그 사석엔 철학과 다른 학생도 있었는데 (그는 전혀 무반응) 만일 그 두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반색했으며 그리하여 세 사람이 다같이 문제의 아도르노 한 문장에 긴 주석을 붙이며 반나절을 보낼 수 있었다면, 그 문장엔 지금 그것에 없는 깊이와 열기가, 차원이 보태졌겠지.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얼마 후엔, 

논문은 논문론이 되어야 하지 않나? 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박사 논문의 부록으로 공부론을 쓰게 해야 한다. 자기 논문의 방법론을, 

혹은 자기 논문의 '철학'을, ㅋㅋㅋ 지적 전기의 방식으로 쓰게 하라. 이게 실현된다면, 

그 논문은 아무도 읽지 않지만 부록인 공부론은 '대박'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몽테뉴 에세이들을 조금 읽는 동안, 

이 글들도, 잘 번역됐다면 한국어가 속도 조절의 면에서 더 역량을 갖게 할 글들이겠다 생각했다. 

번역불가의 1-10 척도가 있다면, 그래서 역자들이 거의 만장일치 영어로 번역불가라는 아도르노 책들이 10, 조금 문학적인 시나리오들 <가을 소나타>나 <Au revoir, les enfants> 같은 것들이 한 2 정도라면, 몽테뉴의 에세이는 한 8.7쯤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13.2 정도일 수도. 16세기 프랑스어가, 그냥 16세기 프랑스어이기만 해도, 굉장히 번역하기 어렵다고 어디서 들은 것도 같다. 


영어판 전집을 보면 몽테뉴 번역이 영어판 역자에게 안겼을 엄청난 어려움이 알아보이는데, 

한국어로 번역될 땐 그보다 더 한 어려움이 있으면 있을 것이고, 그런데 번역이 어렵다는 건 원저도 실상 훌렁훌렁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이고, 프랑스 독자가 몽테뉴를 읽을 때 들일 법한 시간과 같은 시간이 (같은 시간과 같은 집중이) 요구되는 한국어 번역이 나온다면, 그것은 빨리 읽기를 장려하는 한국어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 


몽테뉴 에세이들이 다시 (제대로, 합당하게) 번역된다면, 

그 번역은 역자의 번역론이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생각은 자유니까 ㅋㅋㅋㅋㅋ) 했다. 

사실 카우프만의 니체 영역이, 아주 대놓고 표나게 그러진 않지만 카우프만의 번역론이기도 하다. 번역에서 일어나는 그 방식의 선택이 암묵적으로 번역론이기도 하지만, 역자 해설과 역자 주석들을 통해서 더 명시적으로 그렇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되는 주요 책들은 전부, 카우프만의 방식으로든 다르게 해서든, 번역론이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음. 바라는 건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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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도 생각을 자극한다. 

이것도, 무슨 뜻일지 더 잘 알게 문단으로 보고 싶다.  

어쨌든 정신도 겪는 노화를 칭송하는 말일 리는 없을 것이고 

세월과 함께 정신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몽테뉴 에세이 어느 문장이라도 그렇겠듯이. 나야 몇 문장 못 보았지만, 소문에 따르면 그렇다니까), 편파적이나 동시에 반박이 불가하게 보편적인 진실이 있을 것인데, 그 진실은 무엇일까.  


음........ 생각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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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몽테뉴 전집은 아마 58년 스탠포드 출판부 간. 

출간 연도는 찾을 수 없고 저작권이 갱신된 연도들만 (48, 57, 58) 적혀 있는데 책 상태가 50년대에 나온 다른 책들, 6-70년된 책들과 비슷하다. 오래된 좋은 제품. 종이질도 좋고 장정도 탄탄하다. 


montaigne quotes로 구글 이미지 검색하고 나온 그의 말 중엔: 






전집 "인트로덕션"에서 그의 생애를 요약하는 문단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05년, 부친의 독촉에 따라 몽테뉴는 프랑수아즈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영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아이는 하나 뿐이었다. 몽테뉴는 그만하면 남편 노릇을 한 편이지만, 그러나 결혼에 대한 그의 말들은 주로 신랄하다." Montaigne was a reasonably dutiful husband, but his remarks about marriage are mainly caustic.  


reasonably dutiful. 이 두 단어, 이 조합이 재미있었고 결혼에 관한 신랄한 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결혼, 입구 빼고 모두가 공짜가 아닌 시장." 이 정도면 과연 신랄하달 (아니 괴랄한 음절 조합이;) 만. 


생각할수록 심오하고 이 말이 나오는 글 전체에서 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해서" 이게 제목인 에세이도 있나 봐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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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대하여" 


플리니우스와 키케로가 우리 삶의 목표로 제시한 영예. 

내 생각엔 전혀 그렇지 않다. 은둔에 정반대되는 기질이 야심이다. 야심과 휴식은 같은 집 안에 머물 수 없는 둘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오직 그들의 팔과 다리를 무리 바깥에 둘 뿐이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의도는, 어느 때보다 더 무리 한복판에 있다. "노인이여, 남들의 귀를 채울 허섭스레기를 모으는가?" (페르시우스). 이들은 더 잘 도약하기 위하여 뒤로 물러섰을 뿐이며, 무리 속으로 더 깊이 투신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 에피쿠로스와 세네카, 전혀 다른 유파에 속한 이 두 철학자가 자기 친구들에게, 공무를 포기하고 고독이라는 더 높은 지위로 후퇴하길 청하며 쓴 편지들 속 조언들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당신은," 이들은 말한다. "바다를 헤엄치고 떠다니며 살아왔다. 이제 항구로 피신하고 거기서 죽어갈 때다. 당신은 당신 삶 전부를 빛에 바쳤다. 이제 남은 부분을 그림자에 바치라. 직업이 주는 결실들을 포기함 없이 직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명성과 영예를 향한 모든 관심을 끊으라. 당신의 과거 업적에 어린 광채가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빛을 주고 당신의 은신처까지 당신을 따라가는 일, 그 위험을 경계하라. 여타의 쾌락들과 함께, 남들의 칭송이 데려오는 쾌락을 포기하라. 당신의 지식과 당신의 능력, 이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 당신을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한, 당신의 지식과 능력은 그들이 가진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알아볼 사람이 극히 적은 어떤 예술에 왜 평생을, 자기 전부를 바치냐고 물었을 때, "극소수가 내겐 충분합니다. 한 사람도 내겐 충분합니다. 단 한 사람도 없다 해도 내겐 충분합니다"고 답했던 그 사람을 기억하라. 그는 진실을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동무 한 사람이면, 서로를 위한 무대로 충분하다. 아니 당신을 위해 당신 자신이면, 서로를 위한 무대로 충분하다. 당신에게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이어야 하고, 당신의 한 사람은 세상 전부여야 한다. 우리의 게으름과 우리의 부정직에서 영예가 오기를 바라는 건 비천한 야심이다. 우리는, 자기 동굴로 들어가는 길을 열심히 문지르며 내는 동물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의 26번 단장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 체험을 남들에게 전할 때 우린 우리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체험은 전혀 수다스럽지 않다. 이 체험들은, 그러고자 한들 스스로를 소통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들에게 꼭 맞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갖고 있는 무엇이든, 우리는 이미 그 말들 너머에 있다. 말엔 언제나 한 톨의 경멸이 자리한다. 언어는, 평균적이며 중간이고 소통 가능한 것을 위해 발명되었다. 언어와 함께 화자는 즉각 자신을 속화한다." 


니체의 단장도 한편, 너에게 고독을 권한다겠지. 

그런데 울프의 <파도>나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같은, 본격모더니즘의 유명한(악명높은) 책들, 

이 책들은 몽테뉴가 말한 "나와 내 동무, 나와 나 자신이면 충분한 무대"를 위해 쓰여진 작품들 같으며, 

그렇게 쓰여지면서 체험에 꼭 맞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는(체험을 이끄는) 말들을 발명했다. 고 봐도 되겠다 생각함. 사실 바슐라르의 모든 문학 책들이, 그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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