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오전 산책할 때 철봉도 그냥 지나치지 않긴 했다. 

매달려 있으면 상체가 쭉 펴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 정도. (그런데 유툽에서 찾아보니 이것이 상체 스트레칭에 좋다는 내용 동영상들 있다). 학력고사, 체력장 세대면 아는 그 "매달리기"가 아니고 발을 땅에서 떼지 않고 기분으로만 매달리기여서, 하여간 날림. 대충 슬쩍. 그렇게 해도 좋다보니, 그렇담 제대로 이것저것 철봉으로 할수 있는 것들 해보고 싶어져서, 턱걸이에 도전. 아마 영영 못할 가능성 크지만, the journey not the arrival matters. 













  

  

   


오늘 아침 극미미하긴 하지만 진척이 있어 기록. 

발을 땅에서 떼고 꽤 오래 매달릴 수 있었으며, 그러다 아주 조금이지만 순간 상체를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같은, 그러지 않았나 하는 감과 함께 내려올 수 있었다. 매일 이 정도 아주 작은 기적이 있다면 3년 뒤엔 턱걸이하는 (중년)....  





니체의 위버멘쉬를 바슐라르는 순간의 심리학, 

이것으로 설명한다. (위버멘쉬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이해고 해설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어떻게 그 내용을 내 말로 바꿔 쓰거나 요약도 도저히 못하겠다. 요약도 못하겠으면서 

그것으로 페이퍼를 쓰고 있는, 쓰겠다는 막막한 시간들을 보내, 오늘도 보내겠지......) 


그런데 어쨌든 위버멘쉬와 순간의 심리학, 

이것을 암벽 등반가들이 아주 잘 알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클라이머 Jan Hojer 동영상이 유툽에 꽤 있는데 그가 클라이밍하는 (혹은 gym에서 훈련하는) 장면들 보면, 바로 저것이 그런 (초인이 체험하는 극복의, 행복감의) 순간이겠음. 그러게 된다. 암벽등반은 지구력, 지속만큼 순간이 중요할 것같으며, 게다가 이건 자기 체중이라는 "중력의 정신"과 벌이는 싸움이기도 하잖음? 


암벽등반이 그런 것이길 바라며 나도 해보고 싶어서 

유툽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여자 클라이머 훈련 동영상 발견했다. 멋있음! 

나야 동네 철봉 매달리기 정도 근근히 하면서, 그런 신세지만 보는 걸론. 눈은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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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강의는 사실 독백에 가까웠다. (....) 그는 강의의 내용에 완전히 몰입했다. 니체는 다른 존재와 자기 사이에 어떤 관계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말했고 자주 말을 멈추었는데, 그건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가 하는 말이 가질 인상을 (마치 자기가 화자이면서 동시에 청중인 듯이)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풀려 나가는 그의 사고의 실[絲]이 특별히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그를 이끌면, 그의 목소리는 잠기듯 낮아졌고 그럴 때 그 목소리는 가장 부드러운 '피아니시모'였다. 그러니 아니다, 니체는 '질풍노도'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말없이 고통을 겪어내는 사람이었고, 자기를 산산히 부술 운명에 대항한 싸움을 벌이며 철학에서 위안을 요청하고 있었다. 철학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철학이 그의 감정을 위로했다. 그의 강의에 담겼던 그 따스함이, 그가 가졌던 세계관이 그의 말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지던 그 방식이, 새롭고 온전히 개인적인 무엇을 내가 보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이 남자의 전존재를 구름처럼 감쌌던 세계관. 그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이런 질문이 떠오르곤 했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정, 사유하는 존재인 이 사람, 이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갑자기 그는, 하던 말을 끊고 비틀며 거기서 에피그램이 나오게 하곤 했다. 그의 수업은 대개는 결론이 아니라 아포리즘으로 끝났다 (....) 우리의 수업이 끝남을 알리던 그 격렬한 언어의 분출. 수업이 끝나면 니체는 자기 의자로 돌아가 무얼 듣는 자세로 잠시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고, 마치 교실에 들어올 때 그랬듯이 부드럽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 바젤 대학에서 그의 학생이었던 루드비히 폰 셰플러의 회고 (67) 


Conversations with Nietzsche (1987). 니체를 알았던 사람들이 남긴 니체 회고의 글들을 모은 책. 

이 책에 의외로 (단지 니체 생전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좋은 얘길 해줄 수 있겠냐는 회의가 있었다면, 의외로. 아니면, 기대한 대로) 재미있고 도움되는 내용이 있다. 위와 같은 회고를 한 루드비히 폰 셰플러는, 회고를 참 길게도 하는데 (다른 회고자들은 2-3 페이지일 때, 그는 무려 13페이지) 처음부터 책 제목을 잘못 말하기도 하고 (아래처럼) 


"그 당시 내가 저자로서 니체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단 얘긴 아니다. <비극의 재탄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반시대적 고찰>은 꼼꼼히 읽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 편집자가 "sic"을 넣어줌. I had heard of The Rebirth [sicof Tragedy. 비극의 재탄생. ;; 이거 생각보다 웃김. 명작, 명서들의 제목에서 한 글자만 바꾸기, 한 글자만 넣거나 빼기. 해도 재미있는 결과 나올 거 같. "다락방에 미친 여자" 등. 


니체 회고를 핑계로 자신을 미화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 긴 회고 곳곳에서 짐작되고, 

그러니 그의 얘길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되겠고 경계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의 회고에서 갑자기 니체가 살아 걸어나오는 것같은 그런 감이 있기도 하다. 


프란츠 오버벡의 회고도 있는데,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의 관계에 대해, 

니체가 일방적으로 부르크하르트를 추종한 관계라면서 부르크하르트 쪽에서는 편지 포함 니체가 쓰는 모든 글에 "horror" 아닌 다른 것을 느낀 적이 없다고 (그런 내심을 니체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한다. 그리고 니체가 우정에 대한 칭송을 많이 하지만, 그 점에서 그는 오직 불행만을 알았다는... 얘기를 아주 담담하게 함. 그 얘기하는 문단에, 이런 문장이 있다: "니체의 실제 친구들 (그의 진정한 친구들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는 아예 없었다. 니체에 따르면, 현실 세계가 아닌 진정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니체는 "감당하기 힘든 난제"였다." (48)


꽤 놀라운 건, 프란츠의 아내 이다 오버벡의 회고. 프란츠 오버벡 자신 훌륭한 학자고 사람이었을텐데, 여기 실린 이다의 여러 회고들을 보면 남편보다 더 똑똑하다는 생각이 한 몇 문장 안에 들, 어쨌든 내겐 들었다. 관찰력, 표현력, 주제 장악력. 이런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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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Radio 3 Documentary. 

아동문학과 검열 주제로 저 팟캐스트에 올라온 에피 들었는데, 

인터뷰로 나오는 누군가가 저런 말을 한다. "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한 세계도 태어난다. 

어떤 아이이든 문화의 착오를 고칠 자연의 기회라고 테드 휴즈가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걸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언제나 희망과 낙관주의를 가질 수 있다.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다고 한편의 우린 느낀다.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아이들이 가져올 것이다." 


아동문학에 현실을 가져와라. 아동문학의 검열을 폐하라. 

이 쪽 주장인 것 같고, 위의 인터뷰이도 그의 생각에 '이 세상을 아는 아이가 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거지 '타락한 세상에서 보호된 아이일수록 타락한 세상과 싸울 전사가 된다'여서 저렇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수선하게 이것저것 인용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인터뷰하고 있는데 

아동문학과 검열 주제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나라면 어떤 입장일지 바로 알지 못하겠던 게 이상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고전적인 질문, 세상엔 악서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 다큐 팟캐스트 에피는 "절대적으로 없다!"고 답함. 그런가? 그렇게 보더라도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을 강력히 옹호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라면 악서가 있다 쪽에 서겠다. 덜 좋은 책, 정도의 의미에서라도 나쁜 책.. 의 개념을 갖고 있어야지 않나. 나쁜 책이 하는 나쁜 일들에 대해서도. 


어쨌든 테드 휴즈가 했다는 저 말은, 

자명하며 나도 알던 걸 말만 멋있게 한 것일 뿐...... 인것처럼 순간 느껴지더니, 

아니다 심오하다고까지 말할 건 아닌지 몰라도, 생각을 자극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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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근방. 13년 7월. 0.8개 하던 12년 4월로부터 1년 3개월 지난 다음 장면은 

오오...... 과연 과연 풀럽의 힘 놀랍습니다. 


내일부터 동네 체육공원 철봉에서 나도 해보려고요. ;;;; 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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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나 아니면 사조, 혹은 현상 하나를 주제로 20분 정도 대담하는 팟캐스트 Minerva가 있는데 

여기 스티븐 내들러가 한 번 출연했다. 주제는 스피노자. 내들러가 말을 참, 잘 하고 목소리도 들으면 바로 끌리는 목소리. 이 에피에서도 그렇다. 그를 선생으로 스피노자 (뿐이겠어, 누구든. 그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해도 좋으니 모두) 배우고 싶어진다. 끝나기 전에 스피노자에게 자기 인식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아는 것.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도 자연의 법칙에 종속됨을 아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에겐 중요한 moral step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을 견디며 자신을 이끌 힘을 갖는다." 


이런 얘길 한다. <햄릿>에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 명대사 (명대사. 쓰고 보니 이제야 처음으로 말뜻에 합당하게 쓰는), 거기 등장하는 저 유명한 구절을 잠시 망설이다 쓰면서 말하고 나서, You're an English major, you get the reference. 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 때 그 말투가, 아주 뭐랄까 음악적이고 매력적이다. 





내들러의 한 인터뷰 링크. 

http://www.3ammagazine.com/3am/on-descartes-spinoza-for-sure/


나는 저 대목이 듣자마자 사무치더니 오래오래 기억했고 생각했다. 

이 말의 한국어 대응문을 할 수 있는 한 (내들러라는 사람의 말투, 어휘등을 고려하여) 정밀하게 만들어 본다면? 


"영문과 나왔으니 아시잖아요."

"영문학 하셨으니 지금 제 말 출전은 아실 거에요." 

"영문학 전공이셨으니까 레퍼런스는 제가 말할 필요도 없겠고..." 


한국어로는 이 (이런 하찮은) 말도, 내들러가 하듯이 하기는 참 어렵다는 결론을 나는 내리고 맘. ㅋㅋㅋㅋㅋ;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문했는데, 그에 대해 나온 자답은: 한국에서는 정신의 삶이라는 것에 근접하고 그것을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도 (ex. 교수들) 정신들이 대개는 난폭하고 유치하다. 난폭함이 유치함이고, 유치함이 난폭함이다. subtlety, 이런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정신. 무엇으로도 그게 "art"가 되게끔은 못하는 정신. 



*표현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라, 

내들러처럼 '발화';;;;(가 맞는 말이겠지)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렇게 발화될만한 맥락이, 한국에서는 그런 맥락조차도 사실 어렵다는 생각도. 

다들 어째 그냥 (말 줄임....) 


**하긴 내가, 나야말로 그렇다보니 알아보고 괴로운 걸 수도. 나나 잘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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