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 비바람이 가시자, 파란하늘 뭉게구름 아래. 아카시아향은 미친○ 머리카락처럼 날린다.

어젯밤 한움큼 움켜쥐고 아편처럼 맡던 향내음이 산발이다.

발. 여름이 벌써 손내밀었네요. 잡아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요. 햇살 뜨거우면 잠시 그늘의 봄을 빌려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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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형평^^ - 무엇인가 하려고 했던 시대.

읽으면서 그 흐름의 깊이와 자장은 넓었다. 짧게는 1970년대와 2010년대. 길게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그 역사에서 피어오른 명망가와 무수한 꽃들은 그 강물에 떠다니고 있을 것이고,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기도 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시선으로 복기하려는 이는 드물다. 추억과 향수에 가까운 글들로 현재도 앞날도 더 희미해져가기만 한다. 그래서 그런 반추에 `청춘`들은 지난 과거를 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늘 현실인 책의 배경처럼 스며있는 `노동문제`의 침잠엔 할 말이 없고, 부귀와 영화, 명예에 대한 관심만으론 지금현실을 한발자욱도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시절을 과잉대표한 대학생: 삶이 그 시대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청춘이었으리라. 낙과가 아니라 늘 날 것같은 생동감이 원천이자 생명력은 아니었을까.

부족함을 직면하고 추스려낼 용기와 시대를 거슬러올라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를 느낄 때,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이 시대 청춘들에게 건네줄 자양분은 아닐까

왕년을 이야기하는 것. 전우회의 자족감이 아니라면, 다 버려야 할 지도 모른다. 집요한 복기를 통해 못다한 아픔을 발굴해 내 물려주는 것이 맞다. 그러다 미쳐 보지못한 이론들이라도 다시금 발견한다면 나쁘진 않을 것 같다.

- 유경순,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 학출활동가와 변혁운동」을 읽고

발.

물론 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용기도 없고 경계에 서성이고 주변에 멈칫거리기만 했다.

짧은 대학 경험, 그 나이의 자식이 있고 삶이 있으니 그래도 말한마디 거들 자격은 없지 않을 것이다.

무릅써본다. 그 정신을 잊지않는 무수한 삶들에 경의를 표하며ㆍㆍㆍ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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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타고난 물활론적 경향 덕분에 어른들이 가르쳐줄 수 없는 감수성을 갖는다고 느낀다.아이들은 꽃을 주울 때 친구를 만들어주려고몇 송이를 더 줍는다. 길거리의 돌멩이가 다른 풍경을 보게 해주려고 위치를 옮겨놓거나, 이사을 가서 힘들어하지 않도록 돌멩이를 주운 자리에 다시 가져다놓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상상하면 자연히 연민이 생겨난다." 59

 

 

볕뉘. 연민한다. 이상한가. 한번 보면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면, 도 다르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부끄러워 말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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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어울림이다. ‘한 아름처럼 아름은 전체를 포섭한다. 미와 같은 한자보다 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아름다움의 아ᄅᆞᆷ은 우리말의 고어에서 의 뜻을 지니는 명사로 해석될 수 잇다. “아름다움나답다이다. 아름다움은 객관인 동시에 주관이며 궁극적으로 나의 체험의 요소 간에 발생하는 느낌이다. 아름다움은 나다운 것이며 나의 느낌화 되는 것이다. 11

 

아름다움이 참을 꼭 전제로 할 필요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참을 전제로 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없는 참은 맹목적이다. 참이 없는 아름다움은 중후함을 결여한 저차원의 것이며, 아름다움이 없는 참은 국부적이며 사소한 차원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15

 

진정한 참은 생성적일 수밖에 없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이라는 생각은 진부한 도덕의 착오일 수도 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이 세계를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잇다. 진리는 계절에 맞추어 밥상에 오는 반찬처럼 시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참은 발견되는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새로운 느낌의 창조를 불러내는 아름다운 진리리가 되어야 한다. 진리의 실현은 느낌의 아름다움을 증진시키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16

 

에술은 스스로 그러함의 미니멀리즘을 지향해야 한다. 미니멀리즘은 스스로 그러함의 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나의 몸을 형성하는 모든 기의 사회 간의 내면적 어울림을 우리는 이라고 부른다. 이 외부로 표출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이라 부른다. 아름다움이란 맛과 멋이다. 맛과 멋은 몸의 건강이며, 궁극적으로 몸이라는 사회가 다시 거대사회를 이룬 문명의 건강이다. 20

 

삶을 위한 예술은 있어도 예술을 위한 삶은 없다는 것이다. 달콤함을 정제한 것이 설탕이며, 감칠맛을 극대화한 것이 인공감미료다. 정제된 미로서의 예술이나 극대화된 맛으로서의 조미료 따위보다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위한 투박한 재료, 소박한 정신이 필요한 시절이다. 화려하든 소박하든 간에 그 대상이 나의 삶을 체감할 수 있게 해줄 때라야 더 친근해지는 것이다. 61

 

볕뉘. 따듯한 설명이 마음을 끈다. 도올의 발문도 좋다.  삶을 의식한다는 것. 더구나 서로의 삶들을 의식한다는 것. 맛을 내고 멋을 내고의 사이에는 나를 채색하는 과정도 들어있는 것이다.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끌고 갈 수 있다면, 조금 멋을 부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 좋은 일이다. 정치도 급급해하면 안 된다. 아름다움이 비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되돌아 봄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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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철학적으로 가정되었던 단일한의지로서의 인민이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가 규정하는 인민(‘선거용 인민’)의 바깥에서 자신의 권력을 요구하고 선언하는 다른 인민의 존재를 목격한다. 그것은 국가적 제한에서 배제된 비실존의 인민’, 거리와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고, 권력 집단과 거대 자본에 대항하는 싸움 속에서 형성되는 모호한 인민이다. 우리는 그 인민을 바깥의 인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바깥, 국가의 바깥, 제도의 바깥, 권력의 바깥에서 포착되는 인민에 대한 성찰로 채워져 있다. 단일하고 통일적인 인민을 사유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떤 잠재적 인민,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다수의 구성으로서의 인민, 인민에서 배제된 인민 바깥의 인민, 인민의 내재적 예외로서의 인민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들은 인민의 현재적 한계와 또 다른 인민의 가능성을 성찰한다.

 

바디우는 정체성에 의해 봉인된 인민이 의미가 있는 경우는 외세의 식민지적 침략에 맞서 해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형성되는정체성이 문제가 되는 상황뿐이다. 오늘날 국가에 의해 추인되고 국민 형용사를 통해 봉인된 인민은 단지 선거에서만 의미를 갖는 잘 길들여진 인민, 중간 계급으로서의 인민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실질적인 인민 주권의 실행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회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내는 우리, 인민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발화의 실천은 수행적인 실천이라고 말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다시금 재현되는 인민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인민의 모습, 여러 인민들의 모습은 감각적인 것으로의 재현을 통해서만 그때그때 인식되는 것이다....‘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야말로 사람들이 감동하기 시작하고, 사유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미적-정치적 사유는 바로 그러한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지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 인민의 이념을 군중의 위험한 이미지와 결합시킴으로써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강변하는 일이다. 그 군중은 우리를 전체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무분별한 인민’, 포퓰리즘의 인민은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는다는 것이다.

 

영웅에 대한 목마름의 신화 그 배후에는 일반화된 정신적 부패가 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일반화된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경제적 불안정을 일소하여, ‘를 잘살게 해주는 것이고, 나와 내 가족의 안전,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강력한 치안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동3권과 같은 기본권의 유린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을 위해 민주주의를 정지시키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 있다. ....파시즘은 현재의 민주주의적 과두정을 극복하는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 수동적 인민을 필요로 한다는 점 이외에도,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정치라는 점에서 그 둘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사람들은 이념없는 삶’,‘생각 없는 삶속으로 황급히 도피하는 것이다...그러한 이해관계의 정치는 민주주의적 과두정과 파시즘을 모두 아우르는 절대적인 정치 원칙으로 남는다. 188-198

 

볕뉘. 메모 겸 흔적을 남긴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스타에 얽매여있거나 정당정치에 매여 있어 옴짝달싹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싱싱한 정치사유의 날 것은 그 선입관에서 벗어나는 데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다. 직접 만드는 맛, 하는 맛...그런 것이 멋있게 보이는 것. 맛과 멋은 일상에서 바텀 업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탑다운이 아니라.... ...인민, 국민, 주권에 대한 뭉음을 던지지만 스타와 영웅을 바라기만 하는 국민들의 시선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 인민은 없다라는 사유에서 재구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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